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뭄으로 저수지 바닥이 쩍쩍 갈라진 모습. <출처 : 기상청 기상사진전>
미래학자들이 가장 염려하는 것은 태풍이나 집중호우, 쓰나미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홍수와 태풍은 사자나 늑대의 공격 정도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은밀하고 완만하게 닥치는 가뭄이다. 혹자는 그것을 코끼리에 비유한다. “코끼리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은밀하게 다가올 수 있다. 코끼리가 왔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피하기에는 너무 늦다.”라고 말이다. 역사를 보면 가뭄은 대기근을 가져오면서 찬란했던 고대문명을 수도 없이 몰락시켰다.
인류문명의 기원이라고 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멸망시킨 것도 가뭄이었다. 4200년 전부터 약 300년 동안 건조화로 인한 극심한 가뭄이 지속되면서 망하고 만 것이다. 중남미 지역의 찬란한 마야 문명도 가뭄의 희생양이다. 900년경 마야문명이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810년, 860년, 910년경에 닥친 강력한 가뭄 때문이다. 이집트 문명도, 인더스 문명도, 앙코르 문명도 다 가뭄으로 인해 종말을 고했다. 어떤 기상현상으로도 문명이 멸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뭄은 다르다. 그만큼 피해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물이 없이는 문명이 유지될 수 없다. 앙코르 문명, 마야 문명 등은 가뭄으로 몰락했다. <출처 : (cc) Bjørn Christian Tørrissen>
가뭄은 비가 보통 때에 비해 오랫동안 오지 않거나 적게 오는 기간이 지속되는 현상이다. 기후학적으로는 연강수량이 기후 값의 75% 이하이면 가뭄, 50% 이하이면 심한 가뭄으로 분류한다. 단, 사막 등 건조 기후와 가뭄은 구별되는 것이다. 아래 인용을 참고하기 바란다.
가뭄은 일시적인 특이현상을 말하며, 강수량이 적어 기후의 영구적인 특성이 되는 건조지역의 기후특성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가뭄은 수많은 정의가 있을 수 있지만 결국 특정기간, 보통 계절이나 그 이상의 기간 동안 강수량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다. 가뭄은 특정 지역에서 어느 정도 긴 기간 동안의 강수와 증발산 사이의 물수지에 대한 평균 조건, 즉 정상상태와 비교하여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시기(주요 발생 계절, 우기 시작의 지연, 주요 작물 생육단계와 관련한 강우 발생 등)와 유효성(강우 강도, 강우 발생 횟수)과도 관련이 있다. 고온, 강한 바람, 낮은 상대습도 등과 같은 기후인자들도 가뭄과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으며 그 심각성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 김병식 외 2명, 2011, 기후변화가 가뭄 위험성에 미치는 영향 평가, 한국습지학회지
통상 가뭄은 기후학적 가뭄, 기상학적 가뭄, 농업적 가뭄, 수문학적 가뭄으로 나누기도 한다. 먼저 기후학적 가뭄은 사용 가능한 물로 전환된 강수량이 기후학적 평균에 미달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기상학적 가뭄은 강수량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기후학적 가뭄과 같으나 강수량 외에 증발량, 증산량 등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셋째, 농업적 가뭄은 오로지 토양수분에만 의존하여 결정된다. 농작물의 종류와 성장 정도에 따라 필요한 수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넷째, 수문학적 가뭄이 있다. 사회경제적 가뭄이라고도 부른다. 댐이나, 저수지 그리고 하천에 물이 고갈되어 물 부족의 피해가 예상되는 것을 말한다.
