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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부량면에는 옛날 백제 때에 농경지의 수리시설로서 쌓은 벽골제가 있었는데, 그 아래 두 개의 용추(龍湫:용소)에는 백룡과 청룡이 살고 있었다. 백룡은 성질이 양순하여 수리시설의 제방을 보호하였는데, 청룡은 심술궂어서 때로 성을 내어 노도를 일으키면서 제방이 무너지곤 하였다.
신라 38대 원성왕 때에 낡아서 무너지기 직전에 있는 제방을 수축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기술감독으로 원덕랑(元德郞)을 보냈다. 벽골태수 유품의 딸 단야(丹若)가 원덕랑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원덕랑의 약혼자 월내(月乃)가 멀리 경주에서 찾아왔다. 이때에 청룡이 성을 내어 백룡과의 싸움이 잦아지고 마침내 제방이 무너지기 직전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이렇게 되면 처녀 하나를 청룡에게 제물로 바쳐야만 무사하게 된다는 풍습이 있었는데, 김제태수가 월내 낭자를 밤중에 보쌈하여 용추에 넣고자 하였다. 이것을 미리 알아챈 단야가 이에 대신하여 제물로서 희생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이곳 주민들은 단야의 거룩한 연정을 기념하는 뜻에서 해마다 이 축제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내용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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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의 건설유산> 벽골제(碧骨堤)는 어떻게 쌓았을까
벽골제를 찾아서
벽골제의 벽골은 ‘벼(米) 고을’이라는 뜻을 한자로 음차(音叉)한 것이라고 한다. 김제평야에 가보면 주변에 산이 보이지 않고, 일망무제의 지평선이 열려있다. 산악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의 광활한 평야가 존재한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김제평야는 경남의 곡창으로 유명한 김해평야와 함께 쇠 ‘金’자 지명에 들어있는 게 뭔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필자가 이곳을 찾게 된 동기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고대 유적 중에서 드물게 남아있는 토목(관개수리) 유적이라는 점과 저수지 제방의 축조 방식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이곳을 찾아갔던 날은 지난 해, 2008년 12월 27일, 성탄절 연휴를 맞아 2박3일 일정으로 떠난 가족여행 도중에 잠시 들렀다. 참고로 노선은 부산-진해 용원(페리호)-거제도-지리산온천(1박)-남원 광한루-벽골제-경주(2박)-부산이었다. 겨울 한복판에 떠난 자동차로 떠난 여행이라 도중에 눈이 내리면 스노체인도 없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바람만 차가울 뿐 날씨는 쾌청했고, 도로 사정도 한결 여유로웠다. 벽골제는 오전 11시 경에 들렀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 현장답사는 겨우 제방에 올라가서 평야를 잠시 둘러본 것뿐이라 아쉬웠지만 다행히도 잘 꾸며진 전시관이 있었다.
저수지 제방인가, 방조제인가
그림 2 벽골제 주변(월간조선 자료)
고대의 관개용 저수지로 알려져 있는 벽골제는 전북 김제시에서 남쪽으로 약 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 축조 시기는 A.D. 330년 백제시대로 알려져 있다. 제방의 길이가 3.3km, 높이가 5.7m에 이르는 걸로 보아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현재 남아있는 유적은 조선조를 거쳐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보수·보강을 한 결과이겠지만 그 규모는 백제시대 최초 축조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난 90년대까지 벽골제는 우리나라 고대의 3대 저수지인 제천의 의림지, 상주(경북)의 공검지(일명 공갈못)와 함께 관개수리용 저수지라는 사실에 일말의 의심도 없었 다. 그러나 2000년 이후 관련 학계에서 벽골제가 저수지의 제방이기보다는 방조제일 것이라는 주장이 차츰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지역에 방조제를 건설함으로써 서해 바닷물이 동진강 상류로 유입되어 염해(鹽害)를 끼치는 것을 방지하고, 간척 효과로 인한 대규모 농지 확보가 주된 목적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이 힘을 얻게 된 배경에는 동진강과 만경강의 하류를 감싸고 건설된 세계 최대 규모의 방조제인 새만금 방조제의 건설이 자리하고 있다.
<벽골제 개요>
축조시기: A.D 330(백제 비류왕 27년).
위치: 전북 김제시 부량면 용성리
관개면적: 10만 ha(약 3천만평)
수문: 5개 (개당 폭 4m)
규모
길이: 3.3.km, 높이:5.7m,
상단폭:10m, 하단폭:21m
<벽골제 관련 연대기>
A.D 330. 백제 비류왕 27년 축조
790년. 통일신라 원성왕 6 증축
1167 고려 인종 21년 중수
1170 고려 인종 24년 일부 훼손
1415 조선 태종 15년 중수
1926~ 일제에 의한 간척사업
1963~ 동진강 수리·간척사업
2006. 새만금 방조제 완성
벽골제의 규모
벽골제는 한국 최고(最古)·최대의 저수지 제방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330년(백제 비류왕 27)에 쌓았고, 790년(원성왕 6)에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후 고려·조선 시대에 수차례 수리·보강을 거쳐 1920년대 후반 일제 강점기 때에도 대대적인 증축을 하였다.
