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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구포신(除舊布新)'이라 한다. '제구포신(除舊布新)'이라?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펼쳐내라"는 뜻인데 <춘추좌전(春秋左傳)>이 출전이다.
교수신문이 2012년의 한 해를 돌아보는 사자성어는 '거세개탁(擧世皆濁 ; 온
세상이 모두 탁하다는 뜻으로 지의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바르지
않아 홀로 깨어있기 힘들다는 의미)'이었고 이 말은 초나라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나온다.
(除舊布新)'이라면 굳이 중국역사까지 찾아가 <춘추좌전>을 빌지 않아도
더 적확한 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바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춘추좌전>은 공자의 <춘추(春秋)>를 노나라 좌구명(左丘明)이 주석한 책이다.
'제구포신(除舊布新)'은 소공(昭公) 17년 겨울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자 노나라의
대부(大夫) 신수(申須)가 이를 새로운 변화의 징조로 풀었다는 내용에 근거한다.
혜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길한 흉조로 여겼는데 신수는 오히려 이를 변혁의
징조로 풀었던 것이다. '제구포신(除舊布新)'을 새해 사자성어를 추천한 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변혁은 불길함의 징조가 나타날 때 필요한 것"이라며
"다만 그 변혁은 백성의 믿음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추천
배경을 밝혔다.
'불길함의 징조'란 무엇일까? 또 '백성의 믿음을 얻기 위한 변혁'은 무엇일까?
생각컨대 2013년을 여는 전제를 지난 연말 대선에서 찾지 않았나 싶다. 박근혜
후보에게 51.6%의 지지를 보낸 국민과 이에 반한 48.0%의 국민. 거의 반반으로
갈라진 민심을 생각하면 분명 우리 대한민국은 '불길한 징조'의 기로에 서있고
'백성의 믿음을 얻기 위한 변혁'이 절실함을 공감한다. 허나 문제는 이를 나누어
본다는 시각과 입장에 있지 않을까?
한 걸음 나아간 문제제기는 왜 굳이 중국 역사와 고사에 빗대었는가이다.
우리 시각과 입장에서 걸맞는 금언이 없다면 그래도 좋다. 하지만 연암 박지원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이 있지 않은가?
두 가지 문제제기를 아우르면 '불길한 징조'를 넘어서 '국민의 믿음을 얻는 변혁'을
우리 국민이라는 하나의 주체의 시각과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하고, 우리 역사의
맥박에서 교훈을 찾으면 어떤가 하는 생각에 이르는 것이다. 이미 아시다시피
'법고창신(法古創新)'은 중국에 기대어온 조선의 문맥을 우리 현실의 고구(考究)
에서 찾자는 연암 박지원의 문(文)과 행(行)의 화두였다.
'법고창신(法古創新)'.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새겨보았을 금언이다. 왜 연암은 공자(孔子) 왈(曰)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두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새로 세웠는가? 그리고 이 금언이 비단 문체(文體)에
한정된 것이었을까?
천박한 식견의 소치일지는 모르나 감히 답한다면 조선조 사대적(事大的) 문치
(文治)의 근간이었던 이른바 '공자(孔子) 왈(曰)'을 벗어나 '우리 민족 왈(曰)'의
문체(文體)로 행(行)하고자 하였던 돈오(頓悟)가 바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이
아니었나 되새기는 것이다.
정조에게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단속까지 받지만 연암은 이를 문체에 그치지
않고 민생에 실천한다. 경상도 안의현감으로, 또 충청도 면천군수와 강원도
양양부사로 재임하면서 행한 목민(牧民)과 선정(善政)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묵언으로, 그러나 엄숙하게 오늘 우리 대한민국에 말을 건넨다.
18세기 영정조 중흥이 근대조국으로 발흥하지 못하고 좌절했던 이유는 무엇이
었는가? 연암의 '법고창신(法古創新)'에서 이어진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좌절
하고 닥친 비운이 경술국치 아니었던가?
돌아보면 당시 청나라의 '중체서용(中體西用)'과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
그리고 우리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는 모두 서양의 부국강병이라는 절체
절명의 과제 앞에 마주친 하나의 문제인식이었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이 과제를 이뤄낸 일본 군국주의 앞에 청과 조선 두 나라의
운명은 어떠했는가?
이제 이백여년이 지나 2012년 대한민국이다.
따라서 대한 역사의 이름으로 '교수신문'에 묻는다. 궁벽진 역사의 금언에 빗대어
현학(衒學)에 연연할 것인가? 역사의 준엄한 교훈을 새기며 우리 역사의 처절한
깨달음을 딛고 우리 몸 우리 생각으로 서고 행할 것인가?
그래서 '제구포신(除舊布新)'이 아니라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지난 이백년, 우리는 위정척사와 동도서기로 나뉘어 나라를 빼앗기고 국민을
비극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일제 치하에서 항일과 친일로 우리끼리 상잔(相殘)
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국권을 찾지 못하였다. 광복 후에는 좌와 우로 갈라져 분단과
전란의 처참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성장과 민주의 반목과 갈등 앞에 서
있다.
스스로 또한 지식에 기대어 사는 백면(白面)과 백수(白手)의 문약한 처지이지만
객관과 학리의 미명 아래 국민의 여망을 가르고 참된 지행(知行)과 아세(阿世)를
구분 못하는 우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연하여 뼈를 깎는 탁마(琢磨)의
정신으로 굳게 서서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항일과 친일의 기로에서, 또 좌와 우의
갈림길에서, 성장과 민주의 역정에서 우리 대학과 강단은 무엇을 했는가?
학위와 급부가 없이도 현대사의 갈림길마다 문행(文行)으로, 또 지행(知行}으로
우뚝했던 선학들을 우러른다. 만해 한용운과 이육사, 심훈과 윤동주의 문행(文行)은
주지의 가르침이고 장준하 선생, 함석헌 선생, 임종국 선생, 또 장일순 선생 같은
분들의 묵묵한, 그러나 그 치열한 헌신의 길 또한 오롯이 선연하다. 어디 이 분들께
현학의 학위나 강단의 급부, 또는 생전의 명예가 있었던가?
2012년 우리 대한민국은 51.6% 대 48.0%의 '불길함의 징조'에 직면해 있고 '국민의
믿음을 얻기 위한 변혁'을 요구받고 있다. 역사는 말한다.
세종은 중국에서 빌어온 민즉천(民卽天)의 왕도(王道)를 시현하는 화두로 맹자의
'발정시인(發政施仁)'을 즉위교서에서 스스로의 문행(文行)으로 비꾸어 '시인발정
(施仁發政)'으로 펼친다. 그리하여 조선초 왕자의 난 등으로 피비린내 나던 조정을
통합과 관용으로 수습하며 진정한 '인(仁)'이 백성의 민생에 끼치도록 선정을 실천
한다. 중국의 사상과 역사의 경험을 빌었으되 우리 생각 우리 몸으로 바꾸어 실천한
문행(文行) 아니었던가?
정조는 연암 박지원 등의 '법고창신(法古創新)' 류의 문행(文行)을 문체반정(文體反正)
으로 단속하면서도 감싸 실용의 길을 열어주는 동시에 채제공, 정약용, 성해응 등에게
<춘추좌전>을 편찬하도록 한다. <춘추좌전>은 교수신문의 '제구포신(除舊布新)'의
출전이다.
이제 우리가 알다시피 1800년 정조의 죽음 후에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박지원 일파와
<춘추좌전>에서 나아간 정약용 일파는 서로 만나 아우르며 조선중흥의 기운을 이루지
못한 채 <열하일기(熱河日記)>와 <목민심서(牧民心書)>로 상징되는 문행(文行)의
유업을 남긴 채 오늘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다시 바깥 경험과 정신에 기대인
'제구포신(除舊布新)'인가? 우리 몸 우리 깨달음인 '법고창신(法古創新)' 인가?
끝으로 연암 박지원 선생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되새기며 2012년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지행(知行)과 문행(文行)의 사명을 새기고자 한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초정집서>(楚亭集序)에서 이렇게 말한다.
"天地雖久 不斷生生 하늘과 땅은 비록 오래되었으나 끊임없이 새것을 낳고,
日月雖久 光輝日新해와 달은 비록 오래 되었으나 그 빛은 날로 새롭다."
연암은 이로써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말하는데, '법고창신'은 본받을 '법'(法),
옛 '고'(古), 비롯할 '창'(創), 새 '신'(新)으로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해 낸다'
는 의미이다.
연암은 그의 저서인 <연암집(燕巖集)>권7 <영처고서(嬰處稿序)>에서 기술한 바,
자신이 속해 살고 있는 조선의 현실을 그려내는 것이 작가의 임무이지 당대 현실과
동떨어진 한당(漢唐)의 글을 모방해서는 아니된다고 하였다. 문체가 고문과 비슷할
수록 그 작품의 표현은 더욱 거짓될 뿐이며, "古世 입장에서 今世를 보면 비속하겠
지만 古人들이 자기 시대의 것을 보았을 때도 반드시 고풍스럽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 시대 역시 한 금세였을 것이다"라 하였다.
"法古者秉泥跡 옛 것을 본받는 자들은 그 옛것에 구속되어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병폐이고,嗆新者患不經 새것을 창조해 내는 사람들은 불경한 것이 병폐이다.