2001년 극심한 가뭄으로 임하댐이 바닥을 드러낸 모습. <출처 : 연합뉴스>
삼국시대
삼국시대의 가뭄은 주로 봄과 여름철에 발생하였다. 가뭄발생에 대한 기록은 가뭄이 발생했다는 정도의 간략한 내용이다. 국가별로는 고구려 13회, 백제 27회, 신라 59회를 기록하고 있다. 가뭄피해는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되어 기근을 겪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우기인 7월에 강우가 없어 풀과 나무는 말라죽었다. 백성들은 기근에 시달려 서로 잡아먹었다. 기근으로 백성들이 자녀들을 팔아서 먹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 당시의 가뭄이 얼마나 큰 참사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려시대
고려시대 가뭄에 관한 기록은 36회가 있다. 가뭄은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주로 봄, 여름에 발생하였고 가뭄으로 인하여 심각한 기근이 초래되었다. 가뭄에 대한 기록의 실례를 살펴보면, 1259년 고종 46년에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거나 관리들도 굶주려 죽은 사람이 많다”, 1344년 충혜왕 5년에 “전년도 5월부터 그해 4월까지 거의 1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1381년 우왕 7년에는 “가뭄이 들어 아이들을 버린 것이 길에 가득하였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 490년 동안 총 100건의 가뭄기록이 있다. 가뭄에 의한 피해는 대부분 기근이다. 평균적으로 5년에 한번 꼴로 가뭄이 발생하였다. 2년 연속 가뭄은 15회, 3년 연속 가뭄 4회, 4년 연속 가뭄 1회, 6년 연속 가뭄 2회 등 해를 거듭하여 가뭄이 발생하였던 경우가 많다. 6년 연속 가뭄이 발생한 시기는 효종8년(1657)~현종3년(1662), 현종7년(1666)~현종12년(1671)이다.
1 |
2 |
1 1968년 가뭄으로 전남지역 논바닥이 갈라진 모습 <출처 : 연합뉴스> 2 1968년 가뭄으로 전남지역 논바닥이 갈라진 모습 <출처 : 연합뉴스> |
1960년대
1967~1968년의 두 해에 걸친 연속적인 가뭄은 주로 영남, 호남지역에서 발생하였다. 1966년에 비해 쌀 생산량이 1967년에는 8%, 1968년에는 18%나 감수되었다. 1967년에 시작한 가뭄은 주로 전남지역에서 발생했다. 광주, 목포지역의 8,9월 강수량이 평년에 비해 13~17%에 불과했다. 이 지역의 농업생산 반 이상이 피해를 입었고, 전체적으로 농가 37만호가 피해를 입었다. 1967년에 이어 1968년에도 가뭄이 계속돼 호남, 영남 지역의 강우량이 평년의 22~27%에 불과했다. 경작지가 30%정도 피해를 입고 수확량도 18%나 감소되었다.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식수 및 관개급수를 위해 대량의 양수기, 소방차, 식량운반선을 투입하기도 했다.
1970년대
1967~1968년의 가뭄 이후 10년만인 1976년, 1977년에 또 다시 가뭄이 발생하였다. 주로 중부 및 남부 내륙지역인 경기, 충북, 충남, 경북, 경남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1977년 6,7월에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이 평년강수량보다 287~153mm가 적게 내렸다. 1968년에 비해 233~244mm 가 적은 대가뭄이 시작되어 8월 초에 해갈되었다. 심한 가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급수노력으로 평년작 수준의 수확을 올렸다.
1976년에 이어 1977년에도 2년 연속 가뭄이 발생하였다. 전년보다 더 긴 한발기간과 피해 면적을 보았다. 다행히도 긴급 양수작업 및 지하수 굴착 등의 노력으로 쌀 수확량은 오히려 풍작이었다. 예를 들어 한해 피해면적은 1976년에 28,180ha이던 것이 1977년에는 60,223ha로 약 2배 이상 증가하였다. 그러나 쌀 수확량은 1976년 3,622만석에 비해 1977년에는 4,770만석으로 늘었다.
1980년대
80년대에 들어 초반부터 가뭄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981년 초부터 시작한 가뭄은 5월에 저수율이 평년에 비해 약 70%정도 낮아졌다. 경북지역의 총 저수지 7%, 경남지역이 3%, 전북지역이 2%가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6월에 들어서면서 저수율이 평년의 50%로 더욱 낮아지고 따라서 경북이 총 저수지의 21%, 경남이 20%, 전남이 24%, 전북이 52%가 고갈되었다. 1981년의 1월부터 5월까지의 총 강우량은 평년보다 100mm정도가 적었다.
1982년에도 가뭄이 지속되어 1~6월까지의 강우량이 평년보다 183mm가 부족했다. 전국 평균 저수율이 34%, 경북 금릉지역이 4%, 전북 완주지역이 7%로 거의 고갈상태가 되었다. 1968년의 전국 평균 저수율이 39%, 1976년도가 38%인 것에 비하면 어느 정도 심했는지 알 수 있다. 1982년의 가뭄으로 논의 피해가 12,977ha, 1982년에는 45,302ha나 되었다.
