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란 존재는 무엇일까
마침 맨해튼에서 의사로 있는 친구 메일에 여동생 이야기가 있길래 이런 답신을 보냈다. 그는 세 번 결혼에 실패한 친구다. 서울의대 학생회장 출신인 그는 처음엔 상당한 재력가의 딸과 결혼했다. 같이 미국에 갈 때 그는 서울대에 남는 의사들보다 두 배나 많은 월급을 받았다. 그렇게 편안하게 살다가 몇 년 후 아내와 이혼했다. 두 번째는 미국 여자와 살았고, 세 번째는 한국 여자를 동행해서 조선호텔에서 나도 만났는데, 그와도 지금 헤어졌다고 들었다. 미국은 한번 이혼하면 자기 수입의 반을 처에게 지불해야 한다. 그래 이쪽 사정도 한번 털어놓아 보았다.
아내란 존재는 무엇일까? 80이면 終年에 가까우니 개념 정리해놓아야 한다. 4월 26일 분당 서울대 병원에서 일주일간 병간호를 마치고 아내와 집에 돌아왔다. 팔십 앞둔 노인이 병실에서 새우잠 자면서 환자 수발하는 일 힘들었다. 이젠 집에 왔으니 혈당 관리와 운동 관리를 내가 맡아서 돌봐야 한다. 어제 오후는 마트에 가서 두릅과 미나리를 사서 끓는 물에 데쳐놓고, 게도 한 마리 삶아 놓았다. 사과와 토마토 등 과일도 챙겨놓았다. 뇌경색은 후유증이 남는 병이라 관리 잘 해야한다.
아침에 TV에서 가리왕산에 10만 평의 땅을 사서 아내를 위한 기념 정원을 만든 사람이 있길래 같이 보자고 했더니, '당신은?' 화살을 내게 던진다. 그런 돈 없는 당신은 무능하단 뜻이다. 그러면서 과거 나의 죄목을 천천히 읊으면서 일깨워준다. 내 경우 아내는 영원한 비평가고 항상 투쟁하며 살아온 존재였다. 어렵게 간병하고 집에 오자마자 이래서 몹씨 섭섭했지만, 한참 후 깨달았다. 그건 좋은 일이었다. 아내의 병을 혼자만 일방적으로 가슴 아파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정을 떼어내는 일도 있어야 마음이 덜 아파진다.
나는 산을 사진 못했다. 대신 70이 넘자 몸이 약한 아내는 큰 병을 두개나 넘었다. 폐암도 큰 병이고 뇌경색도 큰 병이다. 힘들어도 아내 간병 일에 정성을 다하는 건 경상도 사람 사고방식이다. 안하던 일도 시작했다. 나는 마침 수필 작가다. 아내에 대한 글도 쓰고, 초상화도 그린다. 그 마음은 가리왕산에 10만 평 정원 만든 사람과 같은 것이다.
아내는 캠퍼스 시절 김지미 닮은 미인이라, 나는 언감생심 생심도 내지 않았는데 졸업 후 우연히 연결되어 결혼했다. 아내는 명동에서 태어나 덕수초등과 이화 여중고를 나와 고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작가들의 출발지인 <학원>에 시도 많이 실었고, 표지 모델도 했다. 대학교에서 발간한 잡지에도 관여했다. 나는 그를 68년에 처음 만났을 때 그와의 인연은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74년에 결혼했고, 나는 그를 이문동, 수유리, 창동같은 변두리만 데리고 다녔다. 아내는 평생 가진 것 없고, 성격 거친 경상도 남자에게 시달렸을 것이다. 나로서도 간혹 마음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을 만났더라면 오순도순 좋았을 걸 하고 후회도 했다. 그러나 인생은 물릴 수 있는게 아니다.