苟能法古而知變 참으로 옛 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刱新耳能典 새것을 창조해 내면서도 근거가 있다면
今之文猶古之文也. 이 시대의 글이 고문과 마찬가지의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 <초정집서(楚亭集序)> 券1
'교수신문'으로 상징되는 오늘 우리의 지식인들이 <玉匣夜話>에 갇혀있던,
또는 표표히 역사의 안개 속으로 사라졌던 허생(許生)의 귀환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민생과 중흥의 경학(經學)과 창신(創新)의 문행(文行)으로
생생지락(生生之樂) 대한중흥의 새 날을 열 것이 아닌가.
아울러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와 문재인 전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가 한 목소리로
약속했던 약속했던 '국민대통합'의 초석 위에 화합과 상생(相生)의 대한민국을
열 수 있지 않은가? 파란과 불안의 2012년을 보내며 2013년을 새로이 맞는
불민한 자의 생각이다.
다음은 '교수신문'이 밝힌 2013년 희망의 사자성어 원문입니다. 참고하셔서
함께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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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annampark.org/bbs/zboard.php?id=board&no=2384
제4부 법고와 창신을 통일하다
1
아버지께서 문장을 논하실 때면 늘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문장에 고문과 금문의 구별이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문장이 한유와
구양수(한유는 당
나라의 유명한 문장가이고, 구양수는 송나라의 유명한 문장가. 두 사람
모두 당송 8대가에
해당한다.)의 글을 모방하고 반고와 사마천(사마천과 반고는 모두 한나라의
역사가. 그들의
저술인 '사기'와 '한서'는 단순한 역사서에 그치지 않고 빼어난 문장으로
이름높다.)의 글을
본떴다고 해서 우쭐대고 으스대면서 지금 사람■르 하찮게 볼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
기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에 따라 그 형상과
소리를 곡진히 표
현하고 그 정경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만 있다면 문장의 도는 그것으로
지극하다."
또한 아버지는 우리나라 선비들이 과문(과거에서 요구하는 특별한 문체의 글,
내용보다는
형식을 중시하며, 상투적이고 진부한 성격을 띤다.)의 낡은 관습에 골몰하여
진부한 말들을
늘어놓거나 남의 글을 모방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순수하고 질박한 글을
짓는 체하여 문
풍이 날마다 거칠고 무잡스럽게 변해감을 병통으로 여기셨다. 그래서 '초정집의
서문'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옛을 본뜨는 사람은 그 자취(겉모습이나 형식을 말한다.)에 구애됨이 병폐히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법도가 없음이 폐단이다. 진실로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새로운 것은 만들어내면서도 법도가 있다면 지금의 문장은 옛 문장과 같을
수 있을 것
이다."
또 '과문 모음집에 붙인 글'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진실로 이치를 담고 있다면 집안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예삿말도 학교
에서 가르
칠 만하고, 동요나 속담도 '이아'(13경의 하나. 천문, 지리, 음악, 기재, 초목, 조수
등에 관한
고금의 문자를 설명한 책으로 중국 고대 사전에 해당한다.)에 수록할 만하다. 그
러므로 문장
이 훌륭하지 못한 것은 글자 탓이 아니다. 자구가 아름다운가 속된가 하는 것만
따지거나
한 편의 글이 고상한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만 문제삼는 자들은 비유컨대 마음
속에 아무
런 계책도 없는 용기 없는 장수와 같아서 갑자기 글제목을 대하면 우뚝 솟아 있는
견고한
성을 눈앞에 만난 것처럼 당황한다. 그러므로 글 짓는 사람의 걱정거리는 늘
스스로 길을
잃어 얻지 못하는 데 있다 할 것이다."
한편 '초정집의 서문'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하늘과 땅이 비록 오래되었으나 끊임없이 만물을 낳고, 해와 달이 오래되었으나
그 빛은
날로 새롭다. 또한 천하의 책이 비록 많다고 하나 그 담고 있는 뜻은 저마다 다르다.
그러므
로 날짐승, 물고기, 길짐승 가운데는 혹 그 이름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는 법
이다. 그리고 산천초목에는 반드시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땅이나 신령한 존재가
있게
마련이다. 썩은 흙에는 영지(영지버섯, 옛날에는 상서로운 존대로 간주했다.)가
생겨나고, 썩
은 푸에서 반딧불이 생겨난다. 예악은 성인이 만드신 것이지만 그럼에도 후대에
이르러 예
를 둘러싸고 이러쿵저러쿵 시비가 있으며 악에 관해서도 논의가 분분하다. '주역'의
경우 괘
(주역의 괘를 이룬 하나하나의 가록 그은 획.)와 효(괘와 효를 풀이한 글인 '괘사'와
'효사'를
가리킨다. 원래 괘와 효는 기호에 불과한데, 기호만 갖고서는 그 뜻을 알기가 어려
우므로 후
에 설명하는 글이 추가되었다는 말이다.) 자체만으로는 뜻을 충분히 드러낼 수 없었
으므로
후에 괘와 효를 설명하는 말을 많이 붙였고, 똑같은 것을 보고서도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
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100세 뒤의 성인이라 할지라도 틀림없이 그렇다고 할 것이다"(중용에
나오는
말)라는 말은 앞 성인이 한 말이며, "순임금이나 우임금 같은 성인이 다시 살아난다
할지라
도 내 말이 옳다고 할 것이다"(맹자, 등공문에 나오는 말)라는 말은 후대의 현인
(맹자를 가
리킴)이 한 말이다. 우임금과 후직과 안회(후직은 요순시대에 농사일을 관장하던
신하로서
주나라의 선조이다. 안회는 공자의 수제자이다.)는 그 도가 하나였다. 편협함과
공손하지 않
음은 군자가 추구할 바가 아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복희씨는 '문'(여기서는 문채라는 뜻으로 쓰였다. 우주 삼라만상의 겉으로 드러나는
형상
을 가리키는 바, 연암은 이를 암암리에 '문장'이라는 말과 결부시키고 있다.)을 관찰
할 때,
위로 하늘을 살피고 아래로 땅을 살폈다. 공자께서 복희씨의 이러한 관찰을 훌륭하게
여기
사 '계사전'을 지어 '가만히 집에 있을 때는 괘와 효의 형상을 살피고 괘사와 효사를
음미한
다'라고 하셨으니, 무릇 '음미한다'는 것이 어찌 눈으로 보고 살피는 것이겠는가?"
이상은 모두 아버지가 문장에 대해 논하신 대체적 내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지으신
문장은 착상이 독창적인 데다가 기운이 가득 차고 이치가 갖추어져 있었다. 비문이나 묘지
는 생동감 있게 서술되어 그 사람의 목소리와 모습을 듣고 보는 듯하였으며, 편지글은 붓
가는 대로 썼으면서도 인정물태를 다 드러냈으니, 개성적인 글을 창조하여 진부한 말을 답
습하지 않으셨다. 몇백 년 후 의당 높은 안목을 갖춘 사람이 나타나리니, 이 어찌 내가 사사
로이 찬미할 일이겠는가.
2
아버지는 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나는 문장을 짓는 데 달리 잘하는 건 없고 사실을 기술하고 대상을 묘사하는 솜씨가 요
새 사람들보다 조금 나을 뿐이다. 요새 사람들이 지은 비지(묘비문과 묘지를 합해 일컫는
말)는 대개 판에 박은 듯하여 한 편의 글을 여러 사람에게 써먹을 수 있다. 그러니 내체 돌
아가신 분의 정신과 모습을 어디서 또올릴 수 있겠느냐? 그래서 삼연(김창흡) 공께서는 '우
리나라 사람들 문집은 상가집 곡비의 울음소리와 같다'라고 하신 것이다. 옛사람은, '얼굴이
둥글면 모난 데를 그리고 얼굴이 기다라면 짧은 부분을 그린다.'(이는 청나라 화가 대창의
말이다. 둥근 얼굴을 그릴 때 전적으로 둥글게만 그려서는 그 본질이 잘 드러나지 않으며
거꾸로 둥근 얼굴 중의 어떤 모난 부분을 그려야 비로소 얼굴이 둥글다는 사실이 확연히 부
각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대상의 형상을 묘사할 때 형상 그 자체보다는 음영을 그림으
로써 형상의 개성적 특질을 부각시키는 방법과 서로 통한다)라고 했거늘, 사마천의 열전과
한유의 비문이 읽은 만한 건 이 때문이다.(이 두사람의 글은, 서술한 인물의 널리 알려진 행
적을 지루하게 언급하는 방식이 아니라 잘 알려져 있지 않거나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일화
를 통해 인물의 개성과 본질을 드러내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지금 사람들은 이 뜻을 모르
고 종이 가득히 진부한 말과 죽은 구절만 채워넣고 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이렇게 해
야만 법도에 맞고 충실한 글이 된다'라고 한다. 나는 모르겠다. 이게 무슨 글쓰는 법인지?"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옛사람들의 글이 그 당대에야 어찌 난해하고 모호하겠는가? '서경'의 '요전'과 대우모의
'시경'과 국풍과 아송, '주역'의 괘사와 효사, '춘추'의 여러 전들은 모두 당시의 금문이어서
그때 사람들은 다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대로 올수록 그 뜻을 점점 알기가 어렵
게 되어 전, 전, 주, 소(모두 경전에 대한 후대의 주석과 해설을 가리키는 말. 전은 주로 경
과 대비되는 말로 쓰이는데 경문 전체를 설명한 '해설서'라는 의미가 강하다. 전과 주는 경
전을 주석한 글을 뜻한다. 소는 옛날의 주를 해설했거나 그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글을 의
미한다.) 따위가 생겨나게 되었다. 요새 사람들은 이런 줄은 모르고 무조건 옛사람의 글을
본뜨고 흉내내어 어렵고 난삽한 때깔을 부리면서도 스스로는 '간명하고 예스럽다'고 여기고
있으니 참 가소로운 일이다. 만약 남들이 자기 글을 읽고자 할 경우 그때마다 자기가 일일
이 주석을 달아주어야 할 지경이라면 이런 글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
3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요즘 사람들은 당송 8대가(당나라와 송나라를 대표하는 8명의 대문장가. 한유, 유종원,
구양수, 소순, 소식, 소철, 증공, 왕안석을 이른다.)의 문장을 배운다 하면서 그 정신과 이치
는 터득하지 못하고 거칠게 그 겉모습만을 배울 뿐이다. 그리하여 무릇 한 편의 글을 지을
때마다 문세가 오르락내리락하게 하고 이 구절과 저 구절을 조응시키며 말을 여닫거나 마무
리를 짓는 데 하나하나 힘을 쏟고 분명하게 본뜨고들 있으니, 설사 솜씨 있는 사람이 진은
글이라 할지라도 그리 좋아할 만한 게 못된다. 하물며 글솜씨가 없는 사람은 그저 주제만은
언급하여 대충 얼버무리고 마니 더더욱 말할 나위도 없다. 옛사람들은 흉금이 넓고 학문이
깊어 글을 지을 때 분명하고 유창하며 법도 있고 아담하기만을 구하였을 뿐 작위적으로 안
배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문장이 이루어졌다. 후세의 비평가들은 단락을 나누고
구절을 분석하여 문장의 입체적 구성을 드러내 보여주고자 하는데, 이는 글을 쓴 옛 작가가
어는 대목에 정신을 쏟았는지를 제시하여 처음 글을 배우는 사람들을 인도하고 깨우쳐주므
로 나쁠 건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옛 사람이 붓을 잡아 글을 지을 때 그 마음속에 글 한
편에 대한 안배가 미리 갖추어져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옳지 않다.
