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鷄足山”은 우리 고유의 地名입니다.
얼마 전 동아일보[2007. 5. 29]에 “創地改名 山들, 제 이름 찾는다”의 제하에 여러 예를 열거하면서 <대전 계족산은 산줄기가 봉황형세로 뻗어 있어 ‘봉황산’으로 불렸으나 일제가 ‘닭발’정도의 의미로 격하시켰다.>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녹색연합 등 일부 단체와 대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계족산은 일제가 개명한 이름이라며 제 이름 찾아주기 운동에 동조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여러 확인되지 않은 설들을 내세우며, 증거를 제시하고 있으나 역사나 문헌적으로 신빙성이 없는 것들이었습다.
아직도 식민의 殘滓가 散在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사안에 대해 덮어놓고 일제의 행위로 매도하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참고로 일부에서는 <大田>도 일제의 개명이므로 <太田>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同春, 尤庵선생이 살았던 17세기에도 이미 <大田川>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계족산이 일제에 의해 <닭발산>으로 격하, 개명된 것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지명이었음을 世宗實錄 地理志에서 옮김으로써 이를 증명하고, 또 관심있는 제현의 참고 자료로 제공하고자 합니다. <주; 이외의 여러 곳에 대전의 계족산에 관한 자료가 있고, 江原道 寧越府에도 同名의 산이 있는데 元孫의 胎封(原文末尾添附)을 묻은 곳이기도 합니다.>
[참고자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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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理志 / 忠淸道 / 公州牧/ 회덕현(懷德縣)
◎ 懷德縣: 本百濟雨述郡, 新羅改爲比豊郡, 高麗改爲懷德縣。 顯宗戊午, 屬公州任內。 明宗二年壬辰, 始置監務, 本朝因之。 太宗十三年癸巳, 例改爲縣監。 鷄足山。【縣人以爲鎭】 四境, 東距淸州十四里, 西距公州七里, 南距珍山二十二里, 北距文義二十四里。 戶三百, 口一千二百六十六。 軍丁, 侍衛軍七、守護軍四、船軍一百四十九。 土姓四, 黃、任、李、房; 亡姓一, 郭。 貞民驛續姓二, 裵、金。 厥土肥堉相半, 墾田二千六百八十八結。【水田五分之二】 土宜五穀, 木瓜。 土貢, 眞茸、鳥足茸、漆、雜羽、黃蠟、棗、狐皮、狸皮、山獺皮、芝草、紙。 藥材, 五倍子、土産石鐵。【産縣北二十里稷洞, 下品。】鷄足山石城。【在縣東十里, 四面險阻, 周回三百七十四步二尺。 內有泉一, 冬夏不渴。 鄕人云: “天旱, 此山鳴則必雨。”】 驛一, 貞民。 【俗訛田民】利遠津。【俗號荊角津, 有渡船。】烽火一處, 鷄足山。【東準沃川、環山, 北準文義、所山。】 越境處, 儒城東村郞山里, 越入縣南面。【영인본】 5 책 632 면.
[◎ 회덕현(懷德縣); 본래 백제의 우술군(雨術郡)인데, 신라에서 비풍군(比豊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회덕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 공주(公州) 임내에 붙이었다가, 명종(明宗) 2년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고,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계족산(鷄足山)【현의 사람들이 진산(鎭山)으로 삼는다.】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청주(淸州)에 이르기 14리, 서쪽으로 공주(公州)에 이르기 7리, 남쪽으로 진산(珍山)에 이르기 22리, 북쪽으로 문의(文義)에 이르기 24리이다.
