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왕(歌王)'을 비롯하여 '영원한 음악황제', '20세기 최고가수' 등등으로 불리며 우리 역사에서 무제한의 칭송을 누려온 가수 조용필. 조용필 씨(53세)가 우리 나라 최고의 가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음악에 대한 열정과 끼, 그리고 남다른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처음부터 재능을 펼치진 못했다. 남 못지 않게 몇 년간 배고픔을 겪으며 무명시절의 어려움도 맛보았다.
경기 화성에서 나고 자란 그는 졸업을 앞두고 있던 고등학교를 그만둔 1969년 초 대중가수로서의 길을 결심하게 되었다. 컨츄리웨스턴 그룹인 '에트킨즈'를 결성하고 당시 대중가요의 주무대였던 주한미군부대에서 순회공연을 하면서 음악 인생을 시작한다. 1971년에는 3인조 그룹인 '김 트리오'를 결성하여 '선데이컵 팝그룹 콘테스트'에서 '님이여'라는 노래로 최우수 가수왕상을 수상하며 음악적 역량을 키워갔다.
3년여 동안 그룹 활동을 한 후, 1972년 2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며 조용필 씨는 가요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부른 이 노래는 당시로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앨범 100만 장 판매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며 그를 최고의 인기 가수 반열에 오르게 한다.
이처럼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조용필 씨는 자신의 인생 중 가장 혹독했던 시기인 70년대말의 음악적 고행으로 큰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대마초 파동에 휘말렸던 그는 여기서 주저앉으면 끝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더욱 음악공부에 매달려 허스키 목소리를 만들려고 판소리 창법을 연습했고 기침에 구토, 피고름까지 토해가며 소금 먹고 물 마시고를 반년쯤 계속해 탁성과 가성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결국 그는 1980년 개인 앨범 1집을 들고 팬들을 찾아온다. 1집 앨범의 타이틀곡인 '창밖의 여자'가 150만 장 판매를 기록하며 가요계에 일대 변혁을 몰고 왔고, '단발머리'와 민요를 새롭게 편곡한 '한오백년' 역시 큰 인기를 모았으며 그로 인해 조용필 씨는 요즘 흔히 말하는 '오빠 부대'를 이끈 원조 가수가 되었다. 이후 8집 앨범 '허공'이 인기를 끌었던 1986년까지 각종 가요상을 휩쓸면서 명실 상부한 한국 최고의 가수로 발돋움했을 뿐만 아니라 고소득 연예인 1위를 차지하며 인기와 부를 동시에 누리게 된다.
지난 1999년 20세기를 보내면서 한국 갤럽이 MBC FM 특별기획 '20세기 한국인의 노래 100' 제작팀의 의뢰를 받아 20대에서 50대까지 서울시민 1천 1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인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최고의 노래'는 '돌아와요 부산항에'이고, '최고의 가수'에는 조용필 씨인 것으로 나타났을 만큼 그는 우리 나라가 자랑하는 최고의 가수이며 우리들의 영원한 오빠이다.
철들기 전에는 부모님의 속을 무던히도 많이 썩여드렸다는 조용필 씨. 음악을 하는 아들을 극심하게 반대하던 아버지가 목숨처럼 아끼던 기타마저 부셔버리자 그는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려 한 적도 있었고, 졸업 직전에 가출하여 7년 만에 겨우 부모님의 용서를 받고서야 집에 발을 들여놓았던 일도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장마저 뒤늦게 받았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였고 결국 우리 나라 최고의 가수로 우뚝 섰다.
"하루라도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감각을 잃어버리죠. 노래는 내겐 숨쉬는 공기와도 같아요. 노래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 할 겁니다."
그의 인기 비결은 '끊임없는 정진'이란, 비결 아닌 비결로 단정지을 만하다. 94년 3월 결혼한 그의 아내 안진현 씨도 조용필 씨의 순수함과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며 그녀 또한 남편의 그런 면을 사랑한다고 했다.
다정다감하고 성실한 남편인 조용필 씨는 지난 93년 암치료보험에 가입하면서 교보생명의 고객이 되었다.
"결혼하기 전에 건강도 체크하고 뭔가 아내를 맞는 내 마음가짐도 좀 안정적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교보생명과 보험계약을 했지요. 무엇보다 아내가 무척 좋아하더라구요."
미국에서 중고교와 대학을 졸업한 뒤 한미간 기업을 연결해 주는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그의 아내 안진현 씨가 말하는 조용필 씨는 너무 소박하고 말수가 적어 그녀가 항상 쫓아다니며 조잘거리고 말을 시켜야 한다고 한다. 혹여 혼자 집안 일을 하고 있으면 슬그머니 주방에 들어와 설거지와 가끔 계란부침과 라면요리를 해주는 자상한 남편이기도 하단다.
지난해 12월 1일부터 9일간 무대를 사르는 <그리움의 불꽃>이라는 타이틀로 열렸던 공연에서는 그의 히트곡들마다 배어있는 당시 사회상이 배경화면을 통해 그려졌다. '못 찾겠다 꾀꼬리', '단발머리', '친구여',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추억 속의 재회' 등을 부르며 깊이가 더해진 조용필 씨 음악의 또 다른 변신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네 모습을 그렸던 그의 음악을 선보였다.
조용필 씨는 이 공연을 마지막으로 올해 스케줄을 마무리하며 이후에는 바로 새 앨범 작업에 들어간다. 지난 98년 17집 <친구의 아침>을 내놓은 이후 4년 만인 내년 4월에는 18집 앨범을 발표할 예정이다.
음악을 사랑하는 그는 음악이 사람들을 뭉치게 하고, 과거의 기억들을 잊게 하고, 심지어 사람의 미래를 바꾸는 힘이 있음을 안다. 음악에 대한 절대적 헌신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고 조용필 씨의 음악은 오랫동안 우리 곁에서 함께 웃고 울어주며 친구가 되었다.
조용필 씨는 어느새 50이 넘어버린 나이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나이를 무색하게 할 정도다. 그는 분명 20세기의 대표적인 가수임에 틀림없다. 그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과 시간,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을 고려해본다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신장 166㎝, 몸무게 55㎏. 한국인의 평균 신장이나 몸무게와 비교해도 '크지도 무겁지도 않은' 체구의 작은 거인 조용필. 그의 자그만 몸, 어느 곳에도 천재성이나 그 천재성으로 인해 빠지기 쉬운 오만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프로의 면모를 지닌 순수하고 열정적인 진정한 가수의 모습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