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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내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 활동한 것은 2003년이다. 당시 국회 다수당이던 한나라당에서 연구소에서 요청한 친일인명사전 발간지원 예산 5억 원을 박근혜 당시 대표의 주도로 반대하고 삭감한 일이 있었다. 이에 전국의 누리꾼들이 단 14일 만에 삭감한 예산보다 더 많은 7억 원을 모금하여 연구소에 기부하였다. 나도 그때 성금을 내고 연구소 회원이 되었다. 연구소에서는 우리나라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 건 프랑스가 한 것처럼 나치시대 독일에 협력한 반프랑스행위자에 대한 법률적 정리와 같은 민족적 배신자 처리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후손들에게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이라도 인명사전을 만들어 물려줘야 이 시대를 살았던 조상으로서 역사에 죄를 짓지 않는다고 1991년부터 본격적인 연구작업에 들어간 바 있다. 이전에 1965년부터 고 임종국 선생이 개인적으로 1989년까지 연구한 성과가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2006년에 하반기에 내가 주도하여 경북에서는 유일하게 2007년 민족문제연구소 경북북부지회를 결성하였다. 출범당시 구성원은 교사, 공무원, 회사원, 귀농인사, 회사원, 약사, 광복군출신 어른 등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6개월의 준비를 거쳐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는데 ,안동 KBS 뉴스에도 방송되고, 신문에도 나고, 내가 라디오에 생방송 인터뷰도 했다. 그뒤 매월 한차례씩 모여서 회원들이 연구소의 연구성과를 돌려보고 정치, 역사, 사회 등등에 대한 얘기로 서로 우의도 다지고 했다.
그러다 2008년 5월, 풍기 광복단기념공원의 운영을 책임진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인 회원이 우리지회 회의에 풍기의 초대 인삼조합장을 지낸 친일인사 이풍환 씨에 대하여 풍기인삼조합이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할 예정이라며 이를 안건으로 다루어 달라고 인삼조합측 자료를 가져왔다. 이풍환 씨는 풍기에서 3.1운동 당시 만세운동 시위가 일어났던 1919년 4월 19일, 풍기지역 인삼재배와 인삼조합, 양조장 등에 대한 부일의 공로로 조선총독의 표창을 받은 사람이다. 그후 여러차례 총독표창을 받았다. 어찌 되었건 풍기사람들이 3.1 운동에 함께 하며 투옥되고 고생할 때 조선총독표창을 받은 것은 왜놈에 대한 협력의 공로이지 동포에 대한 공로는 아닌 것은 분명하다. 당연히 우리 지회는 이 100주년 기념사업이야 맘대로 하더라도 친일인사 흉상과 공덕비는 안된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2. 본격적인 말
2007년 말 경, 심산 김창숙 선생을 도와 파리장서사건에 도움을 준 공로로 애국지사 상훈을 받은 고 송영호(건국훈장 애족장), 고 송재호(수상은 없음) 씨의 조카되는 장수관광농원 사업을 하는 송종박 씨가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회장이 되었다.
그런데 송 회장은 자신이 독립투사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이풍환 기념사업에 대하여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차원에서 찬성하고 이를 관철시키고자 이사회까지 소집하였다. 이에 광복단기념사업회(이하 광복단) 사무국장인 우리 회원은 "광복단에서 어찌 친일인사기념사업에 찬성하느냐?"고 반대하였다.
그러자 회장은 지난 14년간 문제없이 운영되어 온 위탁운영을 지금처럼 찬성한 이사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영주시에서 매월 광복단 위탁운영비로 나오는 지원금을 없애라고 영주시장에게 요청, 2009년 1월부터 영주시의 광복단 운영비 지원은 끝나고 말았다. 광복단기념사업회의 돈줄을 끊어 광복단기념사업회를 무력화 시켜 자신의 친일인사 기념사업 찬성 구상에 반대한 사무국장의 행동에 보복을 한 셈이다. 영주시에서도 위탁운영이 광복단의 전문성이나 업무의 수월성, 관리의 편리성 등 여러 면에서 타당한데도 영주시장과 밀접한 관계인 송 회장의 요청에 영주시장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1년간만 직영하기로 하고 지원금을 종료했다. 그리고 회장은 친일인사 기념사업에 대한 찬성에 따른 좋지 않은 여론 등등, 여러가지 사정이 있어 사퇴를 하였다. 그러나 광복단에 대한 업무를 보이지 않게 계속 방해하였다. 사퇴하여 수리가 되었음에도 업무를 인계해주지 않아 운영비를 쓸 수 없게 하며 후임회장이 선출되면 보자고 하였다 한다.
