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제1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 957년 5월 19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제1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열렸다. 한국 최고의 미인을 뽑는 제1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1957년 5월 19일 개최됐다. 대회 주최사인 한국일보는 4월 6일 1면에 미스코리아대회 개최 사고(社告)를 냈다. 응모 자격은 만 18세이상 28세까지의 한국 여성으로서 지ㆍ덕ㆍ체의 모든 면에 진선미를 겸비한 사람, 직업의 유무는 불문하나 흥행단체 또는 접객업소에 종사한 일이 없는 미혼여성으로 했다. 신청 마감은 4월 30일이었으나 마감이 다가와도 신청이 들어오지 않았다. 행사 준비 기간이 짧은 탓도 있었겠지만 당시만 해도 미스코리아 선발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좋지 않았다. 이날 결선대회에 오른 7명의 후보가운데 23세의 박현옥양이 미스코리아로 당선됐고 홍인방양과 김정옥양이 준 미스코리아로 당선됐다. 미스코리아에 당선된 박양은 7월 1일 롱비취시에서 열린 세계미인제전에 한국여성의 대표로 참가해 우리나라 여성들이 지닌 진선미를 자랑했다.
[1897년] 국어학자 정인승 출생
← ‘큰사전’ 편찬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정인승 선생. 한글학회의 ‘큰사전’을 완성하는 등 한글발전에 크게 기여한 국어학자 건재 정인승 선생은 29세 때인 1925년 연희전문학교를 마치고 전북 고창고보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일제당국의 감시와 방해로 한글교육을 못하게 되자 1935년 사직했다. 1936년부터 조선어학회(한글학회의 전신)에서 ‘큰사전’ 편집주간을 맡았던 그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 수감돼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풀려난 건재는 ‘큰사전’ 편찬에 혼신의 힘을 쏟아 1957년 한글날에 완성시킴으로써 우리말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전북대 총장과 학술원회원, 한글학회 고문 등을 역임했고, 건국공로훈장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다. 저서는 ‘한글독본’ ‘한글문답’ ‘표준중등말본’ ‘표준고등말본’ 등이 있다. 1996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이자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됐다.
[1924년] 마시탄 사건 발생 1924년 5월 19일 평안북도 강계군 고산면 마시탄 강변에서 참의부(參議府) 독립군이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3대 조선 총독으로 임명된 사이토는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국내 치안을 강화했다. 치안 유지에 자신이 붙은 사이토는 마루야마 쓰루기치[丸山鶴吉] 경무국장을 거느리고 조선과 만주 국경을 시찰하러 나섰다. 이 정보를 입수한 참의부 독립군은 사이토를 저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참의부 제1중대 제1소대장 이의준은 10여 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마시탄 강변의 만주 쪽 절벽 바위틈에 매복한 채 사이토 일행을 기다렸다. 60여 명의 경찰이 동승한 총독 순시선이 다가오자 대원들은 절벽 위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순시선이 전속력으로 사정권을 벗어나는 바람에 결국 사이토를 사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마시탄 사건은 독립운동계에 적잖은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1906년] 민종식 의병대, 홍주성 점령
← 한말 제2차 의병투쟁 당시 의병들의 모습 1906년 5월 19일 전 참판 민종식이 이끄는 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했다. 당시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에 반대해 민중과 양반 유생을 중심으로 반일무장투쟁인 을사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민종식은 충청남도와 전라도의 유생들을 규합해 봉기를 추진했다. 1906년 5월 11일 이용규·김광우·조희수·정재호 등과 함께 홍산에 모여 봉기를 최종 결정하고 의군을 출동시켰다. 이들은 서천·남포·보령·결성을 거쳐, 5월 19일에 홍주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5월 31일 다시 성을 내준 뒤, 충청도와 전라도 각지로 흩어져 소규모 부대로 꾸준히 항쟁을 계속했다.