고문을 배우려는 자는 자연스러움을 구해야 마땅하며, 자기 자신의 언어로부터 문장의 입
체적 구성이 생겨나도록 해야지 옛사람의 언어를 표절하여 주어진 틀에 메워넣으려 해서는
안된다. 바로 여기서 글이 난해한가 쉬운가 하는 차이가 생겨나며, 진짜인가 가짜인가가 결
정된다. 고정된 하나의 틀로 천만 편의 똑같은 글을 찍어내는 게 바로 오늘날의 과문이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나라에 충성한 제갈량은 큰 도가 무엇인지 알았으니, 문장을 쓰는 법 역시 큰 도가 무엇
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다.
"남을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데면데면하여 우유부단하
기만 하다면 이런 들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
4
아버지의 초년 문장은 전적으로 '맹자'와 사마천의 '사기'에서 힘을 얻었다. 그러므로 아버
지의 문장에 기운이 펄펄한 것은 그 근본 바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좌구명의 좌전
과 국어(춘추시대의 열국의 사적을 나라별로 기록해놓은 책)라든가 한유와 구양수의 글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공부하여 그 문장의 정신과 이치, 대의와 법도를 깊이 터득하셨다.
중년 이후 세상을 벗어나 은거하실 때 및 중국을 여행하실 때 창작한 우언, 해학, 유희 등
의 작품 가운데는 왕왕 장자나 불교에 출입한 것이다. 만년에는 가의와 육지의 상소문이나
주자가 나라일을 논한 글들을 가장 좋아하셨다. 그래서 아버지의 편지글을 공사를 막론하고
여기서 유래하는 게 많다. 이것이 아버지 문장에서 발견되는 초년과 만년의 차이이다.
5
아버지께서 젊을 때 지으신 글 가운데 '주공의 부도탑 명문'이라는 글이 있다. 친구 김공
노영이 그 글을 읽고 말했다.
"이는 지극히 정밀한 글이다."
공은 그 글을 암송했으며, 서늘한 밤이나 맑은 아침이면 낭랑하게 읊조리곤 했다. 그 후
내종 동생인 이정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근자에 '주공의 부도탑 명문'을 다시 읽고 이 글이 불교를 배척하는 글임을 알았습니다.
김공이 '지극히 정밇나 글'이라고 하신 건 그 글의 의미를 깊이 꿰뚫어보신 것이라 하겠습니
다."
내가 늘 남들이 이 글에 대해 평하는 말을 들었지만 이같은 해석을 없었다. 나는 어늘 날
한 늙은 중에게 이 글을 보여주었다. 그는 죽 읽더니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는 불교를 배척하는 글이구먼요!"
6
아버지의 글 가운데에는 거짓을 꾸며 명성을 훔치는 유자를 꾸짖은 것이 더러 있다. 이
때문에 혹 화를 내며 언짢아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유충문공(유언호)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
다.
"이 친구는 위선적인 유자를 꾸짖으려고 특별히 풍자한 것뿐일세. 나는 자네들이 걸핏하
면 힘을 내어 위선적인 유자를 대신해 분노를 터뜨리는 게 늘 이상하다네."
7
아버지는 책 읽는 속도가 매우 느려서 하루에 한 권 이상 읽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늘 이
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기억력이 썩 좋지 못하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덮으면 곧바로 잊어버려 머릿속이
멍한 게 한 글자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일을 처리해야 하거나 글제목을
정해놓고 이리저리 글을 구상할 때면 처음에는 읽은 내용이 하나씩 떠오르다가 종국에는 줄
줄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옛사람의 지나간 행적이나 선배들의 격언 가운데 눈앞의 정경
에 어울리는 것들을 죄다 활용하여 이루 다함이 없었다."
지계공은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연암은 책을 매우 더디게 보아서 내가 서너 장 읽을 때 겨우 한 장밖에 못 읽었다. 또
암기 능력도 나보다 조금 못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읽은 글에 대해 이리저리 논하거나 그
장점과 단점을 말할 때에는 엄격한 관리가 옥사를 처결할 때처럼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그
제서야 나는 공이 책을 느리게 보는 것이 철저하게 읽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8
아버지께서 글을 지으실 때는 매양 제목에 따라 구상하여 마음을 집중하고 생각을 골똘히
하셨다. 만일 자신의 견해가 남과 다를 경우 비록 선유가 한 주장이라 할지라도 아첨하며
따르거나 구차하게 부화뇌동하려 하지 않으셨다. 반드시 오사란지(검은 줄을 쳐서 칸을 만
들고 테를 두른 종이)에다 붓으로 깨끗이 글씨를 쓰셨으며, 한 점 한 획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으셨다. 고쳐야 될 자구가 있으면 비록 한 편의 글을 거의 다 썼다 할지라도 반드시 종이
를 바꾸어 처음부터 다시 쓰셨다.
그리하여 한 편의 글이 완성되면 곧바로 편철해두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치 몸에 병
이 생긱기라도 할 듯 아무리 바쁜 중이라도 꼭 그렇게 하셨다.
9
아버지는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지계의 글은 침중하고 안존하며 법도에 맞아 예봉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젊을 적에
예기를 많이 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글과는 성격이 다르다. 하지만 그는 문장을 논하는
데 빼어난 안목을 갖고 있어 옛사람들이 글을 쓸 때 고심한 곳을 잘 알아보았다."
아버지는 한 편의 글이 완성될 때마다 반드시 지계공에게 보이며
"나를 위해 비평을 좀 해주게!"라고 하셨다.
지계공은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연암은 필력이 굳세고 식견이 정하니, 이는 근대의 여러 작가들이 지니지 못한 바다."
두 분은 반평생을 한 집에 거처하며 친구처럼 격려하고 형제처럼 다정하게 지내셨는데,
아버지의 글을 제대로 논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안 사람은 지계공 한 분뿐이었다.
10
아버지는 선견지명이 있으셔서 왕왕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것을 말씀하셨다.
젊을 때 유안공(이보천)을 모시고 있던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공의 인척 한 분이 찾아
와 인사를 드렸다. 그가 가고 난 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허, 아무개가 곡 죽겠구나!"
유안공은 정색을 하여 나무랐다.
"어찌 말을 그리 경솔히 하는가?"
며칠 뒤에 과연 그 사람이 죽었다는 부고가 왔다. 유안공은 아버지를 불러 물었다.
"자네, 아무개가 죽을지 어찌 알았나?"
"접때 그의 거동을 보니 정신이 이미 나갔습니다."
11
병-신년(1776) 겨울의 일이다. 아버지가 시골집에 와 계실 적에 마을의 선비 한 사람이 찾
아와 뵙고 말하기를, "서울에 유포된 윤음이 있기에 적어왔습니다."하면서 소매에서 종이를
꺼내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는 앞의 몇 줄을 보시고는 돌려주며 다음과 같이 주의를 주셨
다.
"자네는 시골 사람이다. 만약 조정의 윤음이 있다면 조만간 도와 현에서 반포할 것이니
그때 가서 얻어보는 것이 옳다. 사사로이 임금님의 말씀을 베껴와 고을에 유포하고 서울을
들락거리며 소식을 전하고 다니는 건 백성을 어지럽히는 일이므로 절대 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이 풀이 죽어 돌아갔다. 얼마 안 있어 거짓 윤음을 유포하고 다닌 자들에 대한 옥
사가 일어나 임금님께서 친히 국문하셨는데 이에 연루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12
김건순은 법도 있는 집안의 후손으로서 뛰어난 재주와 박식으로 그 이름이 세상에 크게
떨쳐 안회가 다시 태어났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가 한번은 아버지를 찾아 뵙고 가르침을 청
하여 한참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돌아갔다. 그가 간 뒤 아버지는 기색이 좋지 않았다. 아버
지는 나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부터 김군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만나보고 나니 마음이 안 좋구
나. 그 재주는 정말 천하의 기이한 보배라 이름할 만하더구나. 그러나 천하의 기이한 보배는
모름지기 견고하고 두터운 그릇에 보관해야 엎어지거나 깨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이제
그의 그릇을 보건대 이러한 보배를 간직하기에는 법이다. 그런데 이제 그의 그릇을 보건대
이러한 보배를 간직하기에는 부족하니 마음이 몹시 안됐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김건순은 그릇된 부류들과 사귄다고 해서 김상헌의 종손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그리고 나서 5년 후 천주교에 물들었다는 죄명으로 제 명에 죽지 못
하였다.