이에 사무국장은 광복단기념사업회의 정상화를 위하여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정관을 검토한 결과 회원들이 회비를 내서 운영하면 될 것같아 1년간 회비를 낼 진성회원 모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모집된 회원들을 통하여 총회를 소집하고 회원 총회에서 광복군 출신인 우리지회 회장님을 광복단의 회장으로 선출하였고, 새로운 운영진도 구성하였다. 그리고 법인 대표에 대한 변경등기도 하여 마침내 전 회장으로부터 운영비도 넘겨 받았다. 나는 감사 겸 운영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사무국장인 회원과 협력하여 광복단 정상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100여 명 회원들이 회비를 내고 있다. 그러나 월 200만 원은 되어야 그런대로 굴러가는데 많이 부족하다. 광복단기념공원내에 우리가 터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기존 사무실 한켠을 지난 14년간 기념사업한 것을 보더라도 양해하라고 영주시와 협의하여 쓰고 있고, 그 사무실을 지키며 광복단을 이끌어야 할 여직원이 있어야 하기에 우리 회원 중에 아줌씨 회원 한명에게 부탁하여 인건비 조금만 주고 수고를 부탁했다.
그런데 또 사퇴한 전 회장이 지금도 영주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하는지 몰라도 여러가지 방법으로 방해를 놓고 있다고 들었다. 자신이 이미 회장을 사퇴했고, 사표가 이사회에서 수리되었고, 우리 지회장님이 신임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그 신임회장과 인사까지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뜻이 맡는 이사 몇 명과 영주시장에게 광복단기념사업회 회장단이라 칭하면서 회장단 이름으로 광복단기념사업회에 대하여 종전처럼 위탁운영을 하지 말 것을 요청하고 다녔다고 한다. 자신이 독립투사의 후손이면서 친일인사 기념사업에 찬성하는 것도 그렇고, 영주사회에서 재력이 있다고 이를 바탕으로 회장을 사퇴한 후에도 지역보훈사업을 훼방 놓는 것도 좋은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이것을 이겨내고 고향의 독립정신을 지켜낼 것이다.
그래서 내가 친구들에게 이지역 유일한 보훈단체인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에 1년간 후원회원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늦어도 내년에는 지금 상황에서는 영주시에서도 월 300만원이면 되는 운영비를 년간 몇 억 원 들여가면서 광복단기념공원 직영을 원하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위탁운영을 받아 올 예정이다. 지금도 그것을 위하여 영주시와 계속 접촉하고 있다. 영주시에서도 적극적인 검토를 시작한 것으로 들었다.
희망의 싹이 보이기 시작하니 고향의 보훈사업에 대하여 친구들이 짐을 진 지게꾼에게 일어서도록 뒤에서 조금만 지게를 떠밀어 일으켜 세워주기 바란다.
후원 회비는 월 1만원. 후원기간은 가입일로부터 1년 간이다. 기간을 정하지 말고 더 오래 고향을 위해 평생해도 좋다. 나도 정년퇴직 때까지는 할 예정이다.
계좌 : 농협 751082-51-038385 (대한광복단)
안내전화 054-635-3606(여직원이 받음)
나에게 전화해도 된다 010-8845-8702 또는 사무국장 김진회 010-3226-6323
나에게 전화해서 알려줄 사항은 주민번호, 월 1만원 자동이체할 계좌번호이다. 문자로 알려줘도 좋고 직접전화해도 좋다.
내가 역사를 전공하지 못했지만 역사문제에 관심이 있다보니 이런 일까지 하게 되었다. 알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내 스스로 부끄러울 것 같아서 임원도 맡았다. 그러나 이 시대에 우리의 근현대사에 대해서는 우리가 학교 때 배운 것과는 너무나 다른 사실이 많기 때문에 좌, 우, 진보, 보수를 모두 망라하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미군이 왜 친일파를 등용하여 우리역사를 뒤집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나도 이런 사실을 알기까지 퍽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 아래 글도 읽어보고 대한광복단에 대하여 이해를 높이기 바란다.
