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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현 유적지 답심자료 스크랩 헌릉(獻陵)
이장희 추천 0 조회 100 14.09.18 16: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필자의 집에서 머지 않은  서초구 내곡동에 헌인릉(獻仁陵)이 있다.

헌인릉은 조선 3대 태종(太宗,재위 1400-1418)대왕과 원경왕후 민씨의 헌릉(獻陵)

23대 순조(純祖 재위 1800-1834)대왕과 비(妃) 순원왕후 김씨의 인릉(仁陵)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얼마 전 사진 몇 장 찍은 김에 글을 만드는데 두 릉(陵)을 한번에 다루려 했으나

태종대왕의 헌릉(獻陵) 만으로 이미 넘친다. 따라서 순조대왕의

인릉(仁陵)은 편을 나누어 다음에 올리는데 주된 사설은 헌릉에서 다 했으니

인릉은 사진 몇 점과 그에 따른 설명만 짧게 붙이면 될 듯하다.

    

 

헌인릉(獻仁陵) 능행(陵幸)길

 

오늘 날 서초구 내곡동 헌인릉 가는 길은 여럿이나 조선 시대 임금의 능행(陵幸)길은

숭례문-이태원-(*)한강진(한남대교 북단 한남역부근)에서 강을 건너 사평리

(沙坪里; 글자 그대로 모래밭이었던 듯, 현재 신사동)에서 지금 강남대로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대략적으로 비슷하게 따라 가다 양재역을 거쳐  헌릉로로 가는 길이다.

 

(*)도성에서 양재역까지 가는 데 일반 백성이야 동작진(현 동작대교 북단)이나

서빙고진에서 강을 건너 현 반포를 가로 질러 지나 가도 되고

광희문(시구문)을 나와  현 장충체육관 길을 따라 한강진으로 가도 되지만

임금의 행차는 늘 한강진을 건널 정도로 한강진은 중요한 나루였다.

 

 이상 능행길을 대동여지도에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헌릉 바로 옆 신원(新院)이란 필자가 다른 글 ‘청계산과 영남대로’ 에서  쓴 것처럼

현재 청계산 입구 신원동-새원마을 이다. 대동여지도에서 눈금 하나는 10리고

위 능행길 눈금을 세어 보니 5개가 약간 넘으니  50리 남짓이다. 

근세 이전 10리는 대략 4.5km 니 숭례문에서 23km 정도 거리다.

 

 

박석고개

 

양재 하나로마트에서 헌릉로를 따라 오다 헌릉 입구 못 미처 야트막한 언덕을

옛날 박석고개라 불렀다. 박석고개는 전국 곳곳에  있고  그 숫자 만큼

어원에 대한 설명도 가지가지다.

 

+달>박달>박돌>박석 설(說)

누구를 환송하느라 고개에서 박수를 쳤다는 박수고개 설

돌이 많다 해서 박석고개 설

 

그 중 박석(薄石)을 깔은데서 연유했다는 다음 이야기가 가장 그럴 듯 하다.

 

…우리 나라의 도로는 비교적 소박하고 실용적으로 설계되었다.

도로의 대부분은 황토로 덮었으며, 극히 제한 된 곳에만 돌을 깔았다.

경사가 심한 고개 위의 비탈길은 비가 올 때 미끄러우며 유수에 노면이

침식을 받아 패어지기 쉽기 때문에 돌을 깐 곳이 많다. 오늘날 도처에

남아 있는 '박석 고개'란 지명은 이러한 데서 연유하는 데,

문경 새재에는 1970년대까지 이러한 길이 남아 있었으며… 후략

 

 

사진: 세곡동 방향에서 찍은 박석고개.  위쪽 길을 가로지른 고가는 구룡터널을 거쳐

성수대교로 가고 오른 편으로 갈라지는 길이 헌인릉 입구다.

 

 

재실(齋室)

 

어느 왕릉이나 들어가는 들머리에 재실이 있다.

재실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 참사하는 사람들의 숙식, 제사음식 장만,

제사 후 음복을 하기 위하여 지은 집이다.

