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들의 보석상자 [제3편]
내가 오른쪽 볼과 왼쪽 볼을 내어 주지 않으면
사과는 부풀지 않는다.
흥분이 극에 달해야만
나는 향기로워진다.
이제껏 구분되지 않던 냄새를 드러내며 비로소
둥글어진다.
너는 노을이 아름답다지만
누가 칼날을 세우기라도 하면 핏줄들이 모두 숨어 버린다.
모처럼의 흥분이 사그라질까 봐 나는
칼끝에 집중한다.
사과는 사과를 유지하려 애쓴다.
둥근 사과는 이미 잘린 사과일지 모른다.
사과 노릇을 하려는 사과일지 모른다.
창 너머로 나란히 기차가 가고
덜컹덜컹 배경을 자르면서 가고
칼이 지나가면서 고요해지는 저녁이다.
나는 환부를 움켜쥐고 몸을 뒤튼다.
칼이 지나간 줄도 모르면서
너는 노을이 아름답다 한다.
-심언주, 「사과에 도착한 후」 전문
이 아름다운 시는 ‘사과’의 무엇에 대해 쓰는가? 얼핏 보면 사과, 노을, 칼, 기차와 같이 평이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시다. 사과라는 단어는 개체-사물이 아니라 그것을 지시하는 언어 기호다. 시인은 사과가 과육과 향기를 통해 그 현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추측한다. 사과의 불가피한 사과-됨은 “사과는 사과를 유지하려 애쓴다.”라는 구절로 또렷해진다. 사과를 지시하는 기호로는 사물의 윤곽과 정체를 확정짓지 못한다. 기호의 추상성은 실재에로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이다. 이렇듯 사과는 말할 수 없음 속에서 아무런 도덕적 감정 없이 사과라는 형태만을 드러낸다. 언어만으로 사물의 정체를 확정지을 수 없는 탓에 “둥근 사과는 이미 잘린 사과일지도” 모르고, 한사코 “사과 노릇을 하려는 사과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칼은 도구-사물인데, 칼의 도구성은 ‘사과’라는 객체-사물로 인해 새롭게 주목된다. 노을이 흐르는 조용한 저녁에 누군가 칼로 사과를 깎는데, 이 저녁의 고요는 사과를 깎는 작고 조용한 노동이 불러온 것이다.
사과의 과육과 껍질 사이를 칼이 가르며 지나간다. 창 바깥에서는 기차가 두 개의 풍경으로 가르며 지나간다. 칼과 기차는 ‘가르고’, ‘지나가는’ 것에서 하나다. 또 다른 겹쳐짐이 있다. 시인의 상상세계에서 ‘사과’와 ‘나’는 하나다. 그래서 사과 껍질이 깎일 때 “나는 환부를 움켜쥐고 몸을 뒤튼다.”라는 구절은 자연스럽다. 이 시를 다시 읽으면, 여기 사과와 칼이 놓여 있다, 누군가 칼을 들어 사과를 깎는다. 이 고요한 노동 속에서 나[주체]-사과[대상]-칼[도구]은 한 덩어리다, 그러나 한 찰나 속에서 엮인 이것들, 즉 나, 사과, 칼은 제각각의 개체들로 돌아간다. 시는 이렇게 의미의 연쇄구조를 노출한다. 사과는 의미 이전 그것의 있음만으로 충분히 빛난다. 우리는 늘 정체성의 이상한 감각 속에서, 혹은 감각의 쇄신 속에서 사과를 사과로 발견하는 사태와 만난다. 우리는 날마다 이런 돌연한 아름다움이 강림하는 기적의 찰나들을 겪는다.
중력과 대기의 변화들, 푸른 바다, 태양과 달, 우주의 궤도를 도는 별들, 해마다 땅에 뿌려지는 어마어마한 씨앗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 우리는 월트 휘트먼처럼 대답할 수밖에 없다. “개방된 대기 속을 떠다니는 태양과 별들……사과 모양의 지구와 그 위의 우리들……그들이 떠다니는 모습은 장관이다./나는 그것이 장관이라는 것과 행복이라는 것 외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휘트먼, 「직업을 위한 노래」) 사과들은 먼 곳에서 오고, 빛과 공기의 혼례가 이루어지는 찰나 속에서 사과들은 빛난다. 내가 여기에 있음으로 사과도 여기에 있다. 이 아름다운 것, 어느 순간 생활 속으로 끼어들고, 추측과 우연의 상상력을 낳는 이 사과에 대해 우리는 똑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심언주의 ‘사과’는 감각을 쇄신시키는 은유이고, 뇌의 파장을 바꾸는 음악이며,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적의 사물이라고! 지금 여기에 사과가 있다는 것, 그리고 맘껏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태이고 우리가 누리는 행복이라고!
장석주 「은유의 힘」
2024. 3. 18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