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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사회를 보는 눈
-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 과학
김 동 광
I부. 과학기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 잡종의 미학
- 오늘날 잡종이 중요시되는 이유
자연과 사회, 문과와 이과, 자연과학과 인문학 등의 이분법적 사고로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기 힘들다. 과거에는 자신의 분야만 알아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문제들은 어느 한 분야로만 이해할 수 없는 복합적인 문제들.
- 근대 세계는 인간과 기계, 또는 인간과 물질의 잡종(雜種, hybrid)을 양산하는 시대
우리 자신도 사이보그(도나 하러웨이, 사이보그 선언)
- 간학문적 접근, 間學問 interdisciplinary
분야, 또는 접근방식들 사이의 융합(fusion)
예) 생태학과 여성학의 접근방식이 결합하면서 에코-페미니즘이 등장
- 나의 세계선(world line)
러시아 태생의 물리학자로 빅뱅이론을 창시한 사람 중 한명인 조지 가모브는 자신의 자서전 제목을 ‘입자들의 궤적’을 뜻하는 “나의 세계선”이라고 붙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은 입자들이 비산하는 것만큼이나 숱한 시행착오를 되풀이. 이러한 시행착오가 건강하고 튼튼한 잡종을 만드는 과정. 결과지상주의 협애함을 극복하고 ‘과정(process)과 결과가 분리 불가능함’을 인식할 필요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물리학과 철학의 잡종
우리가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해란 무엇인가?
과학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설을 수립, 검증, 이론 정립)
단일한 통로가 아닌 다양한 통로들이 있다.
2. 과학을 둘러싼 오해들
- 과학기술 문화의 시대
흔히 오늘날을 과학기술 문화의 시대라고 부른다. 과학기술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사람들의 삶에 높은 규정력을 가진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과학기술의 산물인 인공물(artifact)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가령 극소전자기술과 통신기술의 결합인 휴대폰이나 정보기술의 발달로 가능해진 인터넷은 불과 수십년 전만해도 공상소설에나 나옴직한 기술이었지만, 오늘날 휴대폰이나 인터넷이 없는 생활이란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이다.
- 삶의 양식과 사유 양식의 과학화
이처럼 현대 과학기술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심대한 영향을 주면서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사고하는 방식까지 과학화(科學化)시킨다. 이러한 상황은 어른들의 세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식기술의 보조를 받고, 젖병과 분유로 길러지고, 첨단기술의 산물인 다양한 장난감에 둘러싸여서 생활한다. 실제로 과학기술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환경이며 조건인 셈이다.
이처럼 과학과 기술은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제 2의 자연”으로 바꾸고, 우리의 생활과 사고에 깊은 영향을 미치면서 우리의 삶과 복잡한 연관을 이루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과거에 종교가 차지하던 지위를 대신하기도 하고, 도덕이나 윤리에 변화를 가져오고(배아 복제를 둘러싼 논쟁 등 생명공학의 상황), 여가와 오락에서도 과학기술에 대한 의존도를 크게 높이고 있다. 과학기술은 우리의 모든 삶과 뗄레야 뗄 수 없이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과학은 우리가 살아가는 토양과도 같다.
- 과학에 대한 오해, 또는 예외주의
과학과 기술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여전히 과학이나 기술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 생활에서는 과학기술의 산물을 스스럼없이 사용하고 과학기술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과학이나 기술에 대해서는 “나와는 무관한 무엇”이나 “보통사람은 알 수 없는 무엇”으로 생각하는 이중적인 태도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이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에 과학기술 자체가 보통 사람들에게 권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잘못된 오해를 세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과학은 특별한 것이다. 이러한 예외성은 과학자에 대한 일반적인 상(像)이 흰머리의 노 과학자가 흰 가운을 걸치고 칠판에 어려운 수학공식을 쓰는 모습으로 정형화되는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흔히 과학자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예외적인 사람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팽배해 있다. 이러한 생각은 과학지식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과학지식은 자연의 진리를 추구하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이며, 그 밖의 지식과는 무언가 다르다는 인식이 보편적이다. 물론 근대 과학의 지식은 그동안 어떤 지식보다도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높은 설명력을 발휘했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물질문명과 문화가 그러한 지식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지식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이라는 생각은 오늘날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휠체어의 물리학자로 잘 알려진 영국의 스티븐 호킹 박사는 최근에 발간된 그의 저서 <호두껍질 속의 우주>에서 “과학이란 끊임없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가설을 수립하고 그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벌이는 노력”이라고 말했다. 17세기에는 뉴턴의 이론이 만고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졌지만, 3백년 후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허물어졌고, 이 이론들도 언젠가는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될 것이다. 절대적인 과학지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이 세계를 설명하려는 노력만이 계속될 뿐이다. 과학이 특별하다거나 과학지식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비과학적인 사고이다.