[1890년] 호치민 胡志明 출생
1890년 5월 19일 태어남 / 1969년 9월 2일 죽음 "1776년 선포된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로부터 생명·자유·행복의 추구에 대한 천부적인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원칙이 천명되었다. 그것은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며, 생명·자유·행복을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호치민
호치민은 베트남의 민족운동을 이끈 민족주의자이며 20세기의 영향력 있는 공산주의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이다. 식민지 베트남에서 태어나 성장기를 보낸 호치민은 1911년 프랑스 증기선의 선원으로 프랑스·미국·아프리카 등지를 떠돌며 공산주의 이론에 접하게 되었다. 1919년 파리 평화회의에서 베트남 민족의 자결권을 호소했으나 묵살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1920년 프랑스 공산당에 참여한 이래 소련·중국 등지에서 공산주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베트남 혁명청년협회와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결성했다. 이후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나 한동안 소련에 잠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점령하자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재결합했고, 1941년 30년 만에 처음으로 귀국해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호치민은 북베트남에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세웠으나 식민지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프랑스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러야 했다. 1954년에 열린 제네바 협정에서 총선거 전까지 남북 분단에 대한 잠정적인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총선거는 무산되었고, 1959년경에는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인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다. 호치민은 독립을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는 강경한 의지로 미국과의 협상을 거부했으나, 베트남 통일을 보지 못한 채 1969년 세상을 떠났다.
[1908년] 소설가 백신애[白信愛] 출생
1908. 5. 19 경북 영천~1939. 6. 25 서울. 일제강점기에 한국 민족이 겪는 가난의 고통을 섬세하게 그렸다. 본명은 무잠(武岑). 본관은 수원. 아버지 내유(乃酉)의 1남 1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일부에서는 5월 20일 태어났다고도 함.). 고향에서 한문과 여학교 강의록을 공부했고, 1924년 대구사범학교 강습과에 입학했다. 영천공립보통학교·자인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가족이 대구로 이사하자 혼자 서울로 올라왔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 그해 가을에 귀국했으나 아버지가 결혼을 강요하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연극을 공부했다. 1932년 귀국해 결혼했으나 곧 이혼했으며, 1938년 가을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가 이듬해 귀국해 위장병 악화로 죽었다. 1929년 박계화(朴啓華)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나의 어머니〉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어 단편 〈꺼래이〉(신여성, 1934. 1)·〈복선이〉(신가정, 1934. 5) 등을 발표했으며, 대표작 〈꺼래이〉는 일제강점기에 시베리아를 넘나드는 한국인의 실상을 파헤친 작품이다. 그뒤 무력한 두 아들을 둔 어머니의 생(生)에 대한 애착을 그린 〈적빈 赤貧〉(개벽, 1934. 11)을 발표했는데, 특히 굶주림 때문에 배가 더 고플까봐 배설마저 참는 끝장면은 가난의 극치를 생물학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강한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그밖에 단편 〈악부자 顎富者〉(신조선, 1935. 8)·〈빈곤〉(비판, 1936. 7)·〈정조원 貞操怨〉(삼천리, 1936. 8)·〈광인수기 狂人手記〉(조선일보, 1938. 6. 25~7. 7) 등을 발표했고, 액자소설로 가난과 애욕을 둘러싼 갈등을 그린 장편 〈아름다운 노을〉(여성, 1939. 11~1940. 2)은 그녀가 죽고난 뒤에 발표되었다. 수필로 〈백합화단〉(중앙, 1934. 4)·〈녹음하 綠蔭下〉(조광, 1937. 6) 등을 발표했다.
