밖? 에서 저랑 현식님이랑 많이 싸웠고? 그래서 않좋은 모습도 많이
보여드렸습니다~ (내 본성이~)
여기선 차분하게 할께요~ 되도록이면 열내지 않음~
제가 한단고기를 접한건 중2때였습니다~
김용우선생님이셨던가? 귀중한 시간을 역사얘기 한다구 많이 쓰셨거
든요~
거기서 우리역사가 많이 왜곡되었단걸 알았습니다~
일제새대때 우리역사책을 몽땅가져다 불태운 사건이며~
지금우리나라 사학계에 어떤 인물들이 있다는것등등~
(그땐 삼국사기나 유사 25사 같은건 모르는 분야였음~
첨 부터 한단고기에 쓰여진 우리민족의 일만년 상고사를 알아버렸죠~)
수학선생님이었거든요~ 지금만나면 콜라라두 한박스 사드리고 싶은분임~
삼국사기가 유교적 사대주의에 입각한책이라는건 국사책에두 나옵니다~
그리구 25사같은건 우리가 신경쓸겄두 없지만 써야한다면 한단고기에
나오는 내용중에 25사와 크게 차이나는 문제가 없습니다~
(임승국 교수님의 한단고기(정신세계사))에서 뽑은내용~
전 25사를 읽어보지 않았거든요~
이책이 근래에 들어 조작된것이란 주장이 있던데요~
그건 비루기님이 올리신글에 충분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구 조선조에 세조,예조,성종 등이 8도 관찰사에게 희귀서를 걷으란
명령을 내렸을때 한단고기의 첫머리를 장식하고있는 삼성기와 태백일사,
단국세기,규원사화등의 인용문헌인 조대기 등이 있다더군요~
질문과 대답에서 대치님인가가 올린적이 있구~(비루기님꺼를요)
역사자료방 40몇번에 비루기님이 올리신글이 있습니다.
한단고기의 가치는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역사는 당연히 바르게 알아져야하고 바른역사를 알기위해선 교과서 같은게
바른 역사서겠죠~
삼국사기나 유사같은것의 헛점은 많이 드러나 있습니다.
김부식이란 사람은 사대주의자였다는게 확실한 사실이고~
그런 사람이 중국을 덮고있던 우리상곡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짐작
할수 있습니다.
일제시대... 이병도씨(그당시 조선 사학계의 거두였다더군요~)가 어떻
게 했죠~ 우리나라를 일본에 낑겨넣으려고 별의별 발작을 한사람이죠~
이 내용도 비루기님의 글에 있습니다~
그 이병도님의 제자들이 국사를 쓰고있고 이번년도 국어문제집네도 나
오시데요~ 문제풀다가 화가나서 혼났습니다.
어릴땐 잘몰랐지만 조금씩알아가면서 뭔가 끓어오르는게 있더군요~
항상 작게 보이던 아버지가 더없이 위대해 보일때 그런기분입니다.
이런 가치에 대한건대 내 얘기만 하다니...
반론이 많이 올라올겁니다(난 예언할수 있습니다)
쓸려니깐 자꾸 감정에 치우치는거 같군요~
한단고기가 가짜라는 의견 이나 어떻게 평가할껀지는 아는거 많은
형님 누나들 에게 부탁해야 하겠지만~
전 이것이 우리의 참된역사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증명은 음...비루기님의 글이나 정신세계사판 한단고기를 읽어보시고...
또 ...아마 명지대학인가? 임승국교수님을 만나보시구요~
(한단고기는 번역해 놓은게 아주많던데 ~ 제가 읽은게 4가지쯤 됩니다~
근데 임승국 교수님께 가장 좋더군요~ 겨레밝히는 책들...)
반론이나 격려도 기다리겠습니다~
너무 실없는말을 많이 한거 같습니다~
담부턴 할수있는한 서론은 줄일께요~
그럼~ 안녕~
1994.11.8 박!!!!!!!!!!!
번호:2/54 토론자:TEODORA 수신자:ALL 토론일시:94/11/09 10:07 길이:218줄
하이텔 한국사동호회의 이문영님의 글을 여기에 옮겨 봅니다.
앞으로 계속 이문영님의 글을 옮긴 후에 제가 분석한 것을 올리죠...
이문영 (nymphal )
[사료비판]재야사서 비판-1.단기고사 12/27 18:39 211 line
안녕하세요? 이문영입니다.
그동안 규원사화 등의 도가류 사서에 대하여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에 대한 제 의견을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그 첫번째로 <단기고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단기고사는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이 지은 책으로 되어 있고 1946년에 간행이
되었습니다. 한문 원본은 사라졌고 번역본만 남아있습니다.
기록된 내용은 간지가 적혀 있지 않고 기록들과 역대왕들의 제위 기간만 적혀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의심이 가는 대목이 한두군데가 아닙니다.
중국을 원망하면서도 중국에 대해서 일관되게 ‘중화’라는 존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그 하나인데 그것은 그럴 수도 있다고 하지요.
아래의 글은 정말 지나치다고 생각되는 대목만 추려본 것입니다.
9세 아술에 이르면 을성문덕이 국민의 참정권을 주장하고 의회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0세 노을은 최고 자문처로 자문기관을 설치합니다.
11세 도해는 만국박람회를 개최합니다. 기계공창을 설치하여 온갖 기계를 만
듭니다. 양수기, 경기구, 천문경, 자명종, 어풍승천기, 흡기잠수선 등등.
12세 아한 때는 후세의 역사를 예언하는데 노스트라다무스는 비교가 되지 않
습니다. 또 단기고사의 거의 모든 왕들은 태자가 왕위를 물려받는데 이때 아
우가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옳바른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3세 흘달 때는 근대 천문학 강의가 있습니다.
14세 고불 때는 인구조사가 있었는데 인구가 1억8천만명이라고 나옵니다.
16세 위나 때는 전거가 분명한 奇遇를 우리 역사에 엉뚱하게 붙여 놓고 있습
니다(이런 대목은 여기 말고도 몇군데 더 있습니다).
17세 여을은 민권옹호정치를 펴고 국립장관학교를 만듭니다.
후단군조선으로 들어가서
2세 추로의 신하이름이 왕이라는 뜻의 이사금입니다.
7세 등올은 입법, 사법, 행정을 분리한 삼권분립을 시행합니다.
9세 감물 때에는 유황발사총이 발명됩니다.
그리고 기자조선에 들어가면 철학, 윤리학 등의 책이 지어지고(이것은 전 부
분에 걸쳐 다 나오는 바인데 자본론이니 심리학이니, 논리학, 도덕경 등도 다
우리가 지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10세 등나때에 성선설, 성악설, 무성설 등이 주장됩니다.
20세 때에는 사상의학이 나오는데 우리 선조들의 고귀한 업적이 모두 고조선
시대에 올라가 붙어있는 격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단기고사 안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번역자가 잘못 옮겼을지도 모르고 또 책제목이 같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그리고 정말 그랬는지도 모르는 거지요. 그래서 저
는 다른 방법으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선 단기고사 안에 나오는 인용서적들의 목록을 뽑아보았습니다. 그것은 다
음과 같습니다.
桓氏傳
진단기
거칠부 소사
만리원론
고사
탐고사(금국 황자운 지음)
돌궐사
금국정송기
고구려 유기
만주실록
만주산사
일단 저중에 고구려 유기가 고구려 역사책인 유기라면 그것을 빼고는 듣도 보
도 못한 인용서적들의 목록이 됩니다. 단기고사 서에는 소정방, 설인귀가 고
구려사와 백제사를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했는데 고구려의 정사인 유기가 남아
있다는 것이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또 대야발의 시절에는 금나라라는 것이 있
지도 않았는데 금나라 황자운이 썼다는 탐고사가 웬말이고 금국정송기는 또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것을 만약 역자가 본 다른 전거를 대느라고 써넣은 것
이라는 주장은 성립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최소한 구한말까지 탐
고사나 금국정송기가 있었어야 하는데 그런 책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
습니다. 또 만주실록이라는 것은 청의 태조와 태종에 대한 실록으로 알고 있
습니다. 그런데 발해시대에 웬 청나라의 역사책이 등장한답말입니까?(비록 만
주실록을 뒤져보지는 못했지만 단기고사에 있는 내용이 그곳에 없으리라는 것
은 거의 확실할 것입니다)
또 거칠부소사는 그 황당한 발명품들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인용되었다고
쓴 것이 틀림없고 돌궐사를 참조하라고 되어 있는 내용은 제가 잘은 모르지
만 칸트철학을 그대로 옮겨 놓은듯 합니다(기자조선 29세 마간). 또 만리원론
은 우주기상학부터 원자론에 이르기까지 설명이 나오는 부분을 뒷받침하고 있
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지 저는 정말 믿을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주의한 것은 연대입니다. 단기고사는 갑자를 하나도 기록하지 않아
연대를 알 수 없도록 해 놓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역대 왕
들의 연대가 나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연대를 합산하면 일련의 연대표가 형성
되고 역사상 확실한 사건이 있던 때를 대입하면 각 왕들의 시대를 판별해낼
수 있습니다.
기자조선 말년에 연인 위만이 나라를 빼앗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해는 정
확하게 안나와 있지만(환단고기 등에는 BC 194년이라고 합니다만 중국측 기록
에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BC195 - 190년 사이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
는 190년에 놓고 연대를 역산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단군조선은 BC 2509년에 건국된 것으로 계산이 나옵니다. 믿기지 않는
분들은 직접 해보세요. 전단군조선이 1222년이고 후단군조선은 875년으로 통
합 2096년이 되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역년이 일치하지만 기자조선은 전단
군조선이 끝날때 세워져서 1097년을 갑니다. 그러면 기자조선의 멸망이 BC 1
90년이니까 여기에 1097을 더하면 BC 1287년에 기자조선과 후단군조선이 건립
된 것이 되고 여기에 다시 1222를 더하면 BC 2509년이 되는 것입니다.
자, 단군세기와 역년은 같지만 연대는 영 딴판인 것입니다. 이 점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음에 저는 외국과의 교류를 중점적으로 살펴 보았습니다. 처음부터 설명을
해보지요.
단군왕검의 연대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이미 말한바 있고 2세 부루는 우임
금과 동시에 왕위에 올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동작빈의 계산에 따르면(이 사
람의 계산에 따르면 단군이 왕위에 올랐다는 무진년이 BC 2333년이 되게 됩니
다) 우가 왕위에 오른 해는 BC 2183년이 됩니다.(이것은 여담이지만 삼국유사
기록대로 단군의 치세가 150년이었다면 우 임금이 자리에 오른 2183에 150을
더해보십시오. 딱 2333이 나옵니다. 아마도 단기고사의 저자도 이 정도는 알
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단기고사식 계산법으로는 부루가 왕위에 오른
것은 BC 2416년이 됩니다. 200년 이상이 차이가 나지요.
12세 아한 38년에 하가 멸망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때는 BC 1972년인데 역시
동작빈의 계산법으로는 BC 1751년이므로 200년 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23세 아흘 12년에 돌궐 사신이 왔다고 하는데 돌궐은 545년에 건설된 유목제
국입니다. 742년 멸망하지요. 그런데 이때는 BC 1108년입니다. 너무 빠릅니다
. 그때에도 돌궐족이 있었을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럴 확률은 별로 없고 또 돌궐의 원래 부족명은 ‘궐’, 알타이어로는 ‘큘
’이라 합니다. 당대의 돌궐제국도 자신들을 ‘쾨ㄱ튀르크 제국’(쾨ㄱ는 잘
못 쓴 것이 아니고 완성형에 없는 글자입니다)이라고 불렀습니다.
후단조에 드러가면 단기고사는 치명적인 과오를 일으킵니다.
2세 추로 28년에 달단의 추장이 입조했다고 되어 있는데 역시 이당시에 존재
했는지 알 수가 없군요.
6세 나휴 때에는 동돌궐과 수호조약을 맺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분명 돌궐의
나라가 있었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러나 돌궐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펴본 자와
같습니다.
8세 추밀 이후에는 춘추전국 시대의 국가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때는 BC
260년대로 춘추시대(BC 770 - 453)도 시작되기 전입니다. 저는 일단 이렇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국가는 주의 제후국들이었으니까 춘추전
국시대가 시작되기 전에도 이들 나라와 사신교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입니
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도 문제는 남습니다. 魏, 趙, 韓은 晋의 대부들이 진을
멸하고 세운 나라입니다. 바로 이 때를 기점으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가 나
뉘어집니다. 그렇다면 진과 조위한은 함께 등장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 그런데 9세 감물 때에 위가 나타나고 11세 사벌 때에는 위, 한, 진이 모두
사신을 보내며, 15세 두홀 때는 아예 진과 조가 동시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21세 여루 45년에는 노에서 주역을 가져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이때는 B
C 526년으로 공자가 아직 26세 밖에 안되었던 때입니다. 주역이 아직 만들어
지지도 않았던 때인 것입니다.
23세 고열가 때에는 衛에서 사신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때는 BC 454년
으로 이미 衛는 BC 661년에 晋에 의해 멸망당한 나라입니다.
기자 조선으로 고찰을 돌립니다.
3세 솔귀 때에 은이 멸망하고 기자가 망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채로 같은 세기에는 속합니다.
14세 누사 때에도 돌궐에서 사신이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5세 이벌 때에 전국시대가 되었다고 하면서 秦이 북구강병책을 알려왔다고
되어 있는데 이때는 BC 870년대로 아직 춘추시대도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또
진에서 부국강병을 시작하는 것은 상앙의 변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시대는
BC 359 -350년간 입니다.
21세 불리 때에 몽고 사신이 왔다고 되어 있는데 그 때 몽고가 존재했는지는
의문입니다.
27세 고태 때에 주에서 도덕경을 가져왔다고 했는데 이때는 BC 583년으로 아
직 노자가 나타나지도 않았던 때입니다.(그리고 도덕경은 장자 이후의 전국시
대에 만들어진 책으로 보고 있습니다)
31세 노물 때에 주에서 춘추, 예기를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 때는 BC 545년으
로 공자가 7살 때입니다.
36세 인한 때는 북부여에서 사신이 오는데 이때는 BC 431로 아직 후단군조선
이 멸망하지 않았고 따라서 북부여도 없던 때입니다. 이로써 한 책안에서도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이들의 왕위는 거의 부자상속으로 되어 있는데 도저히 인간의 수명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나이들까지 살았던 셈이 되는 왕들이 많습니다. 이 점은 다
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이 단기고사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는 겹치는 기사가 상당수 있습니다. 두 책
중에 어떤 책은 보고 쓴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무엇을 보았을까
요?
단기고사가 발해의 책이 맞다면 조대기는 그 이후의 발해의 책이 됩니다. 그
러나 환단고기에 전하는 조대기의 내용과 단기고사의 앞부분에 나오는 단군왕
검의 세계는 영 딴판입니다. 이것은 또 무슨 이유일까요? 조대기가 발해에서
만들어진 책이라면 그 제작연대가 단기고사보다 빠를수는 없을 것입니다. 단
기고사를 쓴 대야발은 대조영의 동생이니까요. 그렇다면 조대기는 작성될 때
단기고사를 가장 크게 참고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단기고사의 주장대로라
면 이미 고조선에 대한 역사책들은 모두 없어진 것이니까요. 또한 단기고사는
왕실에서 만든 책으로 발해인들이 널리 보았을 텐데 말입니다.
중간서를 쓴 단재 신채호의 글은 이 책이 진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왜 그의 글에는 이와같은 내용이 하나도 없을까요? 모든 신학문
과 그 찬란한 발명품에 대해 단재는 왜 입을 다물었을까요? 단재가 친일파라
서 우리 선조의 위대한 역사를 말살하려고 그랬다는 생각을 가지실 분은 없을
줄 압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단재가 이책을 본 것은 임자년이
라고 되어 있으니 1912년이 됩니다. 그러면 조선상고사를 비롯한 단재의 책들
이 다 그이후인 것입니다. 단재는 1880년생으로 1912년이면 33세였고 <조선상
고사>는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습니다. 단재는 이글에서 “고기에 가로
되 단군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하우를 도산에서 만났다하고....”라고 쓰
고 있습니다만 이 <고기>가 단기고사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단기고사에는
부루가 팽오를 보낸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요.
또 신채호는 <천부경>, <삼일신고> 등이 근자에 처음 출현했다고 하며 이를
사서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합니다.
다음번에는 사서와 지은이들에 대한 의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번호:3/54 토론자:TEODORA 수신자:ALL 토론일시:94/11/09 11:13 길이:91줄
안녕하세요?
순규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순규님의 글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을 인용해서 반박을 하지요.
앞에 ## 표시가 된 것은 인용하는 글입니다.
우선 25사를 읽어보지 않고 "환단고기는 25사와 크게 차이가 나는 문제
는 없다"고 하는 것은 아직 고교생이고, 25사를 필자도 다 읽어보지 못했
으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앞으로 올릴 이문영님의 글에 그 내
용에 대해서 나오니까요.
그러나, 25사를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몇 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조금이라도 우리의 역사를 알려주는 자료를 무시한다는 점입니
다. "史記"의 조선열전이나, "漢書" 조선열전, 지리지 燕조, "三國志" 위
서 동이전 등의 제한된 사료를 다만 중국사서라고 해서, 그 내용이 화려
하지 못하다고 해서 무시한다면, 그것은 상당한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둘째, 적을 알아야 이길 수가 있는데, 중국측에서 우리를 어떻게 보았
는지를 알아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주장을 이길 수가 없지요. 만약 전혀
25사의 내용에 대해서 무지한 상황에서 중국이 "너희는 우리보다 못하다.
그 근거는 25사에 나와있는 내용이다"라고 할 경우에 반박할 말이 있을까
요?
##그리구 조선조에 세조,예조,성종 등이 8도 관찰사에게 희귀서를 걷으란
##명령을 내렸을때 한단고기의 첫머리를 장식하고있는 삼성기와 태백일사,
##단국세기,규원사화등의 인용문헌인 조대기 등이 있다더군요~
환단고기는 삼성기, 태백일사, 단군세기(단기고사)로 이루어져 있지요.
따라서 첫머리를 장식한다는 것은 잘못 말씀하셨군요. 물론 이것은 별 문
제가 아닙니다.
##역사는 당연히 바르게 알아져야하고 바른역사를 알기위해선 교과서 같은게
##바른 역사서겠죠~
국사교과서의 문제는 많은 학자들이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에 문
제가 많다는 것이죠. 그리고 식민사학의 잔재도 많이 남아있구요. 그리고
현대사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고려로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지요.
##삼국사기나 유사같은것의 헛점은 많이 드러나 있습니다.
##김부식이란 사람은 사대주의자였다는게 확실한 사실이고~
##그런 사람이 중국을 덮고있던 우리상곡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짐작
##할수 있습니다.
삼국사기가 김부식 혼자만의 저작은 아닙니다.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에 김부식은 감수국사의 직책일 뿐입니다. 즉 지금의 국사편찬위원회의
위원장 정도 되겠지요. 그리고 삼국사기는 조선조에 기록된 "고려사"에
비하면 상당한 자주적인 모습이 보이는 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대주의자라서 상고사를 왜곡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왜 수나라
의 고구려 침략에 대해서는 기록을 했을까요? 천하의 주인되는 국가가 휘
하의 속국을 '징벌'하면서 패배했던 것을 기록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또, 중국을 덮고 있었다고 하시는데, 여기서 중국이란 어디를 말합니
까? 고조선의 영역은 요동, 한반도 북부, 만주에 걸쳐 있었다는 것이 현
재 학계의 통설이지요. 그리고, 중화주의자(사대주의자도 포함)들에게 있
어서 중국이란 중원을 말합니다. 고조선의 영역은 '동이'라는 변방일 뿐
입니다. 순규님은 고조선이 중원을 지배한 것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그런 기록이나, 유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순규님의 주장이 사실이
라고 말씀하시려면 그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기 바랍니다.
이병도씨의 제자가 쓴 글이라고 해서 모두 식민사관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이병도씨의 책이나, 제자가 쓴 글을 읽고 배운
사람들도 모두 식민사관을 가진 자가 되겠군요. 환단고기 옹호론자들은
심심하면 식민사관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환단고기를 반박하는 사람은
모두 식민사관을 가진 자들일까요? 순규님은 식민사관에 대해서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가 있으신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전 이것이 우리의 참된역사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화려한 역사만이 우리의 참된 역사일까요? 현재 우리의 역사가 많이 왜
곡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많은 학자들이 끊임
없는 노력을 기울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단고기에 기록된 역사가 바로잡힌 역사라고 인정하는 학자는
거의 전무한 상태입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서 고조선 시기에 인구가 몇
명이라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지요? 지금의 우리 나라의 인구보다 더
많지요. 이것이 진실일까요? 물론 아니죠. 따라서 이렇게 조작되거나 과
장된 부분을 가려내는 것이 사료비판입니다. 이렇게 사료비판을 해서 인
정이 되는 부분만을 사료로 인정하는 것이죠. 그래서 찾아낸 환단고기의
가치가 바로 발해의 연호를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앞으로 좀더 많은 자료
가 발굴이 되면 환단고기의 가치가 더 돋보일 겁니다. 하지만, 조작된 부
분은 어느 누구도 사료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상으로 순규님의 글에 대한 반론을 펴 보았습니다. 고교생이라서 그
런지 글에 헛점이 아주 많군요. 좀더 많은 책을 읽어보시기를 부탁합니
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당당하게, 그리고 자신의 흥분되는
감정을 조절하면서 토론에 임하기를 기대합니다. 토론에서 흥분할 경우에
는 논리가 흐려지고,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남에게 전달하지
도 못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랍니다.
제가 왜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올린 글을 잘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감수국사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통설이라 함은 학계에서 폭넓게 인정받는 학설을 말합니다.
그리고 고고학자가 우리 나라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 나라 사람들만 연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의 고대사 뿐만 아니라 한국사의 구석구석까지 연구
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하는 사람이 어떤 사료를 볼 때 기분나쁘고 안 나쁘고는
거론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이(夷)라는 글자가 우리가 볼
때에는 비록 기분이 나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감정상의 문제일 뿐, 그것
이 기분 나쁘다 하여 무시할 수는 없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만을
연구하는 자세를 가지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구문제를 언급했는데, 그 당시의 세계인구가 몇 명 정도인지 학
교의 선생님께 여쭈어서 알아보기 바랍니다. 그것까지 가르쳐 줄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그 정도의 노력은 해야 토론의 자세라고 할 수가 있으니
까요.
그리고 '한'인지, '환'인지를 따질 필요는 없어요. 왜냐하면, 한자는 시대
에 따라서 발음이 변화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지요.
북부여기는 제가 잊고 언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반론의 근거가
되나 보군요. 앞으로 신경쓰도록 하죠...
그리고 조대기에 쓰여졌다는 남녀평등, 부권(父權)이라는 용어도 조대기가
쓰여졌다는 시기에 사용된 용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근대에 쓰여진 말이므로, 조대기가 쓰여진 시대도 근대로 내려온
다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참... '영고탑'에 대해서 알아 보셨나요? 그것을 알아보고 그 뜻을 여기
게시판에 올려놓아 보세요. 세계사를 하시는 선생님께 여쭈어 보면 아실
수가 있을겁니다.