그림 3 수문-장생거
제방은 포교리(浦橋里)에서 월승리(月昇里)까지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며 총연장 3.3km가 남아 있다. 수문 자리에는 거대한 석주(石柱)가 3군데에 1쌍씩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1925년에는 간선수로로 이용하기 위한 공사에서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으며, 제방은 절단되어 양분(兩分)된 중앙을 수로로 만들어 농업용수를 흐르게 하였다.
1975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제방 높이는 북단(北端)이 4.3m, 남단(南端)이 3.3m이고, 수문 구조는 높이 5.5m의 2개 석주를 4.2m 간격으로 세웠으며, 서로 마주보는 안쪽 면에 너비 20cm, 깊이 12cm 요구(凹溝)를 만들고 목제(木製) 갑문을 만들어 수량을 조절하였다. 석축(石築)은 약 6m이며 가장 낮은 곳이 1.1m이다.
쌍룡놀이의 수수께끼 벽골제 제방 아래는 거대한 용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다. 대나무로 통발을 엮듯이 만들어 놓았는데 금방이라도 용의 포효가 들려올 듯 아주 정교했다. 용 두 마리가 왜 싸우고 있는지,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으나 그 내력은 다음과 같다.
‘이곳 부량면에는 옛날 백제 때에 농경지의 수리시설로서 쌓은 벽골제가 있었는데, 그 아래 두 개의 용추(龍湫:용소)에는 백룡과 청
룡이 살고 있었다. 백룡은 성질이 양순하여 수리시설의 제방을 보호하였는데, 청룡은 심술궂어서 때로 성을 내어 노도를 일으키면서 제방이 무너지곤 하였다.
신라 38대 원성왕 때에 낡아서 무너지기 직전에 있는 제방을 수축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기술감독으로 원덕랑(元德郞)을 보냈다. 벽골태수 유품의 딸 단야(丹若)가 원덕랑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원덕랑의 약혼자 월내(月乃)가 멀리 경주에서 찾아왔다. 이때에 청룡이 성을 내어 백룡과의 싸움이 잦아지고 마침내 제방이 무너지기 직전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이렇게 되면 처녀 하나를 청룡에게 제물로 바쳐야만 무사하게 된다는 풍습이 있었는데, 김제태수가 월내 낭자를 밤중에 보쌈하여 용추에 넣고자 하였다. 이것을 미리 알아챈 단야가 이에 대신하여 제물로서 희생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이곳 주민들은 단야의 거룩한 연정을 기념하는 뜻에서 해마다 이 축제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을 제방의 안전과 관련지어 아전인수 격으로 풀이를 해본다면 이렇다.
백룡은 민물인 저수지에 살고, 청룡은 색깔도 시퍼런 서해 바다에 산다. 저수지는 설령 장마가 지드라도 제방을 충분한 높이로 튼튼하게 축조했기에 유실되는 일이 없지만, 서해 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6~7m에 이를 정도 크고, 때때로 태풍으로 인한 해일까지 들이닥쳐 제방을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또한 김제태수의 딸인 단야의 희생은 고대 토목공사에서 다반사로 행해졌다는 인신공양(人身供養)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전설 때문인지 벽골제의 뼈 ‘골(骨)’자가 축조 당시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는 뜻이라는 설도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토성과 제방의 수축방법
그림 5 제방 축조 광경
그림 6 수문 모형
고대 토성(土城)은 판축(版築)공법을 이용했다. 판축이란 좁다란 널빤지를 이용하여 일정한 두께의 토벽을 층층이 쌓아올리는 공법이다. 고대 저수지의 제방(堤防) 역시 그 구조는 전적으로 흙을 다져 쌓은 토성과 흡사하다. 구조물 축조에 본격적으로 석재가 사용되기 이전에는 지상의 벽체는 나무 또는 흙으로 이뤄졌다. 이 판축은 기원전 고대 중국에서 등장한 이
후 만리장성, 제방, 주택의 담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용도로 적용되었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중국의 서북부 지방의 농촌에서는 지금도 실생활에 애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토성의 축조에 이용했다는 기록만 전해지고 있다. 중세 이후 구조물의 구축에 석재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석성(石城)이 등장했다고 기존의 토성이나 토축 제방들은 헐어버렸던 것은 아니다. 기존의 토축 벽체 위에 석재로 옷을 입히듯 보강을 했던 것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일부 지역에서 토축에 의한 판축공법이 지속적으로 이용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지속적으로 계승 발전되었다는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중국 서북부는 연중 강수량이 50mm 이하로 거의 사막 기후인 반면, 한국은 중국에 비해 연중 강수량이 1000mm 전후로 많고, 이 강수량도 특히 4,5월의 장마기간에 집중되기 때문에 습기에 약한 토축 구조물을 유지하는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제방단면의 구성
그림 7 벽골제 제방 단면
벽골제 현장에 있는 안내판에는 제방의 단면도가 있다. 이 단면도를 보면 제방이 어떻게 축조되었는지에 관해 알 수 있다.
