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조좌랑 이공 묘갈명 병서
(吏曹佐郞李公墓碣銘幷序)
공의 휘는 조(晁), 자는 경승(景升),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단성현(丹城縣) 원당동(源塘洞)에서 살았는데, 가계는 성주에서 갈라져 나왔다. 시조 장경(長庚)은 고려조에 성주의 아전(衙前)으로 우뚝 일어난 분이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1품에 올랐다. 경산부원군에 추봉되었다. 다시 손자 승경의 공적으로 원나라 황제의 총애를 입어 농서공(隴西公)에 제수되었다.
농서공의 아들 문열공 조년(兆年)이 공의 7세조이다. 이분이 경원공(敬元公) 포(褒)를 낳았고, 이분이 밀직 상호군 인립(仁立)을 낳았고, 이분이 숭록대부(崇祿大夫濟) 제(濟,1598~)를 낳았다. 제는 우리 태조의 사위가 되었는데, 나라를 창업할 적에 남다른 공훈이 있다고 하여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고,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 휘 윤(潤)은 결성 현감을 지냈고, 조부 휘 의순(義淳)은 어모장군에 올랐으며, 부친 휘 계유(繼裕)는 음직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모친 사천 이씨(泗川李氏)는 수화(秀華)의 따님이다. 가정 9년 경인년(庚寅年, 1530, 중종 25)에 공을 낳았다.
공은 순정하고 충허하며 국량이 있었다. 일찍 부친을 여의었지만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하였다. 재물을 나눌 적에는 구차하게 얻으려 하지 않았고, 제사를 지낼 적에는 반드시 재계하고 목욕하였다. 형 창이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공은 형에게 의지하는 정상 없이 날마다 경전을 암송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567, 명종 22)에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에 임명되었다. 무진년 (1568)에는 진주목의 학관, 신미년 (1571)에는 경주부의 학관에 제수되었다. 공은 학관으로 있으면서 기생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계유년(癸酉年, 1573, 선조 6) 성균관 학정에 제수되었고, 동래 호성관으로 차출되었다. 그때 왜인이 공에게 후추 한 말을 바치자, 공은 위로하고서 받지 않았다. 왜인이 놀라고 감복하여 ‘한 조각 맑은 얼음 같아 한 여름에도 서늘하네’ 라고 읊은 시구가 있다.
조정으로 들어가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갑술년(甲戌年, 1574, 선조 7) 성균관 전적으로 옮겼다가, 바로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당시 조정의 논의가 가공을 행하고자 하였는데, 삼사의 관원들은 각자 삭록에서 가공비를 분담하였다. 공은 혹 병으로 등청하지 못할 경우라도 자기 몫을 보냈다.
공이 벼슬에 종사할 적에는 고관의 집에 발걸음을 들이지 않았고, 남과의 교제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교활한 아전을 제압한 일 때문에 모함을 받게 되어 비방이 어지러이 일어났다. 이해 겨울 공은 이 일로 낙향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뒷날 조정에서 사실을 알게 되어 공은 잇달아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벼슬하지 않고 여러 해 고향집에서 지내며 상수학에 침잠 하여 ‘주역’ 읽는 것을 더욱 좋아하였는데, 잠자고 밥 먹는 일도 잊을 지경이었다. 내가 고금의 사람들을 살펴보니,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관직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드문데, 공은 명예와 이익에 대해 이토록 담박하였다.
내가 어찌 대가를 바라고 공의 비명에 아첨하는 말을 하겠는가? 경진년(庚辰年, 1580, 선조 13) 공조 좌랑에 제수되자, 형이 출사를 권하였지만 공은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공은 집에서 지낼 적에 검소함을 숭상하여 의복과 음식을 치장하지 않았고, 한결같이 관대하고 온화하게 집안사람을 대하였으며, 형제와 친족들을 대접할 적에는 변함없이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하였다. 누이동생이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재산으로 장사를 지냈으며, 서모를 생모처럼 봉양하였다.
겉으로는 농담을 잘하였지만 속마음은 본래 확실하였다. 그래서 착한 사람들은 공을 좋아하였고, 악한 사람들은 공을 꺼렸다. 이해[1580, 선조 13] 12월 23일 원당동 별장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1세였다.
공은 임종 무렵, 일어나 세수하고 밥을 몇 술 뜨더니 자식들에게도 먹으라고 하였다. 또 말에 안장을 채우고 떠날 채비를 하라고 명하였는데, 버선을 다 신기도 전에 운명하였다. 아! 공의 성품은 충신에 가까워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자못 고인의 기상이 있었다. 만약 공이 몇 년 더 살았다면 그로부터 크게 진보할 수 있었을 터인데 불행히도 중도에 세상을 떠났으니 애석하도다.