13
하루는 아버지께서 공적인 일로 훈련대장 서유대를 만나보고 돌아오셔서는, "서대장의 얼
굴에 살기가 가득하니 이상한 일이야!"라고 하셨다. 후에 들으니 그 날 과연 서유대가 포도
청에 명령해 죄수 몇 사람을 사형시키게 했다 한다.
또 하루는 당신 앞을 지나가는 집안 노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 하인의 기색이 왜 저리 안 좋을까?"
며칠 후 그 아비의 부음이 고향에서 날아왔는데, 죽은 날이 바로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그
날이었다.
14
아버지는 중국 여행에서 돌아오신 후 그곳 사람들과 서신을 왕래하는 일이 없으셨다. 아
버지는 일찍이 박제가에에 다음과 같은 주의를 주셨다.
"자내들은 조심해야 할 것이야! 청나라 사람들과 사사로이 소식을 주고 받는 것은 몸을
삼가는 도리가 아닐세."
15
아버지는 북경에서 돌아오실 때 거기서 사귄 중국인 벗들이 선물로 준 물건들을 대부분
사양하고 받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유황표(유세기)가, "산중의 밝은 달이 뜬 밤에 이걸 사르
면서 저를 생각하기 바랍니다."라면서 준 침향 몇 근 만큼은 받으셨고, 기여천(기풍액)이 준
단도 한 쌍도 받으셨다. 그 칼은 매우 짧아 한 자밖에 되지 않았고 폭은 손바닥만 했는데,
끝이 굽었지만 예리하였다. 칼자루와 칼집은 없었으며, 고리를 달아 열 자 길이의 붉은 끈을
묶어놓았다. 이 단도는 뒤에 금성공(박명원)의 소유가 되었다.
16
아버지께서 북경에 가셨을 때 첨운패루(패루란 편액 들을 걸어둔 문이다.)에서 이홍문이라
는 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자기가 영원백 이성량의 후손이라고 했다. 또 그의 조부인
편덕이 올해 여든둘인데 조선에 사는 일가의 소식도 듣고 간행한 족보도 전할 겸 해서 여러
차례 조선 사신이 묵는 곳 근처까지 찾아왔었으나 말을 붙여볼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고 하였다. 그런데 조부가 이제 중풍이 들어 일어날 수 없게 되자 홍문으로 하여금 조선 사
신의 숙소 근처를 두루 탐문하게 했는데 다행히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홍문
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귀국에 영원백의 후손이 살고 있습니까?"
그는 이훤(이여송의 후손) 등이 조정에서 벼슬하여 현달해 있는 줄 통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무과를 거쳐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원백과 태보(이여송을 가리킨
다. 그 벼슬이 태자태보였기 때문에 태보라고 했다.)는 모두 화상이 있어 관에서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지요."
홍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귀국에 살고 있는 우리 일가들도 이곳에 친족이 있는 줄 알고 있나요?"
"소식이 감감하니 어찌 알겠습니까? 이제 그대를 만났으니 돌아가면 마땅이 소식을 전해
그들을 기쁘게 해주겠습니다."
홍문은 몹시 기뻐했다. 그는 감사하며 말했다.
"족보를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려울 것 없지요."
홍문은 이튿날 비단 가게에서 아버지를 뵙기로 약속했다. 약속한 날 홍문은 가게로 찾아
와 아버지를 모셔 의자에 앉힌 다음 앞에다 수십 개의 탁자를 벌여놓고 과일 삼백 꾸러미,
붓 하나와 먹 하나, 도장 새기는 돌 스무 개를 선물로 드렸다. 그리고 족보 다섯 권을 꺼내
어 앞에 갖도놓고는 의자 아래에서 절을 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바라옵건대 저의 작은 정성을 살피시어 귀국에 사는 일가에게 이 족보를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버지는 사례하며 말씀하셨다.
"족보는 삼가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절대 남에게 족보를 외국에 전했다고 말
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는 홍문이 준 선물 중에 붓과 먹만 받아서 족보와 함께 가지고 돌아오셨다. 먹에는
'만지명월'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뒷면에 '현상'이라는 낙관이 있었다. 그 모양은
동그랗고 테두리가 있어 흡사 우리나라의 마패와 같았다. '만지명월'이라 한 것은 은미한 뜻
이 있는 듯했고, '현상'의 현자에에서 맨 위의 점을 없애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강희제(청나라
2대 황제) 이전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귀국하시자 이훤을 불러 족보를 전해주었다. 이윽고 임금님께서 그 족보를 보시
고는 이훤의 품계를 높여줌과 동시에 이여송을 위하여 사당에 위패를 마련하라는 특명을 내
리셨다. 궁궐에서 족보가 나가던 날 의장대가 앞에서 행진하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임금님께
서는 집을 하사하여 이여송의 제사를 지내게 하셨다. 그리하여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입은
장수가 군악 연주 속에서 제사를 지냈다.
마침내 이훤은 아버지의 은덕에 감격하여 조정의 반열에서 아버지를 칭송하는 말을 하였
다. 아버지는 그 말을 전해듣자 깜짝 놀라 이훤을 꾸짖었다.
"전후의 은혜로운 아버지의 은덕에 감격하여 조정의 반열에서 아버지를 칭송하는 말을 하
였다. 아버지는 그 말을 전해듣자 깜짝 놀라 이훤을 꾸짖었다.
"전후의 은혜로운 분부는 모두 임금님의 지극한 마음에서 나온 것어거늘 그걸 나의 은혜
라 하다니 말이 되어?"
'열하일기'에는 족보를 전해준 이 일이 생략되어 있으니, 삼가 임금님께 그 공을 돌리고자
한 아버지의 뜻을 엿볼 수 있다.
아버지는 홍문에게서 받은 붓과 먹을 송원 김공(김이도)에게 주었다. 이여송이 위패를 만
들 때 공은 포의(벼슬하지 못한 선비를 일컫는 말)의 신분으로서 그 위패에 글씨를 썼으니,
공이 청음(김상헌) 선생의 후손이기 때문이었다. 김공이 이 붓과 먹으로 글씨를 쓴 것은 신
령이 감응해서 된 것이지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그 후 이훤은 임금님의 분부를 받들어 우리나라로 이주해 온 친족의 계보 및 사적을 엮고
자 하여 아버지에게 일을 부탁했다. 아버지는 지계공한테 찾아가 부탁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리하여 지계공은 그를 위해 널리 전기와 야사 등에 의거하여 책을 써주셨으나, 그 대략의
내용은 '지계고'에서 살필 수 있다.
17
아버지는 균역법에 대해 늘 이렇게 논하셨다.
"군포를 덜어주는 것은 본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한 것이었건만 세액의 부족을 재
신하는 방법이 좋지 않아서 그 폐다닝 끝이 없다. 가령 어살(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속에 설
치한 나무 울타리)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밀물과 썰물, 개펄의 넓이는 수시로 변하는 법
이고 어족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일정하지 않다. 만약 어떤 곳의 포구에 어살을 설치하여
올해 잡은 농어가 고깃배 1백 척의 분량이라고 치자. 나라에서는 이를 기준으로 세금을 매
겨 장부에 기재한다. 이듬해 혹 밀물이 멀찍이 물러나 개펄의 넓이가 줄어들거나 어족이 모
이지 않게 되면 백성들은 수입이 준다. 그렇건만 세금은 그대로다. 관에서는 상황에 따라 세
금을 가감하지 않고 오로지 세금 독촉만 일삼을 뿐이다. 그러니 백성들은 세금장부는 그대
로 남아 계속 세금을 징수하고 있다. 기타선박세나 염세 등의 폐단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균역법이 처음 시행될 때의 일이다. 그 일을 담담할 비변사 당상을 새로 임명하고자 했지
만 적임자를 찾기 어려웠다. 당시 조정의 의론은 우리 장간공(박필균)께 맡기자는 것이었지
만 공께서는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으셨다. 공은 이렇게 탄식하셨다.
'이 균역법을 주장한 사람은 자손이 없으리라!'
앞 세대 분들의 선견지명이 이와 같았다. 무릇 법을 처음 만들 때는 오로지 위, 아래의 손
익을 살펴 좋은 법인지 나쁜 법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균역법을 시행한 취지는 본래 위(나
라)의 것을 덜어서 아래(백성)에 보태주고자 한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그와 반대로 아래의
것을 가혹하게 수탈하는 셈이 되었으니 법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못함을 알 수 있
다."
