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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IS IS TOTAL WAR 원문보기 글쓴이: 흑룡2
1921. 6. 28. 발생한 자유시 사건 현장 주변은 대부분 겨울철 활동이 불가능하여 제야강과 대륙횡단 철도를 따라 아래와 같이 도시가 위치한다. (1910년대 수백척의 배가 다녔지만 현재 항구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① 블라가베셴스크 : благовещенск, 블라가베쉔스크 혹은 블라가베쳰스크라고도 한다. 아무르주(Амурская область)의 주도(州都)이다. 제야강을 따라 자유시 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135킬로미터 아래에 위치, 제야강과 몽고에서 발원한 아무르강의 합류지점으로 중국의 흑하시(黑河市)와 마주보고 있다.
② 자유시 : 러시아어로 스바보드니(Свободный)라고도 불리운다. 1912년 7월 30일경 시내에 최초의 건물이 만들어졌다. 1917년 4월 알렉셰예프스크(Алексеевск)에서 러시아어의 ‘자유’를 의미하는 ‘스바보드니’로 개명되었다.
③ 수라제프카 : Cypaжевкa, 우크라이나 출신 주민들에 의하여 자유시(스바보드니)보다 먼저 만들어진 아무르강의 지류인 제야강변의 항구 마을이다. 자유시 항구로 불려졌다. 자유시 중심부에서 약 3~4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다. 행정구역은 자유시의 일부분이다.
철도와 도로교통의 발전으로 여객선 항구역할이 감소되었다. 가로 약 4킬로미터 세로 약 4킬로미터 정도의 크기이며, 1921년경 벽돌공장, 양조장, 제분소, 도축장, 기차역과 항구 관련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1928년 아무르강 대홍수로 대부분 침수되었다.
④ 바르다곤 : Бардагон, 수라제프카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7킬로미터 정도 하류에 있는 마을이다. 자유시보다 먼저 건설되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도로교통이 발전되자 제야강변 항구로서의 역할이 감소하였다.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사건 당시 수라제프카에서 제야강 갱변(강변)을 따라 탈출하던 사할린의용대가 다수 수장되었다고 하며, 박일랴 등 일부는 바르다곤 방향(남쪽)으로 도주해서 중국땅으로 탈출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⑤ 사벳스키 : Советский, 수라제프카 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4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북동쪽 1킬로미터 지점에 (자유시) 러시아인의 공동묘지가 있다. 1937년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전까지 살았던 마을이다. 과거에 카레이스키 마을(корейский посёлок), 혹은 쌀마을, 콩마을 등으로 불려졌으나 지금은 러시아인들이 사는 마을이다. 자유시의 행정구역이다.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사건 당시 수라제프카를 탈출한 독립군 약 300여명이 마을주변 공동묘지 근처로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수라제프카에서 동료들이 죽자, 적군(赤軍, 소련군)에게 스스로 항복하였다고 한다. 사벳스키 마을 공동묘지(Корейского посёлка кладбище)가 옆에 있었는데 1937년 중앙아시아 이주 후 묘지를 관리해 주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한다.
⑥ 크라스나야라바 : Красноярово, 자유시에서 제야강을 거슬러 올라가 직선거리로 북동쪽 24킬로미터쯤 떨어진 곳
⑦ 마자나바 : Мазаново, 자유시에서 제야강을 거슬러 북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곳, 제야강에 의한 상습 침수지대에 위치한다. 한국 독립운동사에는 “마자노보 혹은 마사노프”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1928년 대홍수로 도시의 대부분을 상류쪽으로 옮겼다. 일제(日帝) 침략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곳이다.
⑧ 푸짜찌나 : Путятино, 마자나바에서 북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22킬로미터 위의 제야강 상류 마을이다.
⑨ 보츠카료프카 : Бочкарёвка, 자유시에서 남동쪽으로 직선거리 60킬로미터쯤에 위치하며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블라가베셴스크로 가는 흑하지선(黑河支線)과의 교차점이다. 여러 차례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서 오늘날의 명칭은 벨로고르스크(Белого́рск)이며 철도교통의 요충지이다.
⑩ 트로이츠코예 : 블라가베셴스크에서 자유시(스바보드니) 방향인 이바나프카(Ивановка)군 지역에 위치하며, 발해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자유시에서 제야강 상류지역인 쉬마나프스크 지역에서도 고대의 석성(石城)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의 일부 양심있는 사람들은 마자나바 학살, 이바나프카 학살, 자유시 민간인 학살을 대부분 인정하고 있다)
https://ja.wikipedia.org/wiki/%E3%82%A4%E3%83%AF%E3%83%8E%E3%83%95%E3%82%AB%E4%BA%8B%E4%BB%B6
⑪ 사말리(혹은 사만리, 四萬里) : 자유시(스바보드니)에서 남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470킬로미터 지점의 아무르 강변에 위치한 고려인 마을이었다. 1871년 4월경 한국인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자유시(스바보드니), 마자나바, 바르다곤 등보다 먼저 마을이 생겼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었다.