부인 강씨는 통사랑 득량의 따님이다. 집안을 다스릴 적에 그릇된 거동이 없었다. 공이 세상을 떠난 해 4월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유함은 순후하고 학문에 열의가 있었으니, 공의 은덕에 보답을 받을 만한 사람이다. 그는 진주 하씨 면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차남 유눌은 진양정씨 몽호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막내 아들은 어리다. 장녀는 의령 이씨 산립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이제 겨우 젖을 뗐다.
신사년 (辛巳年, 1581, 선조 14) 2월 27일 단성현의 북쪽 가산 산수가에 장사를 지냈는데, 부인의 묘와 같은 언덕이다. 내가 딸을 잃고서 아직 장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지어서는 안 되지만, 공과의 의분이 깊은 점을 돌아 보건대 개인적인 슬픔 때문에 그만둘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눈물을 닦고 감히 이 글을 지은 뒤 다시 명을 쓴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내리신 안연을 닮은 분
사람됨이 순정하고 아름다웠네
서책을 읽으며 가학을 계승하여
한평생 자신을 헛되이 하지 않았네
학업을 연마하여 명성이 드러나자
사람들이 귀신을 공경하듯 하였네
가산에 공의 영령이 계시니
천년토록 후손들을 보호하시리라
만력 신사년 (1581) 8월 하순에 진주의 벗 성균관 생원 하항이 삼가 지음.
--------------------------------------------------------------------------------------------------------------------------------------------------------
[原文]
吏曹佐郞李公墓碣銘
公諱晁。字景升。星州人。居丹城縣內源塘洞。系出本州。始祖長庚。在高麗崛起州吏。生四子。咸躋一品。襲封京山府院君。更荷帝寵。授隴西公。子謚文烈公兆年。爲士世祖。是生諡敬元公褒。褒生密直上護軍仁立。仁立生崇祿大夫濟。爲我太祖壻。創國謂有殊勳。封君配享。於公爲高祖。曾祖諱潤。結城縣監。祖諱義淳。禦侮將軍。考諱繼裕。有蔭不仕。配泗川李秀華之女。以嘉靖九年庚寅生公。醇虛有量。早孤。能自奮爲學。分財無苟得。行祭必齊沐。兄昌宰累郡。無乞狀。日誦經傳。中丁卯丙科。出成均館學諭。歲戊辰辛未。除晉慶二州學官。居庠不畜妓。歲癸酉。除本館學正。出爲護送官。倭進胡椒一斗。慰而不受。倭驚服。有一片淸氷六月涼之句。入爲本館博士。歲甲戌。遷典籍。轉司憲府監察。時朝議欲待家供。司官各分朔祿。公或臥疾。則必還其祿。其從仕。不躡朱門。不喜納交。以制搰吏。爲所搆陷。謗議紛起。是年冬。因事下鄕不起。後朝廷知公。連授職。不赴。家食多年。沈潛數學。尤喜讀易。至忘寢食。余觀古今人。雖賢者鮮不爲官祿所動。而公能於名利上。淡泊至此。余汚豈戀諛墓之金乎。歲庚辰。除工曹佐郞。兄勸亦不肯赴。公居家尙儉。不治衣食。一以寬和臨之。待兄弟親黨。一出於丹悃。妹死。葬以己財。庶母養如己孃。外善戲謔。而內本確實。故善者好之。惡者忌之。是年季冬念三。觀化于本洞別業。享年五十一。臨歿。起盥洗食數匙。命子亦食。令具鞍馬。爲發行狀。納足巾未畢而歿。嗚呼。公性近忠信。不求人知。頗有古氣。若假以年。自是庶幾將進。而不幸中沒。惜哉。配姜氏。通仕郞得良之女。治內無非儀。以其年孟夏先歿。生三男兩女。長惟誠。淳厚向學。可食其報者乎。娶晉州河沔之女。次惟訥。娶宜寧鄭夢虎之女。次幼。長女歸宜寧李山立。次甫免黃口。以辛巳仲春二十七日。葬于縣之北加山新水上。與夫人同壟。沆哭女未葬。不宜執筆。而顧於公義分旣深。未可以私痛廢。乃拭淚敢撰。重之銘曰。
帝鑄顔餘。醇懿爲人。讀書承家。生不虛身。居業有胄。人敬鬼神。加山有靈。護玉千春。生員晉州河沆撰。<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