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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11. 상상 테마10 - 얼음 이미지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얼음과 관련된 단어를 바탕으로 비유적 상상력을 동원해 시를 써도 좋은 작품이 탄생한다. 빙하, 유빙, 결빙, 눈사람, 북쪽, 남극, 북극, 얼음낚시, 영하, 아이스크림, 빙산, 냉장고, 냉동실, 드라이아이스, 살얼음, 쇄빙, 크레바스 등을 객관적 상관물로 만들거나 보조 관념화해서 써도 무난하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신선한 상상력을 더 많이 동원해보자. 당신 앞에 무엇이든 얼릴 수 있는 특별한 냉장고가 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얼릴 것인가? 상상해 보자. 먼저 추상적인 것을 떠올려 보자. 슬픔, 우울, 의지, 사랑, 이별, 분노, 집착, 애착, 집중, 서러움, 그리움 등을 얼려볼까? 시간이나 공간은 어떤가? 자정, 정오, 오후 3시, 저녁 7시, 찰나, 순간, 겨를, 때때로, 수시로, 오랫동안, 독방, 사물함, 운동장, 교실, 사무실, 식당, 트렁크 등을 얼려도 좋다. 그 밖의 얼릴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노래, 리듬, 그림자, 발자국, 꿈, 악몽, 낮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울음 등 예기치 못한 것을 얼리면 상상이 더 낯설어진다. 이제 언제 얼릴 것인가 녹일 것인가 어느 공간에서 열릴 것인가 녹일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얼릴 것인가 녹일 것인가(예, 당신의 선언에 밤은 얼어붙는다) 왜 얼릴 것인가 녹일 것인가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민해보자.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빙점 / 하린
겨울의 심장은 얼었다 풀렸다를 반복한다 지루한 하늘엔 제트기가 날고 멍든 정신은 녹조현상으로 숨이 막히다 저수지의 심장에 구멍을 뚫고 야광찌가 되어 반짝인다 당신과 나의 서로 다른 빙점을 실감한다 파닥거리는 당신의 사상이 나의 빙점 아래에서 춤출 때 차가운 악담이 당신의 노래를 감싼다 누군가 당신의 정체를 묻는다 오지를 떠돌다 생을 마감한 지구의 마지막 종(種)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방법대로 메시지를 보내지만 나는 나의 방식대로 수신을 차단한다 그러나 당신을 향한 집착은 우주 어디쯤 흘러가고 있을까 결국엔 그리움의 가장자리부터 봄은 온다 세상의 모든 귀들이 녹아내리고 불감증 걸린 발바닥이 당신의 소멸을 더듬는다 쩌어쩍 쩌어쩍 환청처럼 전설의 물고기가 요염한 꼬리를 흔들며 헤엄쳐 오는 소릴 듣는다 길고 긴 방하기를 통과한다. ―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문학세계사, 2010.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시 속 화자는 이별 상황에서 “당신은 당신의 방식대로 메시지를 보내지만/ 나는 나의 방식대로 수신을 차단한다”라고 말한다. 스스로 만날 수 없는 이별의 정황을 알고 있으면서 기다림을 지속하고 있는 태도를 보인 셈이다. 겨울 내내 이별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얼음낚시다. 그런데 얼음낚시를 통해 잡고 싶은 것이 흔한 물고기가 아니라 ‘전설의 물고기’다. 그 물고기는 결코 인간의 방식으로 잡을 수 없기에 ‘나’는 끝내 재회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화자는 봄이 와서 해빙이 되면 죽음을 맞이할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힌다. 얼음이 갈라질 때까지 기다림의 자세를 유지하다가 끝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이별은 당신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이별이고 ‘나’의 낚시는 불가능한 것을 지속하게 하는 ‘의식’이다. 그런 정황을 통해 필자는 이별의 허망함과 기다림의 깊이를 표현하려고 했다.
이 시의 장점은 얼릴 수 없는 것을 얼리게 만든 상상이다. ‘겨울의 심장’을 얼리고 그곳에 구멍을 뚫고 낚시를 하는 상상이 이 시가 가진 매력에 해당한다. 멍든 정신이 녹조현상으로 숨이 막히는 상상이나 잡으려는 것이 이 세상에 없는 ‘전설의 물고기’인 점도 상상력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빙점」에서 객관적 상관 현상으로 쓰인 것은 얼음낚시를 하는 행위이다. 얼음낚시는 저수지나 호수, 강이 얼면 그곳에 구멍을 뚫고 물고기를 잡는 방식의 어류 행위이다. 그런데 잡으려는 건 진짜 물고기가 아니라 ‘전설의 물고기’다. “저수지의 심장에 구멍을 뚫고/ 야광찌가 되어 깜박”이면서 “당신과 나의 서로 다른 빙점을 실감”할 때 찾아오는 물고기가 바로 ‘전설의 물고기’인 셈이다. 실재하지 않는 물고기를 잡는 행위를 통해 필자는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려고 했다.