그럼, 이상으로 반론을 마치고 하이텔 한국사동호회의 이문영님의 글을 한
편을 더 올리도록 하지요.
달구벌에서 현식.
ps. 여전히 이번에 올라온 글에서도 무례한 말투가 한 두 가지가 아니로군
요. 말을 버릇없이 하다가는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
하시고 글을 올리실 때 무례한 문구는 사용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동안 규원사화 등의 도가류 사서에 대하여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에 대한 제 의견을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그 두번째로 사서와 지은이들에 대한 의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제의 시발점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잡았습니다.
왜 이들 두 사서에는 규원사화와 같은 단군조선의 역사가 빠져 있을까요?
김부식은 왜 그 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걸까요?
첫번째 가설은 이렇습니다.
김부식은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몰랐다.
그러나 그럴리는 없습니다. 고조선은 중국의 사서에 무진장 많이 나오고
있고 삼국사기의 첫머리도 조선유민이 산간에 흩어져 살고 있다라는
마말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가설은 이렇습니다.
김부식은 괴력난신을 논하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과 춘추필법에 따라
고조선의 역사는 황당무계하므로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별로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첫째로, 물론 구삼국사를 보고 쓴 이규보의 동명왕편과 비교할 때,
또 일연의 삼국유사가 전하는 사실을 볼 때 삼국사기가 더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고주몽이 알에서 태어나거나 혁거세 등의 건국신화도 모두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입니다.
둘째로, 규원사화의 전하는 바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규원사화에 규원사화의 원본인 진역유기의 원본인 조대기는
발해인이 가져온 것이라 하였으니 김부식 때에 그 책이 있었을 것이고
만일 김부식이 그글을 보았다면 쓰지 않았을리가 없습니다.
세번째 가설은 이렇게 세울 수 있습니다.
김부식이 편찬한 것은 삼국에 대한 역사일뿐이므로 고조선등의 역사는
일부러 넣지 않았다.
이것은 아주 그럴 듯합니다. 우선 세계가 분명히 전해지는
가야의 역사도 김부식은 전하지 않았습니다.
또 발해의 역사도 다루지 않았습니다.
김부식은 철두철미하게 삼국의 역사만 취합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부식은 왜 삼국의 역사만 고집을 하였을까요?
삼국사기의 발문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의 역사만 꿰고
오히려 우리의 역사를 모르는 것을 한탄해서 삼국사기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역사 꼭대기에 있는 고조선의 이야기를
빼먹은 채 우리의 역사를 알린다는 것은 곧 삼국이전의 나라는
우리나라가 아니라는 논리가 되고 맙니다.
과연 인종과 김부식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요?
저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김부식이 중화주의자로(그것도 아주 골수분자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기술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있는 사실을 깔아 뭉개거나
없는 사실을 견강부회해서 만들어내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우리는 삼국의 역사에 대한 기본 텍스트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행히 많은 금석문의 자료가 김부식이 역사의 사실을
깔아뭉개지는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는 왜 고조선의 역사가 없을까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제 생각에는 삼국사기의 저본이었던 구삼국사에 고조선이 기술되지
않았던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구삼국사의 기록은 동명왕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규보가
그 글을 쓴 이유는 우리가 성인의 자손임을 알리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제일 꼭대기를 동명왕으로 본 것이지요.
이 점으로 볼 때 구삼국사에도 단군 조선의 이야기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구삼국사에는 왜 단군 조선이 누락되었을까요?
그리고 구삼국사가 있었다면 왜 인종은 우리나라 학자가 아국의 역사를
모른다고 한탄하였을까요?
구삼국사는 유교적인 체계 아래 정리된 책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 책은 전해지는 전승과 이상한 이야기들과 역사적인 사실들이
혼재되어 있는, 역사서라기보다는 민담집과 같은 성격이 더 강했던
책이었던 모양입니다.
따라서 고려의 귀족들은 황당무계하다 하여 그 책을 읽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인종은 김부식에게 새로 책을 지을 것을
명령하였고 김부식은 중국측 사서와 엄밀한 대조를 거쳐
구삼국사를 한편의 중국사서와도 같은 형태로 정리를 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구삼국사에 고조선의 역사가 없는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군요.
아마도 구삼국사는 고려에서 편찬되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삼국사기 서문에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삼국사는 누가 썼을까요?
당연히 신라의 누구입니다.
신라는 자신들의 시조를 박혁거세나 김알지, 석탈해 등에서만
찾았던 것입니다. 삼국사기 처음에 나오는 조선유민들을 자신의 조상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단군에 대한 이야기는 백성들 사이에서 전승으로 내려갔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저는 한가지 가설을 세워봅니다.
조선 유민들의 지도자인 6촌장들이 6두품 세력이 되는 것은 모두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단군의 후예라는 사실을
전승으로 지켜 갑니다. 또 어쩌면 역사서도 갖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이들이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하는 것은 고려시대입니다.
그때부터 단군이 한민족의 시조라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이야기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식적인 관찬사서에서는
단군조선의 역사가 기록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고구려는 자신들을 단군의 후예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만일 그랬다 하더라도 신라가 그 역사를 말살했을 개연성은
충분합니다. 신라는 자신들보다 역사가 빠른 부여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를 전승한 발해와
대치한 상태에서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 발해로 이어지는 계통을
인정한다면 스스로 역사의 서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므로
분단의 역사가 분단의 이데올로기를 생성한다는 하나의 진리를
우리는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신라는 아예 발해를 말갈국가로 생각하는
경향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신라는 발해를 가리켜 ‘발해말갈’, ‘말갈’, ‘狄國’등으로 부르고
발해의 시조 대조영을 말갈수령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발해와의 관계가 우호적일때는 고구려 유민국가로 설명을 하는
이중성도 보여줍니다.
이제 구삼국사에서 고조선의 역사가 사라진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관심을 삼국유사로 옮겨 봅시다.
삼국유사에는 고기와 위서를 들어서 단군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고려시대의 또 하나의 책에서 단군조선의 이야기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승휴의 제왕운기입니다.
이 두책은 서로 다른 사서를 보고 작성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단군조선의 역사를 하나는 1500년 치세로(유사),
하나는 1028년 치세로(운기) 나타내고 있는데다가
하나는 위치를 평양(유사)으로, 하나는 위치를 요동(운기)으로
보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책은 모두 단군을 한사람으로 인식하고,
즉 왕조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단군이 신선이 되었다는 점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단군에 대한 이야기가 전승되어 여러갈래의 글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들이 조대기와 같은 글을 보았다면 그 내용을 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음을 쉬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본 ‘고기’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데는
선학들의 연구가 이미 있습니다. 이것을 삼한고기라고 말하는데
(<증보문헌비고>에 나옵니다.)
<해동이적>이라는 책에서는 삼한고기는 신라 진흥왕때의
安弘법사가 지었다고 전합니다(교보에 이책이 마침 없더군요).
이 말이 사실이라면 안홍법사는 6두품의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안홍은 수에 들어가 胡僧 비마와 나등과 함께 돌아왔고
불경과 사리도 가져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안홍을 해동명현이라고 칭찬하고 저서로
<동도성립기>가 있다고 했고 아마 전기인 것 같은데
<동해안홍기>라는 책도 있다고 합니다.
일연은 왕사로써 궁중의 책을 보지 못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삼국유사를 지으며 그 숱한 전거를 대고 있는데 조대기와 같은
훌륭한 책이 있었다면 반드시 참고를 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조대기는 궁중에 있던 책은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또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 역시 볼 수 없었던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발해인이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의 세조는 즉위 3년에 16권의 책을 찾아내라고 하는데 세번째로
일컬어지는 책이 바로 조대기입니다.
단군조선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있는 BC2333년 건국설은 조선 성종때
편찬된 동국통감에 나옵니다.
동국통감은 단군이 요25년 무진에 건국했다고 하는데 이 때가 바로
BC2333년입니다.
삼국유사에서는 연도 계산에 대해서 의문점을 달고 있습니다.
동국통감에는 주목할만한 기사가 있는데 권근의 설입니다.
권근은 단군의 치세가 단군 개인의 것이 아니고 왕조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현재 인정되는 사서에서 최초로 나오는 공식적인 견해입니다.
여기에서 각종사서들이 전하는 우리의 고대사를 재구성해보기로 합니다.
삼국유사는 환인 - 환웅 - 단군으로 부자지간으로 설정을 해놓앗습니다만
환단고기에는 이들이 부자지간이 아니고 3왕조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규원사화도 이점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환인은 신으로 환웅은 왕조를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 사서들은 그 이후 우리나라의 여러 국가를 모두 한집안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심지어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삼국유사에
중국의 전설로 되어 있는 선도산 성모의 전설을 우리 것으로 바꾸어
단군과 한 혈통임을 증명하고자 하는데 이것이 우스꽝스런 일이라는 것은
삼국유사를 한번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정말로 그랬다면
구삼국사에 단군이 빠질리가 없습니다.
규원사화 역시 신지씨의 후손이 숙신족이 되었다가 여진족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민족이라고 말하고(숙신은 중국이 조선의 발음을 잘못 표기한 것으
로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부소는 고구려를, 부우는 진번을, 부여는 부여의
조상이고 거기서 다시 옥저, 졸본, 비류가 쪼개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 조상으로부터 각국이 쪼개져 나왔다는 기술은 하등
새로울 것이 없는 방법입니다. 이미 사마천이 사기에서 써먹은 바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는 黃帝라는 인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것은 그가 황제 이전의
역사는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黃帝가 중국 왕조들의 공통조상이라는 전설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황제의 손자 전욱의 손자 우는 하왕조의 시조이고
황제의 증손 제곡의 아들 설은 은왕조의 시조입니다. 주왕조도 제곡과
연관이 있고 춘추전국시대의 많은 나라들이 모두 전욱, 제곡을
시조로 섬기고 있습니다.
단군조선의 치세에 대한 문제를 한번 봅시다.
삼국유사는 1500년 치세에 1908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제왕운기는 1028년 치세를 주장합니다. 역시 오래오래 살다가
신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단기고사는 그 연대를 믿는다면 단군조선의 역대가 드러난 최초의
책입니다. 그러나 후세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지 조선 초기의
동국통감이나 사문록 같은 책에는 여전히 단군조선의 역대는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나마 나아진 것은 동국통감이 인정받는 사서중에는
처음으로 단군조선은 왕조였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이런 점은 구한말까지 내려가 대종교의 종사인 김교헌 역시
1212년간을 통치했으나 그 傳世는 모른다고 말하기에 이릅니다.
단기고사를 발간하고자 했다고 하는 신채호 역시 단군조선의 왕명을
거론한 바 없습니다.
이대목에서 환단고기를 감수한 李沂의 독특한 견해도 한번 살펴봅시다.
이기는 1848-1909의 격변기를 살아간 애국지사입니다.
(그러니까 환단고기를 감수했다고 해도 그 간행 2년전에 죽은 것입니다)
호는 海鶴, 자는 伯曾. 전라 만경 출신입니다.
실학을 연구하여 유형원, 정약용의 학통을 이었다고 하며
1905년 노일전쟁 후 미국으로 가 노일강화조약에 한국의 입장을
호소하려 했지만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의 방해로 실패하자
도꾜로 가서 일본천황에게 한국침략을 규탄하는 서면항의를 하고
을사조약 체결 후 귀국하여 한성사범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장지연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민중계몽과 항일운동에 진력하다가
1907년에는 自新會라는 결사대를 조직하고 을사오적의 하나인
권중현을 습격했지만 부상만 입히고 실패했습니다.
이일로 7년 유배형을 받아 진도로 갔지만 곧 풀려나와 <호남학보>를
발행하고 민중계몽운동에 계속 힘썼습니다.
이기의 선조가 환단고기 단군세기를 지은 李암입니다.
(암자가 옛한자라 안나오는 군요. 아시죠, 品자 밑에 山자.)
그래서 이기의 집에는 옛역사책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기의 문인에 단해 이관집이라는 사람이 있고 이 사람의 아들이
이유립으로 바로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놓은 사람입니다.
이관집과 환단고기의 편자 운초 계연수는 1909년에 단학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고사연구와 대왜투쟁을 부르짖었고
이관집은 만주에서 밀정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기가 선조가 남긴 글에 주석을 단 <증주진교태백경>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환단고기 범례에도 “이 글이 ‘태백진교’가 다시 일어날 바탕이
되지 않을런지, 손은 저절로 춤춰지고” 云云의 글이 있습니다.
이기의 글은 아주 독특한 역사관을 보여주는데
단군은 천제로 眞敎를 설립하고 자신의 도를 금거북에 담아
바다로 보냅니다. 이 거북을 발견한 사람이 禹입니다.
바로 중국 하나라의 우임금입니다.
우는 그 도를 伊尹에게 전하고 이윤은 그 도를 다시 기자에게
전했습니다. 기자는 단군의 3세전인이라고 이기는 말합니다.
기자는 도를 주나라에 전하고 조선으로 옵니다.
즉 기자는 은인이지만 단군의 진전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기자조선을 인정하는 입장입니다.)
또 단군시대에 금강조사라는 이가 있는데 이사람이
회글족에게서 알라가 태어날 때 진교의 도를 전해주었고
(알라가 태어났다는 것은 분명 알라와 마호멧을 구분하지
못한 탓일 겁니다.)
인도에 들러서 석가가 태어날때 진교의 도를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즉 이슬람과 불교는 모두 단군의 진교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또 이기는 국통이 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기왕 이기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 더 말해봅시다.
왜 이기의 글에는 단군의 역대세가에 대한 이야기가 없을까요?
그리고 왜 기자를 은인이며 조선으로 왔다는 점을 인정하는 걸까요?
이기가 선조들의 글을 갖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암이 썼다는 <단군세기>를 갖고 있었든지 아니면 보기는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단군세기>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런 주장을 늘어놓은 걸까요?
이 경우에는 절대로 못보았다는 주장은 통용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환단고기의 감수자가 바로 이기라고 했기 때문이지요.
자, 위의 의문점을 간직한 채 앞에서 살펴본 사항들로 눈길을 돌립니다.
먼저 환인과 환웅에 대해 보면 환인을 왕조로 파악한 것은
환단고기 뿐입니다. 환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삼국유사나 규원사화가 그 통치는 인정하지만 어디까지나
신화적인 성격 속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단군조선의 연대를 보면 환단고기와 단기고사 만이
2000여년의 역사를 주장합니다.
(삼국유사의 1908년은 단군의 나이이며
단군조선은 1500년의 치세를 가졌다고 했으니 이는 분명히
구분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역사를 왕조사로 파악하는 경우 모두 47대라는
점에는 일치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명도 거의 일치하니
(다른 것은 15대 벌음, 대음 19대의 종년, 구모소
44대 구물, 구홀뿐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의심을 안가진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전세는 같은데 역년은 1000년이 차이가 난단 말입니다.
다음으로 기자와 위만의 취급에 대해서도 알아봅시다.
기자를 조선족으로 파악한 것은 단기고사 하나뿐입니다.
위만은 고대사서 모두 공히 연인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단 단기고사에만 조선인이라는 설이 있다고 적혀져 있습니다.
여기서 연대의 문제를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잠깐 환단고기와 관련된 사람들을 짚고 갑시다.
환단고기의 삼성기전을 쓴 안함로나 원동중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역시 되짚어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안함로는 진라 진평왕에서
선덕왕 때의 사람으로 환단고기에 적혀 있으니 그렇게
알 도리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왜 삼성기전에는 신라의
시조를 단군과 연관 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는 신라사람으로 왕명을 받들어 중국에 가서 학문을 연구했고
속명은 김에 아버지는 이찬이었다고 하니 진골출신 이상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들 나라의 역사는 안중에도 없이
오래전의 고구려로 이어지는 계통만 밝혀 놓았다는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이 글이 전문이 아니라서 그럴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있습니다만 희박합니다. 삼성기전에 보면
“정미년 한나라 혜왕 때 연의 추장 위만이 몰래 서쪽 변방 한모퉁이에
살았는데, 번한의 준이 그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바다에 들어가 망하였다. 이로부터 삼한이 거느리고 있던 백성들은
거의 한수 남쪽으로 옮기니 한때 많은 군웅들이 요해 동쪽에서
싸웠다.”
라고 되어 있어 삼한이라는 말이 여기에 처음 나옵니다.
한수 이남으로 옮겨갔다고 했으니 바로 당대의 자신이 살던
신라의 이야기가 될 것이 틀림없는데 삼한의 계통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 역시 의심스럽습니다.
이 안함로는 살았던 연대나 중국 유학 경력, 이름의 유사성이
바로 안홍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안홍이 <삼한고기>의 저자가 맞다면 <삼성기>를 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의 <고기>(즉 <삼한고기>)와 <삼성기>는
전혀 비슷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단군세기를 지은 이암은 1296-1364를 살은 고려말의 인물로
서화가로 명성이 높았고 초명은 군해, 자는 고운, 호는 행촌입니다.
이 사람의 후손이 다시 태백일사를 지은 이백이라 하고 또 그 후손이
이기라고 합니다. 이암은 1313년 충선왕 5년에 1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충정왕 때 찬정사, 우정승이 되었다가
공민왕 초에는 칠성군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저서로 단군세기, 태백진훈, 농상집요가 있다고 했는데
앞의 두책은 무리가 없지만 농상집요는 좀 이상합니다.
농상집요는 고려 충숙왕 때 원의 황태후로부터 송나라 책을 수입할
때 들어온 책의 하나입니다. 이 책으로 고려는 농작물 재배에 새기술을
많이 배우고 조선시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세종이 만든 농사직설 이후에도 양잠에 대한 것은 이 책을 참조햇습니다.
그런데 같은 이름으로 이암이 책을 또 쓴 걸까요?
아니면 이 책의 수입에 이암이 관여했던 것이 잘못 전해진 것일까요?
그건 그렇다치더라도 이암이 쓴 단군세기 서에는 이상한 구절이 있습니다.
“지금 외인이 간섭하는 정치가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왕위를
물려주는 일과 다시 왕위에 오르는 일을 다 저들의 마음대로 하는데
우리 대신들은 손을 묶고 아무런 대책도 없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자, 이글을 쓴 때가 공민왕 12년 1363년입니다.
아시다시피 공민왕은 개혁군주로 자리에 올라 1352년 몽고식의
변발을 금지하고 1356년 정동행성을 폐지시키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실지를 회복한 인물입니다. 1361년에 비록 홍건적의
침입(제2차 침입)이 있었지만 그 다음해 정세운, 안우 등의
명장이 격퇴하였고 1363년 이해에는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왔던
해올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때는 백여년에 걸친 몽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개혁군주의 힘을 뒤에 업고 강력하게
융솟음치던 때입니다. 비록 안팎으로 도적떼들은 있었지만
왕위에 관계되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몽고의 힘에 의해 왕위가 좌우되던 때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것은 충숙왕과 충혜왕이 번갈아 가며 왕위를 차지했던 일인데
이미 23년전의 과거지사입니다. 이때 국운이 날로 번창하고
신군주를 모셔 다들 기운이 나던 시절에 위의 글은 도대체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저 글이 구한말에 쓰여진 것이라면
사리에 딱 맞습니다. 아시다시피 고종은 왕위를 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이완용 이하 친일파 대신과 일본이 고종을 협박하여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도록 합니다.
자, 다시 위의 글을 봅시다. 분명 ‘지금’, ‘더욱 심해져서’,
‘아무런 대책도 없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환단고기에는 고려사에 나오는 <신지비사>의 대목을 인용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에 있습니다. 여기에
신지비사는 단군 달문때 신지발리가 지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에도 신지비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 신지비사 서에는
연개소문의 소문이 관직명이라 나온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신지비사의 서적은 고구려 시대 아래로는 내려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물론 신지비사라는 서로 다른 두책이 있었다고
하면 되겠지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는 전혀 그 이야기가 다릅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일단 한 임금이 자리를 잡으면
5~60년의 치세는 기본입니다. 단기고사처럼 아들에게 물려 준다는
것은 말이 안되므로 여기에는 그런 식으로 대가 물려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단군이 수 130세에 치세함이 93년이라고 했으니
나이 37세에 나라를 세운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웅씨의 나라가 있었으니 단군조선이 우리의 최초의 국가도 아닌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환인, 환웅의 나라도 있었다고 하지요.)
아무튼 사람이 130세까지 살 수는 있으니까 그렇다고 하고
태자 부루는 그 이후에 58년간 제위에 있었습니다. 이미 단군 즉위
67년에 부루를 도산에 파견했다고 하니 그 때 부루의 나이가 못되어도
스물은 되었겠지요?(스물밖에 안된 청춘이 오행치수를 가르쳤다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요.)
그러면 단군 즉위 47년에 부루가 태어난 것으로 해둡시다.
즉 단군의 나이 84세에 부루가 태어난 것인데 해외 토픽을 보면
그런 일도 가끔은 있으니까요. 그리고 다른 기록에는 그 밑으로 동생들이
여럿 있었지만 여기에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부루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이미 50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었을 때는
108세가 되겠지요. 그 뒤를 다시 태자가 이었다니까 그 태자는 언제
태어났을까요? 3세 가륵은 45년간 자리에 있었습니다.
죽었을 때 100살이라고 하면 왕위에 오를 때는 54세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부루가 40대 후반에 낳았던 것이겠지요.
4세 오사구는 또 가륵의 아들입니다.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에
임명했다고 하니 동생의 나이가 아무튼 20은 되었겠지요.
그렇다면 가륵은 또 80에 자식을 본 셈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심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지요. 단군은 유별난 사람이니까
예외로 치고 부루부터 다시 따져 봅시다. 스물에서 삽십사이에
첫애를 보는 게 정상이니까 그렇게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부루가 단군 67년에 스물이었다 치고 77년에 가륵을
낳았습니다. 그러면 가륵이 왕위에 오를때는 나이가 84세고
죽을 때는 나이가 129세가 되는데 장수 집안이므로 그렇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렇다면 4세 오사구는 어떻게 됩니까?
가륵이 30에 오사구를 낳았다면 오사구가 왕위에 오를 때 나이는
99세이고 죽을 때는 137세입니다. 정말 엄청난 이야기들 아닙니까?
그 다음부터는 제가들 중에서 왕을 뽑는 일이 생깁니다.
5세 구을은 양가에서 나오고, 6세 달문은 우가에서 나오고,
7세 한율은 다시 양가에서 나오고, 8세는 출신불명입니다.
9세는 8세의 태자였지만 10세는 다시 우가에서 나옵니다.
10세 노을은 뽑힌 사람이므로 역시 20은 넘었을 것입니다.
그는 59년이나 왕위에 있었고 그 뒤를 태자가 이었는데
그도 57년이나 자리를 지켰으니 정말 고대에는 장수를 했던 모양입니다.