호수가 3백 호요, 인구가 1천 2백 66명이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이 7명, 수호군(守護軍)이 4명, 선군(船軍)이 1백 49명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황(黃)·임(任)·이(李)·방(房)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곽(郭)이요, 정민역(貞民驛)의 속성(續姓)이 2이니, 배(裵)·김(金)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간전(墾田)이 2천 6백 88결이요,【논이 5분의 2가 된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모과[木瓜]이다. 토공(土貢)은 느타리·싸리버섯·칠·잡깃[雜羽]·밀[黃蠟]·대추·여우가죽·삵괭이가죽·잘[山獺皮]·지초·종이요, 약재(藥材)는 오배자(五倍子)이요, 토산(土産)은 석철(石鐵)이다.【현의 북쪽 20리 직동(稷洞)에서 나는데, 하품(下品)이다.】
계족산 석성(鷄足山石城)【현의 동쪽 10리에 있는데, 사면이 매우 험하며, 둘레가 3백 34보 2척이 되고, 안에 샘이 하나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향인(鄕人)이 이르기를,“하늘이 가물 때 이 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역(驛)이 1이니, 정민(貞民)이다.【세속이 잘못 전민(田民)이라 한다.】이원진(利遠津)【속칭 형각진(荊角津)이라 하며, 나룻배가 있다.】봉화가 1곳이니, 계족산(鷄足山)이다.【동쪽으로 옥천(沃川) 환산(環山)에, 북쪽으로 문의(文義) 소산(所山)에 응한다.】
월경처(越境處)는 유성(儒城)의 동촌(東村) 낭산리(郞山里)가 현의 남면(南面)에 들어어와 있다.]
[참고자료]; 2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충청도(忠淸道) 회덕현(懷德縣)
동쪽으로는 옥천군(沃川郡)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는 전라도 진산군(珍山郡)경계까지 30리이고, 서쪽으로는 공주(公州) 경계까지 9리이고, 북쪽으로는 문의현(文義縣) 경계까지 29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0리이다.
【건치연혁】본래 백제의 우술군(雨述郡) 일명 후천(?淺)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비풍군(比豊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때에 공주에 예속시켰으며,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우술(雨述)ㆍ후천(?淺)ㆍ비풍(比豊).
【성씨】본현 이(李)ㆍ임(任)ㆍ황(黃)ㆍ방(方)ㆍ곽(郭)이 있으며, 배(裵)ㆍ김(金) 모두 역성(驛姓)이다.
【산천】계족산(鷄足山) 현 동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날이 가물 때 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식장산(食藏山) 현 남쪽 23리에 있다. 질현(迭峴) 현 동쪽 12리에 있다. 동자암현(童子菴峴) 현 동쪽 8리에 있다. 이원진(利遠津) 현 북쪽 29리에 있는데, 속칭 형각진(荊角津)이라 한다. 전라도 무주현(茂朱縣)에서 발원하는데 공주에 이르러 금강(錦江)이 되고, 서천군(舒川郡)을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 갑천(甲川) 현 서쪽 5리에 있다. 전라도 진산군(珍山郡) 신현(新峴)에서 발원하는데 본현 서쪽 3리에 이르러 선암천(船巖川)이 되고, 하류에서 형각진(荊角津)과 합류한다.
【토산】지치[紫草]ㆍ누치[訥魚]ㆍ지황(地黃)ㆍ복령(茯?), 석철(石鐵) 현 북쪽 직동(稷洞)에서 난다. 안식향(安息香).
【봉수】계족산 봉수(鷄足山烽燧) 동쪽으로 옥천군(沃川郡) 환산(環山)과 응하고, 북쪽으로 문의현(文義縣) 소이산(所伊山)과 응한다.
【누정】쌍청당(雙淸堂) 현 동쪽 6리에 있는데, 본현 사람 송유(宋愉)의 별장이다.
