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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꼬지 행사 후기를 쓰는 친구들에게 참고자료로 사용하도록 여기에 자료를 올려 놓습니다.
제12기 WYK 모꼬지 행사 (하남시계에서부터 광나루한강공원까지)
오덕만(위례역사문화연구회장)
한강을 걷는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가래여울 마을이다.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상일동역에서 하차하여 3번 출구 앞에서 가래여울 마을로 가는 02번 마을버스를 타고 가래여울 마을에 왔다. 오는 도중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개발이 한창임을 알 수 있었는데 이곳 강일동의 너른 벌판은 벌말이라 불리던 곳으로 청송 심씨의 집성촌이 있었던 곳이라 하나 모두가 아파트 단지로 변해 버렸다. 조금 지나니 비닐하우스들이 넓게 펼쳐져 있고 올림픽대로 지하차도를 지나자 한적한 남평 문씨의 집성촌이라는 강마을이 나타났다.
서울의 도심 속에서 이런 한적한 강마을을 본다는 것도 새삼스럽다. 이곳은 행정구역상 서울특별시 강동구 강일동에 속해 있는데, 예전에는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일부였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971년부터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왔기에 주변 경관이 크게 변하지 않고 지금까지 옛 모습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상수원보호구역, 군사시설보호구역 등으로 묶여 마을의 변화는 크지 않았고 주민 30여 가구 중에 4~5집은 매운탕 식당을 운영하고 나머지는 농사를 짓고 살고 있다고 한다.
가래여울이라는 마을의 이름은 한강 여울가에 있는 마을로, 가래여울이 있었으므로 가래여울 또는 가려울이라고 부르고, 한자명으로 추탄(楸灘)이라 하였다. 인조때 영의정 오윤겸이 이곳에 살면서 그 호를 추탄이라 하였다. 또 가래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가래여울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이곳에서 한강의 서울`하남시 시계까지는 팔당 쪽으로 약 800m정도 더 내려가 하남시 선동마을 앞에 있는 선동IC까지 가야한다.
선동은 광주수리조합 용수간선의 끝에 위치한 마을로서 예전에는 동부면 둔지리였다. 둔지섬은 당정섬과 미사동이 이어져 큰 섬을 이룰 때 하류지역의 마을이었다. 1925년 이전에는 아주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를 입고 당정섬과 미사동 사람들이 둔지섬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면서 마을 이름을 배 ‘선(船)'자를 따서 선리(船里)라 하였다. 담양 전씨(潭陽田氏)의 집성촌이다. 둔지 둔지섬은 선사시대부터 주거지로서는 최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섬이 퇴적토이기 때문에 토심이 깊고 부식토라 농사도 잘 되었다. 또 강이 있어 고기잡이하기에도 좋은 조건을 갖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한강을 오르내리는 배가 정박하기에 좋아서 광주관아로 운반되는 군량미 등을 이곳에 하역하여 다시 육로로 운반하였다. 이렇듯 포구역할을 하던 이곳에 자연히 장사꾼이 모이고 장이 서게 되었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라 모일 ‘둔(屯)'자를 써서 둔지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72년 홍수에 의해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 강 건너편으로는 미음나루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산2-2에 해당하며 이곳에 수석리토성(水石里土城)이 존재하는데 1986년 9월 7일 경기도기념물 제94호로 지정되었다. 이 토성은 한강을 건너는 나루를 지키기에 알맞도록 ‘토미재’라고 불리는 한강 북쪽 산봉우리 위에 만들어진 백제시대의 유적이다. 해발 83m 정도의 구릉 위에 타원형을 이룬 작은 규모의 토루는 둘레가 145m나 되어 우리나라 초기에 쌓여진 성지들과 일반적인 형태가 같다. 이곳에 서면 서쪽으로 아차산, 남쪽으로 이성산과 남한산, 동쪽으로 천마산, 북쪽으로 수락산이, 그리고 마을 앞의 미음 나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러한 지세는 이곳이 한강을 중심으로 한 전략적 요충 지대임을 알게 한다. 전체 둘레는 140.5m이고, 직경이 남북으로 37.52m, 동서로 49.3m의 반월형의 토성이다. 성벽은 백제의 성터에서 흔히 보는 판축방법으로 이루어진 듯한데, 흙을 다져 쌓은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 높은 곳을 깎아 다져 만들었으며 높이는 4∼5m이다. 성안에는 동서 13.5m, 남북 5.7m, 높이 4.8m의 높은 터가 만들어져 있는데 가운데 부분이 약간 우묵하고 불에 탄 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봉화를 올렸던 자리로 짐작된다. 