다음 12세는 또 우가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 우가나 양가라는 것은 부족이 아니고 그저 관직명일지도
모르니 우가들이 계속 왕위를 차지하는 것도 특별히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쭉 살펴보면 왕위 세습은 20세 고홀이 차지한 이후로 되어가는 것 같은데
그렇게 보면 이들 역시 굉장한 장수족 들입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계산해 보세요)
다음에 주목할만한 것은 규원사화와 단군세기가 모두 같은 책을 참고했다는데
있습니다. 이암은 이명, 범장과 함께 환단의 진결을 얻었다는데
이명은 바로 진역유기를 쓴 사람이고 규원사화는 진역유기를 보고
만들어진 책입니다. 그렇다면 두 책이 전하는 사적이 이토록 틀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책이 진실이라면 다른 책은 거짓일 수 밖에 없습니다.
범장은 환단고기에 북부여기를 전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단군 고열가 이후에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규원사화가
전하는 바와 틀리니 이 두가지 서적이 서로 보완하는 것으로 옳다고 하면
규원사화는 간데 없는 위서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북애자가 왜 2000년의 역사를 뚝 잘라 1000년의
역사로 축소 왜곡했을까요? 그럴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암과 이명이 얻은 책은 서로 달랐으며 그 둘은
자신들이 얻은 책은 서로 보여주지 않았던 걸까요?
그런데 이명이 본 책은 <조대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조대기를 보고 쓴 책이 <진역유기>이고
<진역유기>를 보고 쓴 책이 <규원사화>인데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조대기>의 원문이 인용되어 있으니
그 원문과 <규원사화>를 비교해 보면 이 이상한 의문에 어떤
해결점이 보일 것입니다.
우선 딱 처음부터 틀린 것이 있습니다.
<규원사화>는 환인의 인을 因으로 쓰고 <조대기>는 仁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대기>에는 인이 仁인 이유까지
설명하고 있는데 <규원사화>의 설명과는 전혀 다릅니다.
또 <규원사화>는 환인을 신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조대기>는 환인을 인간 최초의 조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조대기>에는 환인의 나라에 대한 설명과 그 왕명, 역년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규원사화>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규원사화>에는 환인을 일대주신으로 소개하고 환웅천황에게
명을 내려 천지를 만들게 합니다.
<조대기>에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것 같은 곰과 범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곰족과 범족으로 나옵니다만 규원사화에는 이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북애자가 버린 이유는 또 뭘까요?
또 <조대기>에는 해모수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규원사화>는
단군조선의 이야기만 다루고 있습니다.
<조대기>는 고구려의 역사, 발해의 역사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朝代記라는 이름과는 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나오는 조대기의 인용이 어디까지인지는
잘 알 수가 없는데 본국의 역사를 다루는 자세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만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왕건의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 태조라든가 태조라고
쓰지 왕건이라고 쓰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조대기>는 대중상이라고
쓴다거나 태자 조영이라고 쓰는 등의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물론 발해에서는 그런 예의가 없었다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사학을 전공으로 하시는 분들과 그렇지 않은 분들 사이에
제일(아마도 거의)많이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이 고대사 부
분인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서 중세사나 근대사에 있어서 의견이 엇갈린다든
가 사실 자체에 대한 반론이 이처럼 천양지차로 갈리는 경
우는 없는 것같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한국고대사에 있어서의 사료
의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요. 제가 알기로는,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련된 자료는, 조금만 사학에 관한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일년정도만 바싹 읽어 간다면 거의 섭렵할수 있을
정도로 양이 부족한 것같습니다.
거기다가 고대사 특유의 성격. 상상력의 날개를 마음대로
펼치는 것이 가능하다는 바로 이것이 이 분야에 있어서 많
은 분들이 쉽게 전공자의 영역을 넘볼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조선 문제에 있어서는 제가 알기로는 비단 환단고기에
관해서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것같고, 기존의 사료
비판이 가해진 믿을 만하다고 인정된 중국측사서들에 의해
서도 두계선생님의 기존의 고조선관을 흔들수 있을 정도의
논리전개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해방이후 북한측과 남
한의 일부 사학자들에 의해서 지적되어온 고조선 이동설 같
은 것도 그 일례가 될수 있겠지요.
환단고기 역시 마찬가지 인것같습니다.깊은 이야기 난에
이미 올린 바가 있지만, 이 책은 분명히 숙종대에 지어진
책이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사실인 것같
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숙종대에 이미 존재하였다는 사실
역시 현재의 전공사학자 여러분들에 의해서도 지적된 바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어디선가, 조선왕조실록의 태
조대인가 성종대인가 하는 代에 환단고기인가 조대기인가
하는 책을 불살랐다는 기록을 본것도 같습니다. 제가 확실
히 근거를 댈수는 없지만.이러한 기록이 맞다면 이러한 류
의 역사서들은 이미 조선전기에는 성립되어 있었다고 보아
야 하지 않을지.)
저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믿는 편입니다. 양자사이
에는 넘을수 없는 실력과 관점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여야
하며 또한 현실적으로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 한바와 같이 사료의 절대부족, 그리
고 이러한 사료의 절대부족을 단지 가설의 도그마화로 메우
려고 해서는 문제는 절대로 풀릴수 없다고 생각합니다.제가
생각하기에도 지금까지 문헌에만 의존하여 고대사를 구성하
는 시도는 역동에서 지금 벌어지는 바와 같은 논란이 벌어
질 가능성이 그안에 내재되어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허술한 구석이 매우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나오는 고대사 관련논문들이 고고학을 원용해서 사
료를 해석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던데 이러한 움직임은 상
당히 고무적이라고 생각하며 경의를 표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노력은 완전히는 아니겠지만, 조만간 우리
앞에 상당히 구체적인 고대의 모습을 보여줄수 있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도야 말로 전공사학자여러분들의
특권이자 의무, 그리고 아마추어와의 분계선을 그을수 있는
작업이 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현식님은 사학도로서 앞으로 전공사학자의
길을 걸으실것이라고 알고 있읍니다.고대사의 문제는 지금
완전히 해결된 것일까요?
이런것은 아마도 앞으로 현식님과 같은 프로사학자들이 해
결하여 저와 같은 아마추어에게 생생히 보여주어야 할 미완
의 문제들이 아닐지.
현식님의 분투를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아이디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미안.)
환단고기에 대해서 현식님과 토론을 벌이셨던 또 한분께
미흡하지만 한말씀.
올리신 글들을 보니, 제가 고등학교때 가지고 있던 생각들
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님께서 하신
말씀이 논리적으로 그르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다음의 문제
이고. 글쎄 어떨지요.
이러한 문제에 관한한 처음부터 해결될수 있는 토론의 주
제는 아니라고 생각하시지는 않으시는지요.
고조선 문제에 관해서는 말씀하신 명지대 임선생님과 같은
주장을 하는 분도 계시지만, 중국측 사료를 원용해서 논리
를 전개한 단국대의 윤내현선생님과 같은 분도 계십니다.문
제는 지금 까지 그래도 현식님과 같은 의견을 가지신 쪽이
나 그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신 쪽이나, 이론전개에 있어서
평행선을 그은채 어떠한 합의점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는 것은 아마 님도 잘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곳은 역사동호회,. 제가 알기로는 전공을 하시는 분들중
에는 이미 대학의 강단에 서계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전체적
으로 보아서 프로이든 아마추어이든 간에 앞으로 더 배워야
할일들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친목단체가 아닙니까?
이런 곳에서 서로 감정이 상해야 할말까지 오고가서, 친목
단체의 분위기를 흐려 놓는 것은 좋지 못한 것같다는 소생
의 생각입니다.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일지.
이런 식의 토론이라면, 훨씬 더 부드럽게 진행 될수 있을
텐데요. 전적으로 님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토론이라고 한다면 나의 주장(thesis)을 갖고 ,그리고 남
의 주장(antithesis)을 들어서 진리(synthesis)에 조금이라
고 더 접근하자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의 주장이(thesis) 바로 진리(synthesis)는 아니라는 겸
허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생각도 언제든지 틀릴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
래야만이 나의 발전도 있을수 있을것이고.
옛날에 심야토론이라는 프로에서 언제나 토론이 진행되어
가면 감정싸움으로 비화되는 것을 보고 고소를 금치 못한
적이 있었는데, 적어도 역사를 사랑하는 우리들(!) 로서 그
런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해서야 될까요?
순규님께서는 극히 일부분의 하나인 설문해자 상의 동이에 대한 설명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 같습니다. 즉 나무만 보시고 숲은 보시지 못한다
는 말이지요.
설문해자는 글자의 뜻을 설명한 말이지요.
그러면 이(夷)의 뜻을 살펴볼까요?
夷는 大+弓을 합한 한자입니다.
삼국 이전에 우리 나라 북부에서는 아주 큰 활을 사용했지요.
이것은 삼국지(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아닙니다. 진수의 삼국지이죠) 위지
동이전 읍루조에 나오는 것입니다. 활의 길이는 4척(四尺)이고 힘이 쇠노와
같았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활을 잘 쏘아 사람을 쏘면 적중했다"고 나옵니
다.
이것이 동이에서의 "夷"자의 근원이 되는 것이죠.
하지만 글자의 뜻을 풀이하면 이러하지만, 실질적으로 사용햇던 뜻은 바로
"오랑캐"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기분나쁘다고 하여 무시하고 활 잘 쏘는
민족이다라고 과장하여 부풀리는데, 부풀릴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중국에
대해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순규님은 환단고기 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다른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으시는데, 그것은 학문을 하려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군
요. 특히 고교생이 자기를 가르치는 역사 교사의 말을 들어볼 생각은 않고
또한 의문사항에 대해서 역사교사에게 질문할 생각은 않고, 아래에서 토론
을 할 수 없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진지하게 임해야 할 토론에 임하는 자세
가 아님을 밝혀둡니다. 개개의 사항까지 여기서 일일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
다. 따라서 기초적인 사실은 순규님께서 개인적으로 알아보시고, 그러한 노
력에도 전혀 알 수가 없거나, 알기가 어려울 경우에는 여기에 올려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저부터 그것에 대해서 알려드리도록 노력하지요.
번호:12/54 토론자:TEODORA 수신자:ALL 토론일시:94/11/18 02:43 길이:24줄
안녕하세요?
자신의 말만 옳다고 고집을 하는군요..
제가 생각하는 근거를 여기에서 말씀드리죠. 낙서장에서 토론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환웅천황의 유물이 땅을 파 보아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할
까요? 사람이 거주를 하면 그 흔적이 남게 마련입니다. 그런 흔적이 없다
고 말씀하셧지만, 진실로 이 땅에 존재했다면 그런 흔적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 일부에만 매달린다고 하는지를 알려드리죠. 바로 아래 글에서도
나타나지만, 순규님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내용만 좋아합니다. "사기는 찝
찝하고, 환단고기는 피가 끓는다" 이게 바로 한쪽으로 치우친 아주 좋은 예
입니다. 전들 오랑캐라고 부르는 것이 좋아서 그것을 언급하는 줄 아십니까?
순규님은 여기 한국사강의실의 제 글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22번에 [정리]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서... 라는 글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진실에 기초하지 않은 자부심은 물거품과 같다는 것
입니다.
웬만하면, 토론실에 토론과 관계없는 글은 올리지 않는 것이 어떤가요?
여기는 학술동호회이지, 종교 동호회가 아닙니다.
이게 실증사학의 문제인데요...
임승국교수님이 이런말씀을 하셨죠~
흔히 우리나라 사학을 삼독이라고 한다~
식민사관+사대주의사관+실증사관...
사람이 산 흔적을 보고 그들의 모든걸 알수있을까요?
그리고 지금으로 부터 6000년전의 일인데 아직 남은게 많을까요?
그시대의 황제의 업적이나 그 모습이나...
보이진 당연히 않겠지요?
( 2 1 3 )
실증사학이란 겁니다~
우리선조들의 족보에 보이는 모든분들의 시신이 생생하게 보존될수 있을까요?
거기다 이름표랑 이력서까지 달려서~
(비꼬는거 아님 비유~)
눈에 안보이는걸 믿을수는 없을까요? 우리가 선조님들 모시는거처럼~
종교는 ... 내가 그런말을 했는가 보네요~
앞으론 주의하겠습니다~
근데 제가 하고싶으면 할꺼에요~
그럼 안녕~
역사는 믿는 것이 아니라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추리해 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영화가 끝날 무렵에 들어와서 나오는 장면들을 보고 그 앞의
줄거리를 추리해 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주변에 보면 사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함정도 있겠지요. 이러한 함정을
피하기 위해 사료비판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전에 이런 소설이 있었지요. 해방전 만주의 어느 조선인 일본군 장교가
광복군의 밀정 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박정희 前 대
통령에 대한 것을 소설화한 것이죠. 이것이 만약 오랜 시일이 지난 후에
다른 사료가 빈약해졌을 때, 이것이 발견된다면 그 소설(소설이지만, 오
랜 시일이 지나면 소설인지 역사서인지 구분이 어렵죠)을 연구한 사람들
의 학설은 어떠할까요? "박정희는 우리가 기존에 알아왔던 그런 인물이
아니다. 봐라! 여기 광복군을 위해서 투신했지 않는가!"라고 할까요?
사료비판이 없다면 충분히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료비판을
아는 학자들은 그 내용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설에도 어느 정도의 역사적 사실이 들어있을 것입니다. 그것
을 사가들은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에서 일부의 역사적 사실을 찾아내어도 그 책 전체를 사실
로 인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환단고기도 무턱대고 믿어주지는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로 판명된 것만을
사료로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환단고기 자체는 사서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습니다. 일부 학자
들은 그 책을 도가, 선가 계열의 서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사료비판이란걸 어떻게 하는건가요?
누르하치나 그런사람이 영고탑이란 지명을 쓰기전에 영고탑이란 지명
이 없다고 말할수 있는학자가 있을까요?
조선시대에 x세대라는 말이 쓰일수는 없지만 우리가 쓰고있는 어떤
단어들이 조선시대에는 제법 많을걸로 알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내용이나 유사의 내용에대한 사료비판은요?
사기에 나오는 내용들은... 교과서에도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라고 쓰여
있는데.. 교과서가 엉터리인거 같군요~
어떤 논문인지는 모르지만 서양학자들이 수메르의 언어를 연구했다더
군요..어떻게 연구했는지는 잘모르겠습니다.. 공부가 부족한 탓이겠죠~
그러더니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수메르는 한국어와 가장흡사하다~
아니 수메르 말은요~
이거 뭐죠?
그리고 천문학적 증거나 그런건 제가 얘기한적이 있습니다.
이런걸 사료비판이라고 하지는 않는모양이군요~
서양학자들이 실수한것일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런 학설이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수메르의 언어에 관심을 가지는
학자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한거 같습니다.
문제죠~
사기의 틀이라고 표현하면 너무 지나칠까요?
사기극에 속하 갖혀버렸다~
아~ <===잠오니까 별겄두 오타가 나오네~
참고~ 난 직접 작성함~
사기 나 유사 그리고 예전에 일제식민사학의 태두리를 벗어나는 학자가
제법있으면 이런 쌈은 필요없는건데~
저 혼자만의 생각이라두 그렇게 생각하께요~
현식님은 알아서 생각하세요~
저두 현식님에게 매달릴 필요성은 거의 못느끼고 있습니다
단~ 위서론이 올라오면 그걸 읽어보고 음..그럴까? 라는 의문을 가지는거~
음~ 그렇구나라는 생각은 아직 해본적이 없거든요~
전 재야사학(우리 도우님의 표현)에 둘러싸인것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재야사학쪽이 훨씬 매력있고 바르게 보이는건 어쩔수
없었습니다~ 오래전부터요~
그럼~
낙서에서 낙서해야할껄 여기서 적다니~....
영고탑은 누르하치 이전엔 사용되지 않은 지명입니다.
그것은 어떤 학자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식관계 기사 등에 대해서는
저도 들어 보았고, 그에 대해서 생각중입니다.
사기,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도 모두 사료비판을 해서 역사적 사실로 인정된
것만을 학자들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순규님께서 생각하시듯이 사기나, 조
한
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을 100% 믿지는 않는다는 것입
니다. 환단고기의 내용은 믿어지는 것이 10% 정도 될까, 나머지는 믿지 않습니
다. 그리고 수메르인 들의 언어가 우리 말과 유사하다는 것은 국어학자들이 연
구하고 있습니다. 사학자들이 그것을 자세히 연구할 당위성은 없겠지요.
그리고 낙서장에 "틀리면 가르쳐 주는 것이 어른들의 자세가 아니냐"고 하셨
는데, 글쎄요.. 순규님의 입장에서는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고 보여질지라
도 토론을 하는 가운데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순규
님의 몫이지요.
역사학에서는 가정이나, 근거없이 믿는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없다고 봐야겠지요. 역사학에서는.
민족주의 사학이라고 해서 100%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한 가지 문의하
지요. 실증사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 보시겠습니까?
아.. 한 가지가 아니군요... 한 가지 더...
환단고기에서 주장하고 있는 큰 줄기를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환단고기에는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논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요?
한단고기의 큰 줄기...
역사지요~
결코 중국에 종속된 반만년 역사가 아닌 일만년 초 강대국의 역사
((정확히는 상고사(아주 엣날역사)))
그리고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다시 그런영광을 누릴수 있도록 발전
해 나가라... 저에겐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던데요.
규원사화 서문을 읽고 가슴이 뭉클하지않은 사람은 전 이상하게 봅니다.
한단고기는 소중한거죠~
국사교과서 개편문제로 임승국 교수님이 박정희대통령을 상대로 소송
을 걸었죠~ 승소 근데 이상하게 일이 않되서~ 유보되다 말소~
(역사자료방인가? 임승국님이 백제사 강의하진 글이 있는데요~ 한번읽
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임승국교수님은 정신세계사판 한단고기를 쓰신?(쓴게 아니라 원전을 번역)
분이시고 제가 참 존경하는분입니다...(근데 사진이나 목소리도 보고 들은?
적이 없음)
그분의 설이라면 모두 옳다고 믿어서도 않되지만 퍽 기우레 되더군요~
기울게~
이거 옳구나 저거 옳구나 하다가 보니깐 거의 쏠려버렸습니다~
그분 글참잘써요~ 특히 물귀신 박광용교수는 들으라~
그글읽고 나랑 청산리 박동수가 얼마나 웃었는지~ 기분이 좋아서요~
어? 글이 이상하게 흘려 버렸다~
민족주의 사학이라고 100%믿을수는 없는거죠~
근데 지금의 사학이 바르다고는 볼수있을까요?
이병도씨의 학설에 쭐쭐따르는 제자들과<==이 얘기에 대한 근거가 역사자료
방에 있을꺼 같습니다..비루기님이 갈무리하신 글이요
그제자의 제자들~
할말이 없네요~
입이 힘들어 피곤하구...
필요없는 일을 하면 피곤하죠~ 별로 기분좋은 것두 아니군요
피곤혀 오늘은...
....미루....
번호:20/54 토론자:TEODORA 수신자:ALL 토론일시:94/12/13 01:03 길이:37줄
안녕하세요?
제가 시험관계로 제대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미수1동 동자님의 반론(또는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드리죠.
영고탑이란 지명은 후금의 태조 누르하치 이전의 어떤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영고탑이라고 함은 누르하치에게 신하들이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는 장소를 여진어로 부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지명은 한번 정해지
면 특이한 계기가 있지 않는 한 변경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명의 유
래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설명이 사서에 보통 나옵니다. 영고탑에 대한 유
래도 마찬가지이죠. 그래서 17세기 초에 와서야 영고답이라는 지명이 생겼
탑
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이라는 명칭은 현대에 와서
생긴 것이지요. 만약 17세기에 지어진 책에 '서울'이라는 지명이 나온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17세기에 '서울'이라는 지명이 이미 사용
되었다는 뜻일까요?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 책이 현대에 와서 지어졌다는
하나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료비판이라는 것은 새로운 고문서(또는 고서)가 발견되었을 때
그것의 신빙성 및 사료로서의 가치를 검증하는 작업으로 역사학에서는 기
본이 되는 것입니다. 사료비판의 측면에서 환단고기는 의문이 많은 책입니
다. 제가 언급한 것도 그러한 의문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의문이 하나씩
풀릴 때,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가 점점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단고기의 내용에서 현재 검증된 것은 발해의 연호부분입니다. 즉
발해의 연호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환단고기가 귀중한 사료가 됩니다. 이
렇게 검증되어 갈수록 환단고기의 진실성 및 신빙성이 높아지겠죠..
그리고 순규님에 대한 질문에는 그럴 의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번
번히 지적한 문제점에 대해서 알아볼 생각, 또는 그에 대해서 모르면 솔직
히 모른다고 시인을 하고 알아볼 생각을 하기 보다는 자기합리화만 시킬려
고 하는 아주 위험한(학생으로서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르
침을 받아들일 의사가 없는 자(者)에게 설명을 하는 것은 '우이독경'(소귀
에 경읽기)으로서 아무런 쓸모가 없고, 저만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만 안녕히 계시길...
달구벌에서...
번호:21/54 토론자:TEODORA 수신자:ALL 토론일시:94/12/13 01:19 길이:23줄
안녕하세요?
글을 읽어 보니깐 장난기가 가득하군요..
역시 순규님은 여기서 토론하는 것 보다는 순규님의 친구들과 잡담이나 하
는 것이 어울리겠습니다. "이전에 다른 지명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없으니
까 영고탑에 대해서는 토론할 가치가 없다."라는 것은 순전히 억지밖에 되
지 않습니다. 억지와 주장의 차이를 알고 계시겠지요? 자기 생각이 잘못되
었든지, 아니든지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 억지이죠...
그 근거를 대 볼까요? "실증사학의 문제점이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
증사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으면서 그것이 문제다라고 하는 것부터가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남이 실증사학이 문제다 라고 하니깐 덩달
아서 그게 문제다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하긴.. 고교생에게 어찌 논리적인
의견을 요구할 수가 있을까요.. 하지만, 논리정연하지는 못해도 자신의 생
각이 옳은지, 그른지부터 판단해 보기를 바랍니다. 판단의 방법은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어째서 옳지 않은가에 대해서 알아보
시길 바랍니다. 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연구해 보고 "이러이러하므로 이러
하다."는 판단이 되면 그게 진실로 자신의 의견이 되겠죠...
그리고 환단고기를 한번만이라도 정독을 해 보시길 권합니다. 제대로,
생각해 보면서 읽었다면 아래 19번과 같은 수박겉핥기 식의 대답이 나오지
는 않을 것입니다. 보다 깊이있는 답변이 나오겠지요.
제가 아직 성숙? 하지 못한건 인정할수 있습니다~
그리구 제 지식수준이 잡담정도에 어울린다는 현식님의 말이 기분나쁘지두
않구요~ 제 자격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시는 여러분들에게도 별 할말이 없네요~
한단고기를 정독하면요...
아마 잘모르는 사람입장이라면~ 그쪽으로 많이 기울게 될껍니다~
그리고 잘아는사람이 정독했다면... 아마 단군세기와 단기고사를 같은 내용으로
취급하는 오류가 생기진 않겠죠?