둘째, 과학에는 명확한 한 가지 답이 존재한다. 첫 번째 오해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이 두 번째 오해도 사람들 사이에 많이 퍼져있다. 이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서는 여러 가지 답이 경합을 벌일 수 있지만, 과학은 객관적인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단일하고 명쾌한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현실과는 큰 차이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환경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과학기술적 주제를 둘러싸고 전문가라는 과학자들도 다양한 입장을 기초로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수도물 불소화, 광우병 등) 최근 과학사, 과학철학, 과학사회학 등의 과학기술학은 과학지식이 생산되고, 과학기술의 쟁점을 둘러싼 논쟁이 해결되면서 하나의 해결책이 사회문화적으로 구성(construction)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있다.
셋째, 과학기술이란 중립적인 도구라는 신화. 흔히 과학은 양날을 가진 칼날과 같아서 과학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제로 오늘날 과학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모든 과학기술 속에는 정치가 배태되어 있다. 최근 줄기세포 기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배아줄기 세포 대 성체 줄기 세포” 논쟁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비단 이러한 논쟁적인 주제 이외에도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고 있는 휴대폰이나 인터넷도 결코 중립적인 도구로 그치지 않으며, 우리 사회와 우리 공동체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치며 나아가 인간 존재의 정체성 자체에까지 깊이 각인된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검색의 일상화는 우리 시대의 지식의 의미, 또는 지식 획득의 방식에 큰 영향을 준다.
이러한 신화와 잘못된 오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학과 사회에 대한 성찰적 관점이 요청될 것이다.
- 사례1 ; 휴대폰의 이용과 공동체
휴대폰이 일반 전화의 가입자수를 넘어서 우리 사회의 주된 의사소통 수단으로 진입.
휴대폰이라는 기술의 발전 궤적 속에 포함된 사유성과 같은 사적 특성들로 인해서 우리 사회의 소통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휴대폰 예절이 강조되는 곳이 주로 전통적인 공동체적 소통구조(강의실, 극장, 지하철 등 면대면 소통과 공동체적 소통이 이루어지던 곳)이라는 것은 해당 기술 속에 기입된 사적 특성이 공적 특성과 갈등을 빚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휴대폰은 단순한 도구로 그치지 않고 우리 공동체적 의사소통을 개별화, 또는 사유화시키는 측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 사례2 ; 인터넷 검색과 지식의 성격 변화
네** 등 검색도구에 의존해서 지식을 찾는 것은 일상적. 그렇지만 이것은 지식을 분절화, 파편화시키면서(상품화에 용이), 동시에 지식을 단순한 결과물로 간주하는 경향을 강화.
배경지식의 획득과 같은 전통적인 지식 추구방식이 가진 여러 가지 장점들을 없앤다. 그 과정에서 지식은 그것이 생성된 배경인 역사적 맥락이나 사회적 측면과 유리된다. 이것은 지식 자체의 소외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지식의 분절화, 또는 소외는 지식이 가지는 성찰적 측면을 거세시키는 문제점이 있다. 전통적인 맥락에서 지식이 성찰적 기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풍부한 배경지식을 토대로 한 지식추구의 과정에서 배태되는 포괄성과 풍부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
- 사례3 ; 사회적 편견이 배태되는 청결기술
청결도 그와 연관된 기술들과 결합하면서 여성들에게 청결을 강요하고 특정 계층을 기준으로 한 과도하게 높은 청결 수준을 요구하면서 여타 계층을 소외시키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3. 과학과 사회에 대한 간학문적 접근의 대두
- 과학기술학(science technology studies, STS)
양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기술이 인류를 낙원으로 이끌 것이라는 계몽주의 이래의 신념이 흔들리고, 60년대 이래 환경문제가 등장하면서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과학에 대한 인식이 크게 전환.