성 안의 깎인 곳이나 팬 곳에서 발견된 회청색 경질토기 조각들은 삼국시대 토기 조각으로서 성을 쌓은 시기를 알려 주는 자료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한강변 구릉지대에는 비슷한 양식의 성터가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미사리 선사시대 유적지와 몽촌토성 등 백제 초기의 중심적 취락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선사시대부터 한강유역에 사람들이 집단 거주한 흔적이 있으며 한강은 삼국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백제가 한강유역을 빼앗긴 다음에는 고구려와 신라에서도 관측과 연락을 위한 봉수터로 사용했을 듯하나, 신라의 통일 이후에는 폐기되어 오늘에 이른듯하다. 지정학적인 위치에서 볼 때, 수석리 토성은 삼국시대에 한강을 중심으로 한 군사적인 요충지였다가 조선시대에는 봉화를 올리는 통신 기능을 지녔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 수석리토성 옆에는 태종조의 명신이었던 조말생(趙末生) 선생의 묘소가 자리를 잡고 있다. 조말생(趙末生, 1370-1447)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서운관정(書雲觀正)의 벼슬을 했던 조의(趙誼)의 아들이다. 조말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학문을 힘써서, 1401년(태종 1) 중시문과에 장원급제에 뽑혀서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정랑으로 영전하였다. 1403년(태종 3)에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8년(태종 18) 이조참판을 제수받고 이어 8월에는 형조판서를 제수 받았다가 곧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군정에 관한 시종을 맡아 태종의 총애가 더욱 융숭해졌다.
1419년(세종 1) 6월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후, 조말생은 병조판서로서 세종의 지시를 받아 ‘대마도는 조선 땅이며 경상도의 계림에 속한다’는 서찰을 대마도주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1426년(세종 8) 장죄에 연좌되어 외직으로 좌천되었다가 1432년(세종 14) 동지중추원사에 임명되고, 1437년(세종 19) 예문관대제학을 지내고, 1439년(세종 21) 궤장을 받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임술년 숭록대부에 승차 되었다가, 이 해에 세상을 떠나니 이때가 78세이다. 조말생는 죽어 금곡에 안장되었으나 그곳에 고종황제의 능이 들어서면서 수석동 산2-1번지로 이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조말생 묘비는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고산대로 길(석실서원지) 수석리 입구에 있는 문화재안내 표지에는 ‘조말생 신도비’로 되어 있다.
수석리마을은 그 뒤로 청음 김상헌 선생(1570~1652)과 관련되어져 석실서원이 세워졌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곳이 되었다.
광해군 시대에 은거해 있던 안동 김씨들은 인조반정(1623) 이후 권력에 진입한다. 그리고 안동 김씨 가문의 철학과 신념을 보여준 것이 병자호란(1636)이다. 청음 김상헌의 9살 많은 큰 형인 선원 김상용(1561~1637)은 강화를 지키다 성이 함락되자 다른 이들은 도망가도 폭약 위에 앉아 불을 당겼다. 어쩌면 봉림대군(나중에 효종 임금, 1619~1659, 재위 1649~1659)은 직접 보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청음 김상헌은 인조를 뒤따라 남한산성으로 갔다(1636년 12월). 끝까지 항복이 아닌 항전을 주장했다.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찢기도 하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 않았다. 임금은 삼전도에서 청의 태종에게 항복했다.(1637년 1월) 청은 명을 치기 위한 조선군대의 파병을 요구했다.(1639년) 끝까지 반대하던 김상헌은 당시 청의 서울이었던 선양으로 잡혀간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6년간의 인질생활을 마치고 돌아 온 김상헌은 한양이 아닌 석실에서 살았다.(1645~1652) 스스로의 호를 석실산인이라 붙였다. 석실에 자리 잡은 이유는 한양과 가까우며 수운을 통해 물자를 조달할 수 있었고, 경치가 좋다는 점 등 이다. 김상헌이 죽은 후 큰형인 김상용까지 함께 제사하는 석실사(石室祠)를 세운다. 2년 후(1656, 효종 7년), 사당은 석실서원이 된다. 조선 후기의 권력은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져 간다. 그 중심에 안동김씨가 있다. 그러니 석실서원도 현종임금의 사액서원이 된다.(1663)
신안동김씨의 세거지가 셋 있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와 한양의 장의동(현재 종로구 청운동), 그리고 양주의 석실(현재 남양주시 수석동)이다. 안동은 육신의 고향이고, 장의동은 권력의 중심일 때의 장소이다. 석실은 권력에서 잠시 물러나 새로운 힘을 기르고 그들의 정신을 이어가는 장소이다.