실증사학이란건... 말그대로 풀이하면 되는게 아닌가요?
파봐서 있으면 확실한 사실이 된다~
근데 그게요~
고고학에서 볼때~ 연대측정을 뭘루 하죠?
문헌으로 하든지~ 아님 탄소14연대측정법으로 합니다~ (아마 하겠죠)
근데 과학동아인가? 조금 오래전에요 인류의 역사를 고쳐써야한다~
탄소14연대측정법은 엉터리다~ 하는 내용이 있던데요~ 참고하세요~
영고탑이란 지명이 그런뜻이라면...
누르하치가 한단고기서술(영고탑이란 지명이 나오는 부분)후의 인물일까요?
한단고기안의 단군세기나 삼성기등의 사서는 누르하치 이후에~ 그전의 어떤 사서
를 얻어서 참고했다고 하던데요.(조대기) 라던가?))
앗 지금의 영고탑이구나~ 그래서 다름이름이 있던걸 그렇게 사용했는지는 잘모르
겠습니다~
어째서 그런지는 알아봐야 겠죠~
현식님~ 제 말투가 변하지 않았다구 하셨는데요~
어디로 몰아가는 듯한 현식님의 작전도 변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낙서에서 한번~ 여기서 여러번~
저두 피곤합니다~ 뭔가 통하는게 있으면 좋을꺼 같은데~
언제 충무나 한번 내려오시면 농구나 한번 하죠~
안녕하세요...
오랜만이군요.. 그래서 그런지 이름까지도... 음..
맞다.. 현식님이죠..
그다지 반론할껀 없구요... '한국사 강의'란 방 아시죠..
그곳에서.. 비루기님이 올리신 한국의 석기시대란 글에서요
음.. 한반도쪽이 빙하기때에 빙하에 덮히지 않았다는 군요...
그러닌까.. 빙하기때에도 살만했다 이거죠...
제가 배우기론 가장 근래의 빙하기는 1만년전이구..현대인이 지구상에
나타난것 또한 1만년전이니깐.. 그 사람들중에서 많은 뻑宕湧? 한반도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뭐.. 현대인이라니 모여 살다가 문화도 꽃피우고...
빙하기가 끝나 가닌깐..
어느 애기대로 선긋고 이거 내땅하고 살았겠죠....
빙하기가 완전히 끝난 다음엔 서쪽으로.. 동쪽으로.. 북쪽으로 가서 살고
나라도 만들었겠죠.. 그렇지 않나요??
이렇게 돼면 한단고기의 가치는 어떻게 돼죠?? 높아지겠죠...
그 비루기 님이 올리신 강의는 분량이 많은데.. 한자가 너무 많아서리...
현식님.. 저기 우에 적은 글은 전부가강의에 있는 내용이 아니고
빙하시대에 한국에는 거의 빙하가 덮인곳이 없다란 말을 보고 제가 생각했어
요
혹 잘못?┛┛汰? 없나요??? (그럼 가르쳐 주세요..)
그리고요... 순규 문젠대요...
순규가 억지를 부린다면 그런 것까지 바꺼주셔야죠....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쪼이며 젊은 날을 헤메십니까???
이만 줄이죠.. 저희도 시험 끝났어요...
하~~~ 방학땐 뭐하나?? 크크크...
번호:26/54 토론자:TEODORA 수신자:ALL 토론일시:94/12/14 17:48 길이:29줄
안녕하세요?
"환단고기의 가치"라는 토론실 제목은 환단고기가 어떤 역사적 가치가 있느
냐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이렇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한 마디로 환단고기의 가치는 이렇다고 할 수는)
그래서 논의가 시작되고는 있는데, 아직 깊이 있는 내용은 나오지를 않고
있네요. 좀더 지나면 깊이 있는 내용이 나올까 하는 기대를 가져보는데 아
무래도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분의 참여가 있으면 그럴 가능성
이 있겠지요..
단기고사 문제라.. 저의 착각이었죠...
무슨 얘기를 하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오류를 인정하죠..
연대측정법은 탄소연대측정법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자상자성공명연대측정법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도 있
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랍니다.
그리고 WIZARD03님..
그런 내용은 토론실에 올릴 성격의 글이 아닙니다. 토론이란 근거를 가지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루기님께서 그 글을 올린 의도는 논의에 참고가 되
라고 하는 것이지, 그것이 환단고기의 가치를 입증하는 근거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요. 따라서 환단고기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
고 논의에 참가하기 바랍니다. 역사동호회는 학술동호회인 것을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토론을 거쳐오며 쭉 느껴온건 별로 좋은 토론은 아닌거 같단 생각밖
에 없었습니다.제가 비꼬는듯한 말투를 쓴다든가(전 원래 그래요~)현식님의 몰
아가는 듯한말투~ 이두가지 이유만으로도 많은 잡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현식님과 CYRENE님의 글만을 정리 해서 제생각과 함꺼 몰려보도
록 하겠습니다~. 말투가 좀 안좋을꺼 같은 얘감이 드는군요~ 양해를 바라구요~
너무심하다 싶으시면 지적을 해주세요~ 구체적으로 어떤부분이 나쁘다는걸~
몇가지 중요한 문제는 따로정리 할꺼고요(예를들어 설문해자 동이문제라든지~~
)이문영님의 글은 아직 생각해볼 부분이 많이 남았거든요~ 산수계산두 힘들구~
처음 이문영님의 단기고사에 대한글은 논점에서 제외시키고 싶습니다~ 제가 알기
론 단기고사와 한단고기안의 단군세기는 비슷한게 거의없는거 같습니다~(같다고
보시는 분들두 있어요~ 하지만~ 단기고사의 말도안되는부분이라고 이문영님이 주
장하시는 부분이 단군세기에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이문영님은 상당부분 일치한다
고 하시지만 실수한거 같으네요~)나머지 남는건 몽땅 모아서~ 올리도록 하죠~
중학교 한문교과과정에 나오는 글자죠~
`뜻은 오랑캐. 예날 중국에선 우리를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이렇게 배워 오셨을 겁니다.
저와 현식님의 다른 의견은 전 이(夷)자를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는 거죠~
<설문(說文)> 이란 책이 있습니다~ 거기엔 이런내용이 있죠~
夷 東方人也 : 이 는 동쪽에 사람들이다.
? 弓 ? 大 : 활 궁 과 큰 대 에서 따온 글자이다.
(죄송합니다 쌍시옷 같은 한자인데 제 옥편엔 없어서요~)
與古文人同 : 옛 글의 인 과 같은 글자이다.
夷者仁壽 : 이는 어질고 오래살며
有君子不死之國 : 죽지 않는 군자가 있는 나라다.
( 이 한줄은 뒤에 설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첨가한 부분입니다(잠열님 말씀))
그리고
후한서 동이전과 예기 왕제편에서는 이(夷)는 뿌리 인데 어질어서 살리기를 좋
아한다고 했고요. 산해경 에서는 군자나라가 북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다투는 일이 없다. 동방은 인국(仁國)이라 군자들이 살고 있는데 예
절이 바르고 서로 사양하기를 좋아한다. 동방삭신이경 에는 그들은 서로 칭찬
하기를 좋아하며 헐뜻지 아니하며 사람들이 환란을 당하는 것을 보면 서슴치 않
고 죽을 데라도 뛰어든다. (그리고 부터는 <동방의 등불 한국.김삼룡지음>에서
발췌한것임 그래서 원문을 못??㉥습니다.)
어차피 `그들은 자신이외의 민족을 모두 오랑캐라고 불렀다'라고 하시며 이런
내용을 무시하실분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랑캐를 표현한 말치곤
꽤 듣기좋죠? 자기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민족을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 모르겠
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오랑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상할건 없습니다. 언제부터 이
(夷)가 오랑캐 즉 변방의 저급족속들이란 뜻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과거에 우
리가 아주강성했던 때가 있었고~ 그때 우리를 본 중국인들이 이렇게 쓰거라면...
잠열님은 이(夷)자가 그냥 인(人)자와 같다는게 요즘의 통설이라고 하시더군요~
오랑캐가 아닌 이의 위력을 실감하실수 있는 글한편을 올리죠.
한나라 유향(劉向)이 찬한 설원(說苑)이란 책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치고자 하니 이윤이 말하기를 "치지 마십시오,조
공의 양을 줄여 그의 거동을 보고 치십시오" 하였다. 걸왕이 노하여 구이의 군
사를 일으키니 이유이 말하기를 "정벌할 때가 아닙니다. 저쪽이 아직도 구이의
군사를 움직일수 있으니 이는 잘못이 우리에게 있음이로 소이다" 하매 탕임금이
마침내 걸임금께 사죄하고 다시 조공을 바치리라. 이듬해에 다시 조공을 바치지
않으니 걸왕이 구이의 군사를 동원하려 했으나 구이의 군사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윤은 "됐습니다. 치십시오" 하매 탕임금은 걸왕을 쳐서 남쪽으로 도망치게 하다
당시 구이(九夷)는 25사나 중국여러사서에서 우리를 표현하던 말이었습니다)
무력의 막강함을 입증하는 일화입니다. 구이의 군사가 움직이고 안움직이고에 따
라 죄있고 죄없음의 기준이 되었다 함은...구이가 상당히 어질고 강했다는걸로
이해해도 될꺼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현식님과 CYRENE 님의 글(갈무리 한것)을 모두 읽어 봤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땐 제가 반론을 하든 어떤 주장을 하든 많은
실수를 한것같군요~
현식님이 인용하신 하이텔 한국사동호회 이문영님의 글에 대한 생각
은 좀더 정리하고 생각한 후에 따로 올리겠습니다~
이번 종합장은 작은 것(논쟁이라고 해야하나?)들을 모은 것입니다~
정말 별 내용이 없더군요~
필요하다 싶은것만 정리했으니깐~ 혹 빠진거나 의문나는게 있다면
메일이나 여기에 올려주세요~ 그럼~ 시작합니다~
3번글~ 순규님 글에서의 문제점~ 에서입니다~
제가 김부식은 사대주의자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상고사를 제대로 서
술했을리가 없다~ 라고 했죠~
제가 김부식이라고 한것은 그시대의 사대주의자들을 말한것입니다~
그리고 김부식이 감수국사의 직책이었다고 하셨는데(현식님 께서~)
감수국사가 뭐하는 직책입니까?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정도 된다고
하셨는데 그정도면 자기가 보기에 이상하면 막을수 있는자리 아닐까
요? 아니라면 감수국사의 정확한 역활을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현식님은 현식님의 글을 똑바로 읽어보면 감수국사가 뭔지 있다고 하
셨지만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란 말씀밖에 안하셨습니다~
제가 이병도씨의 제가 이기백 교수의 글을 읽고(국어문제집에서~)기분
이 않좋았고~이기백씨를 식민사학자로 규정~ 그 이유가 이병도 씨에게
있다고 한말...거기에 대해서 이병도씨의 제자면 모두 식민사학자인가?
라고 하셨죠~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학자다운 고집(아집이라
고 하진 않겠습니다~ )에다가 이병도(자신의 스승이었죠~)에게 배운 것
들이 합쳐진다면 이기백 교수와 이병도 씨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 할까
요?
그리고 한단고기가 조작된 것이라고 하시면서 한단고기에 기록된 우리
나라의 인구는 얼마죠?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죠~
이것이 진실일까요? 물론 아니죠~ <==이렇게 단정하셨죠~
그리고 중국을 덮고 있던 우리상고사 라고 한 제 말에 고조선은 요동,
한반도 북부,만주에 걸쳐 있었다는게 현재의 통설이라고 하셨죠?
현식님은 제가 어떤 사실을 주장하는지 모르시는거 같군요~
한단고기가 옳다면(우리나라의 범위가 엄청나게 넓었고~ 과거 한웅천
황의 시대 환인천제의시대가 있었다면) 그런 인구는 무리가 아니죠~
그리고 그당시의 세계의 인구수를 지금 어떻게 아는지 궁금합니다~
(현식님은 그당시 세계의 인구수를 역사선생님께 질문하라고 하셨죠?)
전 현재의 통설에 대한 반론을 펴고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
겠습니다 ~ 한단고기를 통해서요~
그리고 조대기에 쓰여졌다는 남녀평등이나 부권(父權)은 근세에 쓰여진
말이라고 하셨죠? 이글은 비루기 님이 올려주셨던(역사자료방에) 글에
있는 글과 흡사하네요~ 어떤분께서 규원사화에 문화 라는 단어가 사용되
었다며 규원사화는 위서다~ 라고 주장하셨다죠~ ~
이 문화,남녀평등,부권 등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생각됩
니다. 어떻게 이런따위들이 반론의 근거가 될지 모르겠군요~ 우리조상들
은 한문으로 이루어진 단어를 만들어 내지 못한단 말씀입니까? 그럼 이런
단어들은 누가 만들었나요? 꼭 이미 사용되어진 단어만을 써야 한단말입
니까? 우리조상님들이 이런책에 COMPUTER 이란 단어를 쓰셨나요? 남녀평등
,부권,문화(규원사화에서 쓴 문화란 단어는 지금의 문화와는 틀리죠~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문치교화 란 말을 줄여서 쓴 단어라는걸 알수있습니다~
-고평석 스님-)같은 말들은 사용된 예가 없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만들어
낼수있는 단어 아닐까요? 판단은 여러분들께 맏기죠~
8번글중 ~
CYRENE님은 프로와 아마츄어의 차이를 말씀하시면서 현식님은 프로나 순규
님은 아마츄어다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뭐 당연한 말이죠~ (홧~! 내가 이
런 말을 만다꼬 하지?)
11번글에서 현식님은 사람이 살면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환웅천황의 시대는 흔적이 없다고 하셨죠~
이런걸 남들은 실증사학이라고 하죠~ 덩달아 저도 그러는건지는 모르겠습
니다만~ 땅을 파봐서 안나오면 믿을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경우가 생기죠~
만약 현식님의 고조할아버지의 묘가 홍수가 나서 흔적도 없게 되버렸다~
그럼 현식님의 고조할아버지는 없던분이셨나요?(현식님 고조할아버지껜
정말 죄송합니다~) ...실증사학... 뭔가 문제가 있는거 같습니다~ 안보이
면 없었다니...
참! 제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죠~ 수메르의 언어와 우리나라의 언어가 유
사점이 많다~(서양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그러니깐 현식님은 그건 국어학
자들 문제지 사학자들이 연구해야할 당위성이 없다고 하셨죠~
정말 없었을까요? 만약 수메르와 우리나라 언어가 같다면 이건 엄청난 문
제아닐까요? 한단고기에는 수메르가 우리나라 12한국의 한 연방이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의 증거가 될지도 모르죠~ 전 수메르인들의 언어체계
를 알자는게 아니라 수메르인들과 우리나라의 관계를 말씀드리는 것이었습
니다 . 그리고 제가 한단고기에 나타난 천문현상에 대한 말씀을 드렸죠~
그러니깐 생각중이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군요~
증산도 동호회에서 갈무리한 글몇편을 곧 올리죠~ 그리고 종합장은 계속 올
라갑니다~ 그럼~ 안녕히~
미루였습니다~
번호:30/54 토론자:INGUK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6 16:50 길이:10줄
안녕하십니꺼.
인극입니더.
지가예. 마산시립도서관 향토자료실에 우연히 갖다가 쭉 둘러보는 디
한단고기?[고 제목은 되어있는디 복사본이더라구용.
이상하다 싶어서 펼쳐보니 아니 이런 일본어로 된 번역본을 복사한 책이지 않겠습니
꺼.
그래서 잘살펴보니 1982년 일본에서 출판된 책이더라구? .
제가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한단고기하고 비교는 안해봤는디
대충보니까 비슷한것 같던데
혹시 우찌된 일인지 아시는 분은 설명 좀....
- 인극 -
제가 글을 쓸 때 이 정도는 알고 있겠지 하는 가정을 하고 글을 썼는
데, 미루님은 그렇지 못하네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동이에 대해서는 제가 몇가지만 여쭈어 보지요. 동이가 우리민족이라고
하셨는데, 사실은 우리 민족은 여러 동이족중에서 하나의 민족일 뿐입니
다. 예를 들어서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어째서 왜(倭)가 등장할까요? 왜인
들과 한민족이 같은 민족일까요? 말도 안되지요.
九夷도 역시 마찬가지이죠. 구이란 동방(중국의 동방)에 있던 아홉 이
족을 말합니다. 이 아홉 민족이 모두 한민족이란 가정은 좀 곤란하겠죠.
또한 설원이란 책에 나오는 구이 얘기(구이의 군사 움직이고 안 움직이
고)는 너무 한가지에만 집착하는 바람에 시야가 좁아진 것 같습니다. 바
로 "잘못이 우리에게 있음이로소이다" 라는 구절에 얽매여져 버린 것이
죠. 이유라는 인물이 말한 의도가 선악의 판단을 위해 구이의 군사동향에
신경쓴 것일까요? 아니지요. 선악의 구별이 아니라 군사적인 우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구이의 군사가 하의 걸왕을 따른다면, 은(상이라고도 하지
요)의 승산은 없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하나.. 걸왕이 실정을 하여 구이
가 그에 불만을 품어 걸왕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던 것이죠. 그제서야 이
유는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여 걸왕을 공격해 패배시킨 것입니다.
이제 몇가지를 인용해 가면서 얘기를 하지요.
(맨앞에 ##가 있는 것은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김부식이 감수국사의 직책이었다고 하셨는데(현식님 께서~)
##감수국사가 뭐하는 직책입니까?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정도 된다고
##하셨는데 그정도면 자기가 보기에 이상하면 막을수 있는자리 아닐까
##요? <하략>
감수국사는 국사를 편찬하는 관원들을 통괄하는 직책이죠. 미루님께서
아직 역사 편찬에 대해서 잘 모르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사관(임의로
붙인 말임)은 역사관을 뚜렷하게 가진 사람들입니다. 누가 뭐라고 한다고
해서 쉽게 붓을 고칠 사람들이 아니지요. 감수국사는 편찬하는데 주관을
할 뿐, 개개인의 서술방향까지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닙
니다. 다만, 왕명을 받들어 국사를 편찬하는 최고관직일 뿐이죠. 지금의
국사편찬위 위원장도 마찬가지죠. 長이라고 해서 위원들에게 이래라 저래
라 간섭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식님은 제가 어떤 사실을 주장하는지 모르시는거 같군요~
##한단고기가 옳다면(우리나라의 범위가 엄청나게 넓었고~ 과거 한웅천
##황의 시대 환인천제의시대가 있었다면) 그런 인구는 무리가 아니죠~
미루님의 주장이야 간단하죠. 환단고기의 내용이 진실이고, 거기에 나
오는 말은 무조건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얘기하는 것이죠.
세계의 인구를 어떻게 산출하느냐고요? 인류학, 고고학, 수학 등이 힘
을 합해서 인구를 산출해냅니다. 그 방법을 설명해 달라고는 하지 마세
요. 제가 미루님께 밥상을 차려줄 의무는 없어요. 먹을 것을 찾는 것은
미루님께서 하세요.
그리고 현재의 통설에 대한 반론이라... 제가 말한 것에 대한 반론의
근거는 환단고기가 대부분이로군요.
##그리고 조대기에 쓰여졌다는..<중략>..판단은 여러분들께 맏기죠~
"어떻게 이런따위들이 반론의 근거가 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씀하시는
데, 그 말은 제가 받아서 "환단고기 따위로 어떻게 반론이랍시고 말하느
냐?"라고 말할 수가 있겠네요.
미루님.. 그런 걸로 반론을 펴는 사람은 한 두 사람이 아니랍니다. 임
승국 교수님도 그에 대해서 논리적인 답변을 하지 못했어요. 이런게 어떻
게 반론의 근거가 되는지는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좀 잔인한 말이
지만, 미루님은 사료비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어요.
## 11번글에서...<중략>...없었다니...
실증사학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알아보라고 주문했는데도 전혀 알아보지
않았군요. 하긴, 보통 사람들이 식민사학과 실증사학을 혼동하고 있습니
다. 그래서 실증사학이라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제가 뭐
가 잘못되었냐고 여쭈어 보면 대부분이 "..뭔가 문제가 있다."라고 합니
다. 그리고 고조할아버지 묘를 예를 드셨는데, 환단고기에 나오는 우리
나라의 크기가 묘 정도밖에 안되나요? 예를 들더라도 좀 상대가 되는 걸
로 예를 드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크고 인구가 많았던 나라가 흔적도 없
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엄청난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인가요? 몇억의 인구
가 완전히 사라졌다? 엄청난 면적의 국토에서 흔적이 아무것도 없이 파괴
되었다?
가야를 아시겠죠. 면적은 경남의 반 정도, 멸망한지 1,500여년이나 되
는 나라의 흔적은 지금 곳곳에서 아주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
고조선, 그중에서 위만조선은 멸망한지 벌써 2,100여년이나 되는데도 아
직 그 유적은 요녕성, 북한 등에 걸쳐서 많이 나타나고 있죠? 그런데, 면
적이나 인구가 그와는 천지차이로 커다란, 엄청나게 큰 나라의 흔적은 모
두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 이상하다.. 어디로 사라졌지? 빙하때문에
모조리 부서졌나? 이것도 말이 안되지요? 빙하가 끝난 것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최초의 나라가 생기기 훨씬 이전이니까요. 그럼, 화산폭발? 아니
면, 땅이 완전히 뒤집혀서 땅속 깊이 묻혀버린걸까요?
그런 천재지변이 일어났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그러면 어째서 지질학
자들은 그런, 엄청난 지각변동이 있었다는 것을 아직 밝혀내지 못했을까
요? 이병도나 그의 제자에게 역사를 배워서? 지질학자가 우리 나라 사람
들뿐이라면 이런 말이 통하겠지요. 그럼, 외국인 지질학자들은 어째서 밝
혀내지 못하지요? 관심이 없어서? 아니면 이병도가 현몽해서 그런 것은
하지 말라고 했기에?
##참! 제가...<중략>...것이었습니다.
역사학자라고 해서 만능의 인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수메르 언어가 우
리 언어와 같다는 것을 언어학자가 밝혀내면 그것을 역사학자가 그것을
공부해서 하나의 사료로 삼으면 되는 것이죠. 그게 더 효과적입니다. 역
사를 연구하는 것도 엄청 어렵고 찾아서 연구해야 할 자료가 많은데 언어
까지 연구하라는 것인가요? 그러면 언어학자들은 굶어죽겠군요. 왜냐고
요? 자기들이 연구할 것을 역사학자들이 연구해 버리면 그 사람들은 할
일이 없으니, 일도 못하는 사람들이 밥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명
색이 학자라는 사람들이...
전보다는 많이 진보했군요. 글을 쓰는 방식도 나아졌고, 근거를 제시하
는 것도 그렇고요. 앞으로는 환단고기를 옹호하는 글을 쓸 때 다른 것을
좀더 많이 인용해서 글을 써 보세요.
마지막으로 역사는 역사지 종교가 아니라는 것과 환단고기를 성전처럼
맹목적으로 따를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석, 비판해서 그것이 가진 역사서
로서의 가치를 찾아보기를 권해 드립니다.
