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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의성 김씨 학봉종택을 찾아서
이장희 추천 0 조회 68 14.04.01 21: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의성 김씨 학봉종택

 

내에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목조건물인 봉정사 극락전을 찾아가다 보면, 중간에 의성 김씨 학봉종택

이란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봉정사가 초행길인 나로서는 그 전부터 메스컴을 통해서 접한 바 있는

학봉종택의 간판을 보니 반갑기도 하거니와, 언젠가는 한 번 들릴 것이란 작정을 하였는데

오늘은 봉정사와 학봉종택을 동시에 가볼 수 있으니 운이 좋은 날이다.

봉정사를 들리고 내려 오는 길에 오리라하고 재촉한 발걸음에는 그 다음 여정이 가져 줄 기쁨에

가벼운 흥분이 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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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변에 서있는 안내표지판. 명승지나 문화재의 표지판 색깔은 고동색으로 통일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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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종택 전경

..봉종택(鶴峯宗宅)은 안동시(安東市)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溪里) 856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학봉 김성일(金誠一)선생의 종택으로 당호(堂號)는 풍뢰헌(風雷軒)이다.
원래는 현 위치에 지어졌으나, 지대가 낮고 침수가 자주 되어 선생의 팔대손인 김광찬 공이
영조 38년(1762)에 현 위치에서 100m 가량 떨어진 현재의 소계서당이 있던 자리에 새로 종택을

건립하고 종택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후 200여년이 지난 갑진년(1964)에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정침은 입구자(口)형의

평면을 취하고 있으나 최근에 좌측으로 아래채를 달아내어 전체적으로 보면 일자(日)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의 가구는 모두 5량가의 간결한 구조이다.


침의 우측 후면에는 3칸 규모의 사당(祠堂)을 배치하였으며, 학봉선생의 유물을 보관한

운장각(雲章閣)을 비롯하여 풍뢰헌, 문간채 등이 있으며 주위에는 토석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였다. 사당의 묘우(廟宇)에는 학봉선생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있다.
학봉종택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1995. 12. 1)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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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 대문옆에 있는 맷돌 형상의 조형물

진왜란때 의병활동을 함께한 고경명 장군의 후손이 식수한 기념비와 나무에서

그 옛날 전장에서 생사를 같이한 선조들의 진한 전우애가 후손들에게 전래되어

한 몸이 된 듯 끈끈한 두 집안 간의 우애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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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의 대문

 

봉김성일...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와 일본의 침략기미가 없다고 보고하여 조선을 국난에 빠뜨렸다고

비난받았다. 하지만 김성일이 어찌 노골적으로 침략의도를 드러내는 도요토미의 망상을 간파하지 못했겠는가

당시 조선이 망한다는 생각이 팽배 할 정도로 민심이 흉흉한 상황에서 그런 말은 기름에 불을 붙이는 말인 것이다.

 

성일은 조용한 대비를 주장했고 실제 조선은 성곽을 수리하고 유능한 무장을 속속 배치하는등 준비태세에

들어갔었다.  선조가 이순신을 대간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파격적으로 승진 시킨 것은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통신사로 다녀온지 채 일년도 안되어 임진왜란이 터졌기 때문이다.

김성일은 전란을 당하자 전장에 나아가 최선을 다하다 결국 병사한다.

 

성일은 또한 기개가 있었다. 4대사화보다 더 많은 1000여명의 희생자를 낸 정여립 사건에서 였다.

서인의 정철 일파는 이 사건을 동인을 숙청하는데 이용했고, 수많은 동인 인사들이 비명에 죽어갔다. 단지 의혹이나

누군가의 거짓고변이 죽음으로 연결되는 무서운 세상이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오직 김성일만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변호했으니 그 기개가 사림의 으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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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에서 바라본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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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인들과 함께 오신 수녀님은 곶감 말리는 것을 사진 찍느라 열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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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인들이 우리 문화에 관심이 많아진 것같다.그것은 우리 문화의 위상이 높아진 것도 이유일 테지만,

산국가의 가치관과 사고방식, 생활양식 등 문화를 상품화함으로써 수요의 지속적인
창출이 가능한 문화상품을 개발한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의 결실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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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기거하는 안채에 들어서서 첫 눈에 들어오는 글씨를 보는 순간 나는 흠칫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사실 학봉종택에 관한 이야기는 그전에 메스컴을 통해서 인지는 하고 있었으나,집안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사전에 전혀 알고 있는 것이 없는 터였다.

 

판의 글씨는 미수(眉瘦) 허목(許穆)선생의 필체임이 분명했다.얼마전 大邱 "六臣祠"에서 미수체를
접한 이후로 오늘이 두번 째이다.

광풍제월(光風霽月),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개인 날의 달과 같이

가슴 속에 맑은 인품을 지닌 사람을 말함인 바, 宋代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의 인품을 평하여 한 말이다. 朱子의 詩도 한 편 빌려보자

 

파란 구름 흰 돌과 같은 맛인데(靑雲白石聊同趣)

 

 밝은 달 맑은 바람이 달리 전해 오는구나(霽月光風更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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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부엌을 보노라면 예전 아녀자들의 고생을 알 수 있을 것같다.

이 집의 主부엌이 아니겠지만 문턱이 높고 폭이 좁아 보이는 데서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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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고가(文忠古家)의 현판이 걸려있는 대청마루에 널린 곶감과 썰어 놓은 파가 이곳에 사람이

기거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아무리 고래등 같은 대저택이라도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으면

모래성 같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손 때 묻은 윤기가 그 집의 가치를 더 높이는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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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객이 많아서 일까. 무청(일명: 씨래기)을 다듬는 아주머니의 손 길이 바쁘다.

외국인과 탐방객들이 둘러서서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고,시끌벅적 거렸어도 아주머니는 내내

하시던 일에만 열중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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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에 가린 정면의 건물이 종택의 당호인 풍뢰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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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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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도 문충고가(文忠古家)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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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채의 멋스런 난간과 국화의 오묘한 조화가 눈 길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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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의 사당

봉선생종택 경내(境內)에 있으며 불천위(不遷位)인 학봉선생 양위 분의 신위(神位)를 비롯한

몇 분의 신주를 봉안(奉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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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럽게 익은 모과나무 아래의 진지한 모습의 탐방객들.
오른 쪽에 보이는 건물이 학봉선생의 유물을 보관한

운장각(雲章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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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객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틈을 타서 종택의 정갈한 모습을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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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의 정원. 진돗개인 듯한 백구 두마리가 이곳을 지킨다.

사실, 이 곳에서 반대편의 도산서원 부근에 문중파는 다르지만 우리 집안

한 문파의 종택이 있다.조만간 그곳도 들릴 계획이다.전해 듣기로는 학봉종택보다

그 규모가 훨씬 크다고 들었다.물론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 봐야 하겠지만,

는 집의 규모보다 종손과 문중이 얼마나 애정과 애착을 갖고 종택을 지키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란 생각이다.나는 오늘 말로만 들어왔던 학봉종택을 방문하고 나오면서

내 자식,내 후손 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 인가를 곰곰히 생각해본다.

 

나는 진정 그들에게 무엇을 남겨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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