공격 부대명 | 수라제프카를 공격한 주요 인물 |
한인(고려인) 보병 자유대대 | 고려군정의회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 대대장 오하묵, 최고려, 김하석 등 500명 미만 ‘얼마우재’라고 불리우는 20세 미만의 고려인 부대가 주력 |
적군(赤軍) 29연대 | 29연대장 말라호프 등 약 1,000여명 ※1920. 6. 28. 일경 극동공화국 군총사령관 : 블류헤르, 2군단장 : 셰르쇼바, 4사단장 : 파데예프, 12여단(러시아측은 2여단이라고 일부 기록됨) |
장갑열차 부대 | (자유시 남동쪽의) 보츠카료프카 주둔 장갑열차 부대 (자유시 북서쪽의) 쉬마나프스크 주둔 장갑열차 부대 |
장갑차 | 2대 이상 경전차(혹은 장갑차)가 공격함 |
기병 부대 | 기병중대는 남쪽 바르다곤 방향에서 북쪽의 수라제프카 공격 |
군함(장갑함) 부대 | 블라가베셴스크, 제야시 일대를 운행하며 국경경비 등을 하던 군함인 『3호 장갑함』 등이 바르다곤 방향에서 상류 쪽 섬과 수라제프카 항구를 공격 |
독립군 부대명 | 수라제프카에 주둔한 것으로 추정되는 독립군 주요 인물 (최소 1,470명 이상 ~ 2,000여명 주둔) |
사할린 의용대 (니항부대) | 박윤천(박일랴) 등 400여명 이상 추정 임호(林虎), 김완욱, 손병렬(혹은 송병렬), 김학, 김제문, 채국성, 이다물, 이와실리, 고창률, 기타 독립군 일부도 편입됨 |
의군부 군대 | 허재욱(이명 : 허영장, 허근, 허은, 허재근), 김재규, 김학, 이해룡(이범준), 강응렬, 김석종, 이춘섭, 남해룡, 안알렉산드라 |
이만 군대 | 김표도르, 김덕보(金德甫), 김연준(金鍊俊), 박공서(박개서), 김하경 |
독립단 군대 | 박그레고리(박그리고리), 최빠싸, 전응호 |
다반 부대 | 최니꼴라이, 이와실리, 박춘봉 |
간도국민회군 일부 | (안무를 제외한) 김희영, 정일무, 김광(金匡), 김규찬(金奎燦), 강석진 등 약 수십여명 이상 |
대한독립군 일부 | (홍범도를 제외한) 수백여명 |
00000 군대 일부 | 000(보훈처 주장 친일변절) 부대 일부 |
연해주 독립군 | 최성학(최파벨) |
(이르쿠츠크) 합동민족연대 | (자유시에서 수라제프카로 이동한) 안경억, 신춘식 |
소속 불명확, 북로군정서 등 추정 | 김동한(일제밀정 활동), 이병채, 이택(李澤), 이우석, 김성우, 전영항, 함빠샤, 한권길, 박니콜라이, 황륜 |
1921. 6. 28. 수라제프카 지역 공격 순서
① 까란다리시비리와 자유대대 측에서는 1921. 6. 28. 오전 1시경에 자유시 수비대와 제29연대에서 4개 중대를 우선 출동시켜 수라제프카 지역의 사할린의용대를 정탐케 하였고, 그 뒤에 특립부원을 수라제프카로 파견함. 오전 5시경부터 제29연대장이 사할린군대 본부를 방문하여 무장해제를 요구함(『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72쪽), 장갑차 등의 도착을 기다림
까란다리시비리 측에서 사할린의용대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사절을 파견함(김승빈 주장)
1921. 6. 28. 사할린의용대 1천여명이 먼저 고려혁명군정의회를 공격하기 위해 북쪽인 자유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조작함. (극동공화국 군사령관 블류헤르 등 주장)
② 12시경 사할린의용대를 무장 해제시키기 위해 2대의 장갑차가 수라제프카로 접근
14시경 러시아군 29연대 등 공격 개시 (15시경 공격했다는 기록도 있다.)