[2004년] 중국 상하이 중의약대에 ‘허준 동상’ 건립
← 서울 구암공원의 허준 동상 ‘동의보감(東醫寶鑑)’의 허준(許浚.1539-1615) 선생을 기리는 동상이 중의학의 본고장 중국땅에 세워졌다. 세계 최대규모의 한의학 대학으로 거론되는 중국 상하이(上海) 중의약대는 지난 19일 포둥(浦東) 캠퍼스 교정 한복판에 외부에서 관람할 수 있는 200평 규모의 유리건물인 ‘낙원(樂園)’을 짓고 그 안에 허준선생 동상을 세웠다. 사회주의 중국 땅에 외국인의 개인 동상과 기념관이 세워지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허준선생의 동상은 실물보다 좀 큰 규모이며 앉은 상태에서 동의보감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허준 기념관’은 운동장 한쪽에 자리잡고 있어 오가는 학생들이 쉽게 볼 수 있다. 중국 학생들은 허준선생과 동의보감의 존재를 통해 한국 전통의 한의학 수준을평가하는 모습이었다. 동상과 유리건물의 건설비용은 허준 선생을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는 한국인침구연구가 이병국(李炳國-77)씨가 부담했으며 이씨와 중의약대학 옌스윈(嚴世芸)총장과의 인연이 동상 건립의 중요 계기가 됐다. 1992년에 상하이 중의약대를 처음 찾아 옌 총장과 인연을 맺은 이씨가 이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강의를 하는 도중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을 교수진에게 선물하는 등장시간에 걸쳐 학교측을 설득한 결과였던 것. 학교 관계자는 23일 “한중 관계가 돈독해지는 상황에서 허준 선생의 동상을 중의학의 본산에 세운 것은 큰 의미가 있다”면서 “양국의 중의학 교류를 증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994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Onassis, Jacqueline Kennedy) 사망
오나시스 [Onassis, Jacqueline (Lee Bouvier) Kennedy, 1929.7.28~1994.5.19] 1963년 11월22일 댈라스에서 총을 맞아 피투성이가 된 케네디의 머리를 부둥켜 안고 "Oh, No~!"라고 비명을 지르던 재클린. 미국인에게 희망과 실망을 함께 안겨줬던 그녀가 1994년 5월 19일 64세를 일기로 파란많은 생을 마감했다. 대통령의 젊은 미망인에서 그리스 선박왕의 아내로, 백만장자 보석상의 연인으로, 그리고 말년엔 평범한 어머니이자 할머니로서 그녀는 수많은 동정과 구설수속에서 한 평생을 보냈다. 1928년 돈많은 은행가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워싱턴 타임즈-헤럴드의 인터뷰 담당 기자가 됐다. 그녀가 취재한 사람 중에 매사추세츠출신의 젊은 상원의원 케네디가 있었다. 케네디를 처음 만난 것은 1951년 어느 디너파티에서였다. 그녀는 12살 연상의 케네디와 1953년 로드 아일랜드의 뉴포트에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1960년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녀는 31살의 나이로 70년 만에 가장 젊은 미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그러나 남편의 피살과 함께 그녀의 화려한 퍼스트레이디 생활은 끝났고 5년 후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했다. 그러나 이 두 번의 결혼 모두 행복하지 못했다. 그녀와 결혼한 남자들은 진실로 그녀에게 충실하지는 못했다. 1975년 오나시스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편집자로 일하면서 철저히 매스컴을 피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64년의 삶을 뒤로 하고 눈을 감던 이날, 그녀의 3번째 남자인 뉴욕의 다이아몬드상 백만장자 모리스 템플즈만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동안의 온갖 구설수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그녀가 지금까지 자신들의 최고의 흠모대상이자 영원한 퍼스트 레이디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3년] 한국-마다르스카르 국교 수립
한국과는 1962년 6월에 수교(修交)하였으나 1972년에 단절하였고, 1993년에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1972년 11월의 북한과의 수교 및 마다가스카르 외무부장관 라치라카의 북한방문 등으로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94년 체신장관 하시니아 안드리아 만자로가 방한하였다. UN(국제연합)에서의 대(對)한국 태도는 부정적이며 공산측 공동제안국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이 매년 10만 달러 상당의 기자재 공여사업과 연수생 초청사업을 전개하고, 한국기업이 투자와 통상 등을 펼치면서 실질관계가 확대되어 나가고 있다. 2000년 현재 대(對)한국수입 1091만 달러, 수출 38만 달러이다. 주요수입품은 석유제품, 전기제품 등이며 수출품은 향료, 운모 등이다. 2001년 현재 체류자는 200여 명이다.
[1976년] 한국-파푸아뉴기니 국교 수립
파푸아뉴기니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다. 한국과는 1976년 5월, 북한과는 같은 해 6월 국교관계가 수립되었다. 1976년 이래 한국 건설업체가 진출해 있다. 1978년 6월 총리 미라, 1997년 총독 코로위, 2000년 부총리 마오 제밍과 수산장관 론 가나라포가 방한하였다. 한국에서는 1984년 국회의장 채문식이 파푸아뉴기니를 방문하였다. 양국은 기술협력협정(1983), 어업협정(1992), 이중과세방지협정(1996), 투자보장협정(1999년 가서명)을 체결하였다. 1999년 현재 대한수입 1292만 7000달러, 대한수출 1억 4496만 5000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으로는 동광, 원목, 커피, 동물성재료 등이고, 수입품은 냉동어류, 타이어 및 튜브, 에어컨, 시안화나트륨 등이다. 2002년 2월 현재 한국인 200여 명이 있다.
