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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엄마와 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담다 / Art_해설이 있는 미술
ysoo 추천 0 조회 62 15.12.20 23: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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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_해설이 있는 미술

Master Baby / William Quiller Orchardson 윌리엄 퀼러 오처드슨 ‘아기 도련님’ (유화, 108x166cm, 1886년,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

 

 

엄마와 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담다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완전하다.

아이는 어머니가 여왕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이는 어머니가 권력자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이는 어머니가 그저 자신의 어머니이기를 원할 뿐이다.

어머니가 내어주는 음식이 세상 그 어떤 음식보다 맛난 음식이고, 사랑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동자가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운 보석이다. 모나리자의 미소도 어머니의 미소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

아이에게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다.

 

새해를 맞는 우리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채워줄 명화 속 엄마와 아이의 모습을 만나보자.

 

서로의 미소로 행복을 소통하다
윌리엄 퀼러 오처드슨의 ‘아기 도련님’


사랑의 미소를 교환하는 것만큼 사람에게 즐겁고 행복한 감정을 가져다주는 게 있을까?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를 나눌 때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과 충족감을 느낀다. 엄마와 아기가 눈을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보호 아래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자라는 젖먹이 시절, 그 시절의 행복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천국의 행복이다. 그 행복 속에서 어머니와 나는 하나가 되고, 더불어 세상과 나도 하나가 된다.

미움도, 시기도, 경쟁심도, 적대 의식도 없이 오로지 사랑과 신뢰만으로 충만한 세상, 나와 하나가 된 세상은 그렇게 평화의 왕국이 된다. 그 왕국이 바로 어머니와 아기가 나누는 미소 속에 들어 있다.


19세기 영국 화가 윌리엄 퀼러 오처드슨이 그린 ‘아기 도련님’에서 우리가 보는 것도 이 아름다운 미소다. 아기의 피부는 맑고 투명하다. 얼굴은 빛이 난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서 아기가 미소 짓는 법을 배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아기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평화로운 미소가 번진다. 두 사람은 그렇게 어떤 말도 필요 없이, 다른 어떤 수단도 필요 없이 눈빛을 교환하며 충만한 행복과 사랑을 나눈다.


이 미소는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를 거쳐 내려온 태초의 빛이다. 이 빛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물주의 심장에 가 닿을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충만히 받은 사람에게 이 빛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삶의 등대가 되어준다.

 

 

장 프랑수아 밀레 ‘속삭임’ (캔버스에 유채, 45.7×38.1cm, 1840년대, 런던 내셔널 갤러리).

Jean-Fran?ois Millet, 'The Whisper'

The title is traditional in the 19th century the picture was called 'Peasant and Child'. This picture was probably painted in about 1846, and is one of a number of pastoral subjects painted by Millet during his early career in his so-called 'mani?re fleurie'.

 

 

산들바람처럼 온화하게 전해지는 어머니의 사랑

 

장 프랑수아 밀레의 ‘속삭임’


장 프랑수아 밀레의 ‘속삭임’에 등장하는 아기도 어머니와 따뜻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 자신이 얻은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그림의 어머니는 그리 넉넉한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것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어머니다. 밀레의 그림에서 어머니의 사랑은 지금 밝고 넉넉한 젖빛으로 온 화면을 물들이고 있다. 우유가 섞인 모든 음식이 사랑과 풍요를 전해주듯 젖빛으로 인해 살짝 파스텔 색조를 띤 화면 또한 사랑과 풍요가 넘친다.


그 사랑과 풍요 속에서 미풍같이 잔잔한 대화를 나누는 모자.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두 사람은 볼수록 사랑스럽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이처럼 속삭이길 좋아하는 걸까? 그들의 대화는 왜 이렇듯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퍼져 나갈까?


산들바람이 불면 어머니 대지는 만물의 싹을 틔우고 그 싹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녹색의 낙원을 만든다. 산들바람이 불면 자연도 사람도 마음에 사랑이 싹튼다. 어머니의 속삭임을 따라 우리 가슴에서 움튼 사랑의 싹들은 우리가 평생 사용할 생명의 에너지원이다. 이 싹들이 있어 우리는 거친 태풍을 만난 뒤에도 잔잔한 호수로 돌아올 수 있다. 다 큰 어른이 되어도 이 속삭임만큼 귀한 게 없다. 이 사랑만큼 그리운 게 없다.

 

 

메리 커샛 ‘목욕’ (캔버스에 유채,100.2×65.9cm, 1891~1892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The Child's Bath (The Bath) by Mary Cassatt, 1893, oil on canvas, 39½ × 26 in., Art Institute of Chicago

 

일상의 작은 행복을 나누다

 

메리 커샛의 ‘목욕’


귀한 어머니의 사랑은 일상의 소소한 헌신이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일상에서 낯익어 눈에 띄지 않지만 내가 힘들고 어려운 순간, 태산같이 거대한 존재감으로 다가오는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이다. 그 사랑의 쌓임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아이들은 금세 더러워진다. 아이들은 새 옷을 갈아입혀주기가 무섭게 옷을 더럽힌다. 옷만 더러워지는 게 아니라 얼굴도 손도 금방 흙투성이, 먼지투성이가 된다. 이렇게 더러워진 아이를 씻기는 일은 끝없는 반복으로 인해 곧잘 한숨과 탄식이 나오는 일이 되곤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자비를 쌓아 어머니가
된다. 아이는 그 자비를 받아 온전한 인격체로 자란다.