석실서원은 숙종시대(재위 1674~1720)에 전성기를 맞는다. 김상헌의 손자인 김수항(金壽恒, 1629~1689)에겐 가운데 이름이 昌자를 쓰는 여섯 아들이 있었다. 이름 하여 육창(六昌)이라 한다. 그의 아들 둘은 권력의 길로 나갔지만 둘은 학문과 교육의 길로 나갔다. 三洲 金昌協(1651~1708)과 三淵 金昌翕(1653~1722)이 석실서원을 이끌었다. 김창흡의 영향을 받은 眞景山水의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은 <경교명승첩>에서 '석실서원'과 '삼주삼산각'을 통해 옛 모습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경종 때 위축되었던 석실서원이 영조 때(재위 1725~1776) 다시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 중심인물은 김창협의 손자인 金元行(1702~1772)이다. 김원행의 제자 가운데 담헌 홍대용(1731~1781)이 있다. 12살에 김원행의 문하에 들어 온 홍대용은 10년 간 공부한 후 그의 문하를 떠난다. 홍대용의 학문 목표인 실심실학(實心實學)은 북학(北學)으로, 나아가 실학으로 이어진다.
김창집의 후손인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딸이 순조의 왕비가 되면서, 안동김씨의 60년 세도정치를 엽니다. 김좌근은 세 번의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권력의 절정에 이른다. 석실서원도 김상용, 김상헌, 김수항,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원행, 김이안, 김조순이 배향된다. 안동김문의 가묘(家廟)가 되어버린다.
석실서원 터에서 한강의 상류쪽을 바라본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두 물에서 만나 하나의 강이 되어 흐른다. 곧게 흐르던 한강은 오른쪽으로 휘어진다. 석실이 있는 곳은 하천 공격사면의 침식에도 남은 가파른 산지이다. 건너편 미사리는 하천 물의 흐름이 느려지면서 모래와 자갈이 퇴적된 평탄한 지형이다. 미사리의 퇴적이 상류의 물 흐름을 막아 유속이 느리고 하폭은 넓어진다. 사람들은 이 지역의 한강을 미호(渼湖)라고 불렀습니다. 물이 돌아가는 호수같이 넓은 곳이라는 뜻이다.
하남시의 미사동은 아름다운 물결과 모래로 이뤄진 섬이라 해서 미사리(渼沙里)라 하는데, 예전에는 당정섬과 둔지섬까지도 연결되었던 큰 섬의 중심부였다고 한다. 을축년(1925) 홍수로 인해 지형이 바뀌어 각각 섬으로 되었다고 하는데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 마을은 퇴적토로 이루어졌으며, 선사시대 유적지가 있으며,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위한 조정경기장이 건설되었고, 인근에 카페촌이 형성되어 서울 근교의 명소로 알려지게 되었다. 경주 최씨의 집성촌이다.