[1957년] 발명의 날 제정 1957년 상공부가 제 1회 발명의 날을 만들어 기념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측우기의 발명일이 1442년(세종 24년) 5월 19일이라 하여 그렇게 정했던 것이다. 그 뒤 정부 주관의 기념일을 통폐합하면서 1973년부터는 3월 20일 상공의 날에 합쳐졌고, 그 결과 발명의 날은 사라진 셈이다. 그러나 1982년 5월 19일 제 17회 발명의 날 행사가 민간 주도로 실시되면서 부활되어 그 후 해마다 기념되고 있다.
[1442년] 세종대왕, 세계 최초로 측우기 발명
← 헌종 3년(1837)에 만들어진 측우기 1441년(세종 23) 8월에 예조(禮曹)가 측우기(測雨器)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다음해 5월에는 측우에 관한 제도를 새로 제정하고 측우기를 만들어 서울과 각 도(道)의 군현(郡縣)에 설치하였다. 원래 측우기가 쓰이기 이전에는 각 지방의 강우량의 분포를 알아내는 데 매우 불편하였다. 즉, 비가 내림으로써 흙속 깊이 몇 치까지 빗물이 스며들었는지를 일일이 조사해 보아야 하는데, 이때 흙에는 마르고 젖음이 같지 않아 강우량을 정확히 알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측우기는 일정기간 동안 그 속에 괸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그 곳의 강우량으로 하기로 되어 있다. 측우기는 안지름이 주척(周尺)으로 7인치(14.7cm), 높이 약 1.5척의 원통으로 되어 있는데, 비가 올 때 이 원통을 집밖에 세워 두면 빗물을 받을 수가 있다. 측우기에 괸 물의 깊이는 자[尺]로 측정한다. 즉, 대(臺)를 관상감에 만들어서 측우기를 대 위에 올려놓고 비를 받도록 하는데, 관상감의 관원이 직접 주척으로 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보고한다. 중앙에는 관상감에, 지방에는 각 도의 감영(監營)에 설치하였다. 처음에 철로 만들었으나, 뒤에 구리로 만들어 쓰기도 하였고, 지방에서는 자기(瓷器)·와기(瓦器) 등을 쓰기도 하였다. 주척은 나무 또는 대나무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조선 세종 때의 측우기가 과학사상 뜻깊은 것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쓰였다는 사실이다. 유럽에서는 1639년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처음으로 측우기로 강우량을 관측하였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1658년부터, 영국에서는 1677년부터 관측하였다. 한국에서는 이미 1442년 5월부터 측우기로 우량을 측정하였으며, 이것은 이탈리아보다도 약 200년이 빠르다.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는 1837년(헌종 3)에 만든 것으로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기상청에 소장되어 있다.
[1946년] 조선상공회의소 창립 대한상공회의소(大韓商工會議所)는 상공회의소법에 의해 설립된 민간경제단체로서경제4단체 가운데 하나이다. 전국 지방상공회의소의 운영 및 사업을 종합·조정하고 그 의견을 대표하며, 국내외의 경제단체와 상호 협조함으로써 상공회의소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고 한국의 상공업 진흥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에서 근대적 상공회의소 제도가 시작된 것은 1884년(고종 21) 한성상업회의소(漢城商業會議所)를 설립하고 1895년 11월 상무회의 소규례를 제정하면서부터이다. 이후 1946년 5월 조선상공회의소를 창립한 뒤, 1948년 7월 대한상공회의소로 명칭을 바꾸었다. 1952년 12월 상공회의소법을 제정·공포하고, 1953년 10월 대한상공회의소 및 24개 지방상공회의소가 공법인으로 인가받았다. 1954년부터 38개 지방상공회의소가 신설되었고, 2003년 현재 65개 지방상공회의소가 있다.