2009.5.21.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통꽈 친구들을 첫 손꼽아 자랑하는 동규로부터
참, 근태가 모처럼 전화 왔는데 요즘은 폐기물처리 업체에서 일한다고 한다. 일요일도 없고 비가 오면 쉬는 날이라고 한다. 성실하긴 하지만 살기는 여전히 힘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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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단의 활동과 친일파 처단
1. 독립운동단체의 성격
대한광복단은 1913년 영주의 풍기에서 우리가 일제에 강점된 초기에 국내에서 독립을 위하여 결성된 비밀결사조직이었다.
2. 결성 주도자
대한광복단은 상주 출신 소몽 채기중(1873.7.7(음) 고종10년) 선생이 1906년 풍기로 거처를 옮긴 후 결성을 주도했다. 채기중 선생은 상주와 풍기에서 개항(1876년) 이후 농민전쟁, 의병항쟁 등 무력항쟁의 역사적 영향을 받으면서 무장항쟁의 독립운동 방법에 관한 전망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3. 주요 구성원
대한광복단의 주요 구성원은 참여 범위에 차이가 있으나 의병계열의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천안의 유창순(庾昌淳- 민종식 의병진의 의병), 유장열(柳璋烈), 청양의 한훈(韓焄-민종식 의병진의 의병), 봉화의 강순필(姜順必 또는 상주 출신이라고도 함- 이강년 의병진의 의병), 김병렬(金炳烈), 김상오(金相五), 괴산의 정운홍(鄭雲洪), 예천의 정진화(鄭鎭華), 정만교(鄭萬敎) 등이 었으며 장두환, 강병수, 황상규, 이각 등이 더 참여한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이들은 의병전쟁에 직접참여 했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풍기 출신이 아니면서도 독립운동에 관한 전망을 갖고 풍기를 찾아 들어온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즉 소백산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풍기에서 “비밀혁명기관‘을 만들어 국권회복을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대한광복단은 후에 양제안 선생의 알선으로 대구 출신의 박상진(朴尙鎭) 선생을 만나면서 확대 발전하고, 김상옥은 삼남으로 조직을 확대한다. 이때부터 대한광복회로 명명되게 된다. 대한광복회는 김좌진 장군도 회원있으며, 1910년 대 국내비밀결사의 대표적 단체이기에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접근방식으로 연구가 깊어지고 있다고 한다.
우재룡 선생의 백산실기에 그 조직과 주요구성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령관 : 박상진(朴尙鎭)
지휘장 : 우재룡(禹在龍), 권영만(權寧萬)
지부장 : 채기중(경상도), 김한종(충청도), 이병찬(전라도), 김선호(경기도), 최봉주(함경도), 조현균(평안도), 김동호(강원도)
본부회장 : 박상진, 최준(崔浚 - 경주부호), 이복우 등
만주사령관 : 이석대(李奭大)
국외 : 만주 안동여관 손회당(孫晦堂), 봉천 삼달양행(정미소) 정순영(鄭舜永)
4. 국권회복 노선과 투쟁방법
사상 - 공화정을 택한다.(왕정복고 사상주의자도 있었으나 공화정을 택한 점에 주목한다)
성격 - 혁명단체이며 전국적인 규모에 근대국가 이념을 갖추고 대종교적 민족주의 자주성을 지녔다.
노선 -독립군자금을 모집하여 독립군을 양성한다.
이의 투쟁방법은 무기구입과 친일부호 처단 등 의협투쟁을 당면과제로 제시
노선 - 국내외 독립운동세력간 유기적 결합을 도모한다.
이의 투쟁방법은 대구, 만주, 경기도, 황해도, 전남지역에도 지부를 설치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하였고 서간도 독립군 기지의 건설을 추진함으로써 국외로까지 확대해 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5. 친일파 처단
1)대구 권총사건 - 1915년 7월, 박상진, 정운일, 최병규, 김진우 등이 대구 부호 정재학, 이장우, 서우순 등을 독립자금으로 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 서우순의 집에 권총을 들고 들어갔으나 실패, 체포되어 김진우 12년, 김진만, 정운일, 최병규 10년, 권국필, 최준명 2년, 박상진, 김재열 6월, 홍주일 5월, 이시영 4월을 선고받았다. 이중 정운일은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7년간 수감생활을 하였다.
