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조가 (黃鳥歌) // 유리왕(瑠璃王) 유리왕(琉璃王, ? -A.D.18) 고구려 제 2대 왕. 동명왕의 아들. 이름은 유리(類利), 유류(孺留) 부여에서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로 가서 왕위를 계승하였음 翩翩黃鳥(편편황조) 훨훨 나는 꾀꼬리는 雌雄相依(자웅상의) 암수 다정히 즐기는데, 念我之獨(염아지독) 외로울사 이 내 몸은 誰其與歸(수기여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출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참고] 숲 속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저 꾀꼬리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정답게 노닐고 있구나. 사랑하는 임 잃어 외로운 이 내 몸은 이제 나는 누구와 짝을 하여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배경 설화 및 감상] 고구려 제2대 유리왕 즉위 2년 겨울 10월에 왕비 송씨가 세상을 떠나매, 왕은 다시 두 여자를 맞아 계실로 맞았다. 그 하나는 골천 사람의 딸 화희였고, 또 하나는 한나라 사람의 딸인 치희였다. 이 두 여자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왕은 할 수 없이 동서 두 궁궐을 지어 따로 살게 하였다. 한번은 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나가 이레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두 여자가 서로 다투어 화희가 치희를 욕하되, "너는 한나라 비첩(婢妾)의 몸으로 어찌 이렇게 무례히 구느냐?" 하였다. 치희는 부끄럽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제 고장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이 사냥에서 돌아와 그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그 뒤를 쫓았으나 치희는 노여움을 풀지 않고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나무 밑에서 쉬다가 나뭇가지에서 정답게 지저귀고 있는 한 쌍의 꾀꼬리를 보고 짝을 잃은 슬픔 이별의 정한을 표현했다 [참고]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황조가>의 원문은 한자이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삼국사기가 나온 고려 시대에 한글은 없었으므로, 이러한 <황조가>를 오늘날 이해하기 쉽게 만든 것이 번역시이다. 그러나 <황조가>를 처음 불렀던 유리왕은 한시로 이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의 우리들처럼 우리말로 노래했다. 다만 우리말로 부른 노래가 기록으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아직 우리만의 독자적인 표기 수단을 지니고 있지 못했기에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빌려 기록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날아가는 새의 모습을 보고 유리왕은 '펄펄'이라 노래했을 것이다. 이를 기록하기 위해 한자어 중 '펄펄'의 의미를 지닌 의태어 '편편'을 빌려온 것이다. 따라서, <황조가>는 처음부터 한자로 기록한 한시가 아니라 우리말로 불리던 노래가 정착의 과정에서 한자로 기록된 한역시이다. 현전하는 최고(最古)의 개인적 서정시, 집단 가요에서 개인적 서정시로 넘어 가는 단계의 가요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