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주님께 신앙 고백을 하였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5,14-17
그 무렵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14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나병 환자인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15 나아만은 수행원을 모두 거느리고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이 종이 드리는 선물을 부디 받아 주십시오.”
16 그러나 엘리사는 “내가 모시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결코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거절하였다.
그래도 나아만이 그것을 받아 달라고 거듭 청하였지만 엘리사는 거절하였다.
17 그러자 나아만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시다면,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이 종에게 주십시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2독서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2,8-13
사랑하는 그대여, 8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9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12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13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11-19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미사의 지향은 오로지 ‘이것’뿐이어야 합니다.
김성제 선교사는 악마의 섬이라 불리는 뿔로라는 필리핀 극빈자 촌에서 아이들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마약을 한다는 이곳, 살인과 강간이 판을 치고 평균 열네 살이면 아이를 낳게 된다는 이곳에서 김 선교사는 천국의 예배를 아이들과 만들고 있습니다.
150여 명의 아이와 드리는 예배는 그야말로 눈물과 감사의 예배입니다. 헌금통이 없어서 탬버린에 동전을 넣지만, 아이들은 그 헌금이 자신들보다 더 가난한 이들에게 쓰이기를 바랍니다. 한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하느님께 감사드려요. 저도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또 다른 아이는 말합니다.
“저는 오늘 생일인데 집에 먹을 음식이 없어요. 그래도 교회에 나올 수 있어 하느님께 감사해요.”
이런 눈물의 예배는 세 시간 정도가 드려지는데 천막을 치려면 두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시간이 짧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그 부족한 환경에서도 어째서 이런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또 우리의 미사는 진정한 감사의 예배가 되어야 하는데 왜 감사의 눈물이 흐르지 않을까요? 이런 아이들처럼 감사하는 신자들과 미사를 하는 사제는 또 얼마나 행복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치유를 청하는 믿음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구원에 이를 믿음에 도달하지는 않았다고 하십니다. 다만 돌아와 당신께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7,19)
사실 주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하나의 ‘미끼’입니다. 미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잡히는 물고기가 되려면 바늘을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아가 찔려서 피가 납니다. 그 피가 감사입니다. 우리가 미끼만 원하고 낚싯바늘엔 찔리기는 원치 않으니 감사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서 나온 이야기 중 현수라는 청년이 수진이라는 아이를 유괴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빠 친구라고 말하여 유괴했던 수진이는 사실 그가 아빠 친구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현수를 쫓아온 것입니다. 그 이유는 돌아가신 아빠도 현수처럼 붕대를 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수는 일용 노동자였는데 손을 다쳐 일할 수 없게 되자 이런 안 좋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수진이는 도리어 현수를 위해 대일밴드를 사 왔습니다. 현수는 이런 착한 아이를 유괴하려고 했던 자기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크게 뉘우치고 감사해합니다.
수진이의 부모가 가진 재산은 하나의 미끼입니다. 현수는 이 미끼를 덥석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독이 있음을 몰랐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에 심장이 찔립니다. 그래서 눈물이 납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나의 처지는 바뀐 게 없는데 그 사랑이 자신과 같은 가슴에도 와 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때 자신의 처지는 낮아지고 사랑은 커집니다. 이때 나오는 감사가 진정한 예배입니다. 사랑을 믿은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영합니다. 이는 나병이 낫는 것보다 더 큰 은혜입니다. 나병이 나아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체는 작고 보잘것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이용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는 그분이 나를 낚는 낚싯바늘임을 알게 됩니다. 그분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못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때 솟아 나오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때 가지게 된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미사의 지향은 감사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을 치유해 주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자신을 치유해 주신 분이 인간을 찾아온 하느님임을 알면 그분께 치유되지 않았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미사 때 감사만 나와야 구원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안으로 들어오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감사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가 매일 영하는 성체는 악마의 섬과 같은 우리 마음에 찾아오신 하느님이십니다. 나에게 다가오신 분이 하느님이신 것 하나만으로 우리는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때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https://youtu.be/OzHjqUXv8qg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단체로부터 강의 청탁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그날 오후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이 단체 책임자 되시는 분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른 신부님께 강의를 부탁했는데, 제가 강의하는 시간에만 가능하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게 강의 시간을 바꿔 달라는 부탁이었지요. 하지만 저 역시 그 시간만 가능했기에, 그 신부님이 강의하시고 저는 다음에 강의하겠다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곧바로 연락이 왔습니다.
“신부님 화나셨어요? 그러면 그냥 원래대로 해주세요.”
강의하러 가기 바로 전날 그 단체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제가 아닌, 다른 신부님께서 강의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황해서 그 단체장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의사 전달에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라는 답장이 오더군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강의 준비도 열심히 했고, 강의에 필요한 준비물까지도 모두 사놓은 상태였는데, 이 모든 일들이 헛일이 된 것입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힘이 들어갔는지, 안경 닦다가 안경테가 부러지기까지 했습니다. 또 문턱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계속해서 실수 연발입니다.
안 좋은 생각을 하니, 안 좋은 일만 계속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좋은 것도 많습니다. 강의하지 않아도 되니, 먼 곳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주말 교통 체증에 시달릴 일도 없습니다. 또 할 일이 많았는데 여유 있게 주말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강의하지 못하게 된 것,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이르시지요. 나병 환자 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해서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진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병 환자는 율법에 따르면 성으로 둘러싸인 큰 도시에는 들어갈 수 없었고, 예루살렘 성전에는 얼씬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사람과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어서 예수님을 보고서도 멀찍이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나병이라는 병으로부터 깨끗해진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께 감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나머지 아홉은 왜 감사를 드리러 오지 않았을까요? 하느님의 영광이 이루어졌음은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깨끗해진 것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자기를 고쳐 주신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 부정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만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순간에서도 감사의 이유를 찾으며 감사해야 합니다.
사랑받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사랑하듯이, 용서받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용서한다.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용서받은 기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