[1910년] 핼리혜성 75년 만에 지구에 접근
핼리혜성이 1835년 이후 75년 만인 1910년 5월 19일 지구 2300만Km까지 접근해 꼬리의 길이가 천구의 중간인 120도까지 이르자 전 세계가 혼란에 휩싸였다. 영국의 천문학자 E.핼리(Halley, Edmund, 1656~1742)는 1705년에 당시 뉴턴이 발표한 만유인력의 이론에 따라서 기록에 있는 24개의 혜성의 궤도를 계산해서 1531년, 1607년, 1682년에 출현한 바 있는 세 개의 혜성이 같은 궤도를 돌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거의 같은 간격으로 나타나는 점에서, 이들 동일한 혜성이 태양의 주위를 76년의 주기로 돌고 있다고 결론짓고, 이 혜성은 1758년에 또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E.핼리의 사망후 1758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밤에 실제로 혜성이 출현하자 이후 핼리혜성(Halley's Comet)이라고 불려졌다. 고대의 기록을 알아보면, 지금까지 29회의 출현기록이 남아 있는데, 가장 오래된 기록은 BC 467년 중국 주대(周代)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76년 만인 1986년 이 혜성이 다시 태양에 접근하자 많은 국가들이 탐사기를 쏘아 올려 혜성의 조성, 태양풍과의 상호작용 등을 관측함으로써 신비에 쌓였던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혜성의 본체는 지름이 불과 6Km정도이고 코마(핵 주위의 대기)의 반지름은 약 1천만Km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1891년] 시베리아 횡단 철도 착공
낭만과 꿈, 회한과 유형의 역사로 점철된 시베리아 횡단 철도 공사가 1891년 5월 19일 시작됐다. 공사는 서쪽의 모스크바, 동쪽의 블라디보스톡, 중부 시베리아 철도, 트랜스∼바이칼 철도, 기타 철도 등을 건설하여 서로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됐지만 공사비 부족과 냉혹한 겨울추위 등으로 여러 차례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게다가 죄수들을 포함한 건설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 반발, 폭동을 일으켜 공사 진척을 방해했다. 하지만 최대 난관은 노선의 한 가운데를 가로막고 있는 바이칼 호수였다. 바이칼 호수 공사 중 러ㆍ일전쟁이 발발하자, 바이칼을 우회하는 노선이 시급했던 러시아 정부는 청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 만주를 지나는 동청철도와 연결한 전장 8314km의 시베리아 철도를 완성했다. 전쟁 후 러시아는 일본의 만주 할양을 우려해 대체 루트로 아무르강 철도를 건설, 이를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톡에 이르게 했다. 이 노선은 1916년에 완공됐다. 그래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2개 노선에 대한 완공일을 갖고 있다. 1904년은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고 만주통과노선을 완공시킨 해이고, 1916년은 전적으로 러시아 영토 안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완성시킨 해이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모스크바에서 시작해 시베리아 대지를 가로질러 극동의 블라디보스톡까지 총길이 9천2백88km에 달하는 세계최장의 철로이다. 지구 둘레의 3분의 1에 가까운 거리며 경부선에 비해 20배가 넘는 거리다. 근대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 국가사업의 하나로 꼽히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은 항공수단이 발달하기 전까지 러시아의 동과 서를 하나로 묶는 유일한 대중 교통수단이자 핵심 물류수단이었다. 이 철도는 또한 일제 압정에 시달려 연해주 등지에 이민갔던 수많은 우리 동포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킨 그야말로 '눈물의 철도'이기도 했다.
[1864년] ‘주홍글씨’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호손(Hawthorne, Nathaniel) 사망
호손 [Hawthorne, Nathaniel, 1804.7.4~1864.5.19] 우의적·상징적인 이야기를 잘 묘사한 미국문학의 위대한 소설가이며, 《주홍글씨 The Scarlet Letter》(1850)·《일곱 박공의 집 The House of the Seven Gables》(1851)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매사추세츠주 세일럼 출생. 선장(船長)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기의 청교도(淸敎徒)를 선조로 모신 가정이었으므로 청교도의 사상·생활태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작품을 썼다. 1825년 보든대학교를 졸업 후 1828년 최초의 소설 《판쇼》를 출판하였으나 뒤에 미숙한 작품임을 깨닫고 회수해 버렸다. 1837년 단편집 《트와이스톨드테일스》를 발표했으며, 1839년 경제적 불안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보스턴 세관에 근무하였다. 그후 1850년 그의 대표작이 된 《주홍글씨》를 발표하였다. 17세기의 청교도 식민지 보스턴에서 일어난 간통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그린 이 작품은 청교도의 엄격함을 교묘하게 묘사하고 죄인의 심리 추구, 긴밀한 세부구성, 정교한 상징주의로 말미암아 19세기의 대표적 미국소설이 되었다. 1851년 청교도를 선조로 가진 고가(古家)의 자손에게 악의 저주가 걸린 《일곱 박공의 집 The House of the seven Gables》을 발표하였다. 이듬해 자신이 참가했던 실험적 공동농장을 무대로 한 《블라이스데일 로맨스》를 출판하여 지상낙원에 모인 사람들의 심리적 갈등을 그렸다. 1853년 영국의 리버풀 영사(領事)로 부임하였으며, 그후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이 여행 뒤에 목신(牧神)이 죄를 짓고 비로소 지성과 양심의 깨달음을 경험하는 《대리석의 목신상》(1860)을 집필하였다. 청교도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 전통을 계승한 그는 범죄나 도덕적·종교적 죄악에 빠진 사람들, 자기중심벽·고독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내면생활을 도덕·종교·심리의 세 측면에 비추어 엄밀하게 묘사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일면으로 교훈적 경향이 강하면서 상징주의에 의한 철학적·종교적·심리적으로 의미심장한 세계가 전개되는 정교한 면도 있다.