한편으로는 과학기술과 사회(Science Technology & Society, STS)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간학문적(interdisciplinary, 間學問的) 접근이 시작. 과학기술을 전문가들의 손에만 맡겨두어서는 안되고 시민사회의 참여와 규율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예-최근 황우석 사태)
- 과학기술학의 여러 분과
과학기술철학, 과학기술사, 과학기술사회학, 과학언론, 과학정책
4. 과학을 둘러싼 새로운 영역의 등장
종전에는 과학기술을 하는 사람이라 하면 과학자나 기술자로만 국한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매우 폭넓은 과학의 영역이 새롭게 창출.
특히 과학기술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이 날로 높아지고 과학의 사회적, 윤리적 측면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과학기술학(STS)의 접근방식에 대한 수요가 계속 늘어나는 추세.
- 과학기술자(대학, 연구소, 기업)
- 과학정책과 연관된 활동(정부, 과학기술부의 정책 부서, 연관 기구들,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직)
- 과학언론(과학전문기자, PD, 프로그램 제작자)
- 과학 저술 및 번역(과학 칼럼, 대중 과학서, 어린이 과학서 집필,
과학서 번역)
- 과학기술 시민운동(환경운동의 한 영역에서 벗어나서 본격적인 과학기술 시민운동 본격화. 시민과학센터, 시민참여연구센터 등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참여의 다양한 방안 모색, 실천. 생명공학 감시연대처럼 사회, 윤리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을 수 있는 연구에 대한 감시활동)
II부. 황우석 사태를 통해서 보는 과학의 상황
- 무한경쟁 시대의 과학
인터넷 과학신문 <사이언스 타임즈> 4월 26일자에는 MRI(자기공명단층촬영장치)를 개발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1991년)을 수상한 리처드 언스트 교수의 ‘21세기 사회상과 과학자’에 대한 의미심장한 강연 내용이 “부정한 과학을 몰락시켜야...(이강봉 편집위원)”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국내 한 연구소 개원식 기념세미나에 참석한 그는 오늘날 사회와 과학이 공통으로 처한 상황을 “무제한(unlimited)”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즉, 개인의 자유,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신뢰,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격차 등이 무제한으로 벌어지는 반면, 협력은 사라지고 무한 경쟁이 횡행하고, 윤리적 토대가 무한정으로 무너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언스트 교수는 이러한 사회상이 곧바로 과학자의 환경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21세기는 과학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부자들은 과학에 대해 무제한의 지원을 하고, 그로 인해 과학자들의 격차는 무제한으로 벌어지고 과학자들 사이의 협력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과학자들 사이의 무한 경쟁이 채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무한경쟁에 떠밀려 힘겨운 부담을 안고 있는 과학자들은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서 거짓말이나 부정행위에 무감각해지고 이른바 ‘부정한 과학(unjust science)’을 양산하게 된다. 그는 21세기 과학자들이 해야할 일이 속도경쟁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과학을 몰락시키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황우석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가 나오기 전이던 당시 이 노(老) 과학자는 우리가 겪고 있던 사건의 본질, 그리고 이 사건을 둘러싼 좀더 넓은 정치경제적 맥락을 정확하게 짚어주었다.