2) 채기중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활동과 장승원(전 국무총리 장택상의 부친) 습격사건
1917년 음력 7월 말, 채기중과 박상진은 대한광복단 이름으로 칠곡의 친일부호 장승원(장택상의 부친)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박상진은 장승원에게 광복단에 대한 원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일제관헌에 밀고할 듯한 태도를 취하자 “원래 그자가 이왕과 소송을 벌이고 소작인을 괴롭힌 경북의 유력자임으로 그를 살해함으로써 그 소문이 모든 도에 전파되면 광복회의 사업을 추진하는데 편리하기 때문”이었다고 친일부호 장승원 처단이유를 규정하였다.
이에 음력 9월 26일 채기중은 장승원의 집에 들어가 채기중과 강순필이 저녁 8시 경 각자 휴대한 권총으로 장승원에게 발사하여 총알이 장승원의 후두돌기와 왼쪽 무릎 상부에 적중하였고, 장승원은 대구 자혜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음력 9월 28일 숨졌다.
채기중, 강순필이 친일부호 장승원을 처단하던 날, 유창순은 장승원의 집에 불을 지르려 하였으나 자신이 들고 있던 석유가 든 맥주병이 깨어질 때 손에 부상을 입어 불을 지피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3)채기중의 경북지역 독립운동 자금 모집활동
채기중은 김한종에게 경북 안동 풍서면 가곡리 권현준을 찾아가 독립운동자금을 받아 올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김한종은 권현준에게 “우리는 광복단원이다. 미리 통고한 금원을 교부하는 것을 불응하면 장승원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 하여 300백원을 교부받았다. 이후 채기중은 임세규에게 지시하여 안동군 와룡면 안승국에게 백원을 받게 하고, 안동군 임동면 유승호에게 군수금 200백원을 제공하라고 경고문을 보내고 95원을 제공받았다.
(일제시대 1원은 지금의 4만원 정도이니 300원은 지금의 1200만원 가량임)
4)채기중의 호남, 충청지역 독립운동 자금 모집활동
채기중은 1918년 호남의 부호들에게 독립군자금 5천원 - 5만원까지 기입한 포고문을 보내고 전남 보성군에 도착하였으나 자금모집 대상자들의 집 주변 경계가 심하여 뜻을 펴지 못하였다. 또 채기중은 독립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최면식으로부터 권총과 탄환을 기증받고 광복단원으로 가입시켰으며 충청도 지역에 대해서도 회원확보를 위하여 활동하였다.
5)임세규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활동
임세규는 영주 봉현 노좌 사람이다. 봉주 또는 동근이란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17년 광복단에 가입 후 채기중으로부터 친일부호 장승원 암살 계획을 지시받았다. 임세규의 임무는 장승원의 동태파악이었으며 이를 수행하였다.
1917년 음12월 임세규는 인천으로 이동, 그것의 김한종, 장두환, 김재창 등을 만나 독립군자금 모금 계획을 세우고 김한종으로부터 부호들에게 보낼 포고문을 받아 우편으로 송달하였다. 이때 김한종과 장두환은 대한광복단원들이 장승원을 암살한 것과 같은 이유로 충남 아산군 도고면 신유리 도고면장 박용하를 살해하기로 결의하고 12월 12일 박용하의 집으로 들어가 광복회 명의의 사형선고문을 내보이고 권총을 발사하여 좌측 흉부에 맞추어 사살하였다.
6)채기중, 임세규 이외 대한광복단원의 활동
1916년 5월 한훈, 김상옥, 유장렬, 곽경택 등의 단원들이 보성, 벌교의 친일부호 양재학, 서도현을 처단하고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수합하였다. 한훈은 1917년 1월 벌교 부호 서인선을 납치하여 군자금을 수령하는 활동을 벌였다.
4. 내부 밀고와 순국
도고면장 박용하 처단사건 이후 대한광복단원인 이종국(李鐘國)이 일제관헌에 밀고함으로써 조직이 탄로나 상당수 구성원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에 무려 400여 명이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918년부터 3년동안 공주지방법원, 경성복심법원, 대구복심법원에 이르기까지 재판이 벌어졌다. 검거당한 단원 중 20여 명이 사형을 언도 받았으나 재판과정에서 형이 줄거나 일본 소화(昭和)왕의 즉위 특별사면으로 감형되고 6명이 사형집행되었다. 1921년 8월 박상진, 김한종이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고, 채기중, 김경태, 임세규, 강순필은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참고 영주독립운동사. 2008년. 영주시, (사)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간행)
첫댓글 두말없이 도와주는 데 동의한 친구들께 감사드린다. 더 많은 친구들이 도와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