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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금복 여사를 회고(回顧)하다◁
-새내기 교사의 죽음을 접하고-
강금복(姜今福:1911~2001) 여사는 서울대 총장ㆍ국무총리를 지낸 이수성(李壽成:1939~)씨의 모친이다.
강 여사는 울산 갑부집의 1남2녀 중 맏딸로 태어나 경북여고와 일본여대를 나왔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엘리트 여성이었다.
24세 때 경기여고에서 교생실습을 하던 중 오빠(강정택 전 농림부 차관, 납북)의 중매로 동경제대 법학과를 나온 이충영(李忠榮)변호사와 결혼한다.
이 변호사는 일제 치하에서 판사로 재직하면서도 법정에서 꼭 한복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은 채 재판을 했고, 1943년엔 창씨 개명을 거부하고 법복을 벗었을 정도로 강직했다.
강금복 여사의 일생에는 이 땅 보통 어머니들의 인고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강 여사는 신교육을 받은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 결혼과 함께 교사의 꿈을 접고 남편 뒷바라지에 전념했다.
화장은 커녕 파마 한 번 하지 않았고 늘 쪽진 머리에 한복차림이었다.
그러던 중 발발한 6ㆍ25전쟁은 그녀의 삶을 바꿔놓았다.
남편인 이 변호사가 납북된 것이다.
이 변호사는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끌려가면서 당시 중학생이던 큰아들 이수성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에 가서 살라” 는 한마디를 남겼다.
졸지에 남편과 생이별한 강 여사는 4남4녀의 생계를 떠맡아야 했다.
53년 보건사회부 산하 여성문제상담소장직에 촉탁으로 근무했으나 이내 그만두고 물려받은 재산을 하나씩 처분하며서 자녀들을 키워나갔다.
강 여사의 네 아들은 서울대 네 딸은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둘째 이수인(李壽仁, 작고)은 생전 인터뷰에서 “어머님은 신여성이셨지만 한국적인 전통과 따뜻함과 헌신으로 우리 형제와 가족들을 가르치신 분” 이라며
“우리 가족의 모든 생활은 어머님께서 가르치고 보여주신 모습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고 말했다.
이수성씨는 저서 『신뢰와 희망』에서 "고생을 하면서도 어머니에게 배운 것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옳지 않은 일에는 머리를 숙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 적었다.
셋째 수윤(壽允, 전 교원대 교수)씨는 고교 시절 '싸움은 1등 공부는 꼴찌' 였던 문제아였다.
강 여사는 그런 아들을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다.
하루는 어머니(강 여사)가 학교에 불려가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봤고 그때부터 마음을 다잡아 전교 1등으로 졸업했다.
공부하라는 질책 대신 선생님 앞에서 흘린 어머니의 눈물이 그 어느 가르침보다 컸던 것이다. /
강금복 여사 일생은 중앙일보(2001년 5월28일자 ‘삶과 추억’ 참조)
여기서 눈 여겨 볼 부분이 강금복 여사가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다.
당시 강 여사는 여자로서는 최고의 학력을 지녔으나 아들의 선생님 앞에서는 한없이 낮은 자세로 임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아들이 어머니와 선생님이 다투는 것을 봤다면 감복(感服)은 커녕 오히려 반항심만 키웠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머리를 숙이는 어머니의 태도와 자세에서 인생의 전환이 이뤄졌다.
지난 21일 서울 서이초등학교 새내기 교사(A)의 극단적 선택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서이초 교사에 따르면 학부모들의 심각한 ‘갑질’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교사노동조합이 최근 2~3년간 서이초에서 근무했거나 현재 근무 중인 교사들의 제보를 취합한 자료에 따르면 A씨의 학급 학생이 연필로 뒷자리 학생의 이마를 긋는 일이 있고 난 뒤, 가해자 혹은 피해자의 학부모가 A씨에게 수십 통의 전화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일과 관련해 학부모가 교무실로 찾아와 A씨에게 “애들 케어를 어떻게 하는 거냐” “당신은 교사 자격이 없다” 등의 폭언을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자신의 자녀를 탓하기 전 모든 책임을 교사에게 돌린 것이다.
또 한 교사는 학폭 사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한 학부모로부터 “나 00아빠인데 나 뭐하는 사람인지 알지? 나 변호사야”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이쯤 되면 교권을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하다.
선생님을 교사가 아닌 자신의 고용인으로 여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요즘 학부모의 학력은 교사와 동등하거나 오히려 높다.
과거처럼 선생님을 하늘처럼 받드는 시대는 아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라는 시대는 지났다.
하지만 학부모의 학력이 아무리 높고 사회적 지위가 올랐어도 자녀의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는 별개 문제다.
자신의 부모가 선생님을 존중하면 교사도 학부모를 존중한다.