18
아버지는 일찍이 호포법(호를 단위로 군포를 징수하는 제도)과 구전법(인구에 대해 세금
을 징수하는 제도)을 시행함직하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지금 옛 성인의 제도인 정전법을 시행할 수 없다고 한다면 당나라의 세법인 조용조
가 옛 뜻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무릇 군역이 공평하지 못한 것은 명목이 번다한 데 연유한
다. 그리하여 각종 이름을 붙여 세금을 거두고 지나치게 세금을 징수한다. 이 때문에 백성들
은 날로 더욱 궁핍해진다.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이후 거듭 전쟁을 겪는 바람에 지금 군역의
명목이 아주 많은데다 그 경중이 같지 않다. 그런데 이들 세금은 본래 모두 그때그때 필요
성에 따라 급작스럽게 만든 것이지 결코 태평한 시대에 심사숙고하여 멀리 내다보고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일거에 모두 없애버리는 게 낫다.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일거에 다 없
앨 수 있겠는가? 오직 매호마다 군포를 부과하고 매 사람마다 구전을 부과하는 방법밖에 없
다. 그렇게 하면 정연하고 간단한데다 요체가 분명해 번거롭지 않다. 일단 큰 근본이 정해지
면 자세한 사항은 잘 강구하여 검토하면 된다. 무릇 명목이 분명한 것은 좋은 법이요, 명목
이 구차스러운 것은 나쁜 법이다. 좋은 법이라 하더라도 폐단이 없을 수 없지만, 그 좋은 취
지를 살려 폐단을 바로잡는다면 오래 갈 수 있다. 나쁜 법이라 해서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
지만, 좋지 않은 취지로 이익을 하루라도 그대로 둬서는 안된다. 하물며 지금의 군역이 한갓
민생의 괴로움과 국가 재정의 궁핍만을 초래하고 있음에랴!"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군자와 소인은 그 신분을 두고서 하는 말이다. 지금의 이른바 양반은 옛날의 군자에 해
당하고, 지금의 소인은 곧 옛날의 이른바 '곤궁한 백성으로서 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에 해
당한다. 어진 정치를 펼 때 가장 먼저 보살펴야 할 대상이 소인이거늘, 어찌하여 유독 소인
만 괴롭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단 말인가? 군자가 아니면 백성을 다스릴 수 없고 백
성이 없으면 군자를 먹여 살릴 수 없으니, 군자가 많고 백성이 적은 것은 나라의 이익이 아
니다. 하지만 100년 안에 조선의 온 백성은 모두 양반이 될 판이니, 법이 무너지고 기강이
어지러워지는 건 필시 양반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렇건만 현재 양반은 이를 다스리지
않고 있으니 이 때문에 법이 서지 않고 있다."
19
아버지는 과거제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과거제도가 미비하면 인재가 공부에 힘쓰지 않고, 인재가 공부에 힘쓰지 않으면 학술이
진흥되지 못하고, 학술이 진흥되지 못하면 염치에 힘쓰지 않게 되고, 염치에 힘쓰지 않게 되
면 풍속이 돈후해지지 못하고, 풍속이 돈후해지지 못하면 논밭이 개간되지 않고, 논밭이 개
간되지 않으면 기강이 서지 않으며 예악이 땅에 떨어지게 된다. 한 대의 박사제자드릉■ 모
두 하나의 경전으로 입신하였거늘, 독실함과 순후함을 숭상한 전한의 풍속, 이름과 절의를
중히 여긴 후한의 기풍이 어찌 배양하지 않고 저절로 이룩된 것이겠는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중국은 한나라와 당나라 이래로 지금까지 학교제도와 과거제도가 일원화되어 있는데, 우
리나라는 두 제도가 분리되어 아무 상관없이 되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과거제의 폐단을 논하면서 향공이나 현량, 효렴 따위를 들먹이는 건 늙은 유생들의 상투
적인 말이다. 지금의 제도를 따르되 조금 수정을 가하여 명나라의 제도를 본받는다면 인재
를 잃지 않을 것이다."
20
아버지는 언젠가 명나라 제도가 훌륭하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릇 역대의
법령과 제도란 처음 만들어지기는 나라를 창건한 임금에 의해서지만, 수정되고 보완되는 건
나라를 이어받아 지켜가는 임금에 의해서다. 그러므로 처음에 법을 만든 임금이 그 유폐를
꼭 예견하는 건 아니며, 후대에 유폐를 고치는 임금이 애초에 그 법을 만든 취지를 꼭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명나라만은 그렇지 않았다. 명나라 태조는 제위에 오르기 전에 미천하
고 곤궁했다. 그리하여 원나라 말기의 혼란상과 어려움을 몸소 겪으면서 백성들의 병폐를
두루 맛보았으므로 그 실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천하에 군림하게 되어서는 31년이란
장구한 세월 동안 제위에 있었고, 게다가 중간에 호유용(명나라 초기의 정치가. 명 태조의
총애를 받아 수년간 좌승상으로 있으면서 권력을 행사하였다. 총애를 잃자 반역을 도모하였
으나 발각되어 처형되었다)과 진녕(명나라 조기의 인물. 호유용과 함께 역모를 꾀하다가 처
형되었다)의 반란을 겪었기에 법과 제도의 장점과 폐단을 낱낱이 직접 목도하였다. 그리하
여 애초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법을 만들고 다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 법을 고쳤는
데, 재위기간이 길어 여유가 있었으므로 법을 꼼꼼히 손질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손
볼 데가 없었다. 그 법이 한두 가지 흠집을 드러낸 것은 영락제(명나라 3대 황제) 이후 법을
개악한 데 기인한다.
지금 청나라가 건국되어 나라 안이 평안하고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해진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명나라 태조의 율령을 잘 활용하여 한결같이 따르고 조금도 어기지 않으면서
법령을 만든 근본 취지를 살펴 그것을 실천하고 시대에 맞게 그 말폐를 바로잡았기 때문이
다.
청나라에서 간행한 책들이 늘쌍 청조의 크고 거룩한 계책이 이전 시대를 능가한다고 추어
올리지만 기실 모든 게 이미 '황명회전'(명나라의 법전)에 갖추어져 있다. 청나라는 단지 이
를 실행하고 확대했을 따름이다. '법을 활용하는 사람이 중요하지 법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
니다'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진실로 국가를 경영하려는 원대한 구상을 하
는 자는 반드시 지금 중국의 정치를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명나라가 훌륭한 법을 만든
덕분에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21
아버지는 평소 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문제에 관심을 쏟으셨다. 그리하여 균전
법, 사창제, 화폐문제, 촌락 조직의 문제, 관리등용법, 관리를 평가하는 법, 군사제도, 해양방
위 등등의 문제에 대해 모두 자기대로의 의견을 강구하여 목차를 나누고 항목을 짜 책을 집
필할 구상을 거의 다 마쳤으나 미처 착수하지는 못하셨다. 만년에 자주 관직을 그만두고 한
가히 지내면서 한 부의 책을 쓰시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계공이 아버지 제문에서,
벼슬 그만두려고 생각하신 건
책을 저술하려는 마음 간절해서였지요.
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아아! 애석하다.
22
안의현감으로 계실 때다. 아버지는 시노비(중앙의 각 시에 딸린 노비, 시는 궁중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 이름 밑에 붙여 쓰는 말)를 해방해야 함을 논하여 삼종질인 판부사(중추부의
종1품 벼슬인 판중추부사의 준말) 박종악에게 편지를 보내셨다. 당시 판부사공이 우의정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첫 경연에서 임금님께 건의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또 조정에서 청나라의 동전을 사와 국내에 유통시키자는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는 말을 전해듣고 우의정 김이소에게 편지를 보내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논하셨다.
(당시 조정에서는 청나라 동전을 은을 주고 들여와 사용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연암은 국
내에 있는 은의 고갈을 우려해 반대하였다.)
이런 일은 모두 아버지가 백성의 고통과 국가의 정책에 대해 고심하셨음을 보여준다. 관
련된 편지는 모두 문집에 실려 있다.
23
언젠가 탄식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일국의 제도는 도량형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우리나라의 도량형은 정확하지 않다. 이 때문
에 온갖 기물이 구차하고 정밀하지 않다. 동쪽 시장의 되가 서쪽 시장의 것보다 크고, 남쪽
마을의 자가 북쪽 마을 것보다 짧다. 약재를 다는 저울은 왜인에게 빌려다 쓰고, 은을 다는
저울은 북경의 시장에서 사다 쓴다. 이래서야 무슨 제도를 논하겠는가?"
24
아버지는 일찍이 '위인찬' 세 편을 짓고자 하셨다. 아버지가 꼽으신 위인은 한나라의 제갈
량, 송나라의 한위공(송나라의 어진 재상 한기), 명나라의 왕양명이었다. 내가 미처 여쭤보지
못한 탓에 아버지께서 그 글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 했는지 알지 못한다.
25
언젠가 탄식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독서와 학문에는 세상에 소용이 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우리나라의 선현들
중 조중붕(조헌)이 쓴 '동환봉사'같은 글은 오로지 정사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는 도끼를 가
지고 대궐 문밖에 엎드려(도끼를 소지하는 건, 만일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이 도끼로
죽여달라는 비장한 결의의 표시다.) 실정을 비판하는 극렬한 상소문을 올렸다가 귀양을 가
게 되었는데 유배지인 함경도 길주까지 걸어서 갔다.
그 후 조중붕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그의 역량과
기백은 큰 일을 맡을 만했지만, 성공과 실패라든가 이익과 손해 따위는 결코 따지지 않고
오직 자기가 해야 할 일만을 힘써 해나갔을 뿐이다.
율곡이나 우암(송시열)과 같은 선현들 역시 그 독서와 학문에 체와 용(체는 자신을 수양
하고 마음을 닦는 일이요, 용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말한다.)이 있었다.
그러므로 세상일을 경륜함에 다들 지극히 주도면밀했으니, 어찌 종일토록 성명(인성과 천명
에 대한 성리학적 논의)의 이치만을 논했겠는가?"
