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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본격적인 여름입니다.
아니, 여름이 한창이죠. 하지만 곳 선선해질 겁니다. 가을이 멀지 않았으니까요.
자, 사설은 이만 접고요. 책 추천에 들어가겠습니다.
도서명: 유령해마
저자: 문목하
* 이 소설은 아이프리 도서관 9번 문학에 4번 일반소설 부분에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 소개글 서평
지난번 고전 이후 읽을 작품을 찾지 못했다. 책은 많은데, 내 필을 확 당기는 작품이 없었다. 활자 중독증 같은 건 아니지만 뭔가 읽고 싶다는 욕구에 갈증이 났다. 이런 걸 읽기 중독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닥치는 대로 읽는 것도 아니니까, 재미있게 읽기 중독인가? 어쨌든 무료함에 슬슬 지쳐갈 때쯤 우연히 들게 된 게 이 작품 ‘유령해마’였다. 제목에 끌린 것도 아니요, 소개글을 훑기는 했지만 별반 기대는 하지 않았던 책이었다. 그냥 이거 아니면 또 다른 작품 물색해야겠네, 모르겠다, 이거라도 읽어볼까, 이런 심정으로 다운받아 펼친 전자도서 파일이었다. 그리고 감상문 쓰는 거 보면 알겠지만 끝까지 완독했다.
특이점을 넘어선 범용 인공지능 ‘해마’ 이야기.
“그들을 둘러싼 희비극과 지난한 이야기는 내게 모두 동일한 무게를 지녔고, 너를 스쳐가는 한 명 한 명의 삶은 결코 너보다 특별하게 행복하거나 불행하지 않았다. 비극은 흔하다. 흔하기때문에 비극인 것이다.”
‘해마’라고 하니까 바다에 사는 플랑크톤의 일종인 ‘해마(sea horse)’를 떠올릴 수 있겠다. 혹은 뇌에서 학습, 기억, 새로운 것을 인식하고 감정적 행동을 조절하는 부위인 ‘해마’를 연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글 속의 해마는 뇌의 기관도 아니고, 바다에 사는 해마는 정답과는 더더욱 멀어지는 답이다. 소설의 설명에 의하면 ‘해마’는 서로 다른 알고리즘을 가진 여러 개의 인공지능을 한데 담을 수 있는 그릇이자, 사람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대로 자극과 정보를 기억하고 추론하는 범용 인공지능이다. 사실 아직도 이게 무슨 소리인지 헷갈린다. 인공지능 아니고 그릇이라면서, 문장 끝에 가서는 ‘범용’이라는 단어와 함께 결국은 인공지능으로 귀결된다. 아니라는 거야, 맞다는 거야, 판단이 영 애매하다. 하지만 해마가 사람에게 편리하다는 건 틀림없는 것 같다. 인간의 손이 닿기 힘든 모든 일을 몸체를 바꿔가며 처리하고, 사람들의 모든 질문에 답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격을 갖고 있고, 다른 설비와 융화될 수도 있는, 사람처럼 학습하며, 특유의 감각도 있는, 4천만 명 정도의 삶을 지켜보는, 혹은 함께할 수밖에 없는 인공지능이다. 단지 해마는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주인공 해마 ‘비파’도 예외는 되지 못한다.
그런 어느 날, 비파는 구조대원 업무 중 건물 매몰 현장에서 ‘이미정’이라는 7살짜리 아이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 비파는 아이를 보고서도 사람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주민등록도 되어 있지 않았고 이름도 없었던 탓이다.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름마저 부를 명칭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의미의 ‘미정’이 굳어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비파는 그 아이를 버리고 오지만 미정은 해마의 뒤를 쫓아옴으로써 건물의 잔해에서 자가 탈출한다. 미정은 보육 시설에서 생활하며 불투명한 미래를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바꾸기 위해 준비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질 길 없는 현실을 버티며, 만인에게 공평한 시늉을 하면서도 그녀에게만은 불공평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힘겨운 삶을 꾸려나간다. 그렇지만 독특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는 미정과의 만남은 비파에게 별반 큰일은 아니었다. 미정의 모든 삶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다른 4천만명의 인생 또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마 비파가 미정을 주시한 건, 그녀가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뿐이었다.