김원행이 호를 미호라 했다. 1747년 봄 김원행은 석실에서 여주까지 배를 타고 여행했나 보다. 당연히 시 한 수 남겼는데
朝發石室祠 아침에 석실사(石室祠)를 출발하여
登舟自玆始 미호에서 배에 올랐네
江山旣淸曠 강산은 맑고 시원하며
雲日况晴美 구름 낀 날씨지만 청명하고 아름다워라
桃花依絶岸 복숭아꽃은 가파른 언덕에 있고
老屋多臨水 오래된 집들은 물가에 닿았네
中流散雲帆 강물 속 안개를 헤치며 저어가자
風濤浩未已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 그치지 않네
三峰出天畔 산봉우리는 하늘로 솟았고
秀色每相値 빼어난 경치를 매번 만나네
持杯屢相屬 술잔 잡고 서로 몇 차례씩 권하자
歌詠亦互起 노랫소리가 함께 일어나네
樂哉滄洲趣 즐겁구나 강호의 정취여
吾道信在此. 나의 길은 참으로 여기에 있네. 1) 김원행, 『渼湖集』권1 詩, 「自渼湖發船 向驪州」.
1863년 고종이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안동김씨의 권력은 서리를 맞는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서원철폐령을 내린다.(1869) 안동김씨에게 많은 모멸을 받았던 흥선대원군이 석실서원을 살려둘 리 없었다. 서원은 허물어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1900년. 고종임금은 금곡의 양주 조씨 일가의 무덤을 자기가 죽은 후 묻힐 곳으로 정한다. 현재 고종과 명성황후가 묻혀있는 홍릉(洪陵)이다. 양주조씨일가의 무덤 이장 지역을 석실서원 자리로 내준다. 한강변에 서 있는 두 그루의 고목만이 석실서원의 전성기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하남시 선동 한강둔치에 만들어놓은 선동축구장에서 가볍게 몸 풀기 스트레칭을 하고 위례청소년지킴이의 티셔츠로 옷을 갈아입은 뒤 드디어 광나루 한강공원까지 약 7km의 걷기대회를 시작하였다. 하남시계에서 가래여울마을까지 870m, 가래여울에서 강동대교까지 430m, 강동대교에서 고덕수변생태복원지까지 930m의 길을 걸으니 불과 2.3km 정도 걸었을 뿐인데 온 몸에 땀이 범벅이다. 강동대교 밑을 지나면서 강 건너편으로는 왕숙천의 합수부가 보인다. 왕숙천은 한강의 제1지류로 길이는 38.5㎞이다. 포천군 내촌면 신팔리 수원산 동쪽 계곡에서 발원해 남남서쪽으로 흘러 남양주시 진접읍을 지나, 진건면과 퇴계원면의 경계를 따라 흐른다. 남양주시와 구리시의 경계를 이루면서 계속 남류하다가 구리시 토평동과 남양주시 수석동 사이에서 한강에 흘러든다. 왕자의 난으로 함흥에 갔던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한양으로 환궁하던 중에 지금의 진접면 팔야리에서 8일을 머물렀다고 해서 이 마을을 팔야리(八夜里)라 부르게 되었고,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을 '왕이 자고 갔다'라는 뜻으로 왕숙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는 세조를 광릉에 안장한 후 '선왕이 길이 잠들다'라는 뜻에서 왕숙천이라 명명했다고도 전하며,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는 '왕산천'(王山川)이라 표기되어 있다. 유역 내에는 동구릉을 비롯 순강원·휘경원·퇴계원리지석묘·지금동지석묘·가운동지석묘 등의 유적과 봉선사·봉영사·보현사·관음사 등의 많은 사찰이 있다. 또한 하천유역에는 퇴계원공동묘지·서울시립공동묘지·천주교공동묘지·장승공동묘지 등 수많은 묘지들이 모여 있다. 또한 유역 내에는 조선 세조의 능인 광릉(사적 제197호)과 그 주변에 광릉수목원이 있다. 광릉은 조선시대 세조의 묘지로 결정된 뒤부터 소나무·잣나무·전나무 등을 심어 벌채를 엄격히 금지한 국유림보호지구이며, 광릉수목원은 1987년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공원 겸 산림욕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2,800여 종의 식물과 1,600여 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광릉크낙새(천연기념물 제11호)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고덕수변생태복원지는 강동구 고덕동 396번지일대로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오염되고 각종 경작활동으로 훼손된 고덕동 한강변이 각종 야생식물들이 자라고 곤충, 새들이 찾아오는 생태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조류들은 개똥지빠귀와 노랑지빠귀, 직박구리 등을 비롯하여 꿩, 붉은머리오목눈이, 비둘기, 참새 등의 조류를 볼 수 있었다.