- 지나친 성과주의와 과학의 도구화
이번 사태의 일차적인 책임은 물론 황우석 교수를 비롯한 핵심 연구자들에게 있다. 그들은 끝까지 거짓말을 하다가 백일하에 모든 것이 밝혀질 때에야 마지못해 사실을 인정했고, 진위 문제가 불거졌을 때 정당하게 자료와 증거를 토대로 사실 여부를 밝히려는 과학적 태도를 보여주지 못하고 자신들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정부와 일부 지지자들에 의존해서 검증을 피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몇사람의 부정직성으로만 문제를 돌린다면 우리는 이번 사태에서 별반 교훈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과학, 그리고 과학 연구는 그렇게 단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냉전이 끝난 이후, 그동안 군사력으로 경쟁을 벌이던 많은 나라들은 이제 경제력을 둘러싼 무한 경쟁에 돌입했다. 그 과정에서 과학은 이른바 경제발전을 위한 중요한 성장동력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과거 사회주의권 국가들을 포함해서 모든 나라들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너도나도 과학 연구에 많은 자금을 쏟아 부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60년대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으로 과학기술 분야에 많은 투자를 했고, 70년대에는 과학입국이라는 구호를 내걸어 새마을 운동과 함께 “전국민 과학화 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에 시달린 노동자들의 희생이 대표적인 문제점이었다, 그렇지만 이번 황우석 사태를 낳은 근본적인 원인의 상당부분도 이 과정에서 이미 배태되었다. 그것은 ‘과학의 도구화’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과학이 경제발전을 위한 도구로 간주되는 것이다.
- 다양한 가치 배제
물론 “그게 왜 나쁘냐?”라는 물음이 나올 수 있다. 사실 근대과학은 그 형성과정 자체가 자본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모든 나라들이 직접 나서서 과학연구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붓고 있다. 따라서 “우리도 뒤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을 오로지 경제발전의 도구로만 인식할 때 과학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한낱 수단이 되고, 국가간 경쟁이 격화되면서 지나친 성과주의가 과학자들의 목을 죄게 된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과학에 대한 다양한 가치부여가 불가능해지고, 경제적 가치만이 강조되는 점이다.
- 과학과 윤리
황우석 교수는 윤리 규정에 어긋나는 연구원의 난자 기증을 시인하면서, 당시 “일과 성취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당장 성과를 내야한다는 압박감으로 윤리 문제를 도외시하고, 나아가 연구 결과 자체를 조작해서라도 다른 나라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번 사태에서 황우석 이외에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할 집단은 정부와 정치권이다. 대통령을 비롯해서 정치권의 실세들은 한결같이 황우석 교수의 인기에 편승하려고 안간힘을 기울이면서 실질적으로 황우석 교수가 윤리를 무시하고, 논문을 조작해서라도 성과를 내놓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대통령은 “기술이 아니라 마술”이라는 말로 비윤리적 연구를 칭송하고, “윤리 논란으로 연구가 중단되어서는 안된다.”느니 “이 정도에서 덮고가자”라는 식의 발언으로 조기에 막을 수도 있었을 문제들을 키워서 국가적 불행을 야기했고, 대다수의 여야 국회의원들도 황우석 교수에게 줄을 대기 바빠 문제를 지적하기는커녕 덮기에 급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리는 부수적, 주변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 국가주의, 그리고 일그러진 애국주의
우리나라가 너무 급하게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과학을 도구로만 간주하는 경향이 과학자와 정부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내면화. 박정희 정부는 과학을 경제성장과 북한과의 체제경쟁의 일환으로 삼았고, 그 과정에서 과학이 나라를 위해 동원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김. 그래서 “과학의 발전 = 국가의 발전”이라는 등식이 우리들 마음속에 은연중에 뿌리내리게 된 것 같다. 이것을 국가주의라고 한다. 그리고 흔히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파스퇴르의 말을 끌어다가 정당화시키곤 한다.
결국 많은 사람들의 열광을 폭발시킨 뇌관은 다름아닌 국가주의였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 국가주의의 뿌리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이 기회를 예방주사로 삼지 못한다면 더욱 불행한 사태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황우석 사단과 언론, 그리고 정치권은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국가와 일치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국민적 지지를 얻어내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 연배의 사람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우리는 국기와 애국가에 너무도 친숙해있다. 국기 앞에 서면 저절로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 ...”하게 되고, 타자연습을 할라치면 손가락은 어김없이 국민교육헌장 첫머리인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를 두들긴다. 다시 말해서 국가로 지칭되는 무엇이 나, 또는 집단의 정체성보다 항상 우선시되는데 익숙.