○ 박팽년(朴彭年)이 지은 기문에,“천지 사이에 바람과 달이 가장 맑은데, 사람의 마음의 신묘함도 또한 이와 다름이 없다. 다만 형기(形氣)에 구애되고, 물욕에 더럽혀져서 능히 그 본체를 온전히 보전하는 자가 드물다. 대개 연기와 구름이 사면에서 모여들어 천지가 침침하게 가려졌다가도, 맑은 바람이 이를 쓸어내고 밝은 달이 공중에 떠오르면, 위와 아래가 통투(通透)하게 밝아져서 털끝만한 점철(點綴)도 없게 된다. 그 기상은 진실로 용이하게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사람으로서 그 마음을 온전히 지켜 더럽힘이 없는 자라야 족히 이에 당할 만하여 스스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황노직(黃魯直)이 일찍이 이로써 용릉(?陵)에 견주었으며, 소강절(邵康節)도 또한 청야음(淸夜吟)이란 시를 지어 그 맛을 아는 자가 적은 것을 탄식한 것이다. 혹 요즈음 세상에도 또한 이 낙(樂)을 아는 자가 있는가. 시진(市津) 송유(宋愉) 공은 본래 대대로 벼슬하던 구가(舊家)이었다. 그러나 공명(功名)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촌야(村野)에 물러나와 산 지가 이제 30여 년이 되니, 그 고을은 충청도의 회덕이요, 마을은 백달촌(白達村)이라 이른다. 사당(祠堂)을 거실 동쪽에 세워 선대의 제사를 받들고, 전답 두어 이랑을 설치하여 제사의 수용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 드디어 사당 동쪽에 따로 당(堂)을 세운 것이 무릇 7칸이다. 그 중간을 온돌로 만들어 겨울에 쓰기에 맞도록 하였고, 바른편으로는 3칸인데 대청을 넓게 하여 여름에 쓰기에 적당하게 하였으며, 왼편으로도 3칸인데 포주(?廚)와 욕실[?浴], 그리고 제기(祭器)의 저장소 등이 각기 정한 곳이 있으며, 단청으로 담을 두르니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매양 시사(時祀)나 기제사 날을 당하면, 공이 반드시 심의(深衣)를 입고 별당에 들어가서 재계(齋戒)하여 공경과 정성을 다하였다. 무릇 제사하는 법이 모두 예경(禮經)을 좇았으며, 또 가절(佳節)을 당하면 반드시 술자리를 마련하고 손을 맞이하여 혹은 시를 읊고 혹은 노래하여 향당(鄕堂)과의 즐거움을 흡족히 하였고, 만년에는 선학(禪學)을 좋아하여 그 마음을 담박(淡泊)하고 고요하게 가지고 사물에 얽매이지 않으니, 대개 그 천성이 높고 또 밝아서 명리(名利)를 벗어난 사람이었다. 중추부사 박연(朴堧)공이 그 별당에‘쌍청(雙淸)’이라 편액을 지어 주고 또 시를 지었다. 나는 이를 듣고 옷깃을 여미고 말하기를,'참으로 쌍청이란 뜻이 이러하구나.' 하였다. 백이(伯夷)는 성(聖)의 청(淸)한 분이었는데, 공은 그 백이의 풍(風)을 듣고 흥기(興起)된 이인가.
대개 바람이란 귀로 얻어 듣고 달은 눈에 보이는 것인데, 사람들이 모두 이 두 가지 물건의 맑은 것은 알면서도, 내 한 마음속에 저것을 부러워하지 않을 만한 것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즉 그것을 아는 자가 알지 못하는 자와 견줄 수 없는 것을 어찌 알리오. 이제 공의 선조를 받드는 공경심과 손과 즐기는 흥취를 보건대 그 스스로 즐거워하는 지취를 가히 알 수 있다. 그러나 호량(濠梁) 위에서 물고기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장자(莊子)도 물고기가 무엇을 즐거워하는 지를 몰랐으며, 혜자(惠子)도 또한 몰랐던 것이니, 내 어찌 감히 공의 즐거움을 조금인들 엿볼 수 있으리오. 공의 아들 주부(注簿) 계사(繼祀)가 내가 그 말속(末屬)에 있다 하여, 나로 하여금 기문을 쓰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학교】향교 현 북쪽 1리에 있다.
【역원】정민역(貞民驛) 현 서쪽 10리에 있다. 미륵원(彌勒院) 일명 굴파원(屈坡院)이라고도 하는데, 현 동쪽 24리에 있으며, 남쪽에 누(樓)가 있다.