 

 

사진 : 헌인릉 재실, 관리가 비교적 잘 되는 듯.

전주 이씨네는 조상이 남긴 재산도 많은데다 문화재청에서 다 관리해 주니 좋겠다.

저런 집 하나도 유지 보수 관리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닌데...

 

사라진 금천(禁川)

 

궁궐과 왕릉에는 반드시 라고 해도 될 만큼 금천(禁川)이 있다.

터를 고를 때 배산임수(背山臨水)를 따지기도 했으려니와

금천(禁川) 냇물은 성(聖)과 속(俗)의 경계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금천을 건너면 성스러운 공간,

왕릉 앞의 금천(禁川)을 건너면 신령(神靈)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대부분 절 앞에도 개울이 있어 사바세계와 청정세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무성한 숲, 잘 가꾼 잔디와 목조 건물은 산불 앞에 활활 타는 쏘시개가 되니

왕조시대 능에 큰 불이 잦아 능묘 앞 냇물은 화재 대비용이기도 했다.

 

그런데 헌인릉 앞에는 냇물-금천(禁川)이 보이지 않는다.

매표소 관리인에게 물으니 ‘저기가 바로 개울이었는데 지금 복개되었어요’ 한다.

 

 

 

 

사진 왼쪽이 주차장이고 오른 편에 잔디와 가로수가 있고

그 옆 진입로가 금천(禁川)을 복개한 길이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덮였던 냇물이 다시 밖으로 나온다.

냇물을 그냥 둬도 주차장이 조금 줄어들 뿐이고,

헌인릉은 관람객이 많은 편도 아니다.

혹시 바로 옆  국정원에서 복개해 버린 지도 모른다.

 

왜 덮어 버렸는지?

경위야 알 수 없지만 별 고민 없이 편의주의로 저지르지 않았을까?

왕릉에서 금천(禁川)이 가지는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은데.

 

헌릉(獻陵)

 

입구에 바로 순조(純祖)대왕과 순원왕후 김씨를 모신 인릉(仁陵)이 있으나

오른 쪽 안쪽으로 태종(太宗)대왕과 원경왕후를 모신 헌릉(獻陵)부터 간다.

 

홍살문과 참도(參道)

 

 

위 사진은 조선 왕릉의 전형적 구성을 나타내고 있다.

전면에 홍살문이 있고 그 너머 박석을 깐 참도(參道)가 정자각까지 벋어 있다.

정자각 오른 쪽 뒤에 신도비가 있는 비각이 있고, 정자각 뒤로 잔디가 깔린

사초지(莎草地)가 급경사를 이루면서 그 위에 능원(陵原)이 있다.

수복방(守僕房)과 수라간(水剌間)이 참도를 가운데 두고 좌우 양 끝에 있었을 텐데 없어진 듯.

 

홍살문은 사진과 같이 양쪽에 붉고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죽 박아 관아(官衙)나 능원(陵園) 앞에 두어 신성한 곳 임을 알리던 문이다.

한자로 홍전문(紅箭門)으로 쓰고  홍문(紅門) 이라고도 한다.

살의 숫자는 조금씩 다른데 많이 박았다고 더 위엄 있는 것도 아닌 듯 하다.

헌릉의 홍살문에는 살이 가운데 태극 무늬를 중심으로 양쪽에 다섯 개씩이다.

 

 

 

 배위(拜位)가 없다

 

보통 홍살문 안 오른 쪽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능에 온 임금이 절 하는 네모진 돌판

 - 배위(拜位)가 있는데 헌릉에는 없다. (배위가 아니라 망료위(望燎位)라는 주장도 있으나

 그 부분은 인릉에서 다루겠다. ) 원래 있던 배위가 없어졌는지? 처음부터 만들지 않았는지?

 

참도(參道)에 신도(神道) 어도(御道) 구분이 없다 !

 

다른 능에는 참도가 두 부분으로 층이 져, (홍살문에서 보았을 때) 왼쪽이

약간 높다. 높은 왼쪽은 선왕의 혼령이 다니는 신도(神道)요,

낮은 오른 쪽은 제사 지내러 온 당대 임금이 걷는 어도(御道)다.