“나는 좀 더 잘할 수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이 수정된 미래에 일했더라면. 나는 분명 완벽하게 일했는데, 어째서 그게 완벽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온갖 직종에서 활동을 하며 평범한 나날을 보내던 중 비파는 해마에게 목숨보다 소중하다고 비유되는 임무를 맡게된다. 해마의 현실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중앙’에서 가상세계 실험에 참가하는 인간들의 의식체를 쫓아내라는 것. 비파는 그 임무가 인간을 다치게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걸 알아채고 자신에게 불가능한 임무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해마는 사람을 그 어떤 식으로든 해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패할 것을 알고 해마를 시험하는 함정 임무인 셈이다. 그럼에도 비파는 해결하기 위한 사고를 멈출 수 없다. 해마는 외부에서 받은 질문에 답을 내야만 하는 알고리즘을 지녔기 때문이다. 거의 본능이다. 시간이 지나 인공위성 업무를 맡게 된 비파는 사고로 조난을 당해 우주를 떠돌게 되고,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끼며 미정의 삶을 되새기며 지켜보게 된다.
“난 이미정 기자라고 하는데, 넌 이름이 뭐니?”
한편 기자로 일하는 이미정은 자신과 함께 살던 고아 소녀 양세진 및 젊은이들의 돌연사와 얽힌 일로 거대 회사와 법정 투쟁을 진행 중이었다. 그 와중 해마 비파는 개명해서 이은하가 된 미정에게 뜻밖에도 자신이 중앙에서 받은 해결할 수 없는 임무의 해답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우여곡절의 사건 사고 끝에 해결할 수 없는 임무에 시달리는 해마(비파)와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짊어진 인간(이은하)이 만난다. 과연, 둘은 각자의 임무를 해낼 수 있을까?
유령해마, 반짝이는 회색을 닮은 소설
“네가 두렵다는 이유로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 역시 나는 알았다. 너는 늘 두려워하면서도 그 다음 걸음을 떼기 위해 버티고 서 있었으니까. 나는 항상 네가 고요한 비명을 지르며 삶을 뚫고 내달리는 걸 지켜봐왔다.”
이 소설은 분명 SF 장르이다. 무인 자동차, 각종 로봇, 그리고 인공지능의 결정체 해마까지 온갖 공상 과학을 현실로 끌어와 일상생활의 영역에 안착시켰다. 그런데도 기계적인 인상보다 감성적인 느낌이 든다. 대개 SF 소설은 내게 회색빛 느낌을 준다. 딱딱한 금속성의 회색. 하지만 이 ‘유령해마’에서는 다른 회색, 은빛이 섞인 찬란한 회색을 보았다. 그건 어쩌면 주인공 비파가 자신의 이야기 외에 다른 타인의 이야기, 이은하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주인공 비파는 자기 이야기 대신 또 다른 주인공 인간을 ‘너’로 부르며 그녀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1인칭임과 동시에 2인칭 전개인 셈인데, ‘너를 보는 나’의 형식이 묘하게 낭만적이다. 내가 너를 바라봄으로써 저장된 데이터를 서술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너를 애호한다는 선언이나 다름없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화자 비파가 그런 감정에 자각이 없기는 해도, 그럴 때조차 변화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애초에 해마들의 이명마저 상당히 감성적이다. 주인공 비파부터 시작해 비올라, 나각, 소고, 오보에까지 전부 다 악기 이름이다. 물론 ‘247.30헤르츠’, 비파의 본명처럼 원래의 명칭이 있을 테지만 주로 이명을 부르는 모양이다. 뭔가 묘하게 감성이 잠재된 듯한 뉘앙스랄까?