○ 하륜(河崙)의 서문[序]에,“내 일찍이 시골로 귀성(歸省)할 제, 회덕현(懷德縣) 동쪽 지경을 지나는데, 산천이 굽이굽이 돌고 초목이 울창한데, 중간에 길이 좁고 또 험하였으며, 길 곁에 우뚝하게 숲 밖으로 솟아 나온 원우(院宇)가 있었다. 내가 이를 바라보고 기뻐하여 말에서 내려 누각으로 올라가 한참 동안 납량(納?)하면서 계산(溪山)의 승경을 관람하고 시를 써서 남기려 하였으나, 겨를이 없어 그대로 가버렸고 원우의 이름조차도 이미 잊었더니, 이제 전 공주 목사 황자후(黃自厚) 군이 우리 목은 선생이 지으신 미륵원 남루기(彌勒院南樓記)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그 뒤 끝에 발문(跋文) 쓸 것을 청한다.
그 산천의 형세를 들으니, 곧 내가 일찍이 올라 본 바이요, 원우를 세운 경위와 황씨의 부자ㆍ형제간의 자애(慈愛)와 우애, 또 남에게 은혜 베풀기를 좋아했다는 것은 선생의 기문 가운데 이미 다한 바이다. 이제 그 손자가 또 그 할아버지의 뜻을 본받아서, 그 수리함을 게을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동서 양쪽에 집을 지어 남녀가 머무르는 곳을 따로 하고는, 다시 진신(搢紳)들 사이에 시를 구하여, 더욱 그 할아버지의 덕의 아름다움을 현양(顯揚)하고자 하니, 그의 뜻이 또한 가상하다.” 하였다.
○ 성석린(成石璘)의 시에,“누(樓)가 폐한 것 도로 일으켜 환연(煥然)히 새롭게 하였나. 회덕(懷德) 사는 황군(黃君)은 길인(吉人)이라 이른다. 본래 자상(慈祥)한 마음 품어 여러 사람 구제할 길 생각했고, 항상 측은한 마음 간직하여 인(仁)을 베풀기를 즐겼네. 자손들의 근검함은 가풍에 힘씀이요, 원우(院宇)의 높고 낮음은 땅 형세 따랐던 것. 그 남루(南樓) 가장 소쇄(蕭灑)하다 들었는데, 어찌하면 이 정자 배회하며 정신을 상쾌히 해볼까.”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객실의 다락 높아 경개도 새롭도다. 황공의 이 집 지음 그의 선대부터라. 은혜 베풀고도 보답 바라지 않으매 음덕을 남겼고, 행인들 자기 집 돌아가듯 하여 지극한 은혜에 만족한다. 천년 장래까지 그 성명 없어지지 않을 것이로다. 한 가문의 자애와 효성이 어찌 어질지 않으랴. 감사(監司)가 다시 일으켜 여경(餘慶)을 받았으니, 만년에 아름다운 아들 산악(山嶽) 정기 타고 났네. 덕창원(德昌院) 현 서쪽 2리에 있다. 총술원(寵述院) 현 북쪽 11리에 있다. 형지원(荊止院) 현 북쪽 27리에 있다. 여아원(餘兒院) 현 남쪽 21리에 있다.
【불우】법천사(法泉寺) 계족산(鷄足山) 남쪽에 있다. 봉주사(鳳住寺) 계족산 동북쪽에 있다. 선랑사(禪朗寺)ㆍ고산사(高山寺)ㆍ봉서사(鳳栖寺) 모두 식장산(食藏山)에 있다.
