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조건 (살전 1:2-8)
지난 화요일 조순희 권사님 가정에 첫 번째 손녀가 태어났습니다. 새 생명이 태어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새 생명은 존재 그 자체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 같습니다. 아기의 부모는 물론이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표정에서 그 기쁨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그 식구들이 아이에게 무엇을 바랄 것 같습니까? 건강하게 무럭무럭 잘 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그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 식구들에게 있어서 그것이 바로 기쁨과 감사의 조건일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건강하게 무럭무럭 잘 자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십니다.
교회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가 바로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왜 구원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서 43장 21절 말씀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구원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로마서 12장 1절 말씀입니다.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져야 합니다. 그게 바로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하게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때 세운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중 유럽 지역 첫 번째 교회를 빌립보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에 유럽 지역 두 번째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자마자 유대인들의 난동 때문에 부랴부랴 거기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사도 바울은 베뢰아로 가서 전도했는데 거기까지 유대인들이 쫓아와서 난동을 부렸기 때문에 다시 아덴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사도 바울은 디모데와 실라를 아덴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고린도 등지를 다니며 전도하는 가운데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복음은 전했지만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을 충분히 양육하지 못하고 급하게 헤어진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겪고 있는 환난을 이길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서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얼마 후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돌아와서 전해 주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근황을 듣게 되었습니다. 핍박과 환란이 계속되고 있는 중에도 교회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간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땅 위에 있는 교회들은 완전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가 없는 교회는 없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믿음 안에서 성장하느냐 아니면 성장을 멈추고 뒷걸음질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성장해야 합니다. 교회가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서 믿음의 역사가 나타난 것을 듣고 기뻐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은 구체적으로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말입니다.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리 나라 초기 부흥사 중에 김익두 목사님이란 분이 있었는데 제 부모님과도 나름대로 인연이 있었습니다. 워낙에 소문난 깡패였는데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회심하여 유명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제 어머님 고향이 황해도 신천인데 김 목사님은 전도사 시절 거기서 신천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고 합니다. 또 제 아버님도 소년 시절 경북 영주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김 목사님의 뒷모습이 매우 인상적이고 또 감동적이어서 장차 목사가 되겠다고 그 때 결심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 김 목사님이 산 너머 교회로 집회를 인도하러 가는 중 더워서 윗옷을 벗고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맞은편에서 술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올라오더니 시비를 걸었습니다. “왜 네가 여기 먼저 올라 왔느냐?” 어이가 없어서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다짜고짜 김 목사님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김 목사님은 그 매를 다 맞았습니다. 그 사람은 얼마 동안 때리다가 지쳤는지 때리던 것을 멈췄습니다. 김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형님, 다 때렸소?” 그랬더니 그 사람이 “다 때렸다, 왜?”하면서 또 주먹을 들었습니다. 그 때 김 목사님이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김 목사님이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내가 김익두라는 사람이네.” 그러자 그 사람은 얼굴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김 목사님이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 믿기 전이었으면 오늘이 자네 제사 날이 되었을 것이네. 그러나 내가 예수 믿은 덕분에 자네가 무사한 줄 알게나.” 그러자 그 사람이 머리를 땅에 박으며 말했습니다. “아이쿠 형님, 제가 어쩌면 좋겠습니까?” “무얼 어떻게 해, 날 따라오게!” 그래서 그 사람을 집회에 데리고 갔고 그 사람도 나중에 변화되어 훌륭한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있습니다. 깡패와 술주정뱅이가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신기한 역사가 있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은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의 사랑의 수고에 대해서 듣고 기뻐하며 감사했습니다. 믿음이 자라면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믿음이 뿌리라면 사랑은 그 열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참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사랑의 수고라고 표현한 것에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참 사랑은 희생을 요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사랑의 수고는 상실감을 안겨 주는 것이 아니라 더 큰 행복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는 사실입니다.
일찍이 테레사 수녀가 말했습니다. “사랑할 대상이 있고 또 그 대상을 사랑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두 가지를 다 주셨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비록 어려움이 있었고 또 교회 안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형편과 처지가 아무리 고달플지라도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이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에 대한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감사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받은 복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뭐래도 소망입니다. 어떤 소망입니까? 영원한 하늘 기업을 이을 소망입니다. 땅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살면서 받는 고통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까닭은 영원한 하늘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바로 그 소망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최근 유명 연예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식을 자주 들었습니다. 특히 그들 대부분이 크리스챤 연예인들이기 때문에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아니 안타깝다기보다는 몹시 화가 난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언제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믿음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중의 인기를 더 많이 얻고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연예인이라 할지라도 삶의 기준이 완전히 바뀌었어야 합니다. 돈이나 인기보다 하나님 영광이 최우선 관심사가 되었어야 합니다. 하나님 영광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한다면 또한 이웃을 생각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돌보는 가운데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어야 합니다.
저도 크게 망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는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수표가 부도나던 날 밤이 새도록 고민했습니다. 사방이 꽉 막힌 것 같았습니다.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죽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위가 열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성령께서 분명히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위는 활짝 열려 있다고...
저는 그렇기 때문에 교회들에 대해서 몹시 화가 납니다. 왜 크리스챤 연예인들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값없이 구원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계속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조금씩이라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수고가 뒤따라야 합니다. 불이익이 있을 수 있고 손해를 볼 각오도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하늘 기업을 이을 소망이 있기 때문에 끝까지 참아야 한다고 교회가 분명히 가르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 믿음의 역사가 있습니까? 변화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랑의 수고를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실제로 큰 불이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그 옛날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보여 준 믿음 때문에 크게 감사했던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끝까지 승리함으로 장차 어린 양과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 하는 참으로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