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의 지서와 서북청년단, 독립촉성국민회 등 우익단체를 공격하며 무장봉기가 시작하였다. 제주에서 새로운 민족 동란(動亂)이 시작된 것이다.
미군정청은 더 이상 경찰과 서북청년단으로 제주도민의 무장 투쟁을 막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모슬포에 있는 국방경비대 9연대에 사태 진압을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4월 5일 제주도 비상경비부를 설치하고, 4월 10일 부산에 있는 제5연대 2대대를 제주에 파견하였다.
김익렬 연대장
제주의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인 김익렬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학병으로 끌려갔던 군인 출신이었다. 대부분의 학병 출신들이 민족주의 성향을 지니고, 반일적 태도를 가지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익렬 연대장도 친일파 성향의 군인이 아니었다. 김익렬은 제주도민의 항거를 보니 남로당 당원 중심이 아니라 너무도 억울해서 총과 죽창을 들은 평범한 제주의 백성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동란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장대의 사령관인 김달삼과 단 둘이서 만나 분쟁을 종식시키고자 하였다. 김달삼은 김익렬을 자신들의 진지로 오라고 하였다. 김익렬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남로당이 장악한 지역으로 가서 협상을 하였다. 그 협상은 성공적이었다. 김익렬은 자신이 책임자로서 남로당 무장대를 처벌하지 않고, 주요 지휘부를 몰래 일본으로 밀항시켜주는 것으로 하였다. 그리고 그는 평화적 사태 해결을 공표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