[1795년] 미국의 백만장자 홉킨스(Hopkins, Johns) 출생
← 존스홉킨스대학교 홉킨스 [Hopkins, Johns, 1795.5.19~1873.12.24] 그의 유언에 따라 거액의 기부금으로 존스홉킨스대학교와 존스홉킨스 병원이 설립되었다. 존스 홉킨스는 담배농장을 경영했던 퀘이커교도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종교적인 양심으로 노예들을 해방시켰기 때문에 12세 때에는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들에 나가 일을 해야 했다. 자신이 공부를 중단했던 일과 흑인들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은 일생 동안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17세 되던 해 그는 삼촌에게서 식료품점 경영에 관한 여러가지 일을 배우기 위해 볼티모어로 갔다. 사업경영을 잘 해나갔지만, 1819년 삼촌이 농민들이 위스키로 물품값을 지불하는 데 반대하자 삼촌과의 불화로 독립하게 되었다. 그후 1명의 동업자와 사업을 하다가 나중에는 3명의 형제들과 사업계에 뛰어들었다. 홉킨스 형제들은 메릴랜드·버지니아·노스캐롤라이나 주, 심지어 오하이오 주까지 마차로 물품수송을 하여 크게 성공했다. 그들은 수송의 대가로 기꺼이 위스키를 받았고, 그것을 '홉킨스 베스트'(Hopkins' Best)라는 상품명으로 팔았다. 홉킨스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여행도 하지 않았으며 개인적인 오락을 위해서는 거의 돈을 소비하지 않고 오직 사업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1847년 은퇴 당시 홉킨스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볼티모어의 부동산과 사업에 효과적으로 투자하여 재산을 늘려나갔고 볼티모어와 오하이오철도회사의 주식을 개인으로는 가장 많이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몇몇 은행의 이사를 지냈고 보험회사·도매상점·증기선회사에 투자를 하는 등 볼티모어의 상업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해서 그는 대학과 병원을 만들기 위해 2개의 법인을 설립했다. 그의 유언(1870)에 따라 700만 달러가 이 두 기관에 분배되었다. 흑인 어린이를 위해 고아원도 기증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존스홉킨스대학교는 1876년, 병원은 1889년에 설립되었고, 의과대학은 양쪽 시설을 모두 활용하면서 1893년에 처음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이때 여학생도 남학생과 동일한 조건으로 입학이 허용되었다.