다음 편에 다룰 인릉(仁陵)의 참도에는 그 구별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런데 헌릉의 참도는 구분 없이 그냥 하나다.

 

 

 

사진 : 헌릉 상설도(象設圖) 중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부분

 

모니터 상으로는 19-2 부분이 잘 보이지 않을 텐데

현장 도면에는 흐리게 표시해 놓고 어도(御道) 라고 썼다.

 

어도(御道)가 있었는데 없어 졌는지?

처음부터 신도만 만들고 금상(今上)은 맨땅 위로 걸어 갔는지?

후자일 것 같은 것이 훼손되었다면 흔적이 이렇게 깔끔할 수는 없다.

 

 

 

정자각(丁字閣)

 

왕릉(王陵) 또는 원(園)앞에서 제향(祭享)을 지내던 건물로 정(丁)'자로 생겨

정자각으로 부른다. 구조는 일반적으로 정면 3칸과 측면 1-2칸 정도에 맞배지붕이나

드물게 팔작지붕도 있다. 내부에 신좌(神坐)가 있다.

 

  

동계(東階) 서계(西階)와 신로(神路)

 

참도를 따라 정자각에 온 선왕의 혼령과 임금은

동입서출의 원칙에 따라 동쪽 계단으로 정자각에 오른다.

 

 

사진: 헌릉 정자각 동계(東階)

왼쪽 난간이 있는 계단으로 선왕의 혼령이 오르고, 제사 지내는 임금은

오른 쪽 난간 없는 계단으로 오르는 데 오른 발을 먼저 딛는다. (先右足)

 

 

 

사진: 헌릉 정자각 서계(西階)

제사를 마치면 축관(祝官)이 축문(祝文)을 태우러 서쪽 계단으로 내려가는 데

왼 발을 먼저 내 딛는다. (先左足). 서계(西階)에는 혼령을 위한 계단은 없다.

왜냐하면 제사를 받은 혼령은 정자각 뒤 신로(神路)를 통하여

능상(陵上-민간의 봉분)으로 바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헌릉 정자각에서 본 신로(神路)와 능상.  사진 아래 가운데로 신로가 살짝 보인다.

제사를 받고 난 혼령은 이 신로를 따라 능상으로 돌아가니 서계로 내려 갈 일이 없다.

 

 

소전대(燒錢臺)

 

 

 

정자각 뒤편이다. 중앙이 신로(神路)고 그 위가 신도비각이다.

오른 쪽 아래 바위가 소전대(燒錢臺)로 제사를 마친 뒤 축문을 태우던 곳이다.

조선 후기에는 구덩이를 파서 태우는 (*)예감(예坎)으로 바뀌니

헌릉 옆 순조대왕의 인릉에는 소전대 대신 예감이 있다.

(*)예감 : 예가 한자 지원이 되지 않는데 묻을 예고, 坎은 구덩이 감이다.

 

 

 

  

신도비(神道碑)

 

신도(神道)는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다.

신도비(神道碑)는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고위 관직을 지낸 인물에 한하여 세웠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시작되었으나 남은 비(碑)는 없고 다만 문집 등에

비문(碑文)이 전할 뿐으로 3품 이상 관직자 무덤에 세운 것 같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2품 이상에 세우는 것으로 제도화하였다.

 

문종대왕이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는 것을  금지하여 그 이후 왕릉에는 없다.

그러나 이름은 신도비(神道碑)가 아니지만 비(碑)는 계속 세웠으니

우리 보기는 그것이 그것이다. 뭘 개혁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또 왕릉에만 세우지 않을 뿐 민간에서는 계속 신도비를 세워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요즈음이야  돈 주면 아무나 세우지만 옛날엔 석물 함부로 못 세우고 특히 신도비는

공신이나 석학으로 추앙 받을 정도가 되어야 세울수 있었다.

 

신도비각(神道碑閣)의 위치는 홍살문에서 보았을 때

정자각 오른 쪽 비껴 뒤편이 일반적이다.