그러나 과학을 국가와 일치시키는 국가주의는 이번에 나타난 비이성적인 애국주의처럼 엄청난 불행을 낳을 수 있다. 왜냐하면 잘못된 과학에 대해 비판하는 모든 목소리를 반국가나 매국노, 또는 좌익 등으로 몰아붙일 수 있기 때문.
이번에 논문의 진위를 둘러싼 논란에서 황우석 교수는 자신이 배아복제의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조작 문제를 가리려는 태도를 보이고, 그의 지지자들이 이 주장을 여과없이 받아들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조작을 했는지에 대한 진실인데 본인은 자꾸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줄기세포가 하나든 열개든 그게 뭐 중요하냐’는 변명을 하는 것은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비윤리적이든 사진을 조작하든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태도. 그리고 상당수의 사람들도 줄기세포가 우리나라에게 안겨줄지 모르는 경제적 성과나 노벨상에만 관심을 둘 뿐 그 과정에 수많은 난자가 들어가도 “그까짓 난자가 뭐 그리 대수냐”는 위험한 발상을 하게 되었다.
- 난자의 실험 도구화
이번에 윤리 문제가 밝혀진 후에도 1천명이 넘는 여성들이 스스로 난자를 기증하겠다고 나섰다. 마치 지난 IMF 사태에 금붙이를 기증하던 모습을 연상. 더구나 특종거리를 쫒느라 바빠 문제점과 위험을 지적하기는커녕 마치 미담을 보도하듯 떠들어대는 대부분의 언론은 이런 사태를 오히려 부추겼다. 하지만 어찌 난자가 금과 같을 수 있겠는가. 난자는 생명의 소중한 씨앗이자 여성성(女性性)의 중요한 요소. 그것은 어떤 목적에도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어떤 이유로도 국가를 위해 집단적으로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난자를 추출하는 과정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자칫 치명적일 수 있는 위험은 고려되지 않았다.
- 과학기술의 사회적 측면, “누구를 위한 연구인가”
많은 사람들은 줄기세포 연구가 난치병이나 불치병 환자를 위해 필요하고, 이 환자들을 위해서는 난자를 희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번 기회에 우리는 과연 줄기세포 연구, 특히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질병 치료로 직결되는지, 그리고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과연 누가 그 혜택을 받을 것인지 철저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줄기세포 연구가 불치병을 치료해줄 것이라는 믿음은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줄기세포 연구가 실제 질병 치료에 사용되려면 숱한 난관을 돌파해야 하고, 가능한 시기가 언제인지 심지어는 가능할 수 있는지조차 확실치 않다. 이런 치료가 가능하기에는 아직 생명 현상에 대한 이해가 너무도 부족하다.
따라서 수백, 수천의 난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비윤리적인 배아줄기세포 연구대신 성인의 몸에서 얻어지는 줄기세포인 성체 줄기세포로 연구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리고 국가간 경쟁을 벌이며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천문학적 돈을 쏟아 붓는 것도 재고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연구는 그 외에도 많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설령 이 연구가 이런 방식으로 완성된다 해도 과연 그 혜택을 볼 사람이 누군가이다. 연구에 들어간 2천여 개의 난자는 황교수의 말처럼 “성스러운 여인”들이 기증한 것이 아니라 카드빚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150만원을 받고 판매하거나 윤리 규정을 모른 채 연구원들이 기증한 것이 상당부분이다. 이번 연구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인 난자 제공 여성과 실험실의 여성들은 모두 소수자이다. 전자는 생물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약자들이라는 점에서 소수자였고, 후자는 위계구조와 봉건적인 실험실 문화 속에서 소수자였다. 그렇지만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이들은 더 큰 소수자였다.