식 드림..
번호:32/54 토론자:HAIMOSOO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01 08:07 길이:8줄
안녕하세요?
인극님께서 보신 책은 1970년대 이후에 일본에서 환단고기 번역 붐이
일었을 때 번역되어 출판된 것으로 보이네요. 그것말고도 번역된 것이 여
러 종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유림옹이 필사시킨 것을 일인 학자가 일본어
로 번역해 일본에서 출판한 것인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지요. 그래서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번역을 해서 출판하였죠. 그후 80년대로 들어
와 국내에서도 이유립옹의 책을 번역해서 출판하여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미루입니다~
(흑~ 난 그동안 뭐 했을까? 좋은 멘트 하나 만들어내지 못하다니~)
정말 오랫만입니다~ (현식님 ~ 그리고 읽어주시는 많은 분들~)
할말이 많긴 한데요~ 우선은 약속드린데로~
증산도 동호회에 올려져 있는 글 몇편을 올리겠습이다~
그럼~ 안녕~
번호:34/54 토론자:KIM695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8 23:49 길이:333줄
[ 민족대학강좌 ] 규원사화에 대하여
제목: 일제의 한국사 왜곡 이유
번호 #1/3 전송인:정보 관리자 10.24 23:29 조회:3 Pg:1/8
일제의 한국사 왜곡 이유
이 상시
여러분들을 뵙게 되어서 감개가 무량합니다. 제가 약 1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TV나 사법연수원이나 변호사연수회에 가서 강연
을 했습니다만, 그 이후 강연을 중단했습니다. 왜냐 하면 작년부
터 시작해서 식민사학자들의 일부교수들이 전부 똘똘 뭉쳐서 저
의 논문을 신문에 게재해 주지않고, 또 한국일보 고문으로 있는
천 모씨가 MBC, KBS 등 여러 방송사에 연락해서 될 수 있으면 못
나가게 해달라고 하는 바람에 작년 개천절부터는 제가 TV에 못나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강단에 올라서는 것이 상당
히 오래된 것 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오늘 감개가 무량합니
다.
국내적으로는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민주화의 회오리 속에서
매일 데모와 여러 아우성들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돌이켜보건
데 일본의 소화(昭和)시대는 우리 민족을 침략하던 때였고, 또
일본이 마지막 발악을 하던 때였습니다. 63년이라는 지루한 소화
시대가 끝나고 일본은 가장 아름다운 용어를 써서, 다시 말하자
면 천지와 내외가 모두 평화를 이룩한다는 뜻으로 평성(平成)이
라는 용어를 가지고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이처럼
그 본성은 교활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아름다운 가면을 쓰고 지
금 새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들은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광복했지만, 유독히 44년이라는 반
세기가 지나도록 역사의 광복은 이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서 저는 법조계에 있었기에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제가 아는 힘을
다해서 역사광복에 이바지하려고 1984년부터 이 방면에 투신했지
만, 아직 한없이 외롭고 험난한 길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규원사화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제가 강의를 하고자 합
니다만, 이 규원사회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실로
규원사화에 대해 그것을 해석하고 거기에 대한 논평을 하자면
100시간을 가져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막연하게 규원사화
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붙이고 강연을 하려고 하니까, 무엇을 먼
저 해야 할지,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할지 분간이 안섭니다. 그러
나 이 짧은 시간동안만이라도 대충 규원사화가 차지하는 역사상
위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삼국유사와 관련해서, 우리나라 역사
학계는 해방 후에 삼국유사만 가지고 자꾸 들고 나섰습니다. 일
제는 1916년 대정(大定) 14년부터 1938년 소화(昭和) 13년 3월15
일까지 22년동안이라는 긴 세월을 통해서,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하든지 일본역사보다도 낮게 깎을 목적으로 대대적 역사왜곡 작
업을 합니다. 왜냐 하면 일본의 역사는 서기전 660년에 시작해서
금년까지 2649년이 되는데, 우리 역사 4322년과 비교하자니 1673
년이나 뒤지기 때문이었습니다.
1910년 8월 29일 강제합병이 되자마자 일본초대 총독 데라우
치 마다사끼 육군원수는 긴 칼을 차고 와서 조선총독부 내에 취
조국이라는 부서를 설치합니다. 그리하여 한국을 영구히 통치하
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가 자
기들의 역사보다도 2000년이나 더 오래 되었기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자기네의 역사보다 더 오래되면, 식민지가 오히려 거꾸로 되기
쉽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어떤 한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은
무력으로는 잘 되질 않습니다. 마음 속으로 순종하게 만들어야
통치하기가 쉬워집니다. 그렇게 하자면 일본민족의 조상은 한국
민족의 조상이었고, 일본과 조선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서 조
상도 같고 뿌리도 같다는 것을 부각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
본과 조선은 옛부터 '둘은 한 몸이다'라는 내선일체의 역사를 만
들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를 저희들보다 짧게 깎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 역사가 2649년이고 우리 역사는 4300년
이니까, 사실 큰일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삼국시
대 때부터 깎아내리면 자기네 역사보다 짧게 되겠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국 중 가장 먼저 일어난 나라는 신라
인데, 서기전 57년, 단기 2277년 갑자년이 신라의 시작입니다.
일본의 건국이 660년이니까 신라건국과는 713년이나 차이가 났습
니다. 당시 일제는 이 차이를 없애기 위해, 옛부터 내려오던 조
선 역사서는 전부 불태워 버리거나 일본으로 가져가 버렸습니다.
가져간 역사서는 지금 일본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말도 있으나,
그 근거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조선역사를 깎기 위해 단군의 역사를 신
화로 돌려 버렸습니다. 또 분명히 중국사적에 기록되어있는 기자
조선도, 중국기본사적에 실체가 기록되어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중국사람이 썼으니까 우리의 역사일 수는 없다는 이론을 폈습니
다. 즉 단군은 신화요, 기자는 전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혹 전
설이 아니라 하더라도 중국역사이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위만도
연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위만조선 87년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이
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국은 예로부터 세나라가 분립해
서 죽자 사자 싸움만 해 왔다고 하면서, 그 전에 한수이북은 위
만조선 이후 중국 한나라 무제가 4군을 설치했고, 이남은 일본의
신공황후가 정복해서 임나일본부라는 것을 설치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필연적으로 옛부터 외국의 식민지였
고, 분열된 나라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우리의 조상이 하나라
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했
습니다.
단군조선을 보통 고조선이라 하는데, 이 단군조선이 신화라
는 것을 문헌상 가장 적절하게 증명해 주는 것이 삼국유사입니
다. 삼국유사는 불가사서입니다. 스님이 쓴 것입니다. 내용을 살
펴 보면, '암곰이 화해서 여자가 되었는데 교미해서 낳은 것이
우리 조상이고, 그 조상이 1500년간 조선을 통치하다 죽었는데
그 나이가 1908세였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황당무계
한 내용입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서적이 동국사략(東國史
略),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세종실
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사찬요(東史纂要) 등으로 전부 단
군이 혼자 1048년동안 재위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일제는 바로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서적들만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그러
나 도가사서 내지 민족고유계통의 사서, 다시 말하면 단군을 47
대로 서술한 우리 민족고유계통의 사서들은 전부 불태워버렸습니
다.
이에 저는 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8년동안 돌아다니면서 많은 자료들
을 수집했고, 단군이 47대라는 것을 기초로 하여 책을 펴냈습니
다. 그것이 {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
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앞서 설명한 규원사화입니다.
이 규원사화는 여러가지로 면밀히 검토해 볼 때, 가장 합리적이
고 객관적이며 타당성이 있는 사서라고 생각합니다.
단군의 기원과 실존
그러면 이 규원사화가 왜 가장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타당
성이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개천절만 되면 단군 단
군 하는 소릴 자꾸 하는데, 4300년 전에는 한문이 없었습니다.
단군이란 말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삼국시대 이전에는
어떻게 불렀겠습니까? 이것은 규원사화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규
원사화 단군기를 보면, '박달임검지역야(朴達壬儉之譯也)'라 해
서, '단군이란 박달나라 임금을 번역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박달이라는 말은 옛부터 백달이나 배달로도 불렀습니다. 또 나라
의 우두머리는 임검이라 했습니다.
또 규원사화 단군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신씨이강어단목지하 이환검신인(神氏已降於檀木之下 而桓儉神人
)'이라 해서 그 뜻을 살펴보면, '신씨천황께서 이미 박달나
무 밑에 하강했고, 환검신인이 다시 단목 아래에서 임금의 자리
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단(檀)으로써 나라이름을 삼은 것이며, 단
군이란 단국의 임검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단군을 환검이
라고 했는데, 이 환검이 왕검이나 임검으로 변한 것입니다. 내용
중에 환검신인, 즉 단군이 박달나무 밑에서 인민들로부터 추대되
어 임검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자연히 박달이라는 것이 나라이름
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단군이라는 것은 박달나라의 임검이
라는 의미가 됩니다.
박달나라의 임검이란 뜻인 이 박달임검은 계속 불려져내려
왔습니다. 그러다가 약 2천년 후인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에 불교가 들어올 때를 전후해서 한문이 들어왔습니다. 그
때 사가들이 역사를 한문으로 서술하다 보니까, 박달임검을 박달
단(檀)자 임금군(君)자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그 때부터
단군으로 부르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한문이 들어오
기 전에는 단군이라는 용어는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병도씨
의 '단군이란 건 터무니없는 소리다'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었던
겁니다. 어떤 이는 단군을 탱구리에서 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
무런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바로 박달나라의 임검이란 뜻을 번역하다 보
니까 단군으로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문헌이 있습니다. 중국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보면, 세칭 낙랑단궁(樂浪
檀弓)이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낙랑단궁이라고 한 것은 활이 생
산되는 지명이 박달이기 때문에 단궁(檀弓)으로 불렀고, 또 나라
이름이 박달나무와 같기 때문에 이와 같이 유전되어 왔던 것입니
다.
단군, 단군임검 또는 단군왕검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박달나
라의 임검이라는 뜻을 가진 보통명사입니다. 시조단군 한 사람의
이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단군은
한 사람일 수 없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후손들도 모두 '박달나
라 임검'이라는 뜻으로 계속 단군이라고 불리어 왔습니다. 제왕
연대력이나 조선사례기 혹은 해동춘추 같은 책을 보면, 처음 국
호가 단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전에 규원사화에 대해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청중석에
농림부 장관 지냈던 분이 앉아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강연을 하
다가 도중에 중단하고, 갑자기 그 장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농림부 장관님,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강생들이 모두
깜짝 놀래서 농림부 장관을 쳐다 보았습니다. "농림부 장관께서
는 우리나라 농사를 주무하던 장관을 지내셨는데, 우리나라 농사
의 조상은 누구입니까?" 하니까, "그야 뭐 신농씨죠" 그럽니다.
"아니 신농씨는 중국농사의 조상이지 우리나라 농사의 조상은 아
닙니다. 우리나라 농사의 조상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장관님
의 고향은 어디입니까?"하고 물으니, 경상도 어디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또 질문했습니다. "시골에서 밭을 맨다거나 김을 맬 때
또는 모심기를 할 때 점심밥을 가져오면, 점심먹기 전에 뭐라고
합니까?"하니 "그야 고시례라 그러죠."
규원사화에 고시례(高矢禮)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단군
시대에 고시(高矢)씨가 백성들에게 씨를 뿌려서 거두는 법(농사
짓는 법)을 가르쳤도다. 고로 농부가 논두렁이나 밭두렁에서 점
심밥(들밥)을 대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한 숟가락을 떠서 "고시
례(高矢禮)"하고 외치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고시께서 우리 백
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신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한
뜻이다.' '농부(農夫)나 초부(樵夫)가 밥을 먹을 때에 고시례라
고 축언하는 것은 고시씨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1세 단군 때 8대 대신(大臣)이 있었는데, 이 중
농사를 관장한 사람이 고시씨입니다. 그 당시에는 물론 높을 고
(高)자, 살시(矢)자로 쓰지는 않았겠죠. 국문으로는 어떻게 불렀
는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 음이 한문으로 음역되어 고시(高
矢)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로 이 고시어른께 예를 올리기 위해
서 밥을 먹기 전에 고시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1세단군에게는 네명의 아들 부루, 부우, 부소, 부여가 있었
는데, 맞아들인 부루는 2세단군이 되었고, 제일 끝의 부여는 부
여나라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규원사화에 보면 '부시(부소가 부
시로 와전되었음)가 마른 쑥을 재료로 하여 쇠와 돌을 서로 맞부
딪쳐서 불을 만들고, 그 불로 산과 늪을 태우니, 이에 짐승과 벌
레가 멀리 도망하여 그 해가 점점 없어지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
습니다. 바로 우리가 부싯돌, 부시철, 부싯깃 하는 것은 모두 3
세 왕자인 부시의 공을 기리고자 하는 데 그 연원이 있는 것입니
다. 이렇게 민속에 관계된 여러 풍습들이 규원사화에 아주 많이
나옵니다. 이런 걸 본다면 단군에 관한 기록으로는 규원사화가
아주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군이라는 용어는 한문이 생기고 나서 생겼다는 것은 앞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용어는 위서(魏書)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는
데, 일연이 그것을 삼국유사에 다시 인용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우리 단군을 부인하는 근거는 '중국고대사적에 단군이라는 말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말이 안됩니다. 실제 삼국시대
때 한문이 들어와서 비로소 박달단(檀)자 임금군(君)로 번역되어
그것이 위서에 인용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여러 위서(魏收의
魏書, 三國志 魏書, 魏略 등)에는 단군이라는 말이 나오진 않습
니다. 그러나 단군이라는 기사나 기록이 중국측 고대사적에 보이
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단군이 역사상의 실존인물이 아니고 허
구의 날조된 인물이라고 단정하는 일제사학자들이 내세우는 그
같은 논리는, 우리 상고사를 올바르게 깊이 연구하여 보지도 않
고 오로지 단군사를 말살하는 데만 그 촛점을 맞추어 꾸며낸 얄
팍한 이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 앞서 말한 것처럼 일제사학
자들의 논법대로 한다면, 중국의 고대기본사적에 기록되지 않은
일본의 고대사도 모조리 삭제하여 버려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위서에 처음으로 단군이라는 말이 등재된 것은, 한자
로 이역되어 박달단(檀)자와 임금군(君)자를 합쳐서 단군이란 용
어가 만들어진 이후입니다. 그리고 이건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
사입니다. 그래서 1세단군 이후의 통치자들도 모두 단군이라고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단군이 혼자서 1000년간 통치했다고 와전
된 것입니다. 또 그 명칭에 있어서 신단실기(神檀實記)를 보면,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왕검이라는 말
은 잘못된 말입니다. 임검(壬儉)이 옳습니다. 이 왕(王)자와 임
(壬)자가 글씨모양이 비슷해서 임자가 왕자로 와전된 것입니다.
광복을 기다리는 우리 역사
그럼 {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
분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제가 28년동안 규원사화를 가지고 연구
해본 결과, 중국고대기본사적과 합치되는 부분 열군데를 발견했
습니다. 좀 딱딱한 얘기지만 규원사화에 보면, 제3세 임검 가륵
임검 때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때마침 하왕이 덕을 잃
어 신하들 중에서 몇몇이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임금의 자
리를 빼앗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다. 식달에게 남국과 진번의 백
성을 이끌고 이들을 치게 하니, 나라의 위엄은 크게 빛나게 되었
다(時夏王失德 其臣有謀逆者 乃使息達 率藍眞蕃之民 以征之於是
國威益彰).' 여기서 식달은 사람으로 요즘 말하면 국무총리 벼슬
에 있던 사람입니다. 또 단군조선은 나라를 아홉으로 나누어 다
스렸는데, 진번과 남국은 그 아홉나라 중 두 나라에 해당되는 나
라입니다. 위 대목에 보면 그 당시 중국임금의 이름은 나오지 않
습니다.
그런데 위 내용과 부합되는 중국측 사서가 있습니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보면, '하나라 임검 태강이 덕을 잃어 이인(夷人:동
이인, 즉 조선사람)이 비로소 배반하기 시작했다(夏后氏 太康失
德 夷人始畔)'라는 내용이 있고, 그 주(註)에 '태강 예에게
쫓겨 났다'고 되어있습니다. 하왕 태강이 그 신하 예에게 추방당
한 연대가 표준세계년표에 의하면 '태강 19년 신해(辛亥,서기전
2170년)'이므로, 이 연대를 우리 가륵(嘉勒)임검의 즉위년대수를
기준으로 하여 우리측 기년(紀年)으로 환산하여 보면 가륵임검
37년 신해(단기 164년)에 해당하므로 위 사실은 대략 이 무렵에
일어난 것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두 내용이 부합된다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군데 다 얘기하자면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 이 내용은 환단고기에도 약간 나오는 내용입니다.
15세 벌음(伐音)단군 때의 기사를 보면, '때마침 하왕이 사신을
보내와 도와줄 것을 요청하여 말량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게 하여 구해 주었다. 그 후 또다시 하왕이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임금이 그 무도함을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았다(時夏王遣使請援
乃末良 興兵進救 後夏王復請兵 儉以其無道却而不許)'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 중국측 사서 여러 군데를
찾아본 즉, 서기전 77년에서 서기전 6년에 살았던 유향(劉向)이
라는 분이 쓴 설원(說苑) 제13권 권모편(權謀篇)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위 벌음(伐音)과 같은 시기에 재위하였던 하왕
계(癸) 52년 갑오(甲午,서기전 1767년)에 '탕이 하왕 걸을 토벌
하려고 하므로, 걸왕이 노하여 조선의 군사[九夷之師]를 일으켜
서(조선 군사의 힘을 빌어서) 탕을 토벌하니, 탕이 이에 걸왕에
게 사죄하였다(湯慾伐桀 桀怒起九夷之師 以伐之 湯乃謝罪)'라고
되어있고, 그 다음해인 53년 을미(乙未,서기전 1766년)에는 '탕
이 걸왕에게 조공을 하지 아니하므로 걸이 다시 조선의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구이가 군사를 일으켜 주지 아니하므로 마
침내 탕이 군사를 일으켜서 걸왕을 토벌하여 남소(南巢)로 추방
하였다(湯不貢 桀起九夷之師 九夷不起 湯乃興師伐之 遷桀南巢)'
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 기사는 바로 앞서 말한 규원사화의 벌
음임검의 기사내용을 뒷바침해주는 것입니다. 위 사실을 우리측
기년(紀年)으로 환산하여 보면, 벌음임검 5년 갑오(甲午,단기
567년)와 6년 을미(乙未,단기 568년)의 2년에 걸쳐서 일어난 사
실임이 뚜렷하다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하나만 더 예를 들겠습니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동
이가 '드디어 옥문에 찾아와서 음악과 춤을 바쳤다(遂賓於王門
獻其樂舞)'라고 되어있고,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는 하나라 16
세임검 발(發)의 기사 가운데 '원년(서기전 1837년)에 제이
(諸夷:단군의 여러 제후들)가 하왕문에 와서 춤을 추고 들어왔다
(帝發元年 諸夷 賓于王門 諸夷入舞)'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규원사화의 단군기의 13세 흘달(屹達)단군 때(단기
491-534년, 서기전 1843-1800년)의 기록을 보면 ' ,이 때에 하
나라가 이미 그 덕이 쇠약해지므로, 임검께서 사람을 보내어 그
정치하는 것을 보게 하고, 또 무악을 보내서 시험하게 하였다
( ,時夏德旣衰 使人往觀其政 又送舞樂而 試之)'라는 대목이 있
습니다. 위의 중국측 사서와 내용이 맞아 떨어짐을 알 수가 있습
니다.
이 외 일곱군데가 더 있지만, 오늘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제 책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이라는 책에 위 내용
들이 다 나옵니다. 이 책이 나온 다음에 이병도씨를 위시하여 이
기백, 천관우, 이기동씨 등은 이상시 변호사가 사학자도 아니면
서 이런 내용의 책을 낸 데 대해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모양입니
다. 그래서 그 책 내용을 반박할 사람이 없느냐 하고 상의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규원사화는 근세에 조작된 위서라는 데 초점
을 맞춰서 논문을 쓰기로 결론내렸습니다. 그런데 대표격으로 쓰
려는 사람이 없다가, 경남대학교 조인성이라는 교수가 2월부터
논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논문은 규원사화를 지지하는 학자
들을 통해서,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김모, 신모, 박모, 정
신문화연구원 정모, 경북대학교 강모 등의 사람들이 저에게 보내
왔습니다. 저는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고, 즉시 반대의 글을 실었
습니다. 변호사 회지에서 시작해서 국회동우회지, 한배달 등 여
섯군데에 반박글을 썼습니다. 또 모 교수가 그 반박글을 자기 학
보에 싣겠다고 가지고 갔고, 모 강사는 '국학'이라는 잡지에 싣
겠다고 가지고 가서 총 여덟군데에 이 글이 났습니다.
그 후 저는 규원사화가 위서라는 글을 게재한 한국일보에 위
서가 아니라는 저의 글을 게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글은 절대로 게재해주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얼마뒤
주간조선에서 조인성 교수와 이상시 변호사가 규원사화를 가지고
격론을 벌이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역사광복을 위해 감정적으로만 소리높여 외쳐
부르는 우를 재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역사광복이라 할 때, 우
리의 고대사가 가장 왜곡이 심하고 또 연구와 정리가 잘 안되어
있는 까닭에, 오늘 단군과 관련된 문제를 가지고 같이 살펴본 것
입니다. 이런 문제를 무엇보다도 먼저 정리했을 때, 우리는 변화
하고있는 새로운 세계의 질서에 능동적이고도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통일을 비롯한 민족 내부의 여러가지 문제
들도 해결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강의를 마치겠습니
다. 감사합니다.
◆ 약 력
고려대 법학과 졸업,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법무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현 변호사
저 서
표준동양삼국 역사도표, 단군실사에 대한 문헌고증
논 문
국사교과서 개편시안에 대한 관견,
규원사화 위서론에 대한 종합적 논평,
개정국사교과서 논평 외
그럼 우리 역사적인 상황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대략 말
씀드리고, 거기에 담겨져 있는 사상이 어떠한 것이냐 하는 것을 말씀드리
기 위해, 먼저 사사 을 담고 있는 여러가지 역사적인 문제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릴까 합니다.
우선 중국적인 사대사관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가 엄청나게 변조되었다
는 것은 서두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만, 근간에 나온 일본학자 오향청언(吾
鄕淸彦)씨가 쓴 책을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어요.
"사마천의 '사기'(史記) 25권은 단군조선이 중원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
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조선을 지배한 것
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의 漢이라는 국
호 자체도 옛날 3한조선의 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간 것에 불과하다"
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 사가 대충 어느정도 변조가 되었느야하
는 것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을 겁니다.