26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우리나라 선현 가운데 일두(정여창)나 한훤당(김광필) 같은 분은 모두 수학(숫자로써 우
주의 원리와 주역의 이치를 풀이하는 학문을 가리키는 바, 상수학이라고도 한다.)에 대한 조
예가 있었다. 그러나 저술을 남기지 않아 그 학문이 전해지지 못했다. 이를 통해 저서가 없
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7
매양 다음 말씀을 하시곤 했다.
"유반계(유형원)의 한평생 경륜은 통유(모든 일에 통달한 유학자)라 할 만하다."
28
평소에 농암(김창협)과 삼연(김창흡) 두 선생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하셨다. 또 삼연 선생과
관련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일찍이 영시암, 삼연, 호해정 등을 유람하면서 선생의 모습을 상상해 본적이 있다.
영정을 뵌 후엔 세상에 다시 없는 선생의 풍모를 늘 꿈에 그리곤 하였다."
29
아버지는 한가하실 때면 우리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집안의 옛날 일들을 자세히 말씀해주
셨다.
"여호(박필주) 선생이 병인년(1746)에 입대(대궐에 들어가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것을 일
컫는 말)하셨을 때 나는 겨우 열 살이었다. 그런데도 그때 일이 꼭 어제 일처럼 생생하구나.
당시 선생은 우리 집에 와서 머무셨는데,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모두 찾아와 선생께 인사를
드렸었다. 정승 조현명은 책을 끼고 방에 들어오더구나. 그는 선생께 절을 올린 다음 자리에
앉더니, '소생은 오늘 선생을 모시고 '대학'의 한 대목을 강론할까 합니다' 라고 말했는데, 풍
모가 썩 훌륭하더구나. 당시 나는 어린 마음에 놀라고 탄복하여,
'정말 이렇게도 어진 이를 공경하는 정승이 있다니!'
하고 생각했느니라. 그 후 철이 들자 그가 와서 강론을 청했던 게 달리 속셈이 있어서였
음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은 장간공 행장에 서술되어 있다.
30
아버지는 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집안은 신임의리에 관한 한 매우 준엄한 입장이었다. 일찍이 장간공께서 과거를 단
념하고 응시하지 않으셨던 건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공은 영조 을
사년(1725)에 네 충신(신임사회때 사사된 노론의 4대신을 가리킨다. 곧 김창집, 이이명, 이건
명, 조태채이다.)의 관작이 회복되자 비로소 정시에 응시하여 병과에 합격하셨다. 단 한번
시험을 보아 과거에 급제하셨으니 정말 세상에 드문 일이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다.
"나의 증조부 일곱 현제 집안은 당론이 서로 다르다만, 우리 집과 종가만은 신임의리를
확고하게 지켰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탕평책에 찬성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이익을 좇는 비열한 인간으로 간주했다. 정승 조현명이 우리 집에 묵고 계시던 여호 선생을
방문해 '대학' '혈구'장(대학의 제10장으로 치국평천하의 의미를 해석해놓고 있는 장이다.)을
강론할 것을 청했을 때 장간공은 우스갯소리를 하시어 물리쳐버렸다. 그는 낯빛이 변하며
그만두더구나. 그의 의도는 탕평책이 당시의 여론임을 넌지시 알리려던 거였다."
31
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언젠가 우리 형제가 여호 선생을 강가의 집으로 찾아가 뵌 적이 있다. 선생께서는 막 진
지를 드시기 시작했고 집안 식구들은 방 밖에 모여 밥을 먹으려 하고 있었다. 선생께서 물
었다.
'너희들 반찬은 무어냐?'
'건어이옵니다'
선생께서는 이렇게 꾸짖으셨다.
'오늘 저녁은 금계(박동량) 조상의 기일이다. 너희들이 소밥을 먹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그리고는 건어를 치우라고 분부하셨다. 금계공은 선생께는 고조부가 되지만 다른 사람들
에게는 이미 6대조가 된다. 나는 그 당시 나이가 어려 선생께서 너무 예법이 엄하다고 생각
했었다."
32
이런 말씀도 하셨다.
"장간공은 집안을 다스리는 법도가 매우 엄하여 선고(연암의 돌아가신 아버지) 형제분이
늘 곁에 모시고 서서 수발을 들었다 부녀자들은 공을 뵐 때 소매가 넓은 저고리를 입어야
했으며, 바느질을 하거나 음식을 장만할 때에는 모두 팔찌를 차서 넓은 옷소매가 걸리적거
리지 않게 한 다음에 일을 해야 했다. 진지상은 선고 형제분이 연로하여 흰 머리가 희끗희
끗하던 때에도 반드시 손수 들고 가 올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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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선고께서는 효성스럽게 부모님을 봉양하셨다. 그리하여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 슬하를 떠
나지 못하듯 50년 동안 대문을 나서서 세상일에 관여하신 적이 없다. 부모상을 치른 지 몇
년 만에 선고 또한 별세하셨으므로 세상에는 우리 선고를 아는 이가 없다. 늘 선고의 지장
을 짓고자 했으나 부모님께 효도한 것 말고는 특별히 서술할 만한 일이 없었다. 유안공9이
보천)께서 선고에 대해 언급하실 때면 반드시 탄식하시며,
'이처럼 한 뒤에야 순수한 효성이라 할 수 있지!'
라고 하셨다. 공께서 지으신 선고의 제문에는 지나친 찬사가 조금도 없으니, 이를 읽으면
선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34
일찍이 우리 형제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들이 장차 벼슬하여 녹봉을 받는다 할지라도 넉넉하게 살 생각은 하지 말아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하였으니, 청빈이 곧 본분이니라."
그리고는 집안에 전해오는 옛 일들을 다음과 같이 낱낱이 들어 말씀해 주셨다.
우리 선조 반남(박상충) 선생께서는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식
다가 흉악한 무리들에게 핍박을 받아 청교역에서 돌아가셨다. 고향으로 운구하지 못하고 그
곳에 장사지냈으니, 바로 개성 동문 밖이었다. 선생의 집안이 가난하여 어쩔 도리가 없었음
을 알 수 있다.
반남 선생의 아드님이신 평도공(박은)께서는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가난에다 병까지 겹쳤지만 뜻과 의기만은 의연하였다."
공은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 오랫동안 재상의 자리에 계셨건만 탈속반(첫번 찧은
쌀로 지은 밥. 아주 거칠다.) 먹는 신세를 면하지 못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 공의 집은
낙산(지금의 동숭동 뒷산) 아래에 있었다. 하루는 태종께서 갑작스레 공의 집에 납시었다.
태종은 공이 얼른 나와 영접하지 않은 데 대해 노여워하셨다. 그러자 공은 이렇게 아뢰었다.
"신이 마침 탈속반을 먹던 중이어서 그대로 나가 전하를 뵈면 실례가 될 듯하여 양치질을
하고 나오느라 감히 늦었사옵니다."
임금님께서 그 밥을 가져오라고 하여 확인하고는 더욱 노하여 말씀하셨다.
"이는 저 옛날 공손홍이 삼베 이불을 덮었던 일에 해당되지 않는가? 어찌 조정 대신으로
서 탈속반을 먹는 자가 있단 말인가?"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아뢰었다.
"대신을 의지해 살아가는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워낙 많아 녹봉으로 받은 쌀이 그 날 저녁
이면 다 흩어져버리옵니다."
임금님께서 무안해하시며 말씀하셨다.
"내 잘못이로다.! 내가 임금이 되어서도 소시적 친구에게 탈속반을 먹게 하다니. 나는 도
저히 경의 훌륭함을 따라가지 못하겠구려."
임금님은 즉석에서 동대문 밖 고암(지금의 종암동)의 전지 10결을 하사하셨다.
야천(박소) 선생은 소인의 무리에게 미움을 받아 세상을 피해 우거하시다가 영남에서 돌
아가셨다.(박소는 당시 세도가 김안로에게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남양에 피해있다가 외가가
있던 합천으로 내려가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반장(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가 원래 살았던 곳이나 고향으로 운구하여 장사지내는 일)하지 못했다. 당시 장남인 찬성
공(박응천)이 열아홉 살, 차남인 반성공(박응순)이 아홉 살, 3남인 문정공(박응남)이 여덟
살, 4남인 나으 7세조 도헌공(박응복)이 다섯 살, 막내이신 도정공(박응인)이 세 살이셨는데,
그 울부짖는 소리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 홍부인께서는 이들의 손을 잡고 온갖 고초를 겪
으며 서울로 돌아오셨다.
내가 안의현감을 지낼 때 여러 차례 선생의 묘에 참배하였다. 겹겹이 둘러싸인 쓸쓸한 산
에 홀로 서서 당시 일을 생각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선생의 환난과 가난이 이토록 심했었
나' 싶어 통곡이 나오려 했다.
마침내 다섯 아드님이 모두 벼슬길에 올라 이름난 공경과 어진 대부가 되었다. 찬성공은
여러 차례 고을 살이를 하셨는데 종종 식구들을 거느리고 가지 못하셨다. 그때 문정공은 경
의 녹을 받고 있었는데, 그 절반을 큰형수께 드렸다. 매양 조정에서 물러나오면 조복을 벗지
도 않은 채 형수를 찾아가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를 여쭈어보셨다. 그리고 몸소 쌀독이
며 장독을 들추어보아 빈 것이 있으면 마련해다가 채워드렸다. 그러나 문정공은 가난 속에
서도 맑은 지조를 지켜 온 세상 사람들에게 경외를 받았으니,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참으
로 태연자약하셨다 할 것이다.