지난 11월 30일 한겨레신문에 “황교수와 장애인의 수레바퀴”라는 투고기사가 실렸다. 장애인을 위해 일하는 필자는 이렇게 썼다. “배아줄기세포가 혁신적인 발전을 이룬다 한들 투입해야 할 비용과 시간, 상용화 가능성 등은 얼마가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저 막연한 희망만 안고 기다기리에는 장애인들의 삶이 너무 척박하다. 자본주의의 역사, 좁게는 우리나라의 압축적인 경제성장 과정을 둘러보면 철저히 산업논리로 움직이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혜택이 가난과 편견의 굴레에서 힘겨운 시지포스의 삶을 사는 일반 장애인에게까지 돌아갈지도 의심스럽다.” 이런 식으로 연구가 계속된다면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연구가 힘있고 가진자들만을 위해 쓰여지지 않을지, 그리고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를 더욱 강화시킬 수도 있다.
- 젊은 과학자들의 용기있는 행동
그렇지만 이번 사태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실망만 안겨준 것도 아니다. 논문의 진위 문제는 처음 제보부터 조작 의혹을 밝혀내기까지 모두 우리 손으로 이루어졌다. 윤리문제도 외국 학자의 발표로 공론화되기는 했지만, 이미 작년부터 많은 국내의 학자와 시민단체들이 문제를 제기해왔다.
특히 이번에 젊은 과학도들이 생물학정보연구센터(BRIC)의 게시판인 소리마당을 중심으로 사진 중복 사실을 밝혀낸 것은 정말 훌륭한 일이었다. 사회가 온통 비뚤어진 애국주의로 휘청거릴 때 많은 위협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밝혀낸 청년 과학자들의 기개는 기성 과학자와 정치권, 보수 언론에 대한 실망으로 풀이 죽은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었다. 한 과학자는 이렇게 썼다. “저는 이 사이트에서 희망을 봅니다. 늙은 과학도들의 밥그릇 지키기, 모두 무엇이 잘못인지 알면서 입을 꽉 닫고 과학계의 고질적 비리가 드러날까봐 쉬쉬하는 모습들, 대중적 광란의 허상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정치에 이용하는 정치인들과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여 앵무새처럼 합창하는 언론인들 그들이 이긴다면 결코 대한민국에 미래는 없습니다. 우리는 젊기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월화수목금금금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책임자의 잘못으로 한몫으로 비난을 받게 된 황우석 연구팀의 대학원생들일 것이다. 우리는 이들의 노력에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고 위로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실험실의 비민주적 구조에 대해서도 사회 전체의 관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 사회적 학습
번에 우리 사회는 정말 엄청난 손실을 입었지만 그만큼 큰 교훈을 얻기도 했다. 이것을 사회적 학습이라고도 한다. 짧은 기간 동안 사람들은 과학에 대해 그리고 생명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토론했고, 젊은 연구자들은 자신이 하는 연구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고민했다. 물론 이번 한번으로 밀린 숙제를 하듯 모든 교훈을 얻기는 힘들다. 하지만 우리의 젊은 과학자들이 자정 능력이 있음을 입증해 주었듯이, 우리 모두 자신의 영역에서 무엇이 우리의 문제였는지 성찰해야 할 것이다.
김동광
57년생
고려대학교 독문과 졸업(1984-1996)
동대학원 과학기술학 협동과정 석사 입학(1996 마흔살에 다시 공부로)
동대학원 과학기술학 협동과정에서 과학사회학으로 박사(2004).
논문 “생명공학과 시민참여에 관한 연구
- 재조합 DNA 논쟁사례를 중심으로”
앞으로 글쓰는 일에 몰두하고,
가능하면 예전에 못이룬 창작의 꿈도 다시 지필 예정
과학저술가. (여기저기 글도 쓰고 번역도 하고 강연도 함.)
고려대학교 강사(예전에는 여러 대학 강의했는데,
이제는 힘들어서 고려대에만 나감)
국민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우리나라 과학자 사회 형성과정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음)
시민과학센터 운영위원(97년부터 쭈욱-)
고3과 중3 학부모
지은책
진보의 패로독스(당대, 공저)
“아이 과학 시리즈”(아이세움) 등 어린이용 과학책
옮긴책
세계과학문명사(한길사)
인간에 대한 오해(사회평론)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경문사)
DNA 독트린(궁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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