이러한 선순환의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는 선생님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모도 존경할 수 밖에 없다.
이럴 때 자녀는 건전한 사회인으로 태어날 기반을 형성한다.
선생님을 살면서 겪을 인생의 멘토나 가이드로 여긴다.
강금복 여사의 아들처럼 어머니를 거울삼아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하나의 사례이긴 하지만 강금복 여사의 아들 이수윤씨가 이걸 증명하고 있다.
당시 여자로서 최고의 학력과 갑부의 딸로서 재산을 지녔음에도 아들의 선생님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춘 강금복 여사야말로 진정 이 시대 학부모의 표상이다.
자신이 좀 배웠다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자녀의 선생님을 마치 하수인처럼 대하는 몇몇 천민적(賤民的) 사고의 학부모 때문에 우리 사회가 멍들어 간다.
덩달아 자신의 자녀도 비뚤어진 가치관을 안고 살아간다.
성장해서 돈과 지위로 세상을 재단(裁斷)하고 힘없는 자를 멸시한다.
우리 사회를 좀먹는 암적 존재로 커가는 것이다.
교권이 추락하다 보니 교사가 ‘교권침해보험상품’에 가입하는 현실이다.
이건 정상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시대가 원하는 보험상품이 개발된다고 해도 이런 상품은 나오지 말아야 한다.
교사가 악성민원의 총알받이로 전락한 시대에 나라의 장래를 운운할 수 있겠는가?
시대가 아무리 바뀌고 달라도 교권은 불가침의 영역이다.
교권이 무너진 사회, 스승이 부재(不在)인 사회는 미래가 암울하다.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떠받들고 국가를 지탱한다.
이번 새내기 교사의 안타까운 죽음을 접하면서 20여 년전 별세한 강금복 여사의 일생이 떠올랐다.
아울러 이런 훌륭한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끝으로 강금복 여사가 일흔두번째 생일에 자신의 일생을 정리한 시를 소개한다.
無爲虛送好光陰
七十二年今日時
新年悲歎將何益
自向余年修厥己
“좋은 세월 하는 일 없이 다 보내고/
72년이 흘러 오늘을 맞았네/
그러나 신년에 비탄에 잠긴들 무슨 도움이 되랴/
여생 수양이나 더 하리”
-지인이 보내 준 톡에서-
💜상처의 노래
https://m.cafe.daum.net/dreamt/Snn0/9409
해 난 듯 하다가
우릉우릉 쾅쾅
종잡기 어려운 날씨
톡보내고 나니 여섯시가 다 되간다
오늘은 일찍 파크볼 치러 가자고
파크볼을 치지 않은지 꽤 오래
7월 들어선 거의 매일 비가와서 치지 못한 것같다
동물들 먹이도 주지 않은채 바로 출발
파크장에 가니 이미 많은 분들이 파크볼을 즐기고 있다
우리도 바로 시작
다행히 첫홀부터 오비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펏팅은 제대로 안되어 파로 넣질 못했다
한달 가까이 쉬어 그러나?
승훈동생네와 삼거리 오토바이 가게 장사장네도 와서 즐기고 있다
한바퀴 돌고 난 뒤 장사장네랑 같이 쳤다
장사장이 꽤 잘 친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 분들은 틈틈이 나와 즐겼단다
같이 한바퀴 반을 돌았다
장사장네는 그만 아웃하겠다고
가면서 황미르랜드에 맨발 걷기장이 있는데 그곳에서 맨발로 걷다가 집에 가겠단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다
맨발 걷기장이 있다는 건 알지만 가보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알아두는 게 좋겠다
맨발 걷기장에 가보니 예전 해바라기 심었던 곳 둘레 언덕에 황토흙을 깔아 맨발로 걸을 수 있도록 했다
걷고 난 뒤 씻을 수 있는 수도 시설도 되어 있다
황토흙에 작은 모래가 약간 섞여 있는데 발바닥이 아프지 않게 잘 만들어 져 있다
둘레를 한바퀴 도는데 10분 정도
이곳에서 맨발 걷기를 하면 참 좋겠다
두바퀴를 돌고 장사장네가 시간이 없다하여 나왔다
거기서 성산 부강아파트로 삐지는 길이 있어 그리로 빠져 나왔다
오동촌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황룡강으로 흘러드는 곳에 다리가 있는데 물이 많을 땐 건너기 어렵겠다
오늘 새로운 곳을 하나 알았다
틈나면 자주 와서 맨발 걷기를 해야겠다
땀 흘린 김에 몇가지 일처리
먼저 동물 챙기기
아홉시가 넘어 배고프겠다
모이를 듬뿍 주었다
닭장에 있는 병아리들에겐 모이와 물
부지런히 자라거라
어제 딴 고추를 건조기에 넣어야겠다
집사람이 양파도 썰어 같이 말리잔다
양파를 말려 놓으면 오래 보관할 수가 있다
집사람과 양파 20여개를 껍질 벗겼다
건조기 윗칸쪽엔 고추를 아랫칸쪽엔 양파를 넣고 50도에 48시간을 맞추어 가동
햇볕 좋을 땐 건조기에서 고추를 완전히 말리지 않고 어느 정도 마르면 꺼내서 햇볕에 말렸는데
요즘 같은 장마철엔 아예 건조기에서 말리는게 좋겠다
장마철엔 고추를 설 말리면 고추속에 곰팡이가 필 수 있다
온통 땀으로 범벅
비오지 않으니 기온이 쑥 올라간 것 같다
하기사 이번주부터 여름 휴가철
비가 자주 와 기온이 떨어진거지 그렇지 않음 땡볕에 고생 꽤나 할 건데...