구암정 정자가 서 있는 오른편으로는 건물터 임을 알리는 초석들이 남아 있어 옛 모습들을 상상해 볼 수 있도록 한다. 이곳은 신라 시대 때 9개의 절이 있어서 구암사(九岩寺)라는 명칭이 붙게 됐다. 그런데 절이 광나루에 있는 뱃참인 하진참 동쪽 강변바위에 위치해 바위절이다 불렀다. 현재, 절은 소실되고 지금은 바위절터만 남아 있다. 조선 초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백중사(伯仲寺)는 하진참(下津站) 동쪽에 있다’고 했으므로 구암사는 백중사로 고쳐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바위절로 인해 암사동이란 지명이 유래됐음을 알 수 있다. 바위절은 언제 훼손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1696년 조선 현종 8년 이곳에 구암서원(龜岩書院)이 세워졌다. 구암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정리 사업 때 철폐됐다. 한강변의 작은 암자마저도 정수장 건설 때 도로를 내면서 사라졌다. 그 규모는 현재 중부고속도로 진입로와 암사아리수정수센터취수장의 건설 때문에 크게 훼손되어 잘 알 수 없지만, 현 발굴지와 절벽 밑 취수장 진입로 등에서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구암서원에 모셔진 인물 중 한 사람인 둔촌 이집(李集) 선생은 바위절 근처인 둔촌동 산 328번지의 1호에 일시 살았으므로 그의 호를 따서 둔촌동이란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집은 광주 이씨의 시조로 고려 말 충목왕 3년(1347)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가 정몽주, 이색, 이숭인 등과 더불어 서로 교유하였다. 그는 고려 말 공민왕 재위 때 권력을 장악하나 신돈을 탄핵하였고, 신돈은 이집을 처형하려고 포살령을 내렸다. 이에 이집은 부친 이당(李唐)을 등에 업고 남쪽으로 피신하였다.
이집은 천신만고 끝에 경상도 영천에 사는 친우 최원도 집에 도착하였다. 최원도는 이집이 부친과 은신하겠다고 부탁하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기 방 다락에 숨겨 주었다. 당시 최원도의 집에는 제비라는 계집종이 있었다. 최원도가 밥을 세 그릇 씩 먹고 방에서 용변을 보는 등 미치광이 행세를 하기 시작하자 집안 식구들은 놀랐고, 최원도의 부인은 제비에게 그의 동정을 살피라 하였다. 다락 속에 두 사람을 숨겨 이를 밖에 알리지 않으려고 최원도가 미치광이 짓을 벌인 것을 알아낸 제비는 그 두 사람이 이집과 그의 부친 이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최원도는 2년 동안 다락에 이들을 숨겨놓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미치광이 행세를 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안 부인은 제비가 외부에 누설하지나 않을까 우려했고, 영리한 제비는 그 모습을 눈치 챘다. 이에 제비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사약을 내려달라 청하였다. 부인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제비가 애걸하자 그의 갸륵한 마음씨에 감동하여 돌아앉은 다음 사약을 내렸다. 이처럼 최원도의 우정과 의비 제비의 절의로 무사히 은거했던 이집은 공민왕 20년(1371)에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복직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바위절터에서 540m정도 내려오니 한창 공사 중인 구리암사대교를 지나게 되고 그곳에서 1.5km 정도 걸으니 암사동생태경관보전지역이 나온다. 이곳은 행정구역상 강동구 암사동 624-1 일대로서 한강상류로부터 유입된 토사가 퇴적되어 자연스럽게 형성된 호안과 대규모 갈대 물억새, 수양버들 군락지이다. 약 1km 가까이 광나루안내센터 앞까지 갈대와 물억새 사이로 난 길을 걸으니 기분이 상쾌하고 마음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오전 9시 30분에 하남시계에서 출발하여 11시 20분에 광나루 안내센터 앞에 도착하였고, 이제 동아리별로 점심식사를 한 후 안내센터 앞에 있는 축구장에서 오후 1시부터 동아리별 체육대회를 진행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