객관적 현상이 얼음낚시이기 때문에 얼음낚시와 관련된 것을 정밀하게 관찰하고 메모했다. 빙점, 얼었다 풀렸다 하는 현상, 녹조현상, 질식, 야광찌, 가장자리부터 봄이 오는 현상, 불감증 걸린 상태, 나만의 빙하기 등을 적고 그것들을 어떻게 하면 시적으로 발현시킬까? 하고 고민했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이 시에 쓰인 상상적 체험은 ‘겨울의 심장’을 얼리는 것이다. ‘겨울의 심장’은 화자만이 인식한 심장이다. 그 심장이 존재하도록 하는 것은 당신의 부재다. 그래서 당신의 부재가 가진 상황과 그것이 화자에게 갖는 의미를 상상적 체험을 통해 확장시켰다. 당신이 없는 겨울 내내 얼음낚시를 하게 되면 얼마나 지루할 것인가를 상상하여 “겨울의 심장은 얼었다 풀렸다를 반복한다/ 지루한 하늘엔 제트기가 날고/ 멍든 정신은 녹조현상으로 숨이 막히다”란 표현에 착안했다. 당신의 부재로 만날 수 없는 상황(어긋난 상황)과 관련하여 “당신과 나의 서로 다른 빙점을 실감한다/ 파닥거리는 당신의 사상이/ 나의 빙점 아래에서 춤출 때/ 차가운 악담이 당신의 노래를 감싼다/ 누군가 당신의 정체를 묻는다/ 오지를 떠돌다 생을 마감한/ 지구의 마지막 종(種 )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방식대로 메시지를 보내지만/ 나는 나의 방식대로 수신을 차단한다”란 표현도 생각해 냈다. 당신과 만날 수 없는 것을 확신한 화자가 죽음을 감행하려는 태도를 보인 점을 표현하기 위해 “결국엔 그리움의 가장자리부터 봄은 온다/ 세상의 모든 귀들이 녹아내라고/ 불감증 걸린 발바닥이 당신의 소멸을 더듬는다/ 쩌어쩍/ 쩌어쩍/ 환청처럼 전설의 물고기가/ 요염한 꼬리를 흔들며 헤엄쳐 오는 소릴 듣는다/ 길고 긴 방하기를 통과한다”란 구절도 떠올렸다. 이것들은 모두 필자가 상상적 체험을 실감 나게 한 후에 떠올린 구절들이다. 화자와 철저하게 밀착되어 진정성 있게 체험하면 이별을 안 해보거나 얼음낚시를 안 해봤더라도 충분히 시적 정황에 부합하는 표현을 쓸 수 있다.
* 또 다른 예문 찾기
크레바스에서 / 박정은
왁자지껄함이 사라졌다 아이는 다 컸고 태어나는 아이도 없다 어느 크레바스에 빠졌길래 이다지도 조용한 것일까 제 몸을 깎아 우는 빙하 탓에 크레바스는 더욱 깊어진다 햇빛은 얇게 저며져 얼음 안에 갇혀 있다 햇빛은 수인囚人처럼 두 손으로 얼음벽을 친다 내 작은 방 위로 녹은 빙하물이 쏟아진다 꽁꽁 언 두 개의 대륙 사이를 건너다 미끄러졌다 실패한 탐험가가 얼어붙어 있는 곳 침묵은 소리를 급속 냉동시키면서 낙하한다 어디에서도 침묵의 얼룩을 찾을 수 없는 실종 상태가 지속된다 음소거를 하고 남극 다큐멘터리를 볼 때처럼, 내레이션이 없어서 자유롭게 떨어질 수 있었다 추락 자체가 일종의 해석, 자신에게 들려주는 해설이었으므로 크레바스에 떨어지지 않은 나의 그림자가 위에서 내려다본다 구멍 속으로 콸콸 쏟아지는 녹슨 피리 소리를 들려준다 새파랗게 질린 채 둥둥 떠다니는 빙하 조각을 집어먹었다 그 안에 든 햇빛을 먹으며 고독도 요기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얼음 속에 갇힌 소리를 깨부수기 위해 실패한 탐험가처럼 생환 일지를 쓰기로 한다 햇빛에 발이 시렵다 - 201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빙하기 / 박성현 당신 두 눈에 서려 있는 얼음이, 먼 하늘로 스며들다 지쳐 우두커니 서 있는 노을 같았습니다 마음만 움켜쥐고 얼어버린 거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살얼음 졌으니 오늘만큼은 물러설 곳이 생긴 거겠지요 그렁그렁 남은 햇살을 손바닥으로 쓸어 모으고 가루약을 털어 넣듯 삼켰습니다 팔다리에도 얼음이 끼어 있을까요 당신은 자주 갸릉거렸습니다 밤새 뒤채면서 뜬눈으로 새웠습니다 매일 엄마의 먼 곳이 그리워 울다가, 울음까지 내려놓기는 서러워 마음만 얼렸던 걸까요 얼어붙은 마음이 며칠이고 몇 달이고 계속되는 밤이었습니다 불투명한 얼음도 당신 것, 그러니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그 두껍고 어두운 곳에서 당신을 녹일 햇살의 울음을 기다려야겠습니다 -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문학수첩, 2020)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하린 시인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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