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헌(烏竹軒)
2022. 11. 17.
강릉 오죽헌(江陵 烏竹軒)
보물 제165호
오죽헌은 원래 조선 초기 강릉의 선비 최치운(崔致雲)이 지은 것으로 전한다. 그의 아들 최응현(崔應賢)에서 외손에게로 상속되어 오다가 1975년 정화 사업 때 강릉시로 이관되었다. 경내에 율곡 이이의 사당인 문성사와 율곡기념관, 강릉시립박물관과 율곡인성교육관등을 지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 가옥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5만 원 권과 5천 원 권 도안 인물인 신사임당과 이이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조선 시대 예술가이다. 자수. 시문, 그림, 등 여러 방면에 재능이 뛰어났는데, 특히 그림을 잘 그려 생존 당시에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초충도”, “산수도”, “묵포도도”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룬 그림, 간결하고 단정한 필치의 “초서”, “전서” 등의 글씨, “사친(思親)”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등의 한시가 있다. 이이(李珥)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에게서 학문을 배우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29세에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호조좌령에서 시작하여 황해도 관찰사, 대사헌을 거쳐, 호조, 이조, 형조, 병조 판서 등을 지내며 국정 운영에 참여하였다. ”천도책(天道策)“,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학교모범(學校模範)” 등의 저술을 남겼다. 오죽헌에서 태어나 자랐던 이이는 외할머니인 용인 이씨를 뵙기 위해 자주 강릉을 다녀갔다.
자경문(自警門)
자경문은 오죽헌 안팎을 가르는 문이다. 율곡은 어머니를 여윈 후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유학에 뜻을 두고 일 년 만에 돌아욌다. 그때 강릉 외가로 와 외할머니 앞에서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이라는 의미의 “자경문(自警文)을 지었는데 거기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문은 ”강릉 임영관 삼문(국보 제51호)“과 같은 모양으로 1976년 4월에 건립되었다.
입지문(立志門)
이 문은 오죽헌 남문으로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첫 장인 “입지장(立志章)”에서 따온 이름이다. “격몽요결”은 율곡이 42세(1577)때 해주 석담에서 저술한 책으로 초학자들에게 학문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유학의 입문서이다. 책의 이름은 몽매한을 물리치는 요긴한 비결이라는 뜻이다. 율곡은 “입지장”에서 “처음 학문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맨 먼저 뜻부터 세워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도 성인(聖人)이 되리라고 마음 먹어야 한다.”라고 했다. 학문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뜻을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임당(師任棠) 신(申)씨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난을 면한 아버지 신명화(申命和)와 어머니 용인(龍仁) 이(李)씨의 다섯 딸 가운데 사임당은 둘째 딸로 1504년 음력 10월 29일 이곳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나 1551년 5월 17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48세이다. 덕수(德水) 이씨 원수(元秀)에게 출가하여 일곱 남매를 두었고 우리나라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이르는 율곡은 셋째 아들이다. 사임당은 우리 역사에서는 다시 찾을 수 없는 여성으로 부덕(婦德)은 만인의 사표(師表)가 되었고 천부(天賦)의 자질이 남달리 비범하여 여공(女功)은 말할 것도 없고 글씨, 그림, 학문, 예술에 이르기 까지 천재가 발휘된 작품과 업적이 오늘까지 남아 전하여 뒷세상 사람의 우러름을 받고 있다. 사임당은 율곡과 같은 거벽(巨擘)을 길렀을 뿐만 아니라 매창(梅窓)과 옥산(玉山)과 같은 자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다 어머니의 자질과 훈도(薰陶)에 연유(緣由)하여 서예나 그림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남성은 서로 견주어지는 인물이 있으나 여성으로서는 사임당과 견줄 인물을 찾기 어려우니 사임당은 우리 민족의 만세(萬世)의 여성상이라 이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