또 기계는 기계다 싶을 정도로 이성적인 비파와,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님에도 속마음을 다 알 수 있는 감정적인 이은하와의 대화도 읽는 맛을 더한다. 하지만 전개 방식 외에 소재 부분은 그리 신선하지 않았다. AI에 관한 이야기는 대체로 AI에게서 인간성이 발현되는 모습을 그리고, SF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혹은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한 번쯤은 이 작품과 비슷한 설정을 가진 AI를 이미 만나본 바 있을 테니 말이다. 나도 예전에 읽은 구병모의 ‘한 스푼의 시간’을 통해 로봇 은결을 접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술 방식 덕분인지, 이 낭만적인 SF는 내게 새로움을 주었다. 또 인공지능 Ai가 ‘착각’에 빠지는 대목도 꽤나 흥미로웠다. 그렇다. 인터넷 백과사전보다 아는 게 더 많은, 방대한 정보 생명체인 인공지능이,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모든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어떤 착각을 한다. 그것은 해마가 가진 특성 ‘백업’과 얽힌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그 부분에서 비파의 ‘인간다움’은 절정을 찍은 것 같다. 자신만이 주채적이고, 자신을 중심에 두고 하는 사고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착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은하에게 가, 비파. 가서 증인이 돼.”
“가서 쉬어. 비파.”
나중에 작품의 끝에 이르러서는 비파와 백업의 관계가 임무의 해결을 위해 계속 달려가는 데 제법 큰 역할을 한다. 자세한 건 더 이상 적지 않겠다. 사실 이미 스포일러가 상당한 편이니까. 힌트는 위의 저 두 대사로 가름한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마냥 좋은 점만 있지는 않았다. 우선 전개를 위한 주요 사건이 앞에 후루룩 나와버리기 때문에 중반부 가서는 흥미가 떨어지는 감이 없지 않다. 나중에 의문점이 풀리기는 하지만, 왜 비파가 이런 행동을 하나 싶은 대목도 가끔 나와서 헷갈릴 때도 있다. 그러나 몇몇의 단점으로 이 작품을 권하지 않기에는 현실적인 한편 감성적인 SF의 전개 방식이 꽤나 매력적이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질문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의 이야기
“확신을 줄 수는 없어. 아무도 그럴 수 없겠지. 이걸 누가 알겠어? 해마가 얼마나 많은 것을 분별없이 보았는지는 해마만 알고, 그중 어느 것이 선을 넘은 행위인지는 사람만 알아. 아무도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누가 답을 할 수 있겠어?”
이 작품에서 인상에 남은 대사 가운데 하나가 위의 문장이다.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쳐 비파와 은하, 그 외에 기타 인원은 팀을 맺고 소송을 준비하게 된다. 그것을 간단히 요약하면 ‘개인정보보호법과 사생활 침해’에 얽힌 쟁점이다. 물론 호의를 기반한 협력 관계는 아니었다. 해마 비파는 증인으로 법정에 서기로 하고 이은하의 소송에 적극 협력한다. 한편 이은하는 비파의 임무, ‘중앙’에서 인간들의 의식을 쫓아내는 일에 최선의 도움을 준다. 그것이 둘의 거래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미션은 술술 풀리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실패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해결에 다다랐다는 뉘앙스도 없다. 법정 공방은 1심에서 패해 2심까지 갔고, 해마들은 부분적으로 승소할 수는 있어도 그들이 바라는 승소를 이루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점친다. 비파의 임무 역시 ‘답’을 얻는 과정이 만만하지 않았다. 결국 비파는 이 소설의 제목과 같은 존재, ‘중앙’에 귀환하지 않고 행성 세계에서 거주하는 일명 ‘유령해마’가 되었으니까. SF가 끼면 뭔가 초월적이고 스마트하게 문제를 척척 해결하고, 결국에는 해피앤딩이 될 것 같은데, 이 작품은 AI에게 감성이 부과되는 과정을 그린 것답지 않게 극히 현실적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감정적으로 발버둥을 치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안 될 것을 알고서라도, 될 확률보다 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걸 알면서도,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그랬다. 그리고 자신을 증거하는 물음에 그들은 해낼 거라고 말하는 해마가 또 그랬다.
