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때 청군이 왜 남한산성 점령 못했던 이유는
남한지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이서가 남한산성을 쌓고 화기들을 비치한 기록이 있는데 이게 물량이 상당함. 병자호란 직전 조선군이 남한산성에 배치한 화기 수량 및 목록은 다음과 같음.
조총-40,922정
천/지/현/황자총통-137문
불랑기자포-3,548문
삼안총-258정
비격진천뢰-356문
위원포-60문
목모포-483문
단포-630문
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좀 생소한 위원포, 목모포, 단포를 제외하고 주력 화기들만 봐도 상당히 많은 수량이 비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음. 당시 남한산성으로 급하게 피신하느라 주변 무기고에서 화포를 넉넉하게 가져오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심찮게 조선군이 청군에 대해서 화포로 반격했다는 내용이 자주 나오는 것으로 보면 저 물량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짐.
물론 1624년부터 1636년 12월까지 12년의 기간 동안 많이 고장난 것도 있고 낡았던 것도 있겠지만
이 양반이 전쟁 기간 내에 대부분 수리해놔서 적시에 전부 쓸 수 있었다고 함. 그리고 남한산성 자체도 화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고려된 설계라서 시너지 효과는 매우 크게 나타남.
남한산성이 축성될 때, 조선 측은 임진왜란 당시 기존의 요새들이 너무 쉽게 함락당했다는 전훈과 새로운 화약 병기의 도입으로 인한 일련의 군사적 변화를 받아들여 일본과 명나라의 축성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음.
특히 17세기 들어서 조선이 축성하기 시작한 요새들은 여진의 공격에 대비하여 높은 성벽과 해자, 목책 등의 방어시설은 물론, 화기 사용을 할 수 있도록 포루, 현안, 옹성, 성랑 등의 시설을 도입함.
1606년 함경감사 이시발이 함흥읍성을 축성하면서 이러한 방어시설들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남한산성에도 부분적으로 시설이 일부 도입되었음. 무엇보다도 험준한 지형에 맞춰서 높은 성벽과 성문, 여장이 설치되면서 방어력을 최대한 높히는 쪽으로 감.
다만 포루나 옹성, 치성 등의 방어 시설은 추가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여진이 화기를 제대로 보유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으로 인식되고 있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청군과 교전을 할 때 조선군 포병들이 포루가 없어서 우마장에 화포를 놓고 청군에게 사격을 퍼부었다던지 등의 기록이 보이고는 함.
이때만 해도 조선은 설마 여진이 공성용 대형화포를 가지고 있겠느냐는 생각을 했으나, 1631년부터 자체적으로 화포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투항한 명군으로부터 홍이포 등 대형화포들을 입수하면서 상황이 달라짐.
1624년부터 축성된 남한산성은 이러한 여진의 변화를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시기였으며 그 때문에 포루, 옹성, 치성 등의 방어 시설 건설에 대해서 딱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음. 물론 전쟁 이후에는 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지어서 쓰지만.
어찌되었든 최신 축성 기술과 화기 배치의 시너지 효과 덕에 청군도 남한산성에 대한 공성에 대해서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고 오히려 조선군 수비병력이 운용하는 포격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함. 조선보면 괜히 화기에 미쳐있던게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