장마가 너무 오래가니 땡볕이라도 좋으니 햇볕 좀 났으면 좋겠다
식은 밥 데워 한술
집사람은 입맛 없다며 생략
난 김치찌개에 말아서 맛있게 먹었다
11시가 훌쩍 넘었다
아산형님 전화
11시 30분에 내려 오란다
오늘은 아산형님네와 서울 아짐이랑 정읍 가서 돼지갈비 먹자고 했다
시간되어 내려가니 나와 계신다
정읍 수성구에 있는 수성갈비로
갈 때는 내가 운전
가는 길은 내가 더 잘 안다
수성갈비에 가니 어? 수요일은 쉬는 날이라고
뭐야 보통 식당들은 일요일이나 월요일에 쉬는데 이 식당은 특이하다
이곳은 돼지갈비가 싼 편이라 사람들이 즐겨 찾아 온다
우리도 모처럼 먹어 볼까 하고 왔더니 이거 틀렸나?
형님이 근처 식당에서 먹고 가잔다
그 뒤편에 영천 칡냉면과 왕갈비를 하는 식당이 있다
그 식당에 들어가 왕갈비를 시켰다
아산아짐이 아는 동생네도 왔다
식당안엔 갈비 먹는분보다 칡냉면 먹는 분들이 더 많다
오늘 날씨 더우니 냉면이 제격이겠다
냉면 가격도 5,000원
보통 식당보다 아주 저렴하다
여기 왕갈비는 일인분이 300그램
수성갈비는 200그램이었던 것같은데...
양이 꽤 많다
양으로 따지면 가격대가 비슷할 것같다
먹어보니 맛이 괜찮다
고기가 두꺼워 육즙이 살아 있는 것같다
손님이 많다보니 서비스는 별로
가져다 주라고 말을 해야 그때서야 챙겨 온다
모두들 냉면과 누릉지를 시키는데 난 고기와 막걸리로 배를 채워 생략
오는데 취기 올라 잠이 펄펄
갈비에 막걸리를 넘 마셨던것같다
집에 와 그대로 떨어져 버렸다
일어나니
천둥 번개치며 비가 내린다
그렇게 좋던 날씨가 돌변해 버렸다
천둥 번개치니 컴도 켜지 못하고 그저 침대에서 뒹굴뒹굴
자다깨다를 반복하니 어느새 일곱시
오후 시간을 잠으로 날려 보냈다
잠깐 비 개인 사이 닭들을 가두어 두었다
뉴스를 보니 이제 장마는 끝나고 가끔 소나기가 내린단다
그럼 다행이겠다
올핸 장마가 좀 심했다
내가 시골들어 온 후 장마기간 동안 가장 많은 비가 내렸던 것 같다
솔밭이 물에 잠긴 건 처음이고 물로 언덕 곳곳이 패인 것도 이번이 처음
장마기간에 산짐승이 닭장을 습격한 것도 처음인 것같다
전국적인 집중 호우로 큰 피해를 입힌것도 몇십년만이라던가
보통 장마때는 비구름이 남쪽과 북쪽을 오르내리며 비를 뿌렸는데 올핸 전국적으로 동시 다발로 비를 쏟아 부었다
인간의 무분별한 자연개발로 이상 기후가 생겨 결국 인간들이 큰 피해를 입는 것같다
장마가 끝난다니 하루발리 피해를 복구하여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점심 때 넘 잘 먹어 저녁은 생략
스쿼트 5셋트 하고 일찍 잠자리로
낮잠을 그리도 잤건만 또 잠이 쏟아진다
새벽 안개 자욱
님이여!
장마 끝나면 본격적으로 무더위 시작되겠지요
이주엔 여름 휴가도 떠나리라 봅니다
안전하고 유익한 휴가를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기분 좋은 하루 만들어 가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