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학교는 무등산 뒷편 화순 동면에 위치한 학교다. 지력 위주의 현실 교육에 대하여 정서 위주의 교육을 표방하는 일종의 대안학교다. 교장을 포함한 교원 여덟 명과 사십 명 남짓한 학생들로 구성된 소규모 학교다. 도시의 한 학급 정도 밖에 안 된다. 다른 초등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육학년제이기 때문에 한 학년이 다섯 명에서 여덟 명 정도로 추산된다. 학과 공부 외에 나머지 활동들은 전 학년이 함께 움직일 수 있는 규모이며 실제 그렇게 진행된다. 작가(교장)는 이 학교에서 겪은 일들을 일상적인 에세이 풍으로 들려준다. 그는 교장이면서 동시에 수업을 비롯한 거의 모든 교육 활동에 직접 참여한다.
그의 에세이가 특별한 교육 철학을 피력하거나 교육 사례들을 보고할려는 교육적 또는 홍보적 목적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우리(독자)는 그의 글만 읽고서는 그 학교의 대안 교육이 현실성이 있는지, 이후의 교육과정과 연계성은 있는지, 정서 위주의 교육이 과연 논리적 지력의 밑바탕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정확한 정보를 알 수도 없고, 그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도 없다. 그러한 문제들은 그의 관심도 우리의 관심도 아닌 것 같다. 물론 대안학교의 학교장으로서 남다른 교육적 소신을 갖고 있겠지만 어쩐지 그는 그러한 문제들을 전면에 드러내기를 원치 않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섬머힐과 같은 대안 학교들이 겪고 있는 현실과 이상이 빚는 갈등이라든가 제도 교육의 문제점을 개선해보려는 치열한 실험 정신 등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는다. 독자가 행간에서 그러한 실험적 의도들을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정말 문면에 드러나는 것처럼 지오학교에서는 현실과 아무런 갈등 없이 인성에 부합되는 조화로운 교육이 펼쳐지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만약 후자라면 지오학교는 우리가 그렇게 찾아 헤매는 화순 동면에 있는 작은 패러다이스라고 봐야 한다. 현실의 지도에는 아무리 구글링을 열심히 해도 그런 패러다이스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글의 진정한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지오 학교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연 학습과 노작 교육이다. 목공예라든가 식물 기르기 같은 노작 교육은 손과 자연물이 직접 접촉하고 상호 작용하는 데서 교육적 효과를 찾는 교육이기 때문에 크게 자연 학습에 포함될 수 있다고 본다. 여행이라든가 탐사활동도 마찬가지다. 이 학교는 산 능선이 굽이쳐 내려와 산자락이 운동장 한 켠에 작은 둔덕을 이루고 있다. 학교 주변에 내가 흐르고 육백 년 된 느티나무를 비롯해 벚나무들이 학교를 에워싸고 있다. 천혜의 자연 환경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우리는 자연에서 태어났으며 자연 속에서 자라 자연에 묻히는 자연의 일부이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자연으로부터 배운다. 이 학교는 자연으로부터 배우기 위하여 자연 깊숙이 위치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작가는 자연학습에 대한 이 두 가지 측면을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배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호흡을 배우지 않고도 호흡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연 안에 놓여 있다는 거, 자연과 접촉한다는 거, 자연이 내어주는 생명체들과 만나고 경험하고 소통한다는 거, 이렇게 모든 것들은 우리의 감각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우리의 내부로 흘러들어온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이 대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자연을 떠난 우리의 삶은 자연에서 인간에게로 흘러 들어오는 유연한 생명의 흐름이 차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감각은 닫히며 우리의 정서는 피폐해진다.
작가는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노는 아이들의 놀이를 통하여 자연에게서 인간으로 어떻게 생명의 파동이 흐르는가를 지켜본다. 뱀이나 곤충 같은 하나하나의 생명체들과 아이들이 어떻게 접촉하고 반응하는가를 면밀히 살펴본다. 단지 관찰자의 시점에서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직접 아이들과 함께 행동하며 아이들과 정서적 유대감을 유지하면서 함께 관찰하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동식물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도시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다채로운 생태계가 펼쳐진다. 동물로는 개구리, 장수풍뎅이, 개미, 잠자리 같은 곤충에서부터 뱀, 너구리, 독수리까지 등장한다. 식물은 방동사니같은 잡초에서부터 피튜니아, 백일홍, 셀비아 같은 화훼식물, 수련, 물수세미, 부레옥잠 같은 수생식물, 그리고 감자, 고구마,들깨, 토마토, 옥수수 같은 각종 원예 작물들이 학교 주변에서 발견되고 화단과 텃밭에 심겨진다.