[1798년]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
1798년 5월 19일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1821)은 이집트를 향해 남프랑스에서 배로 떠났다. 원정의 동기는 나폴레옹 개인의 동방에 대한 야망도 있었지만, 이집트를 제압함으로써 인도에 진출한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가 더욱 강했다. 원정군은 33척의 함대와 200여 척의 수송선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3만여 명의 육군과 167명의 학자, 기술자를 태우고 지중해를 동쪽으로 진출하였다. 6월 10일 몰타섬에 상륙하여 이 섬을 점령한 뒤, 7월 초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여 카이로를 향해 진군했다. 현지의 맘루크기병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으나 화포의 위력으로 제압하고 7월 21일 나일강변의 도시 카이로에 입성했다. 입성하자 곧바로 군사정권을 수립했다. 나폴레옹은 현지인에게 유화정책(宥和政策)을 약속하고 이슬람교를 공인하였으며 투르크의 압제를 배제하는 한편 인민의 해방과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입성한 지 얼마 안되어 아부키르만(灣)에서 영국의 넬슨함대에 프랑스해군이 격멸되었기 때문에 본국과의 연락이 끊어져 고립되게 되었다. 이듬해인 1799년 2월 나폴레옹은 시리아원정의 장도에 올랐다. 목표는 남하를 계획하는 투르크의 요충지를 격파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군대는 물 부족과 페스트로 고통을 겪으면서, 하이파로 진군하여 아크레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이집트로 되돌아왔다. 기세등등한 투르크군은 7월 아부키르만에 상륙했으나 프랑스군에 의하여 격퇴되었다. 1799년 8월 말, 나폴레옹은 단독으로 이집트를 떠나서 본국으로 귀환했다. 군사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함께 갔던 학자들의 손으로 곧 이집트학이나 고대동방의 문물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한 장교가 발견한 로제타돌에 새겨진 고대 이집트 문자를 J.F. 샹폴리옹이 해독함으로써 후세에 커다란 공헌을 남기게 되었다.
그밖에 2007년 연기자 겸 가수 하리수 결혼 2007년 자이툰부대 장교 1명 총기 사망 2001년 종묘제례, 제례악 유네스코 유산 선정 2000년 박경완, 한국프로야구사상 첫 4연타석 홈런 1999년 한국축구 100년사를 모은 ‘축구박물관’ 개관 1998년 이탈리아 국립현대미술관 고흐-세잔 그림 3점 도난 1997년 국민회의, 김대중총재를 대통령후보로 선출 1997년 제1회 LG배 세계기왕전 - 이창호구단 우승 1995년 신행주대교 재개통 1994년 아프리카 말라위, 카무주 반다 대통령의 30년 독재 마감 1992년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14대 대통령후보로 선출 1992년 민속의학자 김일훈씨 별세 1988년 월스트리트 저널지, 노드롭 스캔들 폭로 1974년 지스카르 데스탱 20대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 1973년 서독-소련 3개(경제, 문화, 항공)협정 체결 1970년 국제노동기구(ILO)가 빈곤백서를 발표, 세계인구의 15퍼센트가 영양실조로 고통 1967년 소련 대기권 핵무기 금지조약 비준 1967년 유엔(UN) 특별위 나미비아(서아프리카)의 신탁통치 결의 1962년 독일 화가 뮌터 사망 1961년 남북협상 주장한 혁신계 ‘민족일보’ 폐간 1961년 혁명위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 1961년 윤보선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 다음날 번복 1960년 미국-일본 신안보조약 신행정협정 중의원서 자민당 단독승인 1958년 미국-캐나다 북미방공사령부(NORAD) 설치 1955년 국회 태창산업 특별융자조사위원회 보고 1954년 미국-파키스탄 상호방위원조협정 조인 1952년 원내 자유당, 개헌문제로 합동파, 잔류파로 분열 1950년 제2회 총선에 의한 국회 개원, 의장에 신익희 부의장에 장택상, 조봉암 1941년 베트민(베트남 독립동맹) 결성 1935년 아랍 독립운동 도운 영국 탐험가 토머스 로렌스 사망 1930년 남아연방서 백인여성에 참정권 1925년 이탈리아 프리메이슨등 비밀결사 금지 1925년 제네바서 제7회 국제노동회의 개막 1925년 말콤 X 출생 - 1960년대초 흑인의 자부심과 블랙내셔널리즘을 주장한 흑인 민권운동지도자 1924년 참의부 의용군 압록강 연안의 국경을 순시중인 총독 제등실의 배 습격 1922년 손병희 선생 사망 1921년 미국 이민제한법 제정 1919년 북경대학생연합회 맹분선언, 일화배척운동 전개 1909년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발레단이 프랑스 파리 샤트레극장에서 공연 1903년 스웨덴의 시인 스노일스퀴 사망 1902년 정약용의 목민심서, 광문사(廣文社)에서 신식활자로 간행 1898년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글래드스턴 사망 1881년 최초의 신식군대 별기군 창설 1879년 원산 개항을 허가 1845년 영국 항해가 탐험가 존 프랭클린 북극 북서항로 출발 1762년 독일 철학자 피리테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