 

 

 

사진 : 헌릉 능상에서 본 정자각과 신도비각

중앙 정자각 뒤로 혼령이 능상으로 올라오는 묘로(墓路)즉 신도(神道)가 벋어 있고,

신도를 왼쪽에서 (홍살문에서 보면 오른 쪽) 바라보며 신도비각이 있다.

 

태종의 신도비는 2개가 있다.

 

 

 한번에 찍으려니 각도가 나오지 않아 2개 따로 찍어 합성했더니 위와 같다.

왼쪽 비가 처음 세운 것이고, 임란(壬亂)때 훼손되어 숙종 때 다시 세운 것이 오른 쪽이다.

 

 

사진: 구비(舊碑)의 귀부(龜趺)

기교적으로는 신비(新碑) 쪽이 난렵하나 웅혼한 힘은 구비(舊碑)를 못 당하는 것 같다.

구비(舊碑) 거북이등 무늬 마다 임금 왕()짜가 있다고 하는 데 미처  그 생각을  못하고 찍었더니

위와 같이 분명치 않다. 거북이 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은 아마도 임란 때 왜군(倭軍)들 소행인 듯.

 

 

능원(陵原)

 

 

 

사진 : 헌릉 상설도(獻陵 象設圖) 중 능원부분

 

능원(陵原)은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민간의 봉분(封墳)격인 능상(陵上), 능상 앞에 놓인 혼유석(魂遊石),

능상을 아래가 터진 디귿자 모양으로  둘러 싼 담-곡장(曲墻)이 있는 초계(初階)

문인석(文人石)이 좌우에 있고 중앙에 장명등이 있는 중계(中階),

무인석(武人石)이 역시 좌우에 있는 하계(下階)다.

 

 

 

왕과 왕비의 합장(合葬)

 

조선 왕릉에서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실 때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왕과 왕비를 능상 하나에 같이 모시는 합장릉(合葬陵)

두 능상을 나란히 만드는 쌍릉(雙陵)

같은 구역이나 언덕을 달리해 쓰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물론 합장하지 않고 각각 따로 쓴 단릉(單陵)도 있다.

 

 

 

 

 

 

사진 : 헌릉(獻陵)은 위와 같이 나란히 쓴 쌍릉(雙陵)이고, 헌릉 옆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仁陵)은 능상 하나에 같이 묻힌 합장릉(合葬陵)이다.

(사진 보는 쪽에서) 왼쪽이 태종대왕이고 오른 쪽이 원경왕후 민씨다.

왕릉 뿐 아니라 민간에서 합장 할 때도 항상 남자를 오른 편(보는 쪽에서 왼편)

아내를 왼편 (보는 쪽 오른 편)에 묻으니 자세한 것은 필자의 다른 글

'사후(死後)엔 좌우가 바뀐다 ! '를 참고하라.

 

 

 

능상(陵上)

 

 

사진은 쌍릉(雙陵)중 오른 쪽 (사진에서 볼 때 왼편) 태종대왕의 능상이다.

병풍석(屛風石)이 둘러졌고 그  바깥으로 난간석(欄干石)이 에워싸고 있다.

 

 

병풍석(屛風石)

 

 

열 두 방위를 따른 12면에 12 지신(支神)을 새겨 놓았다.

고미술사를 잘 모르는 필자가 보기에도 최근 복원한 광통교의 신장석과 수법이 닮았다.

 

 

사진: 광통교 신장석. 태조 대왕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를 싫어 한 태종이

강비의 능-정릉의 석물을 가져다 광통교에 썼다니 헌릉의 병풍석과 시대가 같다.

 

이 병풍석은 세조대왕의 유조(遺詔)로  얼마간 쓰지 않다가 곧 되살아 난다.

묘제(墓制)는 인간의 습관 중 가장 완고한 부분이니 단번에 혁파하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가면 완전히 없어져 옆 순조대왕 인릉(仁陵)에는 병풍석이 없다.

 

 

난간석(欄干石)

 

 

능상(陵上) 바깥을 난간석으로 둘렀는데 태종과 원경왕후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다.

