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요한 11,25.26 참조)
교회는 오늘 ‘게르만족의 사도’, ‘독일의 사도’라고 불리는 7세기 영국의 성인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675년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인은 7살에 베네딕토 수도원 학교에 입학하고 계속된 수도원 교육을 모두 마친 후, 서른 살의 나이로 베네딕토회 사제로 서품됩니다. 선교사가 되기를 희망한 성인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의 뜻에 따라 게르만족이 살고 있는 독일지역으로 가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그의 선교로 많은 이들이 개종하는 놀라운 일이 생겨납니다. 754년 독일 마인츠의 주교가 된 성인은 그곳에서 많은 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에 주력하다 이교도인들에게 의해 살해됩니다. 1874년 교황 비오 9세는 보니파시오 성인은 ‘게르만족의 사도’, ‘독일의 사도’라 칭하며 그를 성인품에 올립니다.
이 같은 성인을 기억하는 오늘 우리가 듣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우선 오늘 복음 말씀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의 교묘하고도 난해한 질문을 받습니다. 생전에 일곱 형제 모두와 결혼한 여인이 죽은 뒤 부활하였을 때에, 과연 그녀는 자신이 모두 결혼한 일곱 형제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고 사두가이들이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두가이들의 이 같은 질문은 다분히 의도적이며 그 의도란 것도 굉장히 불순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로서 부활이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입으로 순순히 응답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당시 유다인들의 풍속을 들어 이 같은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모세의 율법 규정에 따라 후손을 얻지 못하고 남편이 죽었을 경우, 그 남편의 형제가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후손을 얻도록 하였습니다. 자손을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특별한 축복이라 여기며 후손을 중요시하던 유다인들이 그들만의 문화로서 갖고 있는 하나의 규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바로 이 모세의 율법 규정을 근거삼아 부활이 없음을 주장하려고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고 이 질문으로 순순히 부활이 없음을 시인할 것을 기대했던 사두가이들은 의외의 역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 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르 12,24-25)
예수님의 이 같은 대답은 사실 사두가이들에게는 굉장히 모욕적인 언사입니다. 당시 사두가이들은 유다 사회 안에서 종교 사회 정치적으로 중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집단으로서, 종교적으로는 제사를 담당하는 제관들이 사두가이들의 주축이었습니다. 순수 종교인으로서 제사를 담당하는 제관인 사두가이들을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는 무능한 이들이라고 치부하는 예수님의 언사는 그들에게는 치욕을 넘어 모멸에 가까운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의 속을 뒤집어 놓으신 예수님은 뒤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26)
예수님은 이 대답으로서 사두가이들뿐만 아니라 부활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이들 모두를 일깨워주시는 데, 그 가운데에서도 모세에게 나타나 당신의 정체를 밝히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 그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들었던 그 음성, 곧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는 하느님의 이 말씀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설명해 주시듯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닌 산 이들의 하느님, 곧 지금 이 순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와 관계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닌, 산 이들의 하느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다시 말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의 그 모습이 바로 부활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는 열쇠가 됩니다.
많은 이들이 부활에 관하여 생각할 때, 부활은 오직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것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났을 때, 죽음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후, 또 다른 세상에서의 새로운 삶을 상상하고 또 그것을 꿈꿉니다. 그래서 지금의 삶은 부활의 삶을 위한 준비단계, 지금의 삶의 희생과 봉헌을 통해 미래 언제인지도 모를 죽음 이후의 삶을 보장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부활에 관한 그 모든 생각들은 그저 우리들의 기대와 바람일 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시는 부활의 삶을 그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는 부활의 삶의 모습을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며 가르쳐주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은 우리가 주님이라 믿어 고백하는 하느님 그 분은 이미 죽은 우리 선조들의 하느님이 아닌, 또 아직 태어나지 않을 후손들의 하느님이 아닌 지금 바로 이 순간,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바로 나를 위한 하느님, 지금 이 순간 나와 관계하시는 하느님이심을 이야기합니다. 아울러 부활의 삶 역시 지금 삶과는 별개의 죽음 이후의 내세의 삶이 아닌 지금 바로 이 순간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한다는 사실, 곧 시련과 고통으로 점철된 그래서 죽음과도 같은 지금의 나의 현실 삶이 나와 관계하시는 하느님 그 분을 통해 그 분이 주시는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한 부활의 삶이 지금 이 순간 변화되는 것, 그래서 부활은 먼 미래의 죽음 이후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삶이 부활되는 ‘부활의 현재적 성격’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이 같은 면에서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티모테오 2서 말씀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지금의 우리 삶을 바로 여기에서 부활시켜 주시는 하느님의 체험한 바오로 사도가 그 체험을 티모테오에게 전하는 말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스승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2티모 1,10ㄴ-12)
바오로가 말하듯 우리가 믿는 하느님 그 분이 누구이신지 제대로 아는 것, 또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부활의 삶, 곧 죽음과도 같은 좌절의 삶이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과 희망으로 새로운 부활의 삶으로 변화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알고 또 그것을 믿으며 그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과 함께 그 분이 주시는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오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우리는 과연 우리가 믿는 주님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나는 과연 내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분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또 그분이 내가 건네시는 말씀을 얼마나 잘 듣고 있는지 그리고 그 말씀을 내 마음에 담아 그 말씀의 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것을 물으며 이를 통해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 말씀의 힘으로 우리 삶이 바로 지금 이 순간, 부활을 체험할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부활의 현재성. 여러분 모두가 오늘 말씀이 전하는 이 진리, 곧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 그 분을 제대로 알고 그 분이 주시는 부활의 삶을 굳게 믿으며 그 믿음에 대한 확신으로 여러분 현재의 삶이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한 부활의 삶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요한 11,25.2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