아내는 나와 학번이 같은 연극인 손숙씨 신세와 비슷했다. 나는 구박덩어리 였고, 박봉의 기자는 죄 없는 죄수였다. 그래 기업체 중역이 된 이후 20년간 사람 못할 일 했다. 흔히 재벌 비서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그만치 초인적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걸 뚝심으로 견디고 전라도 사람들만 근무하는 그룹 비서실장 자리 차지한 것은 오로지 처자식을 위한 집념이었다. 그 이후 나는 강남의 봉은사 옆 고급 빌라촌에 20년 살았고, 말년에 대학교수 5년 했고, 수필집도 10권 냈다. 돈 명예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아내는 아직도 습관적으로 나를 죄인으로 규탄한다. 그러나 나는 죄가 없다. 나는 미식축구 선수였지만, 역도부 출신 뽀빠이 이상룡처럼 열심히 당당히 살았다.
아마 조물주가 씨익 웃었을 것이다. 가장 팔팔한 경상도 녀석과 서울 중앙에서 곱게 자란 아내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그러나 실험은 성공했다. 둘은 찌지고 볶고 싸우다가 결국 폭풍노도의 바다는 조용해졌다. 비 그친 아침 해변 물결은 더욱 푸르고, 모래는 더욱 빤짝인다. 이제 나는 조물주가 바란대로 산다. 뇌경색 후유증 아내 간병하면서 그를 모델로 수필을 쓰거나 초상화를 그리면서 살고있다.
<50년만에 남산 산책길 다녀오다>
물은 흘러서 어디로 가고 사람은 떠나면 어디로 가는가?
이제 80을 눈앞에 두니 그런 생각이 든다.
무엇이 바빠 남산 산책길을 50년 만에 가보았나?
남산 바로 밑 명동이 아내가 태어난 고향이고
남산 바로 밑 회현동이 내가 근무한 일간 내외경제신문사가 있는 곳이다.
벚꽃 구경하러 수지 성복동 동네 산책길 걸어볼까,
양재천에 가볼까, 새로 개방한 청와대 가볼까,
생각타가 내가 사는 집 바로 앞 버스 정류장의 55-2 장거리 버스가
조계사 남대문 거쳐 남산 밑까지 간다는 생각이 미쳤다.
그래 토요일 마당쇠가 마님 모시고 남산 산책길을 다녀왔다.
길 옆 고랑은 청계천처럼 인공으로 물이 흐르게 해 놓았고,
노란 개나리, 연분홍 진달래, 은은히 옷깃에 떨어지는 벚꽃 곱다.
바위 사이에는 원추리 심어놓았고, 참나리는 군락 이루어 자생하고 있다.
이만한 산책길 선진국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겠다.
꽃보다 이쁜 게 사람이다. 특히 청춘남녀다.
우리 44년 해방둥이들은 보리밥 피죽 한 그릇 얻어먹기 힘들어
피골상접하고 키도 작았는데, 요즘들은 다르다.
키도 크고 몸매도 늘씬하고 얼굴도 뽀얗다.
따라온 네댓 살 꼬마들은 하늘나라 천사 같고
프랑스나 독일 선진국 꼬마처럼 부티 난다.
내 손자들 모두 중학생 이상이라 한참 바라보았다.
하얀 맨발로 산책하는 서양 숙녀가 보이길래
마당쇠가 손을 흔드니 미소로 답례한다.
병약한 우리 마님은 칠십 고개 넘은 지 오래.
나중에 후회 말고 뭐든지 다 해 드려야 하는데,
사진 한 장 찍고, 커피 한 잔 마시고,
전철 타고 집에 오니 몹시 피곤해한다.
금혼식 여행 멀리 못 갈 거 같다.
마침 산책길에서 대학 은사이신 조지훈 교수 詩碑를 만났다.
나는 그분한테 '대학 국어'를 배웠다. 딱 59년 만에 詩碑를 보니 옛 모습이 그리웠다.
- 파초 우(芭蕉雨) -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 메서 쉬리라던 고.
성긴 빗방울
파초잎에 후두 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는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 메서 쉬리라던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