반성공은 임금의 장인이라는 귀한 신분이었으나, 집안은 썰렁하여 재물이 없었다. 국혼(왕
실과 혼인)을 치를 적에는 안팎에서 재물로 도와주는 것이 옛날부터 내려오던 관례였으나,
공은 홀로 한 물건도 받지 않고 검소하게 혼례를 치렀다.
나의 선조인 도헌공은 당시 바야흐로 벼슬에 진출해 명망이 있으셨으나, 자신의 임금의
외척과 가까운 처지라 하여 더욱 겸손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셨다. 그리하여 두문불출하며 오
직 책과 화초와 대나무로 소일하셨다. 공은 평생 이렇게 지냈으며 끝내 높은 벼슬을 하지
않으셨다. 우리 가문의 청렴하고 욕심 없는 태도는 이처럼 철저하였다.
도헌공의 아드님이신 충익공(박동량)은 일찍부터 임금님께서 알아주시어 조정의 요직을
두루 맡으셨다. 그러나 국운이 험난할 때여서 자기 한몸도 돌볼 수 없었으니 하물며 집안일
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임진왜란 8년 동안 우리 집안은 연안, 수안, 안주 등을 떠돌며
온갖 곤궁함을 다 겪었다. 나라가 중흥되자 공은 외직을 맡으실 때는 큰 고을을 다스리셨고,
조정의 벼슬을 맡아서는 나라의 정책을 관장하셨다. 그러나 나라일을 도모하는 데는 능하셨
지만 집안 살림에는 능하지 못하셨다. 그리하여 논밭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는 몇 달을 지
탱하기도 어려웠고, 가재도구는 열에 예닐곱은 없었다. 평생 지니신 거라곤 은술잔 하나였는
데 공훈을 책봉받던 날 임금님께서 상으로 하사하신 것이었다. 그 외에는 단 한 개의 주기
나 다기도 소유하신 게 없었다. 공은 서화를 몹시 좋아하셨다. 한번은 훌륭한 화가를 만났
다. 그러나 집에는 한 폭의 비단도 없었다. 그리고 달리 구할 방도도 없었다. 마침내 공은
조복을 빨아 거기에다 그림을 그리게 하셨다. 만년에 귀양살이하실 때 나물찬과 거친 밥조
차 드시지 못한 적이 여러 번이었는데, 이 사실은 공이 쓴 여러 시와 편지에 보인다. 큰아들
문정공(박미)이 부마였건만 공의 가난함은 이와 같았다.
문정공께서 선조의 부마로 간택되자 정동의 집을 하사받으셨다. 그러나 공은 그 집이 사
치스럽고 크다느 이유로 사양하시고 태평동에 다시 집을 얻으셨다. 이곳에 집을 얻은 건 부
모님 댁이 가까워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리기 좋기 때문이었다. 충익공의 옛집은 지금도 창
동에 있는데 그 사랑채는 방 두 칸에 대청 한 칸 뿐이었다. 문정공은 선조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지만 왕의 자녀에게 지급되는 전답 외에 개인적으로 따로 하사받은 건 없었다. 정
안옹주(문정공의 부인으로 선조의 다섯째 딸이다.)의 옷에 땟국이 졸졸 흐르더라도 서조께서
는 궁인으로 하여금 직접 확인케 하여 정말 낡을 대로 낡지 않고서는 새 옷을 하사하신 적
이 없었다. 그래서 정안옹주는 항상 옷이 쉬 해어지지 않음을 걱정하셨다. 이 일은 지금까지
도 우스갯소리로 전해지고 있다. 아조(조선왕조) 왕실의 검소한 덕은 진실로 그 의복이며 가
물을 자녀들에게 두루 하사하셨는데 다들 금은과 진귀한 물건들을 얻어갔지만 정안옹주 홀
로 선조대왕이 친히 그리고 난죽 병풍 하나만을 가지고 돌아오셨다. 숭상한 바가 이와 같았
으니, 이로 미루어 좋아하시지 않은 게 어떤 것이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문정공은 비록 일찍 귀하게 되셨지만 가난하여 가마와 말, 하인 등을 갖출 수가 없었다.
공께서는 이런 시를 읊으신 적이 있다.
인도하는 하인은 여든 살 노인
견마 잡힌 종놈은 궁티가 졸졸.
그 뒤를 따르는 어린 종놈은
엄동에도 내의를 입지 못했네.
시정배는 단출한 행차 비웃고 있고
처자는 고단한 행색 부끄러워하나
비켰거라 외치는 벽제 소리에
그래도 행인은 비키게그려.
"인도하는 하인은 여든 살 노인"이란 구절은 길을 인도하는 하인이 주인을 내리 3대나 섬
겨 나이가 거의 여든이 되어 간다는 뜻이다. 공은 이처럼 가난하셨지만 조용히 욕심 없이
사셨다. 공의 풍류와 문학은 당시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성품이 술을 좋아하셨지만 가난하
여 종종 마음껏 취하시지 못했다. 그럴 때는 온종일 고요히 앉아 계시다가 자리를 파하셨다.
그렇지만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잘 도와주어 자신이 가진 걸 아끼지 않고 주셨다.
부친인 충익공이 오랫동안 남쪽 변방에 귀양 가 온 집안이 따라갔는데, 공은 부마였기에
따라갈 수 없었다. 공은 몹시 애통해하셨으며, 한 필 말에 홑옷 차림으로 오랜 기간 유배지
를 왕래하셨다. 게다가 모부인 상을 당하고 그에 겹쳐 큰고모와 셋째 아우가 모두 남쪽 천
리 밖에서 돌아가시니 공은 세 번이나 반장을 하였다. 당시 정안옹주가 혼자 서울집을 지키
셨는데, 힘써 일하여 없는 살림을 꾸려가셨다. 그러나 쌀독은 바닥이 드러나고 돈주머니는
텅 빈 형편이었다. 옹주는 초췌해져 거의 쓰러질 뻔하였다. 옹주는 이때 일로 고생해 익숙해
져 만년까지도 몸소 길쌈을 하셨다. 이와 같은 옛 선조들의 노고와 고생은 100대 후까지 자
손들이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정안옹주는 일흔한 살까지 사셔서 우리 증조부 현제 7명과
자매 4명이 모두 그 사랑을 받았으며, 증손자(박태두의 아들 박필하)한테까지 사랑이 미쳤
다. 이는 근면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여 복을 아꼈기에 얻은 경사거늘, 하늘의 보답은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증조부(박태길)께서는 덕은 있으셨으나 수를 누리지는 못하셨고, 이 때문에 윤부인께서 고
생해가며 조부 형제분을 키우고 가르쳐서 성취시키셨다. 조부께서 막 벼슬살이를 시작하셨
을 때 윤부인께서 그만 별세하셨다. 그래서 조부께서는 고을 원을 맡아 윤부인을 봉양할 기
회를 갖지 못하셨다.
조부 형제분은 통진(김포군 통진면)의 봉상촌에서 시묘살이(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무덤
앞에 초막을 지어서 그곳에 기거하며 3년상을 지내는 것을 말한다.)를 하셨다. 이 땅은 본래
간이 최립의 별장이 있던 곳인데 충익공이 일찍이 매입하여 거처하셨다. 그리하여 조부 형
제분께서 얼마간의 척박한 전답을 소유하시게 되었지만 바다 근처의 소금기가 많은 땅인지
라 해마다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마침 당질인 장익공(박사익)이 강화유수로 계셨는데
항상 쌀, 소금, 간장, 된장 등을 보내주어 제사를 받들 수 있었다.
조부께서는 그 지위가 경의 반열이었으나 자주 끼닛거리가 떨어져 가난한 선비의 살림살
이와 다를 바 없으셨다. 도성 서쪽의 낡은 집은 누추하고 비좁았으나 평생 거처를 옮기지
않으셨다. 한번은 집에 심하게 무너진 곳이 있어 객이 수리할 것을 청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도 바로 그때 조부께서 지방 수령에 임명되셨다. 조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령이 되어서 집을 수리하는 건 옳지 않다."
얼마 후 통진에 있는 척박한 땅이 방죽이 해일로 무너져 장차 다시 쌓으려 했다. 그런데
조부께서는 마침 그때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셨다. 조부께서는 이번에는 이렇게 말씀하셨
다.
"관찰사가 되어서 자기 농장을 돌보는 건 옳지 않다."
조부께서는 사람을 보내 그 일을 중지시켰다. 객은 이렇게 탄식하였다.
"관찰사나 수령이 되려는 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선데 공은 도리어 손해만 보고 있다."
이 일이 알려져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당시 사대부들 가운데는 청렴결백한 법도로
집안을 다스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우리 집의 법도는 당시로서도 너무 지나치다고 일컬어졌
다. 그럼에도 우리 집안은 그런 명성을 자부하지 않았다. 고을 수령들은 으레 집에 선물을
보내주곤 했는데 당시 양식이 자주 떨어져 고을 수령들이 보내온 육포와 건어 따위를 찢어
서 아침 식사를 대신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왜 그걸로 쌀을 팔아 밥을 짓지 않으시는지요?"
조모께서 깜짝 놀라며 말씀하셨다.
"시정 사람들에게는 공경 집안의 가난함을 알려서야 되겠어요?"
무릇 이런 사실들은 모두 자손들이 몰라서는 안될 일이다. 우리 집안은 수십 대에 걸쳐
청빈함과 검소함이 이와 같았으니 이는 원래 타고난 것이었다. 내 비록 너희들이 따뜻한 옷
을 입고 배부르기를 바라지만 부귀와 안일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다만 바라는 건 사대부 집
안으로서 글 읽는 사람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 뿐이다.