이불은 따로 덮더라도 방은 같은 쓰는 셈일까?

 

 

혼유석(魂遊石)

 

 

태종과 원경왕후 앞에 혼유석이 각각 하나씩 있다. 사진은 원경왕후 앞 혼유석이다

보통 상석(床石)이라고 하는데 왕릉에서 제사는 정자각에서 지내니 민간의 산소처럼

제수를 올리는 용도가 아니다. 혼유석(魂遊石)은 혼령이 나와서 쉬라고 만든 돌이다.

 

 

혼유석 밑에 달린 다리를 고석(鼓石)이라고 한다.

상 하나에 다섯 개 또는 네 개가 있는데 헌릉의 혼유석은 고석이 다섯 개다.

고석(鼓石)에는 보통 귀면(鬼面)을 조각했으니 벽사(僻邪)의 의미다.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능상 바깥 곡장 안쪽으로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빙 둘러가며 서 있다.

다른 능에는 호랑이 2쌍, 양 2쌍을 세우나  헌릉은 그 갑절 4쌍씩  8쌍 16마리를 세워 놓았다.

 

 

석호(石虎) 왕릉을 지키고,

 

 

석양(石羊) 사악함을 물리치고 대왕과 왕비의 명복을 빈다.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모두 바깥 쪽을 보고 있다.

 

 이상이 능원(陵原)의 제일 위 부분 초계(初階)로 앞을 틔운 채

나머지 삼면을 곡장(曲墻)이 둘러 싸고 있다.

 

 

장명등(長明燈)

 

 

 

산소나 절에서 장명등은 돌아가신 이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함으로

왕릉도 마찬가지니 혼유석(魂遊石) 앞에 세운다. 사진은 태종대왕

앞에 있는 장명등이나 원경왕후 혼유석 앞에도 또 하나 있다.

 

 

문인석(文人石)

 

 

왕릉에는 장명등을 사이에 두고 좌우 양쪽으로 문인석(文人石)을 세우는데

헌릉에는 2쌍 씩 모두 4개가 있다. (옆 인릉에는 1쌍 2개다) 문인석 뒤에는

석마(石馬)각각 하나씩 서 있다.

 

 

무인석(武人石)

 

 

 

이 사진은 지난 2월에 찍어 다른 것과 계절이 맞지 않는다.

문인석과 나란히 그러나 한단 아래 하계(下階)에 무인석이 있다.

헌릉의 무인석 숫자도 좌우 2쌍 씩 모두 넷이다.

뒤에는 문인석과 마찬가지로 석마(石馬)가 한 필씩 딸려 있다.

 

 

헌릉(獻陵)의 산세

 

“지금 헌릉(獻陵)의 산수(山水) 형세는 회룡고조(回龍顧祖)로서

진실로 대지(大地)이오나…”  세종 3년 (1421) 1월 5일 실록기사

 

회룡고조(回龍顧祖)란 용(龍)이 돌아 할애비를 다시 보듯, 본산에서 벋은 줄기가

빙 돌아 본산을 마주 본다는 것으로 풍수설에서 아주 좋아하는 형세(形勢)다.

 

 

 

 

 

 

사진: 구글로 본 헌릉의 산세-회룡고조(回龍顧祖)

 

그러나 아무리 산세가 회룡고조(回龍顧祖)라도 임란(壬亂) 때 파헤쳐 지는 것을 면치 못했다.

헌릉은 병자호란 때도 등장하니 1636년 12월 21일 충청도 원병이

헌릉(獻陵)에 도착하여 화전(火箭)으로 (남한산성과) 서로 응하였다는

기사가 실록에 나온다.

 

또한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에 세 길로 나뉘어 몰려 올 때

중앙은 송파진을 (지금 잠실 석촌호) 통하고, 동쪽은 광나루를 건너고

서쪽으로는 헌릉을 지나왔다. 이 때 헌릉에 큰 불이 났다는 기사가

실록에 있으니 아마도 청나라 군대가 지른 것이 아닐까 한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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