아이들은 이것들을 키우고 지켜보고 접촉하면서 생명이 순환하는 이치를 깨닫고 서로 얽혀 있는 생존의 법칙들을 터득한다. 또한 이들을 기르는 과정 속에서 예기치 않는 죽음과 맞닥뜨리기도 하고 사소하고 징그럽게 보이는 것들은 예사로 죽이기까지 한다. 반면에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너구리의 죽음에 대해서는 땅에 묻어주는 일종의 장례의식까지 행한다. 어쨌든 죽음은 아이들에게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개념이다.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성장기 아이들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중요한 경험이고 이후에 생명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교사(성인)의 개입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든다. 교사의 개입이란 다른 말로 하면 교사의 교육적 태도나 방법을 일컫는 말일 수 있으며 큰 개념으론 교육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자연 학습은 스스로 배우고 터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선 교사의 개입이 최소화되는 것이 옳다. 작가는 이 미묘한 모순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죽음을 터부시하거나 교사의 입장에서 부주의한 행위를 억압하거나 금지하는 것만으론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작가는 여기 자연스럽지만 기발한 방법 하나를 제시한다. 그것은 교사의 입장이 아니라 아이들이 함부로 다룬 곤충이나 동식물의 입장으로 호소하는 것이다.
이곳은 매우 위험한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돌아다니는 곳이니, 모든 뱀, 개구리, 잠자리, 도룡뇽 그리고 사마귀, 여치, 베짱이, 메뚜기 이하 여러 살아있는 생명들은 절대 아이들 눈에 띄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할 것!
이 애교 섞인 경고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아이들도 잘 알 것이다. 그러나 한 번쯤 다른 입장에 서본다거나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경험은 아이들의 사고를 전환시킬 수 있는 중요한 모멘텀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 책의 모든 글들은 작가(교사)의 시각으로 쓰여졌으나 교사와 학생간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에세이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사실 이 글들의 소소한 재미는 아이들과 실갱이, 참견, 간섭, 말싸움 등을 벌이면서 생겨나는 에피소드들에서 발견된다. 고작 심각한 일이래야 아이들이 연못에 빠져 신발을 망친 일이라거나 정들었던 친구가 전학가는 일 정도다. 어른들이 이만한 일로 아이들과 신경전까지 벌여서야 되겠는가, 저절로 실소가 머금어지지만 읽는 우리들도 덩달아 초등학교 교실로 되돌아가서 그러한 문제들에 부딪히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는 매 편마다 아이들과 갈등을 빚으며 글의 말미에 그 사건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해석과 결론을 제시한다.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평범하고 때로는 기발하다. 그러나 글의 말미가 항상 아름답게 빛나는 것은 그 결론에 깊은 통찰과 지혜가 숨어있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들은 나이 들어서도 자연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연과의 문이 닫히면 사실은 진정한 배움의 문은 닫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아이들과 같은 동심을 잃고 있지 않을 때, 그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출 때, 아이들과 함께 때론 웃고 때론 우기며 서로 교감할 때, 곁에서 지켜보던 자연은 우리에게 그 무한한 품을 열어주며 우리는 그 품 안에서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을 발견하고 생명의 활기를 얻는다. 그러나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자연의 문을 들락거리는 친구이면서 동시에 그 문의 지킴이이기도 하다. 문을 열어주고 길을 안내하며 아이들이 옆길로 새지 않도록 지켜줘야 한다. 자연 학습에서 그 지킴이 역할은 감시와 훈육만으로는 안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참여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체득된 결과물들을 함께 피드백하며 공유해야 한다. 교사가 아이들의 친구에 머문다면 아이들은 방향을 잃고 자연 속에 방기될 수 있다. 만약에 교육자로서의 깊은 책임의식과 내적 반성이 없었다면 이 글들은 평범한 개인의 일기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우리가 자연에게서 무엇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 가를 터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른들과 더불어, 또는 어른들이 아이들과 더불어 자연과 소통하며 자연 속에서 함께 배우는 것이 얼마나 큰 감동일 수 있는 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자연과 문명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게 될 것이며, 모든 삶의 문제들과 함께 궁극적으로 죽음이라는 문제까지를 함께 성찰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