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인 믿음
함석헌
믿음에는 겨냥이 둘이 있어야 한다. 하나만이면 바른 믿음이 아니다.
어떤 사람도 머리가 있고 또 발이 있다. 머리는 하늘을 곧추 향해야 하는 것이요 발은 땅을 꽉 디디어야 하는 것이다. 하늘에만 있고 땅을 모르는 것은 날개 돋은 천사요, 땅에만 있고 하늘을 모르는 것은 배로 기어다니는 뱀이다.
사람은 뱀도 아니오 천사도 아니다. 발로는 뱀의 대강이를 밟고 머리는 하늘을 향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리고 이 두 겨냥은 한 지팡이의 두 끝처럼 한 곧은 선을 이루어야 한다. 그 꼿꼿한 선이 믿음이다.
아래서는 싸우고, 위에서는 자라고.
위엣 나라, 아랫 나라.
사람의 기도는 이 두 나라 사이에 있다.
위엣 나라에서 “아버지 이름이 거룩해지이다” 하면 아랫 나라에서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한다.
위에서 은혜가 내려와야 아래서 이기고, 아래서 싸움의 이긴 보고가 올라가야 위에 영광이 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는 “나라가 임하고 뜻이 이루어져야”지. 아래로부터 위로는 “우리에 빚진 자를 사해주었다”는 보고가 올라가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한 몸을 꼿꼿이 받쳐야 할 필요가 있고 몸을 꼿꼿이 힘차게 가지기 위해서는 양식을 받아야 한다.
땅위에서 천사가 다 된듯 판을 차리고 놀잔 것은 뱀의 소리.
하늘 위에다 이 세상을 떠가지고 올라가 낙원을 짓잔 것은 천사는 아닌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소리.
믿음은 생명의 나무다. 뿌리는 땅을 뒤덮어야 하고 열매는 하늘 위에 맺어야 한다. 그를 위하여 그 두 중간을 굵고 곧고 단단하고 높은 통진 줄기로 받치어, 겉으로는 서리ㆍ바람ㆍ칼ㆍ도끼ㆍ벌레ㆍ짐승과 싸워야 하고 속으로는 진액이 오르고 내려야 한다.
믿음은 상식적이어야 한다. 상식은 곧 세상을 앎이요 세상을 앎은 이웃을 사랑함이다. 상식에 어그러진 믿음은 사랑 없는 믿음, 그것은 뿌리 없는 나무다. 믿음은 제 힘으로 땅의 진액을 빨아올리고 햇빛과 비바람을 받아 졸자라야 하는 것이다. 욕심으로 기도하여 하룻밤 동안에 감정으로 기른 믿음은 콩나물 믿음, 그것은 햇빛만 만나면 말라버린다.
상식은 될수록 넓어야 하고, 믿음은 될수록 높아야 하고.
낙원은 에덴에서 벌써 없어졌고 이 세상은 낙원은 아니다. 싸움터다.
이 세상에서 낙원을 회복한다는 것은 간교한 뱀의 꾀는 소리다. 세상엔 낙원 절대로 아니 온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싸움의 역사,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어디까지 상식적이어야 한다.
인생을 없이 보고 저만 좋으면, 하는 자들이 골방 속에서 콩나물 같은 핼쑥한 믿음을 길러가지고 그것을 영통(靈通)이라 하나 그들은 참 인생의 공기 속에 내놓아 보아라. 단번에 말라버리지 않나. 그들은 어두컴컴한 굴 속에서 사람의 눈을 피해가며 속여가며 취해가며 하는 뱀이다.
영통만이 다라면 예수께서 빈 들에서 돌아오지도 않았을 터요, 모양 변하신 산에서 내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 말로 할 수 없는 지경을 둘 셋에게만 보여주고, 그나마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 했으며, 무엇하자고 ‘믿음이 없고 음란한 세상’ 속으로 엉기엉기 기어내려오나? 어쩔 수 없이 문제가 거기 있기 때문 아닌가?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란 것은 그것을 말해주면 욕심 많은 물건들이 마땅히 할 것은(道德) 아니하고 단번에 영계에 오르자고 미친 수작을 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욕심 많은 깨닫지 못하는 물건들이 영에 합당한 데까지 자라지 않고는 나의 구원이란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탄식을 하면서도 또 그것을 맞잡아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피와 불과 연기와 똥과 고름이 엉켜 돌아가는 실세상의 복판에서 남의 수고한 것을 혹은 빌어 혹은 도적질을 해먹고 살아가면서 조그마한 울타리를 둘러치고 그 안에서 에덴 동산이 다 된 듯이 영통이 다 됐다고 미치는 것은 도깨비의 꾀임이요 늙은 뱀의 속임이다. 나와 저 원수들(社會)과는 운명을 같이하게 생긴 것이다. 살아도 한 삶이요 죽어도 한 죽음이다. 믿음은 참 살림이어야 한다. 생명은 졸자라야 한다. 이것이 상식적인 믿음이다.
예수의 종교는 두 겨냥을 가진 종교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로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은 내게 좋은 자만이 아니고 저 인생 온통이다.
말씀 1956. 3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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