남쪽에서 장갑열차 도착, 사할린의용대에게 10분 정도의 항복할 시간을 줌,
사할린의용대는 무장해제 명령 등에 대처하도록 3시간 정도의 부대 전체 회의 시간을 요구함
장갑열차 출현에 박그레고리가 무기를 버리겠다는 의사를 표명
③ 14시 20분경 까란다리시비리 부대 500명이 북쪽에서 도축장 방향으로 공격 시작, 14시 30분쯤 사할린의용대(폭도) 먼저 사격하여 곧 반격이 시작되었다고 주장. 폭도들은 탄환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대항하다가 항복했다고 조작함
④ 수라제프카 기차역 부근에는 29연대 1,000여명의 병력이 동쪽으로 공격, 전 지역에서 기관총과 대포로 공격
⑤ 3호 장갑함이 제야강 하류방향에서 북쪽 수라제프카 항구 쪽을 공격
기병중대는 (철교부근) 바르다곤에서 북쪽의 수라제프카로 올라오는 도로상에서부터 공격
⑥ 15시경 자유시에서 남쪽으로 공격하던 까란다리시비리 부대의 공격이 지연됨, 15시 30분경 수라제프카 주택지역으로 공격부대 진입
⑦ 장갑차가 수라제프카 기차역 접근
(쉬마나프스크에서 장갑열차가 이때 쯤 도착하여 북쪽에서 남쪽 수라제프카 지역을 공격했다는 소리도 있다)
⑧ 사할린의용대가 수라제프카 주택지역으로 대피 (18시경 공격 부대가 수라제프카 (주택)지역 도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⑨ 16시경부터 수라제프카 주택지역의 사할린의용대 항복 시작. 일부는 제방쪽으로 탈출, 박일랴는 공격부대의 지휘부에 사격중지 요청. 17시 15분경 사할린부대 제4중대 항복후 무장 해제됨
⑩ 사할린부대는 3방향으로 탈출(제야강섬, 남쪽 바르다곤 방향, 부대본부는 묘지방향)
20시 10분경 (자유시에서 남쪽으로) 쉬마나프스크에서 제2장갑열차 도착
20시 17분경 수라제프카와 제방사이의 나루터(수라제프카 항구)까지 공격부대 도달
묘지 부근으로 탈출한 사할린 부대 본부와 약 300여명 항복
바르다곤 방향으로는 약 2개 중대병력이 도주하였다고 함
⑪ 22시경 제야강 섬에 있던 독립군에게 기관총과 대포 사격
23시경 섬에 있던 독립군 약 300여명 항복, 포로들은 까란다리시비리 부대에 인계
⑫ 포로들은 밤에 3곳에 분산 배치(29연대 본부, 제2여단 본부, 장갑차 부근)
⑬ 남쪽으로 탈출한 독립군 일부가 기병중대의 공격으로 다수 제야강에 수장됨
⑭ 6월 29일 까란다리시비리 부대가 포로 등의 이동을 계획
⑮ 6월 29일 까란다리시비리 부대가 수라제프카 마을에서 수색 및 폭력 행사, 까란다리시비리가 사할린의용대에게서 압수한 무기를 러시아군이 몰수하자 항의함
⑯ 러시아군 29연대의 한 개 중대가 까란다리시비리 부대의 행패를 저지함
주요 단체가 주장했던 자유시 사건 희생자 수 | |||
사할린부대 희생자 | 사할린 부대 총원 | 공격측 피해 | |
① 러시아 정부문서 주장 | 폭도는 38명 전사, 80여명이 제야강에 익사 | 전사자 1명 | |
②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73쪽 | 사망자 36명, 잡힌 자 864명, 불구중상자 15명, 박일랴와 탈출한 자 34명, 행방불명 59명 | 1,008명 | 군정의회 사망자1명, 제29연대 사망자 1명 |
③ 간도지방 독립군단체 성토문 | 사망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 917명 | 1,470명 | |
④ 상해파(이동휘계)의 주장 | 사망 400여명, 포로 500여명, 지휘관 70명 이르쿠츠크 교도소 수감 (허재욱과 이병채의 1921. 10. 25. 자 편지) | 1,800명 | |
⑤ 러시아 위키피디아 주장 (2021년경) | 사망 600여명, 포로 900여명 | 1,500~2,000여명 | |
공격을 반대한 부대들 | (자유시 시내에 주둔중) 사할린부대의 무장해제 및 공격을 반대한 주요 인물 |
합동민족연대 소속 고려인 보병대대 | •자유시에 머무르고 있던 이르쿠츠크에서 온 합동민족연대 소속 고려인 부대 약 600여명은 수라제프카의 사할린부대 공격을 반대하다가 지휘부가 다수 투옥됨 |
간도•연해주에서 온 독립군 부대 | ① 홍범도•안무 부대는 자유시에 머무르며 공격 병력 지원 안함 ②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와 최고려, 오하묵, 김하석 등은 수라제프카의 사할린 군대를 무장해제하고 공격하는 문제를 자유시에 집결한 3천명 이상의 독립군을 모두 집결시켜 여러 차례 토의하였으나, 오하묵•최고려•김하석•최호림의 (고려인)자유대대를 제외한 간도•연해주•이르쿠츠크 독립군들이 모두 적극 반대하였고 오히려 분란을 일으킨 자유대대의 최고려•오하묵•김하석을 제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다수였다. 결국 1921. 6. 28. 새벽부터 고려인 보병 자유대대, 러시아 적군(赤軍) 제29연대, 장갑열차부대•장갑차•군함(장갑함)•기병중대를 동원하여 기습공격의 형태로 공격이 일어났다. |
안경억, 신춘식, 엄준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