한사군(漢四郡)문제만 보더라도 있지도 않았던 한사군을 평양에, 그것도
세 군 데나 되는 평양 중에서 대동강의 평양만 있었다 하고 위만(衛滿)
이 조선을 지배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본사람들이 "보아라. 너희 조선
족은 역사의 시초부터 중 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느냐. 너희는 항상 피지배
민족이었지 언제 독립국가였느냐" 고 하면서 우리나라를 영원히 자기네 속
국으로 만들기 위한, 당위론을 제시하는 전 략이었다 하는 사실을 똑똑히
인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고조선의 역사사실을 단군의 실존 여부
와 함께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얘기가 되겠습니다만, 우선
단군 이전에 환웅천황(桓雄天皇)의 역사시대가 18대 1565년 간이나 있었
고 또 그 이전에 환인천제(桓因天帝)시대가 7대 3301년이 있어서, 금년까
지 9183년이라하는 것이 '삼성기 '(三聖紀)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그렇
다면 '삼성기'의 문헌사적 고증이 문제가 되겠습니다만, 이 책을 쓴 안함
로(安含老)는 신라시대 600년경 사람인데 '삼국유사'가 나온 것이 1200~1
400년경이니까, 그보다 배이상 더 먼저 기록된 것이고 이러 한 '삼성기'의
기록을 그대로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나라 역사의 연조는 9000년이 넘는다
하겠습니다.
그럼 9000년이란 역사를 반증적으로 어떻게 인정을 하느냐, 그러한 문헌
하나만 단편적으로 보고 이것을 어떻게 외국학자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하
느냐 하는 게 문 제가 되겠죠. 그런데 이것이 합리화될 수 있는 외국학자
들이 논문이 나와 있어요.
몇년전에 일본에 와서 발표한 소련의 여류 민족학자 R.S.M자리가시노바 씨
는 "한반 도에는 구석기시대에 인류가 살았고 신석기 시대 초에 이미 독자
적인 고도의 문화 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신석기 초가 약 10,000~
12,000년 전이라고 한다면, 이 때 이미 우리 동이족들은 주변국가들이 따
라오지 못하는 수준높은 독자적인 문 화를 가지고 있었다 하는 것을, 우리
와 적대관계에 있는 공산국가의 학자가 발표했 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또 하나 있죠. 역시 공산국가인 중공의 유명한 고고학자 당란(당란)이,
1977.7. 14 자 중공 '광명일보'를 통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산동반도 지
역에서 한강 이남 의 한반도 넓이만한 광대한 지역에 이르는 대문구문명
권(大汶口文明圈)을 발견했는데, 이 곳을 발굴하니까 문자가 나오고 그 곳
을 통치한 소호씨(少昊氏)란 통치자 이름까지 나왔으며, 이것을 최신 과학
적인 방법인 방사선탄소 측정을 해 보니까 지금으로부터 5785년 전 것" 이
라고 합니다. 5785년 전이라고 하면 단군 건국 보다 약 1500년 전 일입 니
다. 그 당시 이미 산동반도에는 문자를 사용한 고도의 문화국가 가 있 었
는데, 그 통치자인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가 동이라는 사실은 중국고전
에 전부 다 나오는 것이예요.
'고사변'(古史辯)만 보더라도, 이 책은 우리가 쓴 책이 아니고 중국에서
나온 책 입니다. 백화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면 "소호씨는 동이계
야(東夷系也),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나와요. 뿐만 아니라 태호 복
희씨(太호伏犧氏), 여와씨(女蝸氏), 소호금천씨가 전부 동이족이라는 것
을, 중국사람 자기네 손에 의해 밝힌 겁니다. 또 며칠 전에 조선일보에 한
번 나온 적이 있죠. 요령성에서 5000년 전의 여신묘가 발굴됐는데 이 묘는
무덤이 아니라 사당이예요. 그리고 궁터도 발굴했다는데 새로운 소식이
아니고 앞서 말씀 드린 당란이 그 때 발표한 것은, 이보다 700년이나 더
앞선 그 이전의 것이예요.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가지 사실을 놓고 볼 때, '삼성기'의 기록이 객관
성이 있고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면, 더 이상 무
슨 반증이 필요하겠 습니까?
그런데 소호가 다스린 나라의 서울은 요동반도에 있고, 산동반도까지 다
시 말해 서 발해만 안쪽의 그 광활한 지역을, 단군 이전에 벌써 통치하였
다는 기록도 있는 데, 5000년 전의 거대한 궁터가 발굴되었다면 이는 부족
시대 미개사회에서는 도저 히 불가능한 일이죠. 강력한 정치세력권이 존재
하지 않았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중국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이 주(周)나라 이전은 다 신화시대로
몰아붙 였지만 은허에서 갑골문이 발굴된 이래, 또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 를 볼 때 요(堯), 순(舜), 하(夏), 은(殷) 등의 역사를 인정안
할 수 없고, 신농 씨(神農 氏), 황제(黃帝)를 신화적 인물에서 역사적 인
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놓여있는 실정이나, '시전'(詩傳) '
서전'(書傳) '맹자'(孟子)를 보면 다 나 와요. 그 가운데 정문으로 적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문헌을 볼 때에는 상당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식
자우환이 라고, 조금 안다는 학자들이 그 시대의 변천과 상황에 따라 그리
고 자신의 이해관 계에 따라, 신화니 비과학적이니 한고 엄연한 역사사실
을 그릇되게 호도한다는 것 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는 청동기가 있습니다. 지금 고고학자들이
역사를 보 는 시야는 걸핏하면 청동기를 가지고 자(尺)질을 하는데, 즉 청
동기 개시년도에 따 라 한 국가의 역사시대가 결정된다는 얘기인데, 현재
사학계에서 얼마를 잡고 있느 냐 하면 우리나라의 청동기의 상한을 3000년
밖에 안보고 있죠. 그러니까 3000년 이 전에는 국가라는게 있을 수가 없다
그런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한강이남에서 우리 학자들이 발굴해 낸 게, 30
00년 이상 소급을 못하니까 그렇게 얘기하죠.
그렇다면 단군조선의 근거지는 도대체 어딥니까? 백두산 아래 아사달입
니다. 아 사달은 그럼 어디냐? 바로 지금의 하얼삔인데, 그 지역을 발굴하
고 있는 북한의 학 자나 소련 학자들이 발표하는 내용을 한번 들어 봅시
다.
지난 78년 8.14 자 북한 '중앙통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우리 조선족이
청동기 를 사용한 것은 서기전 2000년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
이다. 그때 농가 의 유적도 발굴했고 농기구와 오곡씨앗까지 발굴했다."
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소련 학계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히 한국학을 연구하고 있
는데, 거 기에서 발간한 유 엠 푸진이 쓴 '고조선'이란 책을 보면 "조선족
은 4000년전부터 청동기를 사용했다. 단군왕검이 있던 유적지도 발굴했고
단군조선시대 중앙 행정기 관의 유적지도 발굴했다" 고 했습니다.
이렇듯 국내의 여러 문헌뿐 만 아니라 국외 의 학자들이 연구하고 발굴
해서 우리 의 역사상한을, 그리고 단군조선의 건국사실을 고고학적으로 입
증해 주는데도, 우 리가 여기 앉아서 휴전선 이북을 못 가본다고 해 서,
가서 발굴을 못해 보았다고 해서, 우리의 청동기가 3000년 이상 소급할 수
없 다고 우기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죠.
우리가 일찌기 남북 50000리 동서 20000리라고 하는 광활한 지역을, 한
웅천황시 대가 1565년 간 단군조선 시대가 2096년 간 지속되면서 통치했다
는 역사적인 사실 은 예사로이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한웅천황시대까지는 그만두고라도, 단군조선시대만 해도 2096
년 간 지 속되었다 하는 것은 동서양 역사를 통틀어서, 아니 인류역사가
생긴이래 1개의 왕 조가 2000년간 지속된 그러한 역사는, 아무리 눈을 씻
고 찾아봐도 이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것이 가능하였던가를 말씀드리기 전에, 우리와 국경을 같
이 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죠. 하 은 주는 동이족이니까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이후로 300 이상 지속한 왕조가 단 하나도 없습니
다.
그렇다면 도대체, 같은 시대의 중국 역대왕조는 300년도 채 못가 전부
망해버렸 는데, 같은 시대의 우리나라는 2000년 이라는 긴 역사를 간직한
채 그 넓은 지역을 어떻게 통치할 수 있었느냐, 해답은 간단합니다. 그것
은 위대한 철학이 있었기 때 문에 가능한 겁니다. 위대한 철학, 그 철학은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이죠.
우리나라 교육법 제 1조에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교육하라고 되어 있습니
다. 지난 번 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한 지방 강연에서, 대한민국 교육
법 제 1조가 뭐냐 고 하니까 대답하는 사람이 없어요. 서글픈 일입니다.
3~40년간 교직에 있으면서 교육이념이 무엇인지, 홍익인간이란 용어가 어
디서 나왔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 하는 것쯤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홍익인간이란 용어는 삼국유사에 최초로 등장하죠. 환
인이 환 웅을 불러놓고 삼위산과 태백 그 일대가 홍익인간할 수 있는 곳
이니 너희가 가서 다스리라 하면서, 무리 3000명과 통치자의 신표로 천부
삼인(天鵬뀁)을 주어서 보 냈다고 '삼국유사' 첫머리에 나옵니다. 이렇
듯 홍익인간이란 용어의 출처는 환인으 로부터 나온 겁니다.
그런데 요사이 툭하면 단군을 팔고 다니는 사람들이 단군의 홍익인간을
떠들어대 지만, 실은 환인으로부터 홍익인간이 나와서 환웅 이후 단군이
계승하고 오늘날 대 한민국이 이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예요. 그래서 교육
법 제 1조 가 홍익인간입니다.
법 얘기가 나왔으니 우리나라 헌법 전문을 살펴볼까요? 제일 먼저 "유구
한 민족 빛나는 문화 그리고..."로 시작은 잘했는데 맨 끝이 좋지 않
아요. 1980년이 뭡 니 까? 이건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 1980년 밖에 안
되었다는 얘 깁니다. 자유중국 헌법에도 서기를 쓰지 않고 중화민국 75년
이라고 쓰며 기독교 목사인 유태인도 연 하장을 보내는데 서기를 쓰지 않
고 이스라엘 년도 5700년 이렇 게 쓰는데 우리 나라 는 왜, 국통이 없습니
까? 1980년이 왜 들어갑니까?
또 한가지, "3 1 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해 놓았는데
기미년의 선언서를 보면 년도가 어떻게 되어있습니까? 조선건국 4252년,
이렇게 되어 있습니 다. 그 조선은 바로 단군조선이지 딴 조선이 아닙니
다. 그런데도 헌법 전문 맨 끝 에는 1980년이니, 앞뒤가 안맞아도 한참 안
맞는 얘기죠.
본론으로 돌아와서 홍익인간의 역사적 배경은 아까 말씀드렸으니 그 다
음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흔히 말하기 쉽게 풀어서 '사람을 크게
이롭게 함'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 당시 인간이란 개념이 오늘날의 인간이
란 개념하고 동일하였겠느 냐 하는 것도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라고 봅니
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사람을 크게 이롭게 할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거 죠. 그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조화경(造化經), 교화경(敎化經), 치
화경(治化經), 이 삼화개천경(三化思想 開天經)이 바로 홍익인간의 구체적
인 내용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조화경을 '천부경'(天符經), 교화경을 '삼
일신고'(三一神誥)라 하며 치화경을 '참전계경'(參佺戒經)이라고 하는데
이 3대경서가 그 기본입니다.
우리나라 10000년 역사의 뿌리가 곧 이 3대경전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이
존재할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국에서 말하는 소위 유교사상 도교사
상이 파생되어 나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반증을 제시할까요? '맹자'에 나오는 유교의 5륜은 아무리
유교에서 썼다고 해도, 미국에서 국어로 쓰는 영어가 미어가 아닌 영어이
듯, 그 출처는 동이 족입니다. 말씀드리죠. 순(舜)임금이 글(契)을 불러
가지고 사도(司徒:문교장관)를 명하고 인간에게 윤리를 가르치라고 해서
글이 만든 게 바로 5륜입니다. 글은 동이 족이에요. 그리고 순임금도 '맹
자'에 보면 "저풍(諸馮)에서 태어나 부하(負夏)땅에 옮겨 살다가 명조에서
죽었는데 그는 동이족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륜을 선 포한 글(契)
이나 오륜을 선포케 명령한 임금 순 역시 동이족입니다. 따라서 오륜의 출
처는 동이문화입니다.
공자는 어떤가요. 동이족의 혈통으로 은나라 왕족인 송미자(宋微子)의
후손인데, 현재 홍콩대학의 임혜상교수나 대만대학의 서량지 교수도 "은나
라는 동이족이다"하 였고 '고사변'에도 같은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또 공
자 자신도 '논어'에서 말하기 를 "술이부작"(術而不作)이라 하여 "나는 요
와 순의 사상을 계승해서 서술했을 뿐 이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고 밝
혔고 중국의 고전 '초사'(楚사)를 보면 "황제( 黃帝)는 백민(白民)에서 태
어나고... 그는 동이족에 속한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황제의 5세손인 요
임금이 동이족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동이족인 요와 순임금의 사상은 동이사상이고, 이를 계승한 역시
동이계 인 공자의 유교가, 우리의 홍익인간 사상에서 파생되지 않았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도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자(老子)가 황제의 사상을 이어 받았다
고 해서 황노지교(黃老之敎)라고 하는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동이족인 황제
의 사상, 즉 동이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 노자의 도교이고 보면, 비록 중국
대륙에 오래 머물러 있는 동안 다소 변질되어 고구려시대 때 역수입되어
들어 왔다고 해도 역시 그 뿌리는 우리의 홍익인간사상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사상은 또 어떤가 살펴보기로 하죠. 석가 이전에 우리나라
의 전불 시대(前佛時代)에 대해서는 아도화상의 비문과 '삼국유사' 그리고
지공선사(指空禪 師)의 천보산 희암사 중수문에 다 나와 있습니다. 석가
자신도 '대방광불화엄경'보 살 주척품에서 말하기를, "해동 금강산에 법
기(法起)라는 보살이 있어서 1200대중 을 거느리고 법을 설하고 있는데 그
불법이 거기에 예로부터 있었다(從昔己來)"고 증언하고 있으니, 이는 석가
출현 이전에 우리나라에 이미 전불시대 즉 가섭불(迦 舌佛)시대가 있었다
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가섭불이 앉아 법을 설한 연좌 석(宴坐
石)이 신라의 월성 동편 용궁 남쪽에 있었다고하는 기록이 '옥룡집'(玉龍
集)과 '자장전'(慈藏傳)에 있어요.
기독교 사상에 대해서는, 먼저 이 말씀부터 드려야 되겠습니다. 4700년
전에 나 온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편을 보면 동이족이 살고 있는
이 지역 즉 "동방 은 이 지구가 형성될 때 최초로 문화가 발생한 곳(東方
之域天地之所始生也)"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구상
문화의 최초 원산지는 동이족이 살고 있는 동방지역이라는 거죠.
기독교의 한 단면만 말씀드리자면 법률학자인 동경대학의 나까다(中田
薰)교수가 '고전법에 근거한 문화동원론고(文化東源論考)'에서 말하기를,
모세의 5경의 출처 를 조사해보니까 함무라비 법전속에서 나왔다고 했습니
다. 모세는 기원전 1280년 사람인데, 기독교가 오늘날 왜 위력이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생사를 같이 했던 모세같은 대민족주의자가
있었기 때문이죠.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3 1 운동의 유명한 비변절자의 한 분
인 만해 한용운스님을 뭐라고 했느냐하 면, "조선의 한용운은 인도의 타골
과 간디 두 사람 을 합친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시를 잘 쓰니까 타골이고
민족주의자니까 간디라는 거죠.
우리는 무엇을 하던 간에 민족을 염두에 생각하는 정도가 어떠냐에 따라
서, 진정 한 애국주의자냐 민족주의자냐를 가지고 그 사람의 인격을 가늠
해야 된다고 생각합 니다. 우리 주변에 정치가도 많고 위대한 사람도 많지
만, 도대체 남의 나라 사상, 남의 나라 종교를 가져다가 어떻게 민족주의
를 하고 이 나라 이 민족을 살리겠다는 겁니까?
나까다 교수는, 모세하고 함무라비 사이에 500년의 연조가 있지만 모세
의 5경은 함무라비 법전을 계승한 것이고, 이는 또 수메르법에서 나왔다하
는 이런 얘기에요. 그럼 수메르의 역사시초가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인
데, 남은 과제는 수메르족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영국학자 크래머(Kraemer1897)와 일본의 우에노(上野景福)교수가 발표한
것을 종 합해보면, "수메르족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자생한 민족이 절대 아
니고 동방에서 이 동해왔다. 그것도 문자를 가지고 왔는데 바로 태호복희
가 쓰던 팔괘부호(八卦符號) 와 흡사한 문자를 가지고 5500년 전에 서쪽으
로 옮겨 왔다"는 것입니다. 복희와, 수메르에서 최초로 우르(Ur)국을 건설
한 왕조나 최초의 수메르 메소포타미아에 문 화국을 건설한 엔릴(Enril)영
웅이나 거의 같은 시대에요. 그러니까 5500년 전 복 희문화를 가지고 동
방, 동이족이 서쪽으로 갔다는 얘기가 됩니다.
무엇이 그것을 입증하는가? 수메르 말이 우리말하고 같은 것이 많이 있
다는 게 최근 미국에서 연구가 돼 있어요. 뿐만 아니라 수메르라는 말 자
체가, 곧 소머리 다 이런 얘기입니 다. 소머리이기 때문에 송화강이 우수
하(우수하), 음만 그대로 따면 속말수라 해 요. 소머리강이다 이거죠.
뿐만 아니라 '삼일신고' 신훈(神訓)에 나오는 "신(神)은 재무상일위(在
無上一位) 하사 유대덕대혜대력(有大德大慧大力)하사 생천(生天)하시며 주
무수세계(主無數世 界)하시고..." 하는 것이 바로 완벽한 기독교의 일신사
상 그대로 입니다. 또 '참전 계경' 총론에 보면 "여화신이 흙으로 사람 형
상을 만들고 혼을 불어 넣어 7일 만에 이루어 마쳤다.(女禍鍊造成而注之魂
七日而成)"하는 것은 기독교 창세기 2장 7절하 고 꼭 같습니다. 여호아와
여와, 야희와 여희등은 음도 같고 행적도 같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이나 수두제단에 치외법권지대가 있다는 내용, 그리고 동
지에 양을 잡아 붉은 피를 문설주에 바른다는 구약의 기록은 우리나라에서
동지에 붉은 팥죽 을 끓여 문설주에 바르고 하는 것과 같은 내용이에요.
그러한 풍속들이 여기서 건 너가 전해 내려온 거죠.
서양사상을 종합하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즉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둘인데 소 급해 올라가면 이 두가지 사상이, 수메르 문화에서 나왔다는 결
론이 내려집니다. 이러한 신본과 인본사상은 우리의 신인사상이 둘로 나뉘
어 진 것이지요. 이렇듯 지 구상 모든 사상의 뿌리가 동방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빛은 동방에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세계적으로 보아서 900
0년이 되는 역사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서양 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수
메르족이 5500년 밖에 안됐는데...
이런 역사가 없죠. 물론 제 4빙하기 이전의 역사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몇억년 전의 유물이 지금 발굴된다고 해도 그건 지금 우리 인류하고는 관
련지을 수 없죠. 제 4빙하기가 이 지구를 휩쓸고 간 뒤에 살아 남았던 우
리의 아담과 이브 설화는 "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 최초에 천하(天河)
의 동서에 있다가 칠월칠석날 만나 가지고 오색인종을 낳았다"는 것이고,
이것이 '신사기'의 기록을 보면 366갑자에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한 갑자
가 60년이니까 즉 21960년 전에 제 4빙하기가 물러가고 제일 생명력이 강
한 한 남성과 여인, 나반이와 아만이 즉 나반이와 아만이가 인 류의 시초
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럼 이러한 판도에서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 "동방지역은 천지지
소시생야 라" 우리동방 동이족이 살고 있는 땅은 이 지구가 형 성될 때 최
초의 문화가 발생 된 곳이다 하는 것이 여실히 실증이 된다 하겠습니다.
또 '황제내경' 소문편에 보 면 "침술도 역시 동방으로부터 전해 왔다 (폄
石亦從東方 來)" 라고 했듯이 한의학 이라는 것도 우리나라에서 비롯된 거
죠. 그래서 요새 한의학 의 한자를 "漢"에서 " 韓"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진작 바꿨 어야 했어요.
한문이라는 글자도 마찬가지에요. 자꾸 이렇게 한문(漢文)이라고 쓰 니
까 중국 글이라고 생 각하는데, 중국이 漢나라라는 국호를 정할때 이 한문
이 있었 기 때문 에 정한 것이 지, 없었다면 어떻게 漢나라라는 국호가 생
깁니까? 그러니까 한나라 가 있기 전에, 이미 이 글자 한문이 있었다는 얘
기입니다.
지금 이 지구상 모든 사상의 원천은 홍익인간 사상입니다. 그 홍익인간
사상의 내용은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화
경, 교화경, 치 화경이 이 원리 속에서 나오는 거죠.
그래서 게오르규(Gheorghiu 1916~ 루마니아)가 "홍익인간이란 단군의 통
치이념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법률이며 가장 완전한 법률"이라고
지난 1986년 4월 18 일자 프랑스의 유력한 주간지 '라프레스 프랑세스'지
를 통해 발표한 겁니다. 신부 옷을 입고 성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이 왜 모
세의 10계가 최고라고 말하지 않고 이 런 말을 했겠습니까?
또 그는 우리나라에 왔다 가면서 "한국민족이 낳은 홍익인간사상은 미래
21세기 의 태평양시대를 주도할 세계의 지도사상이다"고 역설했습니다. 그
이상 얼마나 평 가를 내리겠습니까?
우리는 등하불명이라고, 지금 주걱 들고 주걱을 찾고 있습니다. 칸트,
헤겔을 찾고 독일철학 어쩌니 하고 아까운 시간만 다 허비하고 있으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 는 이 보배는 왜 하나도 개발 못하고 있느냐 이겁니다.
서양 사람들이 먼저 눈을 뜨고 "미래의 세계를 지배할 보배, 최고의 이념
이 여기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홍익인간사상이다"고 하는데 우리 자
신은 그걸 모르고 외국사상 속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 방황하고 앉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을 불러다가 자문이나 하고 있 으니 이 얼마나 답답
하고 한심한 노릇입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상들은 실로 홍익인
간 사상 속에 내재해있는 것이지, 결코 홍익인간사상하고 대립된 사상이
아니다. 가령 구체 적으로 예를 들자면 유교나 불교 독교라는 것은 홍익
인간 사상과 대립적인 존재 가 아니고, 홍익인간사상의 내재적인 사상이
다." 하는 것을 거듭 말씀드리고 끝마칠까 합니다.