35
아버지는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현인 군자가 시무를 안다 함은 매양 남들이 급하게 여기지 않는 일에 대해서도 미리 대
비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현인, 군자는 일단 일을 착수하여 시행하면 그 효과가
매우 크다. 가의(전한 문제 때의 충신이다.)는 수백자롤 된 '치안책'이란 글을 올려 태자를
일찍 교육시키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했다. 이는 저 진평이나 주발(전한때의 공신들)
과 같은 무리는 생각지 못할 주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묘사화(훈구세력에 의해서 조광조
를 비롯한 신진사류가 화를 입은 사건) 이후 한동안 도학에 대한 논의를 꺼리는 분위기였
다. 당시 인종께서 세자가 되신지 벌써 6, 7년이나 되었건만 세자시강원(세자에게 경, 사를
가르치고 도의를 선도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청)의 고위 관료들은 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는
일이 급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때 문강공(박소)은 전랑으로 계셨다. 회재(이언적) 선
생은 문강공보다 5년 먼저 과거에 급제했으나 아직도 교서관(주로 책의 인쇄 및 반포를 담
당하던 관청)의 한미한 직책에 머물러 있어 별로 아는 자가 없었다. 문강공께서는 선생을
힘껏 천거하여 세자시강원에 근무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두 분이 번갈아가며 궁료가 되어
비로서 정주(성리학자의 정자와 주자)의 가르침을 세자에게 강론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여론은 아직 세자의 나이가 어리니 경서를 강론하는 일이 급하지 않다는 것이었으
나, 두 분께서는 마음을 합하고 곧음을 함께하여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비록 인종
의 거룩한 지혜는 하늘이 내리신 것이라 하더라도 그 초년에 올바른 도리를 함양한 공부는
실로 두 분이 기초를 마련한 것이었다. 옛날의 제도에 정7품 이하 관료들의 승진과 인사는
전랑이 담당했으므로 문강공이 회재 선생을 이끌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군자란 세상일에
있어 먼저 할 바와 나중에 할 바를 알지만, 범속한 사람들은 군자가 무엇을 고심하는지 알
지 못하는 법이다."
36
아버지는 언젠가 우리나라 왕실 법도의 엄함을 논하시다가 우리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
를 해주셨다.
"임진왜란으로 임금님께서 피란을 떠난 동파역에 머무시게 되었는데, 교군과 마부들이 뒤
섞여 분잡하였다. 그때 의인왕후께서 밖에 누가 자나가며 '박내승'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
시고는 박내승을 불러오라 분부하시어 문을 사이에 둔 채 말씀을 나누셨다.
'오늘 이곳에서야 오라버니를 만나뵙게 되는군요!'
박내승은 곧 반성부원군의 아드님인 동언공(박동언)이셨다. 의인왕후에게는 오라버니가 딱
한 분 계셨다. 반성부원군은 작고하신 지 이미 오래여서 의인왕후가 동기친척이라곤 내승공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피란길에 처음 상봉했다는 말은 이치에 영 맞지 않는 것 같다. 전해
오는 말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지만,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내승공은 그 후 10여 년 뒤 작고하셨는데 작고하실 때 직책은 여전히 사복시정 겸 내승이
었다. 선조께서는 나라를 중흥시키는 데 함께한 어린 왕비에게 은혜와 예우를 아주 융숭하
게 하셨으나 그 인척에게는 당상관의 영예를 베풀지는 않으신 것이다. 왕실의 법도가 이처
럼 훌륭했으며, 당시 사대부들 또한 임금의 인척으로서 당상관에 오르는 걸 영광으로 여기
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선배들이 혹 전하기를, 청양군 심의겸은 명종의 인척으로서 사림을 구한 공이 있고 반성
부원군의 아우인 문정공은 선조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 훌륭한 인물들을 조정에 많이 진출
시킨 공이 있다고들 하는데 이는 근거 없는 억측에 불과하다. 단지 문정공께서 조정에 엄숙
한 태도로 악을 물리치고 선을 옹호하셨기 때문에 간사한 무리가 물러나고 어진 이들이 진
출할 수 있었던 거이다. 만약 문정공이 임금의 인척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이는 문정공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할 것이다."
37
가까운 친척 중 아버지와 마음이 가장 잘 통한 분은 교리공 재원과 금성공 명원이셨다.
두 분은 모두 아버지의 삼종형이었다. 교리공은 소론을 주장한 집안이었으나 평소 아버지
앞에서는 당론과 관계된 말을 한 적이 없으셨다. 공은 뜻이 굳세고 기상이 정대하여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홀(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 때 조복에 갖추어 손에 쥐던 물건)을 바로잡고
직언하셨다. 그 말이 모두 바르고 곧아 칭찬할 만하였다. 무술년(1778, 정조 2년)에 올린 상
소는 엄정하기가 추상같아서 가히 정재공(박태보)과 앞뒤를 다툴 만했다. 공은 매번 일이 있
을 때마다 아버지를 찾아와 상의 하곤 하셨다. 아버지가 무어라고 대답하시면 공은 빙그레
웃으시며,
"내가 평소 생각한 것이 자네한테 뭐 그리 신기할 게 있겠나!"
라고 하셨다. 그 의견이 합치되매 기뻐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금성공의 조카인 판서공(박종덕)이 금성공께 무슨 일을 아뢴 적이 있었다. 금성공께서는
그 일의 가부를 논한 다음 조금 있다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일은 아우 미중(박지원의 자)과 상의해라. 그는 일을 논함이 명쾌하고 사사로운 감정
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아버지는 언젠가 금성공의 충성스러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형님은 50여 년 동안 대궐에 출입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임금님을 섬겨 남이 하기
어려운 일을 처리한 게 아주 많았다. 그러므로 그 공적을 역사책에 기록한다면, 내리 두 임
금님을 섬긴 충성스런 신하라 이를 만하다. 나는 그 묘지명을 쓸 때 대궐과 관련된 일은 모
두 빼버리고 서술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까닭은 실로 이 형님의 본래 뜻이 자기가 한 일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데다가 또 나 같은 바깥 사람이 사사로이 기록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형님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쓴 글이나 '열하일기' 중에서 언급한
내용 역시 모두 형님의 한 자잘한 면모만 말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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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선배들 이야기만 나오면 꼭 다음 말씀을 하셨다.
"내가 본 바로는 유안공(이보천)이야말로 진정한 처사셨다."
나는 언젠가 이렇게 여쭌 적이 있다.
"유안공의 학문과 기상은 어떠하셨습니까?"
"공은 늘 주자가 편찬한 '소학'을 독실히 따르셨다. 그리하여 법도로 자기 몸을 단속해 그
토록 근엄하셨지만, 담소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실 때는 호걸스런 선비의 빼어난 기상이
있으셨다. 나는 종종 과격한 말을 하여 중도에서 벗어날 때가 있었는데 공께서는 그때마다
정색을 하고 나를 꾸짖으셨다. 그러나 내가 방에서 물러나오면 기뻐하는 표정을 지으며 미
소를 짓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 마음으로 깊이 통하는 바가 있어서였을 게다."
아버지는 이런 말씀도 하셨다.
"유안공은 만년에 시골집에 계시면서도 종종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수십 수백 년 후의
국가 장래에 대해 걱정하셨다. 그러니 정말 향리에 있으면서도 임금을 잊지 않은 분이라 할
만하다. 늘 나더러 자취를 감춰 은둔하라고 타이르면서 개연히 말씀하시기를,
'선비가 과거를 포기하고 벼슬을 단념한 채 자기 한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향리로 돌아
간다 할지라도 임금을 섬기는 충성스런 마음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라고 하셨다.
공의 기제 때면 지팡이에 의존하는 향리의 늙은 하인들까지 꼭 찾아와 제사에 참여했는
데, 제사를 끝낸 뒤 음식을 나누어주면 반드시 손을 씻고 옷깃을 여민 후 꿇어앉아 먹었다.
공께서 집안을 다스린 법도가 하인들까지 교화시켰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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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손님 한 분이 아버지꼐 말했다.
"공의 주량은 선배들도 좀처럼 미칠 수 없을 듯하외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젊을 적에 미호(김원행) 선생을 찾아뵈었더니 마침 형제분끼리 서로 술잔을 기울이
고 계십디다. 댁에 막걸리를 한 동이 담았는데 이제 막 익어 놋사발 뚜껑으로 따라 마시고
계신 중이었지요. 그 날 저녁에 술 한 동이를 다 비우셨는데, 다들 정신이 또렷하고 기운이
펄펄하여 평상시처럼 담론하시더군요. 그러다가 밤이 되자 다시 남은 술찌끼를 짜서 마저
들지를 않겠소. 내가 당시 그 광경을 목격하고 탄복하였소이다. 그러나 미호공께서 평소 술
을 드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바로 이 점이 선배들을 따라잡기 가장 어려운 점이
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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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강산(이서구) 댁의 모임에 참석하셨을 때다. 아버지는 좌중의 여러 사람과 효
효공(김용겸) 생전의 일을 화제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곁에 앉아 있던 한 젊은이가 공을
뵙지 못한 것을 애석해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자네, 그 얼굴을 보고 싶은가?"
라고 말씀하시더니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가져와 붓으로 공의 작은 초상을 그려보이셨다.
강산이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꼭 닮았어요!"
강산은 그 그림을 간직하여 큰 보배로 삼았다. 효효공을 뵌 사람들은 모두 몹시 기이하게
여겼으며, 완전히 똑같다고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