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76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유월의 붉은 장미’]
유월의 붉은 장미
이것 좀 봐
생명이라면
숨결 가뻐지네
이슈타르* 향내 각혈 덩어리들
저 아득한 낙원 크레타 섬*
홍건이 적셨던 핏빛 정염이지
그래요
이 땅에도 어느 해 유월은 붉었었지
붉은 장미여
눈부신 한낮 아찔한 교성
남 부끄럽소
만년 세월 그리도 자지러졌으면
이젠 사대부집 정경부인
아미 좀 그려 보소
(2004 . 6 . 2)
*이슈타르 ∼ 고대 수메르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여신. 소상塑像에 장미를 두르고 있음
*크레타 섬 ∼ 에게 문명기의 중심지. 크노소스 궁전 동굴벽화에 장미가 그려져 있음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유월의 붉은 장미〉(2004)는 장미라는 고전적인 소재를 인류학적 신화와 한국의 현대사, 그리고 유교적 절제미라는 독특한 삼각 구도로 풀어낸 밀도 높은 작품입니다.
시의 흐름에 따라 주목할 만한 매력과 비평적 포인트를 짚어드리겠습니다.
1. 신화적 관능미와 시각적 충격 (1~2연)
시의 시작은 "이것 좀 봐"라는 직설적인 감탄사로 독자의 시선을 붙잡습니다. 장미의 붉은색을 단순히 '예쁘다'가 아니라 "생명"의 요동이자 "숨결 가뻐지네"라는 생리적 반응으로 연결하며 초반부터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특히 2연의 표현력이 압도적입니다.
⚫"이슈타르 향내 각혈 덩어리들" : 풍요와 사랑, 전쟁의 여신인 '이슈타르'를 소환해 장미의 붉은빛을 '각혈 덩어리'로 치환했습니다. 생명의 가장 뜨거운 정수인 피를 토해낸 듯한 장미의 파괴적이고도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합니다.
⚫"크레타 섬 / 홍건이 적셨던 핏빛 정염" : 문명의 시원(始源)까지 거슬러 올라가 장미가 지닌 원초적인 사랑과 욕망(정염)의 역사를 우주적 깊이로 확장합니다.
2. 개인적 정념에서 역사적 기억으로의 확장 (3연)
"그래요 / 이 땅에도 어느 해 유월은 붉었었지“
이 시에서 가장 빛나는 전환점입니다. 앞선 연에서 지중해와 신화의 세계를 유영하던 시선이 3연에 이르러 "이 땅(한국)"과 "어느 해 유월"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시공간으로 툭 떨어집니다.
한국인에게 '붉은 유월'은 중의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6·25 전쟁의 비극적 핏빛일 수도 있고, 민주화를 향해 뜨겁게 타 올랐던 1987년 6월 항쟁의 열망일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자연의 붉은 장미에서 우리 민족이 관통해 온 뜨겁고도 아픈 역사적 정념을 자연스럽게 겹쳐놓습니다.
3. 자지러짐에서 정조(貞操)로, 역설적 결미 (4연)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흐드러지게 피어난 장미의 관능성("아찔한 교성", "자지러졌으면")에 대해 뜻밖에도 "남 부끄럽소"라며 제동을 겁니다. 만년의 세월 동안 그렇게 원초적인 욕망을 발산해 왔으니, 이제는 정반대의 미학을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사대부집 정경부인 / 아미 좀 그려 보소" : 여기서 '아미(蛾眉, 누에나방의 더듬이처럼 날씬하고 아름다운 눈썹)'는 단정하고 우아하며 절제된 가인(佳人)의 모습을 뜻합니다.
이 결구는 욕망의 과잉을 경계하고, 뜨거운 열정 뒤에 올 담백한 절제와 기품을 요구하는 한국 전통의 미의식(정중동, 동중정)으로의 회귀를 보여줍니다. 폭발적인 서구적·신화적 정념으로 시작해, 가장 한국적이고 유교적인 '단아함'으로 문을 닫는 이 역설적인 구조가 시적 여운을 길게 남깁니다.
♣ 총 평
한기홍의 〈유월의 붉은 장미〉는 장미를 향한 예찬을 넘어, 생명력의 본질(피, 정염)을 탐구하고 이를 우리 역사와 전통적 정서로 수렴시킨 수작입니다.
핏빛 각혈처럼 격렬하게 피어나 타인을 아찔하게 만들던 장미에게 이제는 정경부인의 고고한 눈썹을 그려보라는 시인의 주문은, 나이가 들거나 계절이 지나며 무르익어가는 모든 생명체가 지녀야 할 '품격'에 대한 은유로도 읽힙니다. 뜨거움과 차분함이 공존하는 유월의 계절감을 닮은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