김지훈 (1987A )
단군조선시대의 천문현상의 과학적검증 05/15 19:07 368 line
단군조선 시대의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박창범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라대일 (표준연구원 천문대)
가.머릿말
현존하는 단군조선 시대의 역사가 시대순으로 기록된 대표적 사서를
드라면 발해시대 대야발(大野勃)편찬하고 황조복(皇祚福)이 증간한 단
기고사(檀奇古史)와 고려시대 행촌 이암(李癌)이 쓴 한단고기(한檀古
記)의 단군세기(檀君世紀)편을 꼽을 수 있다. 물론 이 사서들의 출원
이나 전래경로, 그리고 그 내용의 후대 첨삭정도가 확인되지 않는 상
황에서 이에 수록된 내용을 그대로 사실로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최소한 사서에 수록된 내용이 단군조선 시대의 기록이라는
금석학적인 증거가 확보된다거나, 그 내용이 국내외 다른 역사기록들
과 엄밀히 비교, 확인되지 않는 한 이들이 기성사학계에 신빙성 있는
사료로서 인정되기는 힘든 실정이다. 이러한 경우 사서의 사실성은 어
떤 절대적 기준에 의거하여 검?ぜ링?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금석학적인 입증법 이상으로 신빙성있게 사료내용
의 충실도를 알아보는 방법이 바로 천문현상을 통한 과학적 검?ぜ많疫?
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였다. 천문현상은 무릴법칙을 따라 일어나며, 이
들은 과학적 계산에 의하여 정확히 재연될 수 있다. 천체의 움직임
은 내용의 단순, 명확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 과학적 계산을 통해서
그 진위를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관적이거나 후세 절삭왜
곡될 가능성이 큰 다른 역사적 사건들과 중요한 차이를 갖는다. 또한
역사가 변조되었을 경우 천문 현상기록은 하나의 시간표로서 역사적
사건의 올바른 시기를 찾는데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
동아시아 제국들은 천체현상이 지상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는 주술적
믿음하에 전속 천문관으로 하여금 천체운행에 간한 많은 기록을 남기
게 하였다. 이들의 사서에는 방대한 양의 천문현상기록들, 특히 일식
과 행성운행의 특이사건 기록들이 나타난다.단군세기와 단기고사에는
단군조선시대에 일어난 천문현상에 관련된 기록이 12회 수록되어 있
다. 우리는 이들 기록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기록상에 나타난 모든 천
체의 움직임을 BC2333년까지 역추적하여, 실제 일어난 자연 현상과 두
사서에 나타난 기록들을 과학적으로 비교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 사
서들의 기록이 진실된 것인지, 또는 후대에 임의로 조작된 것인지를
과학적 확률계산을 통하여 알아 보고자 한다. 이 논문의 구성은 다음
고 같다. (나)절에서는 먼저 이 12회의 천문현상 기록을 정리하고,
(다)절에서 각 천문현상을 유형별로 기록과 계산을 비교한다. 마지막
(라)절에서 이 과학적검증의 결과를 토의해 보았다.
나.천문현상 자료
단군시대의 기록이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는 상고사서로는 앞서 언급
한 단군세기와 단기고사 이외에 조선시대 숙종 2년 (AD1675)에 북애
(北崖)가 저술한 규원사화(揆園史話)가 있다. 그러나 규원사화는 다른
두 사서보다 내용이 적고, 역대 임금의 재위 기간이 다르며, 천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으므로 본 연구에서 제외하였다. 규원사화
와 한단고기의 삼성기편에는 단군조선 이전의 상고사가 기록되어 있으
나 천문현상에 관한 내용이 없으므로 역시 연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에 나오는 천문현상기록은 세가지로 분류된다. 그
중 일식현상 기록이 10번으로 가장 많고, 5행성의 결집이 한번 그리고
강한 조수현상 기록이 한번 나온다. 표 1에 이들 관측 내용과 해당 문
헌을 정리하였다. 단군조선 시대의 서력 연대는 임승국 번역 한단고기
의 연대표를 참조하였고, 기자조선 시대는 1세 서여(西余)기자가 25에
단군인 솔나(率那) 39년(BC1112)에 건국하였으므로 (단기고사) 이때로
부터 각 기자의 재위기간을 빼어 연대를 계산하였다. 이들 기록에 의
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일식 기록은 BC2183 부루(扶婁) 단제 때에 나온
다. 중국 주(주)나라 시기에 처음 기록된 일식이 BC776이므로 이는 상
당히 이른 기록이라 하겠다(渡邊敏夫 1962). 한편 이들 사서에는 "두
해가 함께 나타났다 (兩日竝出)" 라든가 "흰태양이 무지개를 뚫었다(
白日貫虹)" 등의 기록들이 있으나 그 의미가 분명치 않으므로 차후에
연구하고자 한다. 이런 기록은 모두 4번 나오는데 이들을 합친 16개
천문현상관측 기록의 시간에 따른 분포를 보면 그림 1과 같다. 전반적
으로 후기로 갈수록 관측기록 수가 증가하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보이
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볼 수 있는 천체 관측기록 수의 변화와 한가지
다른 점은 삼국기록에는 천문현상기록 수가 각국의 멸망시기 근처에서
현저히 감소하는 반면, 단군조선시기의 기록은 이런 추세를 보이지 않
는다는 것이다. 물론 단군조선시기의 기록 수가 매우 적어 통계적 비
교는 할 수 없다. 그림 1에서 한 구간의 크기는 550년인데, 이는 근사
적으로 삼국의 정립시기를 통틀은 기간에 해 占 일식 세기,고사
7 35세 단군 사벌 8년 4월(BC765) 사월 일식 고사
8 19세 기자 1년 봄 (BC579) 일식 고사(기자)
9 39세 단군 두흘 21년8월(BC525) 팔월 일식 고사
10 44세 단군 구물 3년 2월(BC423) 이월 일식 고사
11 47세 단군 고열가 48년10월(BC248) 십월역일 일식 세기
12 36세 기자 인한 35년(BC241) 일식 고사(기자)
표 1에 보인 바와 같이 BC1733년 흘달(屹達) 단제 50년 五星娶婁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오성은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 등 육안 관
측이 가능한 5개 행성들일 것이고, 루는 24수 중의 하나로 그 主星은
양자리의 베타별 (? Aries)이다 (이은성 1978). ? Aries는 1993년 현
재 적도좌표계 상에서 (적경,적위) = ( 1h 54m 15s, 20?46` 27") 위치
에 있으며, BC1733년 경에는 지구의 세차운동과 이 별의 특이운동을
고려하면 (22h 41m 51s, 0?0` 38" ) 위치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
다.
먼저 오행성들의 결집 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BC1733년을 중심으로
150년에 걸쳐 다섯 행성 간의 평균 거리의 변화를 계산하였다. 이 계
산에서 행성 위치의 최대 오차는 약 3"이고 일반적으로 0.5" 이내의
값을 갖는다(Meeus 1991). 이러한 오차는 행성결집을 알아보는 목적에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양이다. 평균거리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구했
다.
D = ?( ? d(i,j)?/10 ).......(1)
i≠j
여기에서 d(i,j)는 i행성과 j행성 사이의 각거리(angular distance)
이며, 분모는 5개 행성간의 각거리가 모두 10개 (일반적으로 n(n-1)/2
개) 있기 때문이다. D는 행성의 결집에 매우 민감한 변수량이다. 그림
2는 D의 변화를 150년간 보인 것이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오행성이
약 20년의 주기로 서로 근접함을 알 수 있다. 이는 공전주기가
11.8622년과 29.4577년 (Allen 1976) 으로 가장 긴 목성과 토성이 약
19.9년마다 만나기 때문이다. 결집 지속기간을 결정하는 것은 반대로
공전주기가 가장 ?갉?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성과 금성으로 하늘에서
각속도가 하루에 1°~ 2° 정도이므로 5행성은 20일 이상 한곳에 모여
있지 못한다.
그림 2에서 150년간 5행성이 서로 가장 가까이 모인 시기는 BC1734년
7월 13일 초저녁으로 이때 D값은 10.26도이다.(이 시각은 지구 역학시
로 실제의 셰계시와는 이 당시 몇 시간 차이가 나지만 일식 계산이 아
닌 경우에는 중요하지 않으므로 그대로 사용한다.) 이때 일몰 직후 태
양으로부터 금성, 목성, 토성, 수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생달 등이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나 장관을 이룬다. 그러나 이날 오행성의 평균
적경은 7h 29m 으로 婁星 위치가 아니라 이로부터 130도 가량 떨어진
長星, 즉 바다뱀 자리에 위치한다. 그러나 다섯행성이 10도 이내에 모
이는 매우 드문 현상이 기록과 1년 차이로 실존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이 기록이 실제로 단군조선때의 옛기록에 근거하여 쓰여
졌다면 (예로서 대야발에 의하여), 결집현상 자체는 와전될 여지가 별
로 없으나 결집위치에 대하여는 BC1700년대 단군조선인들이 사용하던
별자리를 2500년 정도의 시간이 경과한 후대의 별자리와 연결시키는데
에 잘못이 있었을 가능서이 높다. 그것은 발해시대 사람들이 지구의
세차운동에 의한 별자리 이동과 양자리 베타별의 특이 운동을 알았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림 2에서 BC1734년의 결집과 바로 인접한 행
성 결집주기에서 가장 행성들이 가까이 모이는 때는 BC1716년 1월 30
일인데, 이 경우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좌우에 갈리게 되어 5행성
들이 결집한 것으로 관측되지 않는다. 한편 BC2000년에서 BC1450년까
지 550년간에 걸쳐서 5행성 위치를 계산한 결과 5행성이 이보다 더 가
까이 모인 경우는 BC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 있었다 (D =2.3).
따라서 이들 사서에 나온 5행성 결집에 관한 기록년(BC1733)이 완전
무작위로 선택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BC1734년의 5행성 결집현상보다
같거나 더 강한 결집이, 이 현상보다 기록에 같거나 더 가까운 시기에
우연히 있게 될 확률은 2*2/550=0.007이다. 여기에서 첫번째 2는 기록
년 전후로 1년을 고려한 것이고, 둘째 2는 기록년 1년 전에 실존했던
BC1734년의 결집보다 5행성이 모인 정도가 같거나 더 강한 경우가 두
번 있기 때문이다(BC1734년과 BC1853년의 결집).
이 확률은 전 세계의 모든 국가 중에 하나를 임의로 선택했을 대 그
것이 한국일 확룰에 비유될 수 있는 작은 값이다.
2. 조수현상
두 사서 모두 29세 단군 마휴 9년(BC935)에 "南海潮水退三尺" 이라는
기록을 보인다. 조수면의 변화는 달과 태양의 조석력에 의하여 일어나
므로 이 기록은 천체운동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 지구가 받는 조석력
은 달과 태양의 중력에 의하여 지구중심이 받는 힘과 지구표면이 받는
힘의 차이에 기인한다. 예로서 조석력이 최대가 되는 삭(朔)이나 망
(望)에서의 조석력은 다음과 같이 주어진다(최승언 1992).
이식에서 G는 중력상수, Re,Rs,Rm 는 지구와 태양과 달의 반경, Ms와
Mm은 태양과 달의 질량이다. 즉 조석력은 태양과 달의 하늘에서의 위
치와 지구로부터의 거리에 의해 결정되는데, 조석력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달의 위치와 거리가 불규칙하게 변하므로, 삭이나 망에서 조석
력의 값이 항상 다르게 된다. 또한 조수면의 실제 높이는 지형과 일기
(풍향, 풍속, 강우 등)에 영향을 받는다. 그림 3은 1992년과 1993년에
걸치는 기간동안 식 2를 써서 계산한 조석력과 교통부 수로국에서 제
공한 인천만에서의조수면 최저치 (역서 1992-1993 )와의 관계를 보인
것이다. 여기서 조석력은 CGS 단위로 구한 값에 적당한 상수를 곱했
다. 조석력이 최대가 되는 시각보다 조수면이 최고 또는 최저가 되는
시각이 뒤에 있데 되는데 대체로 이삼일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이 그
림은 조석력에 거의 정비례하여 조수최저면이 낮아짐을 보인다. 특히
조석력이 강할 수록 조수위값이 적은 분산을 보여 더욱 강한 상관관계
를 갖는다. 따라서 식 2의 결과로 우리는 조수면의 최저수위를 추정할
수 있다.
그림 4는 BC935년을 중심으로 200년에 걸친 기간동안 조석력의 변화
를 보인 것이다. (편의 상 조석력이 188이상인 강한 조석력만 그림에
나타내었다). BC935년에는 이렇다 할 강한 조수현상이 없으나 4년 후
인 BC931년 11월 22일 조사된 200년 기간동안에 가장 강한 조석력이
지구에 미쳐졌다. 그 다음으로 강한 조석력은 BC975년과 BC913년에 있
었다. 그림 3에 의하면 조수위는 주어진 조수력에 대하여 상당한 분산
을 보이므로 그림 4에 보인 조석력들은 비슷한 정도의 조수간만의 차
를 야기시킬 것이다. 그러나 문헌기록에서 4년 떨어진 해에 200년 기
간 중 가장 강한 조수현상이 있었음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 기
록이 전혀 근거없이 임의의 시기를 선택한 경우, BC931년에 지구에 미
친 조수력과 같거나 더 강한 조석력이 발생한 때가 기록이 있는 해로
부터 우연히 4년 이내에 있을 확률은 1*8/200=0.04이다.
3. 일식현상
어느 한 일식을 지구상의 모든 곳에서 볼 수는 없다. 따라서 한 나라
에서 기록한 여러 일식경로를 알면 그 나라의 위치까지도 추정할 수
있다. 즉 기록된 모든 일식들에 대하여 일식을 최대로 잘 볼 수 있는
최적 위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삼구깃대의 기록처럼 많은 일식 기록이
단기간에 수록되어 있고 연대가 정확한 경우 개개의 일식의 진위를 모
두 가릴 수 있어 위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단군시대의 경우
연대가 분정확하기 때문에 일식기록의 효용이 크게 떨어진다. 그 이유
는 부분일식을 포함한 모든 관측가능한 일식의 수가 한반도와 만주,
중국,몽고에 걸치는 지역에서 평균적으로 약 1.4년에 한번씩 볼 수 있
기 때문이다. 즉 한개의 기록에 대응하는 실제로 일어난 일식들이 너
무 많아 문헌의 연대를 정학하게 현대력으로 변환할 수 있지 않으며
그 진위를 파악하지 힘들다. 단군시대에는 문헌의 연대 자체에 오차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므로 기록과 사실과의 비교가 어렵게 된다.
전 세계적으로 일식을 일년에 두번 이상 다섯번 이하 일어난다. 이중
에서 단군시대인들이 관측했을 법한 일식을 추리기 위해 아래와 같은
선별작업을 먼저 하였다. 즉 1960년에서부터 1992년까지 최근에 일어
난 모든 일식들에 대하여 두개의 변수를 각 일식에 다음과 같이 대응
시켰다. 첫째는 일식이 최대로 진행되고 있을 때 한반도에서 본 태양
의 고도 (A), 둘째는 지구중심에서부터 달그림자 중심까지의 거리를
지구반경으로 나눈 값(γ)이다. 그림 5는 개개의 일식을 이 두 변수공
간에서 보인 것인데, 만약 어느 일식이 한반도와 만주와 중국 등지에
서 부분일식으로나마 관측가능하면 O표로, 전혀 그렇지 않으면 X표로,
일부 지역에서만 볼 수 있으면 표로 표시하였다. 관측 가능성은 책
력(Astronomical Almanac 1960-1992) 에 나온 달그림자 위치로부터 경
정하였다. 단군 조선의 수도 위치를 정확히 안다면 그 위치에서 관측
할 수 있는 일식의 변수공간이 크게 줄어들지만, 단군조선의 위치에
대한 일치된 견해가 없으므로 여기에서는 만주와 중국 주위의 광범위
한 지역을 모두 고려하였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동아시아에서 관측
가능한 일식이 (A,γ) 공간상에서 잘 정의됨을 아 수 있다. 따라서 어
떤 일식의 (A,γ) 값이 그림에서 보인 곡선내에 들어가면 관측이 되었
을 가능성있다고 판단하여 기록과 비교하는데에 사용하였다. 이렇게
선별된 일식들도 상당수이어서 단군조선조에 모두 1500개 이상이나 된
다. 일식은 매우 분명한 자연현상이지만,앞서 연구한 오행성 결집이
나 강한 조수현상보다도 훨씬 빈번히 일어나는 단점이 있다.수도위치의
불확실성도 일식기록의 효용성을 떨어 뜨린다.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에는 일식기록이 BC2183년을 시작으로 BC241년까
지 모두 10번 나온다. 이 중에는 일식이 일어난 달이나 계절이 함께
기록되어 있는 것들이 있으나, 일단 일식 연도만 고려하면 5개가 실제
현상과 결부된다. 표 2에 일식기록이 있는 해에 실제로 일어난 일식들
을 비교하였다. 일식계산을 Meeus(1991)의 해와 달의 위치 계산 공식
을 응용하여 수행하였다. 비고한에서 문선상의 일식일과 결부된 실제
일식일이 양력과 음력이 갖는 시간차 정도가 있을 경우 이들이 달까지
일치한다고 표시하였다. 나머지 다섯기록이 나오는 해당년에는 동아시
아에서 관측할 수 있는 일식이 없었다. BC2183년과 BC5133년과 BC241
년의 일식들에 대해서는 그 해로부터 가장 가까운 시기에 실현되었던
일식을 기입하였다. 10개 기록 중 5개의 연도가 일치하는 것은 확률적
으로 무작위 과정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10개의 일식기록이 임의의 연
대에 배정되었을 경우, 그 연도가 일식이 실존한 연도와 우연히 일치
하는 횟수의 기대값은 동아시아에서 볼 수 있는 일식이 1.4년에 한번
있으므로 (1/1.4)*10=7.1 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기대값은 모든 부분
일식까지 포함하고 중국에서 북만주와 몽고에 걸치는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일식을 다 포함하므로 과장된 값이다. 한반도, 만주, 북부
중국 등으로 관측영역을 줄이고,관측된 최대 식분이 0.3이상인 일식
만 고려하면, 이러한 일식은 3년에 한번 일어나고 10회 기록 중 실제와
우연히 일치하는 일식 횟수의 기대값은 10/3 = 3.3 이다.단군시대 일식
기록의 실현율은 표 1과 2의 서력환산을 받아들인다면 2/8=0.25인데
(연도만 있는 경우 제외), 渡邊敏夫(1962)의 일식 기록표로부터 계산
한 BC54년 이래의 삼국시대 일식기록의 실현율이 0.77이고, AD628년부
터 나오는 일본 일식기록의 실현율이 0.44인 것과 비교가 된다. 한편
BC935년의 썰물기록연구에서 강한 조석력이 4년후에 실제로 있었음이
앞의 조수현상 연구에서 밝혀졌다. 그런데 BC935년 이후에 나오는 두
일식 기록의 해당년(BC918,BC837)에는 실제 일어난 일식이 없었지만 4
년 후에는 각각 대응시킬 수 있는 일식이 실존하였다. 이 두 일식기록
의 연도를 이렇게 4년 후로 수정한다면연도 적중률은 7/10 = 0.7로 높아
지고, 따라서 앞서의 연구결과는 일식자료와 잘 어울리는 관계에 있
다.
표 2. 문헌에 기록된 일식시기와 실제 일어난 일식과의 비교
(실제 일식시기는 줄리안력은 따른다.)
문헌상의 일식일 비교된 실제 일식 비고
BC2183 BC2181년 8월 30일 ?
BC1533년 여름 BC1536년 7월 11일 ?
BC 918년 7월 BC 914년 8월 3일 4년후
BC 837년 3월 BC 833년 3월 13일 4년후
BC 765년 4월 BC 765년 2월 10일 일
BC 23년2월 BC 423년 3월 10일 달일치
BC 248년 10월 BC 248년 4월 24일 연도일치
BC 241년 BC 237년 9월 16일 ?
표 2에 수록된 실제 일어났던 일식들에 대하여, 일식 진행 경로를
조사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림 6은 연도가 일치하는 5개의
일식과 bc833년 일식들을 보인 것이다. 일식 진행 계산에 필요한 이론
은 Meeus(1991)을 참조하였고, 계산 결과는 BC1500년 이후의 일식도
(즉 달의 은그림자 경로)를 보인 영국의 Stephenson과 Houlden(1986)
의 계산, 그리고 BC800년 이후 일식도를 계산한 度邊敏夫(1962)의 결
과와 매우 잘 일치하였다. 그림에서 실선들은 굵기 순으로 최대 일식
분이 0.9, 0.7, 0.5, 0.3인 곳이고, 그림자처럼 점을 찍은 곳(BC248
더하면 지방 표준시가 된다. (물론 서울의 경도는 동경 127도 이므로
8시간 28분을 더해야 지방시가 된다.) 그림 6에서 BC765년과 BC579년
의 일식은 관응 〈 지역이 서쪽으로 치우쳐 있어 기록연대의 오차
로 인해 잘못 선택된 듯하다. 한편 BC525년과 BC248년의 일식은 한반
도와 만주, 중국 북부에 달의 은그림자가 드리워져 인상적인 경우이
다. 만약 단군조선의 수도를 안다면 기록과 대응하는 일식 수가 크게
줄어 비교가 한결 수월할 것이다. 단군조선 시대의 천문 현상기록이
지금의 하르빈 근처에서 이루어졌다고 가정하고, 눈으로 일식을 분명
히 느낄 수 있는 식분이 0.7 이상인 일식만 고려해보자. 계산에 의하
면 하르빈의 위도에서 이러한 일식은 9년에 한번 일어난다. 따라서 10
번의 기록이 임의의 연대에 있을 경우 식분이 0.7 이상인 일식의 기대
치는 1/9*10 = 1.1 음 현상을 더 따른다고 할 수
있다.
라. 토의
이상에서 단군조선의 역사기록에 나타난 3가지 유형의 천체관련 기
록 12개를 과학적 계산을 통해 사실성을 조사했다. 먼저 10회로 가장
만이 있는 일식 기록은 기록연대가 불하???실한 점, 단군조선 수도 위
치가 불확실한 점, 일식이 빈번히 일어나는 점 등으로 인해 실제 일식
과의 비교가 매우 어려웠다. 일식 계산과 비교한 결과 10개 기록 중 5
개 일식이 실제 일식과 같은 연도에 있으며, 이 가운데 2개는 달의 온
그림자가 만주, 북중국, 한반도에 드리워지는 일식이다. 그러나 이 연
도 일치율은 무작위로 일식 연도를 기입한 경우에 비해 높지 않다. 일
식현상과는 달리 5행성의 결집은 매우 드문 현상이다. 이것은 토성과
목성의 궤도 주기 때문에 20년에 한번꼴로 결집 기회가 주어질 뿐만
아니라 이때 다른 세 행성이 토성과 목성의 위치에 있어야 하기 때문
이다. 5행성들의 위치를 기록년인 BC1733년 근처에서 계산한 결과, 1
년 전인 BC1734년에 다섯행성이 약 10도 이내에 모임이 밝혀졌다. 오
행성이 이보다 더 가까이 모인 경우는 BC1733년을 중심으로 550년에
걸쳐 한번 있었다(BC1953년). 따라서 오행성의 결집을 사서에 임의로
기입했을 때 이런 정도의 일치를 보일 확률은 0.7%에 불과하다.