1990년대
1994년에는 장마철에 저기압의 발달이 미약하고 태풍 또한 거의 내습하지 않아 비가 매우 적게 내렸다. 연강수량이 한강유역 980mm, 낙동강유역 759mm, 금강유역 872mm, 영산강유역 781mm, 섬진강유역 785mm으로 연평균강수량 1,274mm에 비해 상당히 적었다.
1939년의 대가뭄 때 대부분 지역의 연 강수량이 700mm 이하로 그 이후로 두 번째로 극심한 가뭄이라고 볼 수가 있다. 댐 저수율을 보면 소양강 댐이 42.8%로 예년 저수율 49%보다 6%가 낮았다. 섬진강댐인 경우 예년의 36.1%보다 약 30%가 늦은 6.9%를 기록해 거의 고갈상태가 되었다. 1994년 가뭄은 7~8월 중순까지를 1차 가뭄, 8월 중순~9월 중순까지를 2차 가뭄으로 분류한다. 1차 가뭄 때에 영, 호남지역이 극심했는데 우리나라는 논 재배면적 총 1,115ha 중 13.3%인 148천ha의 농경지에서 피해가 발생했다. 밭 63,847ha를 포함해 총 200,686ha의 피해가 전국적으로 발생하였다. 2차 가뭄 때에는 1차 가뭄 발생지역 중 경남북지역이 계속 이어졌다. 경북지역에서 피해 면적이 논 16,231ha, 밭 5,967ha로 총 22,198ha의 피해를 입었다. 3차 가뭄의 전국 피해는 약 30,883ha였다.
1 |
2 |
1 2001년 가뭄 모습. 철원 지역에서 저수지 바닥이 드러나, 물고기도 말라 죽었다. <출처 : 연합뉴스> 2 가뭄이 극심하던 2001년 6월, 강원도 지역에 걸린 플래카드 <출처 : 연합뉴스> |
개황
2001년 3월부터 6월 16일까지 경기, 강원, 충북, 경기북부 등 중부지방과 서남부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가뭄이 극심하게 발생했다. 이 가뭄은 기상관측 이래 최악의 봄가뭄으로 기록되었다. 2001년 1월과 2월에는 예년에 비해 매우 많은 강설량을 보였다. 그러나 3월부터 6월 중순까지의 강수량이 지나치게 적었다. 이로 인해 하천 유출량은 계속 감소하였다. 6월에는 중부지방과 경기북부지방에서 대부분의 중소하천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상청 자료에 의하면 2001년 3월부터 6월 초순까지 서울, 경기, 충청 및 경상도 지역의 강수량은 예년에 비해 20%대에 머물렀다. 특히 경기북부지역은 10%대에 불과했다. 제주도와 전라도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한반도 전체가 물부족으로 인해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가뭄이 절정에 다다른 6월 중순에는 거의 모든 기상관측지점에서 기상관측사상 최소강수량을 기록하였다. 하천수의 고갈로 제한급수인원이 36만 명에 이르렀다. 5대 수계(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의 평균 강수량도 매우 적었다. 1월에서 5월까지의 강수량은 예년 같은 기간 평균강수량 348.8mm의 61%에 불과한 211.7mm를 기록했다.
가뭄원인
2000년 겨울철부터 중국 북부 내륙지역에 강한 고기압이 자주 형성되었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지역에 고온 건조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봄철 평균모식일기도를 보면 봄철까지도 이동성 고기압의 세력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부근에서의 기압골 세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봄철이 되면서 우리나라는 중국 내륙지방에서 다가오는 건조한 성질의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을 자주 받았다. 이 고기압은 남쪽으로부터 수증기가 유입되는 것을 억제하여 우리나라에 가뭄을 초래하였다. 즉 우리나라에 수증기를 공급하여 많은 비를 내리게 하는 해양성기단의 접근을 막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북쪽으로 기압골이 자주 통과하기는 했다. 그러나 수증기가 남쪽으로부터 유입되지 못하여 강수량이 매우 적었다.
2001년 봄철 평균모식일기도 <출처 : 기상청>
2001년 전국 평균 기온의 경우 과거 평균 기온과 대비해 0.04℃가 높아 증발량이 크게 발생되었다. 이런 요인도 가뭄피해를 가중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2001년 평균 일조시간 역시 예년 평균일조시간 3.5시간보다 182.8% 길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일조시간의 증가와 적은 강수량이 동시에 발생하였던 것이다. 즉 가뭄이 발생할 수 있는 충분한 기상조건 상태가 가뭄을 가져온 것이다.