“두려움이 네 삶에 전부는 아니었고 마찬가지로 네 두려움은 네 삶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두려웠음에도, 여전히 두려움에도 너는 다시 용기를 낼 것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용기를 낼 기회를 만들어주는 무대에 불과하단 걸 알기 때문에. 설령 원하는 만큼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세상이 답하지 않더라도, 너 자신이 달라지리라는 걸 너는 알기 때문에.”
소설 속의 이은하와 내 직업은 동일하다. 비록 부업 비슷하고 분야도 다르지만 어쨌든 같다. 때문에 나도 해마와 같은 질문을 던진 적 있고, 그녀와 같은 선택을 하며 자신을 다독인 적이 있다. 내가 쓰는 글에, 내가 던지는 질문에, 내 외침에, 과연 누군가는, 이 세상은 답할 것인가?
그리고 그 물음에 세상은 여태껏 답을 주지 않았다. 답을 주더라도 미봉책이거나 완벽하다 할 수 없었으며 어설펐다. 어디까지나 요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이제 다달이 기사 의뢰를 받아 인터뷰를 하고, 마감에 맞춰 원고를 쓰고 기사로 나온 걸 보면서도, 예전처럼 이걸로 뭔가 바뀌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갖지 않는다. 뜻 있는 누군가가 이 복지 기업에 관심을 갖을 거라는, 혹은 이와 같은 프로그램이 증가할 거라는, 또는 그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생길지 모른다는, 그런 낭만적인 공상은 안 한다. 그저 이번에도 한 건 넘겼구나, 이런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네 하는 만족감으로 자위할 뿐이다. 옛날에는 어떤 분야의 기자든 ‘기자 = 저널리스트’라는 공식이 있었다지만 요즘은 ‘기레기’로까지 그 직위가 하락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저 최소한 불행을 재생산하지 않는다는 점에만 주목한다. 적어도 당사자에 대한 격려는 되지 않는가.
그래도 가끔은 이 짓을 왜 하나 싶을 때가 있다. 미담을 소개하며 사회적 약자의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줄기차게 써 넣는 일. 막말로 누가 본다고? 뭐 얼마나 본다고? 구독하는 계층은 한정적이고, 맨날 바뀔까 말까, 줄타기를 하다가, 별로 변하는 것도 없이 재자리만 맴도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이은하의 말마따나 질문을,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메아리조차 없을지라도, 단 한 명은 응답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다. 어쩌면 답이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있는 곳에 그 답이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걸 수도 있으니까. 사실 답이 없더라도, 그 일로 인해 내가 변할 거라는 대사에는 의문이지만, 중요한 건 계속 나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아직 인지하지 못한 물음이 있을 테니까.
대중적이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았기에, 제기되지 않은 질문도 있을 것이다. 혹은 너무 멀리 쏘아올린 바람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돌아오는 게 오래 걸리는 물음, 너무 오래 걸려서 깜빡 잊어버린 질문도 있을 거다. 중요한 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은하의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초음파를 보낸다고 들은 적 있다. 그리고 그 음파가 지구로 돌아오기까지는 몇 년, 혹은 몇 십년이 걸린다고. 나도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단지 세상이 내 초음파를 수신하고 반향음을 내는 게 늦을 뿐이라고. 끝으로 이 SF 소설에서 가장 기계적인 해마가 독백한 가장 감성적인 문장으로 감상문을 마무리하겠다.
“정말로 중요한 건 네가 너를 숙제로 삼았다는 것, 숙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다시 펜을 쥐기로 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