조수 간만의 수위는 일식이나 5행성 결집과 같은 분명한 자연 현상과
달리 그 차이를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정확히 측정하였을지는 의심스
럽다. 그러나 해와 함께 조석력을 일으키는 중요 요인인 달이 불규칙
한 궤도운동을 하므로 조수 간만의 차이는 항상 다르게 마련이다. 큰
썰물이 기록된 BC935년을 중심으로 해와 달의 계산하여 지구에
미친 조석력을 200년간 계산한 결과 4년 후인 BC931년에 가장 강한 조
석력이 발생되었다. 썰물기록도 사서에 임의로 삽입되었다고 가정할
가장 큰 실제 썰물과 이 정도로 일치될 확률은 4%이다.
이상의 연구에서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에 수록된 12개의 단군시대 천문
현상 기록 중에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흘달(屹達) 단제 50년(BC1733)의
5행성이 모인 현상 기록이다. 비록 문헌에 "聚婁"라고 했고, BC1734년의
결집이 婁星에 이루어 지지는 않지만. 그 시기 전후 수백년간에 다섯
행성이 가장 강하게 모인 때가 바로 1년 전임을 우연으로 보기는 힘들다.
두 사서의 내용 중의 일부는 후대에 추가되고 윤색되었음이 분명한 것도
있으나. 자연 현상기록들은 변조될 여지가 별로 없으므로 단군시대 연구에
자연현상 기록들을 더욱 활용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大野勃, 단기고사, 고동영 역, 1986, 한뿌리, 서울
渡邊敏夫, 일식월식 옥전, 1962, 웅산각, 동경
北崖, 규원사화, 고동영 역, 1986, 한뿌리, 서울
李癌, 한단고기의 단군세기편, 임승국 역, 1991, 정신세계사, 서울
李殷晟, 한국의 책력, 1978, 전파과학사, 서울
최승언, 천문학의 이해, 1992, 서울대학교 출판부, 서울
한국표준과학 연구원 천문대, 역서, 1992-1993, 서울
Allen, C.W., Astrophysical Quantitites, 1976, The Athlone Press,
London
The Astronomical Almanac, 1960-1993, 미국
Meeus, J., 1991, Astronomical Algorithme, Willmann-Bell, 미국
Stephenson, F. R., Houlden
*************************************************************
생각보다 훨씬 늦게나 올리게 되는 군요. 이 논문이 박선생님께서
올리신 논문중에서 단군조선시대의 천문현상 기록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에는 여기 올린 표 1,2와 그림 1 외에 그림 2~6까지가 있습니
다만 올릴 수가 없는 것들이기에 빠졌습니다. 본문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인데 안타깝군요. 그러나 다행히도 이해에 본질은
아니므로 큰 문제는 없을 듯 합니다. 다만 두번째 논문인 삼국사기에
실린 천문현상에 관한 고찰은 이 논문처럼 단지 기록의 진위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지정학적 고찰까지 하고 있어서 지도의
도움이 무척 클텐데....어떤 식으로 올려야 될지 모르게습니다.
또한 아직 제가 얻지도 못했고요...
하여간 우선 이것으로라도 갈증을 축이시기 바람니다.
그럼.....
설대 천문 92
白狼 후니였으...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조선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성
사학계로부터 위서라는 '누명'을 쓰고 버려져 왔던 상고사 서적들에 대한
복권 작업이 젊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관심을 끌고 있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표준연구원천문대의 라대일 박사는 학계에서 방치
해 왔던 상고사 서적들의 내용을 천문과학적인 방법른으로 검증한 결과 상
당부분이 당시의 실제 상황과 일치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학계
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지난 2월부터 8월까지 약 6개월에 걸쳐 진행된
이들의 연구는 상고사 서적들에 나타난 당시의 천문 현상 기록을 당시의
실제 천문 현상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를 확
보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서적은, 단군조선 시대에 대한
풍부한 역사기록과 함께 당시의 천문현상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는
<단기고사>와 <한단고기>에 들어 있는 <단군세기>이다.
<단기고사>는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여기저기 흩어
져 있는 사서와 옛 비문, 현장답사 등 13년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엮은
단군조선사이다. 제1세 단군왕검으로부터 47대 단군까지 약 2천여년의 역사
를 역대 임금의 재위 기간과 주요사건을 중심으로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
이책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름만 전해 오던 것을, 구한말의 한학자인
유응두가 중국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행촌 이암이란 선비가 저술한 단군조선 시대 역
사서로, <단기고사>의 서술 내용과 큰 줄기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
------- 오행성 결집. 큰 썰물 현상 모두 "사실" -----------
이서적들은 최근세에 들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 일부내용이
과장돼 있다는 이유로 기성 사학계로부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왔다. 그
러나 재야사학계에서는 이런 주장이야 말로 일제 식민 사학의 테두리를 벗
어나지 못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박해 왔다. 재야 사학계는, 일제 때
단군조선 말살운동에 앞장섰던 일인 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조선
의고대사 관련사료는 <삼국사기> <삼국유사>밖에 없다. 그밖의 사서는
사서가 아니라 위서다."라고 주장한 것을 기성 사학계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해온 것. 조선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한 소국의 역사로 개
악하고자 했던 일인 학자들에게, 적어도 고대조선이 대륙을 사이에 두고
중국 민족과 자웅을 겨뤘던 고대 강국이었다고 묘사하고 잇는 이들 상고사
서적들은 눈에가시일 수 밖에 없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단기고사>와 <단군세기>에는
일식현상에대한 기록이 모두 10군데, 목성,화성,토성,금성,수성 등 육안으
로 보이는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 결집 현상'이 한군데,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 한군데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천체 현상은 물
리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전개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특정 시점의
행성들 위치를 알면 슈퍼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이 행성들의 과거와 미
래의 위치를 파악는 일이 가능하다.
연구 결과, 이 사서들이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무작위적으로 날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것은 오행성 결집 현상에 대한 기록
이었다. <단기고사>나 <단군세기> 가록에 따르면, 제 13세 단군인 홀달제
50년, 즉 BC 1733년에 다섯개의 별이 서로 한군데에 모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돼 있다. 즉 '戊辰五十年 五星聚婁'라는 한줄의 글귀로, 무진 50
년에 다섯개 별이 婁星 근처에 모였다는 뜻이다. 박교수팀은 기록에 나타
난 BC 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백50년 사이에 오행성의 결집이 일어난
시점을 샅샅이 조사했다. 조사 결과는 처음에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BC 1733년으로부터 바로 1년 전인 BC 1734년에 매우 뚜렷한
형태로 오행성이 서로 아주 가까워져 있는 현상이 발견 된 것이다. 이 해
7월 13일 초저녁 다섯개의 별은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었다. 이 날은 왼 쪽 하늘에 초승달이 비스듬하게 떠 있어, 별빛이 한
층 더 찬란하게 빛났었다. BC 1733년 을 기점으로하여 5백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오행성이 이보다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80년 전인 BC
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밖에 없었다. 박교수는 "기록 연수보다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약 3천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간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 라고 말했다.
만약 후대의 누군가가 이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해넣었을 경우, 이것이 서
로 맞아 떨어질 확률은 박교수의 계산 결과 0.007%, 즉 "세계 모든 나라
중 임의 한 국가를 지목했을 때 그것이 대한민국일 가능성" 에 비유될
정도로 매우 희박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오행성 결집현상과 함께 박교수팀이 주목한 것은 큰 썰물에 대한 기록.
두 사서 모두 '제 29세 마휴단제 9년(BC935) 때 '南海潮水退三倜'라 하여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 있다. 오행성에 대한 조
사와 마찬가지로, BC935년을 기점으로 전후 2백년 간에 나타난 조석력의
작용을 조사해본 결과, 기록에 나타난 해로부터 4년후인 BC931년 11월 22
일에 이 기간중 가장 큰 조석력이 작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기록과 정확
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전후 2백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4년후
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잇는 대목이라고 박교수는 지적했다. 마
찬가지로 후대의 누군가가 작위로 이기록을 써넣었을 가능성은 0.04%에 지
나지 않았다.
┌────────────────────────────────┐
│ 단군 조선 시대의 천문현상 기록 │
├─────────────────┬────────┬─────┤
│ 시 기 │ 기 록 내 용 │ 문헌 │
├─────────────────┼────────┼─────┤
│BC 2183 2세 단군 부루 58년 │日蝕 │세기,고사 │
├─────────────────┼────────┼─────┤
│BC 1733 13세 단군 홀달 50년 │五星聚婁 │세기,고사 │
├─────────────────┼────────┼─────┤
│BC 1533 17세 단군 여을 20년 여름 │日蝕 │고사 │
├─────────────────┼────────┼─────┤
│BC 935 29세 단군 마휴 9년 │南海潮水退三倜 │세기,고사 │
├─────────────────┼────────┼─────┤
│BC 918 6세 기자 2년 7월 │七月 日蝕 │고사(기자)│
├─────────────────┼────────┼─────┤
│BC 837 32세 단군 추밀 13년 3월 │三月 日蝕 │세기,고사 │
├─────────────────┼────────┼─────┤
│BC 765 35세 단군 사벌 8년 4월 │四月 日蝕 │고사 │
├─────────────────┼────────┼─────┤
│BC 579 19세 기자 1년 봄 │日蝕 │고사(기자)│
├─────────────────┼────────┼─────┤
│BC 423 44세 단군 구물 3년 2월 │二月 日蝕 │고사 │
├─────────────────┼────────┼─────┤
│BC 248 47세 단군 고열가 48년10월 │十月朔日 日蝕 │세기 │
├─────────────────┼────────┼─────┤
│BC 241 36세 기자 인한 35년 │日蝕 │고사(기자)│
└─────────────────┴────────┴─────┘
박교수팀이 처음 연구에 착수할 당시 가장 크게 기대했던 것은 일식 현상
에 대한 기록이다. 일식 현상은 그것을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때문에, 일식 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단군조선
기에 실제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일식 현상이 약 1천5백회 이상으로 추산
되는 데 비해 기록은 10개 밖에 안돼 의미있는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웠다
고 한다. 다만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 기록이 주나라 때인 BC
776년인 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제2세 부루단제 때인 BC 2183년 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어 중국 기록보다 적어도 1천4백여 년이나 앞선다
는 점, 그리고 10여 개의 일식 기록 중 다섯 개의 기록이 실제 현상과 일
치하고, 그중 두개는 해뿐 아니라 달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박교수는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 박교수팀이 결론은, 이 사서들이 그동안 일인 학자들이나
국내 기성 사학계에서 주장한 것처럼,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전적으로 날
조된 것만는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은 왜곡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인하기도 어렵지만, 천문현상은 윤색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사서들의 상당 부분은 단군조선 당시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라고 박교수는 말했다.
------기성 사학계도 연구 결과 인정-------
박교수팀의 연구는 그동안 이들 사서의 내용에 대해 상당 부분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기성 학계의 두터운 벽 때문에 실제 연구 과정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던 고조선사 연구 학자들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윤
내현교수(단국대 사학)는 "그동안은 주로 중국 사서들에 단편적으로 나타
난 기록들에 의존해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연구를 계기로 서지학자
들이 참여하여 이 사서들의 내용을 좀더 정밀하게 검토한다면, 단군조선사
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일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박성수교
수(정신문화연구원 사학)는 "기존 학계의 그릇된 통념을 깨는 획기적인
연구다. 이들 이들 역사서의 내용을 전부 믿을 수는 없다 해도, 연구도
해보지 않고 이를 백안시해온 학계의 풍토는 개선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박교수팀의 연구에 대해서는 그동안 상고사 서적들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
인 입장을 취해온 '한국 상고사학회'측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이들의
연구 결과가 기성 사학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상고사학회
는10월에 발간할 예정인 이 학회 연구논문집 <상고사학보>에 박교수팀의 논
문을 게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단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와 관련해
상고사학회의 실무를 맡고 있는 최몽룡 교수(서울대 고고학)는 "연구 결과
의 중요성을 인정해 논문집에 싣기로 결정했다. 단군조선에 대한 연구는 결
국한국 문화의 뿌리에 대한 연구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문헌사적인 연
구뿐아니라 자연과학적인 연구도 활발하게 벌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럼~ 이만~ 안녕히~
번호:37/54 토론자:ASHURA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9 00:57 길이:10줄
반가워요..
그동안 뜸했는데..
다시 오셨군요..
삼국지 위지 동이전 에는 이(夷)가 오랑캐 내지는 다른민족
이란 뜻으로 쓰였겠죠. 그런데 중국의 중화(中華)사상이 만
들어지기 이전엔 이(夷)자가 다른 뜻으로 쓰였단 말입니다.
규원사화 에서는 이(夷)를 오랑캐 라고 와전 시킨건 공자라
고 하더군요.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잡기위해 그런 사
상의 필요성을 느낀거죠~ (춘추를 쓰면서 라고 나와있음)
제가 현식님의 의견에 반 론을 할때 너무 한단고기에 의존
한다고 하셨고 또 한단고기를 성전처럼 맹목적으로 따른다
고 하셨는데...지금 토론은 한단고기가 주가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전 어떤얘기를 할때도 `한단고기에 이렇게 되어
있기때문에 그렇다'라고 맹목적으로 따른적은 없는것 같습
니다.아니 어쩌면 서로 자신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르는거
아닌가요? 현식님과 저의 논점은 한단고기를 중심으로한 한
국 고대사에 대한 것 이란걸 똑바로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
다. 언제나 가르치려 드시지만 마시구요~
구이(九夷)에 관한 문제는 저도 별로 생각해본 문제가 아니
었습니다. 임승국 님이 고동영 님이 그렇게 써놓으셨거든요.
하지만 설원에 나오는 구이의 얘기는...전 현식님 처럼 이
해 할수가 없습니다. 이유라는 사람은 구이를 하나인것 처
럼 얘기하고 있습니다. 각각 다른 나라를 이루고 있던 이질
적인 민족들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쓴다면...잘못이 우리에
게 있음입니다 라는 말에 대해선요...현식님은 마치 구이가
걸왕의 명령에 따르는 용병인것 처럼 표현하셨군요. 명령을
듣지 않는다니...제경우와 현식님의 의견 둘다 생각할수 있
군요. 구이의 군사가 움직이면 우리가 실수한거다...그러니
구이의 군사가 움직이지 않기를 기다려야 한다.(현식님의견
),구이의 군사가 움직이지 않으니 우리가 칠수있는 정당성
이 생긴 것이다.(내의견) 둘다 막강한 구이의 무력을 입증
은 한 샘이네요~ 구이의 움직임에 따라 그런 큰일이 결정된
거니까요...그 귀절에 대해선 전 현식님의 의견도 일리는
있다고 봅니다.하지만 `물론 아니죠' 한마디로 묵살해 버리
기엔 재 의견도 아깝죠.
김부식에 관해선 제가 잘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삼국사기의
문제점(아마 있다면)엔 김부식이와 그 시대의 여러 사관들
이 책임이 있다는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공부좀 더 해야겠어요...감수국사가 뭔지도 몰랐다니...)
인구문제(호구 조사였죠?)는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군
요. 그러나 그정도가 위서의 근거라고는 할수가 없죠...
제가아는한은 과거로 가서 인구를 셀수있는 학문은 없죠(좀
억지 같으네요~). 그리고 저자가 이정도 실수를 했다고 해
서 위서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될까요?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있는 엄청난 장수기록같은건요? 정확한 사실을 밝히는건 사
학자들의 몫이지만 그걸로 유사를 위서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잘못기록 되었거나 저자의 착오거나(한단고기가 쓰여진 시
대엔 전 세계에 대한 호구조사가 없었죠...
부권과 남녀평등 같은 단어의 사용에 대한 예를 드셨는데..
전번에 고평석 스님의 글에도 있었죠? 우리나라 사람은 단
어를 만들어 쓸수 없느냐? 하는거죠...남녀평등...부권...
등의 단어는 그 시대엔 사용되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조대기
의 저자에게 "남자와 여자가 균등한 권리를 가진다는걸 4글
자로 표현하면?" 이럼 답이 뭐겠습니까? 논리적으로 그 시
대의 문헌을 모두 뒤질 필요없이 조대기의 저자가 만들어낸
단어라면요? 버스나 로보캅 같은 단어는 도저히 만들수 없
겠지만 그정도 단어는 충분히 만들어 쓸수 있다고 생각됩니
가만...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어째 중국사람이 먼저
쓰지않은 단어가, 사회적으로 널리 쓰이지 않았다고 생각되
는 단어가 책에 나온다고 그 책이 위서라고 주장할수 있는
지...모르겠군요...
실증사학이 왜 문제냐...예 들었던걸 이해못하시는거 같으
니까 자세히 설명해 드리죠...할아버지의 묘지는 우리나라
예날 유적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묻어버린거죠...홍수가 나
서 없어져 버린건 시간이 지나서 찾아보기 힘든단 말이구요
...이해가 가시는지...약간의 고고학적 경과가 제가 올린글
중에 있을겁니다. 그리고 오래될수록 상당히 발견하기 힘들
죠...하지만 단지 고고학적으로...실제로 증명되지 않는다
해서 가공 날조된 사실이라고 하는건 어째 억지 같습니다.
제가 증산도 얘길 많이 하죠... 하지만 증산도의 진리중에
이런게 있다. 증산도에 들어오세요~ 한건 아니죠.
전 단지 증산도 천리안 도장에 이런 역사에 대한 자료들이
있다...시간 있음 봐라~ 이것뿐인데요...약간 과민 반응 이
시군요... 증산도 안들어 오셔두 좋습니다~
지금까지 쭉 갈무리를 해서 보아왔지만...역시 논쟁이 심하군요
나 역시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의견을 내보겠습니다.
유명하신 분들...미루,노현식씨.............
여러분의 의견이 가장길고 주류를 이루는데 모두 좋은 의견입니다...
내가 읽은 책은 한단,단사,규원....사기열전,북역 삼국사,유사....아방강역고...
백제사(문정창),북역 발해사...조선상고사(단재)...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지나사(단역 한권)...십팔사략...그밖에 겨레밝히는 책들..
등 등..입니다...한 20-30권정도?!
왜 이렇게 밝히느냐 하면 나 자신이 여러분보다 역사서에 관해서 많이 부족
함을 느꼈습니다.
논쟁을 하면서 많이 읽던 애기도 나오지만 생소한(잘 기억 안남)부분도 많던군요
사실 위의 책 중에 반도 못 읽은거나...단편적으로 읽은것도 있습니다.
이점 양해을 구합니다...머릿말이 길었습니다.
음...한단고기의 가치 .....
비록 그것이 위서론에 휘말려 있지만 다른 어떤 사서보다도 씩씩합니다.
그리고 말 그대로 한단의 비사가 있습니다...
우리겨레가 나약하지 않다는 것도 보여줌니다.
희한것은 그런 책(단기고사,규원사화,한단고기)이 세상에 알렸질때 마다
위서(한자가 안 썼짐):즉 조작된 책이라고 후세인들이 가감,가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합니다.
알지 못했던 책(사서)이 나와서 비교,비판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면 그 사서의 조작,과오,착오,모순을 밝혔내는게 사학자들의 책임입니다.
비 사학자라도 ...역사라는 것이 어느 한 개인의 단체의 소유물이 아닌 이상!
우리겨레의 조상이 썼다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단고기의 조작이라고 주장한 사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
무언가 선입관에 사로잡혔있는 인상을 지울수 없습니다.
꼭 문화,영고탑,상춘...같은 또 황당한부분(호구조사,신독인(인도),몽고 등 과
의 교류) 단편적이지만 그런 것을 지적 합니다.
그러면 그 반대의 부분도 당연히 생각하는 것이 배웠다는 학자로서의 도리안닙니까?
누구의 말되로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우를 범하는것이 아닌지?(철자법 엉망?)
너무 일방적입니다.
이런 일부(혹은 8-9할정도)사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어딘가 많이 듣던
소리입니다.
민족수난기(1910-1945)에 왜인 사학자들의 삼국사(김부식)초기 기록을 부정
하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자세하게 않나오면 허구라고 하고 상세히 나오면 너무 자세히 나와다
고 해서 조작으로 밀어부칩니다.
광복 당시 학계에는 학적부 증명서을 요구합니다.
소위 강단교수를 구하기 위해서,그런데 사학계에서는 당시 정통 한학사학자
들은 대학강단에 들어갈수가 없습니다.왜냐하면 없으니깐!
그리해서 양성된 이x도박사을 중심으로 제자가 생산되고 왜인 사학자의 위
장된 실증사학이 쓰레기통에서 꽃 피었습니다.
한학사학자들 중에 있다면 위당선생님(정인보)만이 있을까?
그나마 6.25때 납북되어 최근에는 그때 돌아가셨다는? 애기만 있습니다.
사족은 그만 하겠습니다.
그러는 나 자신도 어찌보면 편파적 선입관에 빠진게 않일까??? 합니다.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구절을 보고 사서의 한 구절,한 구절, 오목조목 따지기 보다는
그 책에 담겨진 정신,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려고 목숨을 바쳐 지키려 했는
지 알고 싶습니다.....
궂이 짚고 넘어 가자면 한단고기의 내용 중 그 당시에 이해하기 심든 부분
이 있다면 나 자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 우리가 지금 새롭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미 과거에 있었던 것이다.....
의심하고 안믿는 것보다, 믿고 의심(연구)하는 것이 낫지않을까요....
그리고 또 한가지 (이거 처음쓰니까 정리가 안됩니다.)
맨 처음에 아마 이문영씨가 하는 분의 글을 반론의 자료
로 본것같은데
전체적으로 수긍할점(단사와 한단의 역년문제...)은 나도 한번 해봐는데
한단고기와 비교해 볼때 그것은 최초의 단군임검의 재위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200년차이가 나면 그것을 삭감하면 딱 떨어지더라?
왜 그렇까는 ? 애기 안하던군요...
김부식이 왜 고구려.수나라전쟁에 승리의 기록을 남겼는냐?
꼭 그렇지만도 않지요.나중에 뭐 조공을 했다니, 친서,화호.했다니...
애기는 빼놓지않고 기록에 남겼습니다...고.당전쟁도 마찬가지...
안시성대첩의 성주(양만춘)가 누군지도 쓰지도 않아던데?
이름을 몰라서 안타깝다고 한탄하던데?
우리나라 아니 우리겨레의 선조 중에 선가(도가)사서을 왜 숨기면서까지
소중히했냐하면 ...그 독특한 처세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드러내지 않고 실천하며 그 또한 드러내지 않는다.----
......왠 횡설 수설, 희망사항이냐? 생각하신다면 안 믿는 분에게는
......솔직히 할 말이 없습니다.
......반박 한다면 내 짧은 역사지식으로 무엇을 어떻게 의견을 주고받을까요???
나 자신이 결론이 없군요 ....지금도 책 한 권 다시 읽어보면서....
끝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