가뭄피해 (1) 농작물
물마른 논 면적과 밭작물 시들음 면적은 각각 2001년 6월 12일에 8,517ha, 10,295ha, 14일에 8,715ha, 6,288ha, 17일에 5,785ha, 4,279ha에 이르렀다. 이 가뭄 상황은 17일부터 전국에 걸쳐 내린 비로 해소되었다. 17일 전까지 가뭄의 면적이 감소하는 이유는 스프링클러, 양수기, 급수차 등의 장비지원에 의한 것이다. 모내기 한 논 중 마른 면적은 강원, 경북, 충북, 경기가 가장 넓었다. 밭작물 시들음 면적은 충북이 가장 넓었고, 작물은 고추가 2,141ha로 가장 넓었다. 가뭄기간동안 섬진강·영산강권역 내에서 농업용수 부족을 겪은 행정구역은 임실군 등 총 6개 시·군이었다. 보리 등 밭작물의 생육부진과 시들음 현상이 일부 지역에서 나타났으며, 토양 수분 부족으로 인한 콩을 비롯한 밭작물의 파종시기가 지연되었다.
강원지역으로는 밭작물 시들음 면적은 6월 9일 7,932ha에서 6월 10일에는 10,152ha로 늘어났다. 그러나 6월 13일 이후 대대적인 물주기와 함께 국지적인 소나기가 내리면서 시들음 면적이 감소되어 6월 17일에는 5,785ha로 줄었다.
2001년 가뭄 당시 군 장병이 나서 밭에 물을 주는 모습. <출처 : 연합뉴스>
가뭄이 지속되면서 채소, 특작류의 파종면적(112천ha)중 도별 시들음 면적은 충북1,365ha, 강원 298ha, 경기 297ha로 나타났다. 작물별 시들음 면적은 고추 1,242ha, 참깨 414ha, 마늘 336ha로 경사지 재배가 많은 고추의 가뭄피해가 가장 심하였다. 특히 산간 경사지 재배포장은 관수가 곤란하여 한낮에는 일시 시들음 현상이 발생하였다. 과수류에서도 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나타났다. 사과, 배는 나뭇가지껍질이 갈라지거나 말라 죽게 되어 과실이 제대로 크지 못했다. 포도는 송이가 작아지고, 잎 황화현상이 발생했다.
가뭄피해 (2) 물 부족
도서지역 등 상시급수난 지역인 8개 시·군 19개 읍·면에서 17,705세대(57,141명)에 제한 운반 급수를 실시하였다. 6월에 들어서도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가뭄이 더욱 심화되었다. 6월 4일 전국 29개 시·군에 약 16만 5천명에 대한 제한 운반급수를 실시하였다. 지역별로는 강원 4개 시·군, 충북 7개시·군, 전남 5개시·군, 경북 8개시·군, 경남 5개 시·군이었다. 6월 12일에는 제주도를 제외한 7개 도에 걸쳐 24만 5천 여명이 급수제한을 받게 되었다.
2001년 가뭄으로 모내기가 어려워지자 레미콘 업체에서 100여 대의 차량을 지원, 논에 물을 주고 있다. <출처 : 기상청>
2001년 봄철 극심한 가뭄은 이후 가뭄에 대한 범정부적인 대책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양수기 확보, 관정 만들기, 급수차 확보 등이 당시에 만들어진 대책이다. 당시 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극심해지자 국민성금을 걷는 운동도 벌어졌다. 2001년 5월 중순 이후 가뭄이 경기, 강원, 충북 등 중북부지방을 중심으로 극심하게 나타나자 5월 29일 KBS 청주방송총국에서 전국 최초로 범도민 양수기 보내기 성금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이 후 가뭄극복을 위한 성금모금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6월 8일부터 8월 23일가지 성금운동기간 동안 전국 언론기관을 통해 모금된 국민성금은 164억 원에 달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가뭄은 세계적인 추세다, 부경대학교 변희룡교수는 2015년에 한반도에 대가뭄이 예상된다고 말한다. 기상인공조절 기술 개발, 댐저수량 적정관리, 가뭄에 대한 현실적 대책등이 종합적으로 만들어져 가뭄이 오면 슬기롭게 대처했으면 한다. 만사불여튼튼 유비무환이 아닌가!
출처:네이버캐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