【사묘】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5리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서봉부곡(西峯部曲) 현 동쪽 21리에 있다. 흥인부곡(興仁部曲) 현 동쪽 18리에 있다. 침이소(針伊所) 현 북쪽 18리에 있다. 계족산성(鷄足山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9백 69척이고, 높이는 16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제영】속후견민풍(俗厚見民風) 남지(南智)의 시에,“관청 뜰 비어 있으니 송사(訟事)가 적음을 알겠고, 습속이 후하니 민풍(民風)을 보겠도다.”하였다. 수로석완지현고(樹老石頑知縣古)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높은 고개 넘어서니 큰 들판 시원한데, 한 촌락 뽕나무 숲이 시내 굽이 굽어보내. 수목은 늙고 돌은 단단하니 고을이 예된 줄 알겠고, 관 뜰이 비고 인기척 고요하니 관아(官衙)는 한적하구나. 푸른 그늘 땅에 가득 천척(千尺)의 소나무요, 푸른 뜰을 물들임은 두어 줄기 대[竹]로다. 홀로 난간에 의지하여 일이 없으니, 때때로 싸우는 참새 처마 끝에 떨어짐 보네.”하였다.
[참고자료]; 3.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현내(縣內) 끝이 10리이다. 동면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서면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북면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내남(內南) 끝이 10리이다. 외남(外南)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일도(一道)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진도】형각진(荊角津) 이원진(利遠津)이라고도 하는데, 북쪽 25리에 있다.
【토산】쏘가리[錦鱗魚]ㆍ감[枾].
【사원】숭현서원(崇賢書院) 광해주 기유년에 중건하였고, 그해에 사액하였다. 정광필(鄭光弼) 태묘(太廟) 편을 보라. 김정(金淨)ㆍ송인수(宋麟壽) 모두 청주(淸州) 편을 보라. 김장생(金長生)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 모두 문묘(文廟) 편을 보라. 별사(別祠) 현종 정미년에 세웠다. 이시직(李時稷)ㆍ송시영(宋時榮) 모두 강화(江華) 편을 보라.
[주D-001]용릉(?陵)에 견주었으며: 용릉은 중국 강서성 도주(道州)의 별명이다. 송 나라의 큰 선비 주돈이(周敦이 호는 염계(濂溪)가 살던 땅이다. 조금 뒷시대 사람인 황정견(黃庭堅 자는 노직(魯直))이 주돈이를 광풍제월(光風霽月) 같은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주D-002]소강절(邵康節)도...것이다: 소강절은 송 나라 선비 소옹(召雍)인데, 강절은 죽은 뒤에 선비들이 사사로 부쳐준 존칭이다. 그의〈청야음(淸夜吟)〉이란 시에,“다 같은 맑은 뜻이건만, 생각하면 아는 이 적으리.[一般淸意味 料得少人知]”라 하였다.
[주D-003]백이(伯夷)는...이인가: 맹자가 한 말인데, 백이(伯夷)의 풍성(風聲)을 들은 자는 약한 자가 청렴하여 지고, 나약한 자가 굳세어진다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백이가 맑은 성인[淸聖]이라 한 청(淸)을 들어서 이 당 이름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4]장자(莊子)도...것이니: 장자(莊子)가 개천[濠梁]에서 고기 노는 것을 보고,“아, 즐겁게 노는구나.”하였더니, 그 친구인 혜자(惠子 惠施)가,“그대가 고기가 아니거니 고기가 즐거워하는지를 어찌 아는가.”라고 한 일이 있다.
[참고자료]; 4.
[英祖 78卷, 28年( 1752 壬申 / 청 건륭(乾隆) 17年) 11月 25日 壬午 3번째기사; 원손의 태봉을 묻을 곳을 정하다.
○因觀象監啓, 命元孫胎峰定以江原道寧越府下東面正陽里鷄足山西麓癸坐丁向, 待癸酉正月擇日擧行。蓋男胎五朔以藏, 例也]
[관상감에서 올린 계사로 인해 원손의 태봉(胎峯)을 강원도(江原道) 영월부(寧越府) 하동면(下東面) 정양리(正陽里) 계족산(鷄足山) 서쪽 기슭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정하고, 계유년 정월을 기다렸다가 날을 잡아 거행하도록 하였다. 대개 남자의 태는 5개월이 되어서 묻은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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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아하, 그렇군요. 그런줄도 모르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