첫째, 제방의 최하단은 흑회색 점토층으로 제방의 위치가 개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식물탄화층으로 이는 인근의 갈대 또
는 푸나무를 꺾어 수평으로 깔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들 재료는 연약지반 위에 포설하는 토목섬유(Geo-textile)와 같은 기능을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제방 축조 당시에 개펄 위에서 지내력을 확보하고 쌓는 흙이 수평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셋째, 황갈색 점토층은 인근에서 토축에 적당한 양질의 점토를 운반하여 쌓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상층부에 비해 비교적 점토 성분이 많은 것은 침수시에 수밀성을 확보하기 위한 대비로 보인다. 또한 확대기초 형식으로 지반을 개량한 이후 제방 본체는 단면을 축소하여 쌓았던 것이다.
넷째, 황갈색 고상점토는 장마 또는 해수면이 상승할 경우에도 침수의 우려가 비교적 적은 위치로 볼 수 있다.
풀어야 할 공학적 숙제
그림8 판축 개념도
지난 1975년 벽골제에 대한 발굴조사는 고고학자들이 주도하였다. 당시 밝혀진 제방의 단면을 보면, 토층의 폭과 높이에 대한 사항만 나와 있다. 현재까지 발굴보고서를 입수하지 못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어나 제방의
축조 방식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들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여겨진다. 이들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말뚝의 존재이다. 저수지 제방이든, 방조제 제방이든 간에 연약지반에 제방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뚝을 박았을 것이다. 이들 말뚝들은 인근 야산에서 벌목한 소나무들로 제방의 기초에도 박았을 것이고, 제방의 본체에도 층 다짐을 한 흙의 안정을 위해서 일정 간격으로 박았을 것이다. 또한 제방의 완공 이후, 수위의 변화에 따라 제방의 표면이 물에 노출된다. 특히 수문 자리의 석주와 석축는 일정기간마다 배수에 따른 응력 집중 현상이 일어나게 되고, 이때 석주나 석축이 부등침하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기초 지반의 안정이 필수적이다. 기초 지반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말뚝을 바둑판처럼 박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림9
둘째, 제방을 축조할 때, 흙을 5m 이상의 높이로 쌓아올리기 위해 어떤 공법을 사용했을까, 하는 점이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토성의 축조에 적용했던 판축(版築)공법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벽체의 양면에 협판을 대고 흙을 다질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방의 너비가 무려 21m나 되기 때문에 칡덩굴과 같은 밧줄을 이용하드라도 수평방향의 구속력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는 한쪽 면에 협판을 설치한 다음, 제방의 안쪽에는 지지용으로 말뚝을 박고 여기에 밧줄을 묶었을 것이다.(그림 9 참조). 이
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토목기술자에 의한 발굴조사가 재차 이뤄지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건설 유적과 발굴조사
우리나라 고대의 건설 유적들은 대다수가 아쉽게도 공학 기술적 규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만약 드물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 관련 기록이 있더라도 기술적 규명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고대의 기록이란 권력층에 의한 치적홍보용과 같이 거의 정치적인 관점에서 씌어졌을 뿐 아니라 설령 기록을 했더라도 기록의 당사자가 기술자가 아닌 관료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다음으로는 고대의 건설 기술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고, 이에 대한 문헌 자료는 대단히 희소한 편이지만 다행이도 중국에는 잘 보존되어 왔다. 그러나 문제는 국내에 고대의 건설기술, 특히 고대의 토목분야를 전공한 학자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건설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파악한 뒤에는 직접 현장을 찾아가는 수 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안을 추천한다면, 현장 답사 시에 관련 전문가들이 합동으로 참가하여 조사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여러 정황을 입체적으로 마치 흩어진 퍼즐을 맞춰가듯 짜 맞춰 보는 것이야말로 차선의 대안이 될 것이다. 그런 날이 하루 빨리 도래하는 데 있어, 이 글이 조그만 기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참고자료>
김환기, 김제 벽골제의 토목공학적 고찰, 토목학회 논문 제56권 12호, 2008. 12
민족문화대백과서전 4권
<작성자:박원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