아이를 반복해 씻기노라면 피곤하고 힘이 들지만, 어머니는 금세 아이의 뽀얗고 부드러운 피부와 포동포동한 살집에 빠져든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정서적 교류를 나누게 된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생명의 신비, 존재의 신비가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아이와의 스킨십은 생명감과 존재감을 그 충일한 정점에서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의식이다.


미국의 여성 화가 메리 커샛이 그린 ‘목욕’에서 우리가 보는 것도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그런 애착과 유대감이다. 아이를 안고 씻기는 어머니는 방금 전까지 다른 집안일로 분주했던 것같다. 몇 가닥 내려온 머리카락이 그녀의 가쁜 일상을 잘 전해준다. 다소 숨이 차더라도 씩씩하게 아이를 씻기는 일에 집중하는 어머니. 그렇게 아이를 씻어주다 보면 발가락 하나, 손가락 하나가 새롭고, 모기에게 물리거나 넘어져 다친 상처 자국까지 보석처럼 귀하게 다가온다.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향한 사랑의 명상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이처럼 어머니의 보호 아래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자라는 어린 시절, 이 시절의 행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천국의 행복이다. 그 행복 속에서 어머니와 나는 하나이고 더불어 세상과 나도 하나다. 이 원초적 행복이 중요한 것은 아이가 자라나 거친 세파에 맞닥뜨릴 때 영원히 마르지 않는 힘과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삶이란 그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아름답고 귀한 것이며, 내 영혼의 자유와 평화는 그 어떤 어려움과 가난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이를 보장해 준다. 어머니의 사랑은, 사람의 삶 그 시작 부분뿐 아니라 남은 생애 내내 영향을 미치는 매우 강력한 힘이다.

 

 

Thomas Webster  In Sickness and Health (1843) 토머스 웹스터 ‘병과 건강’ (나무에 유채, 50,7x81.2cm, 1843년, 런던 빅토리아와 앨버트 미술관).

 

A Fanciful Twist

 

 

희망과 낙관의 기운을 전하는 어머니의 손길

 

토머스 웹스터의 ‘병과 건강’


어머니가 가장 속상한 때는 아마도 아이가 아플 때가 아닐까 싶다. 아픈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다 가여워 보이지만 어린아이는 더욱 가련하고 불쌍해 보인다. 자기의 아이가 아니어도 가슴이 미어지는데, 자기 자식이라면 오죽할까. 아이가 괴로워할 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부모는 그저 아이의 고통이라도 나눠 그 어려움을 덜어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뿐, 아이의 아픔은 온전히 아이의 몫일 뿐이다.

 

작고 여린 아이가 왜 저리 심한 고통을 견뎌야만 하는지 하늘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그래도 며칠 아프고 말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나 있지, 오래 앓아야 하는 병이라면 그 모든 게 부모의 탓인 것만 같아 아이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죄스러워지기까지 한다. 그래도 병든 아이가 의지할 데라고는 엄마 아빠뿐이다.


그런 까닭에 이럴 때일수록 어머니는 더욱 마음을 다잡고 아이에게 편안한 환경과 분위기를 마련해주기 위해 정성과 노력을 다 쏟게 된다. 토머스 웹스터가 그린 ‘병과 건강’에 등장하는 어머니도 그렇게 병약한 딸에게 희망과 낙관의 기운을 불어넣어주려 애쓰는 자애로운 어머니다. 떠돌이 악사가 허디거디(손잡이를 돌려 소리 내는 악기)를 들고 동네에 나타나자 딸을 침대에서 일으켜 집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서는 이미 다른 여자아이들이 음악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아픈 아이의 자매일까, 동네 꼬마들일까? 어쨌든 옆에 아픈 아이가 있거나 말거나 신이 난 아이들은 서로 어울려 흥겹게 춤을 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도 희미하게 화색이 돈다. 딸아이의 안색을 살피던 어머니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아이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포개 애틋한 정을 드러낸다. 나무 그림자를 뚫고 쏟아지는 저 햇살처럼 하늘의 밝고 환한 기운이 이 아이를 벌떡 일으켜 세워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야외의 신선한 공기도 쐬었고 다른 아이들의 신나는 율동도 본 아이는 이제 곧 병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이 그렇게 놀 수 없다는 것이 속상하겠지만 용기를 내어 더 열심히 투병 생활을 할 힘이 생겼다. 아픔과 고통을 이겨낸 대가로 얻어낸 건강은 천만금보다 귀하다. 그럼에도 건강한 사람들은 그 값어치를 모르고 지낼 때가 많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아팠던 경험이 꼭 손해인 것만은 아니다. 귀한 것을 귀한 줄 아는 것도 인생의 중요한 공부다. 어머니의 사랑 속에 그림의 아이는 지금 그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프레더릭 레이턴 ‘음악 레슨’ (캔버스에 유채, 92.8x118.1cm, 1877년경, 런던 길드홀 아트 갤러리). The Muisc Lesson Lord Frederic Leighton

 

자애롭게 인도하는 어머니의 자식 교육

 

프레더릭 레이턴의 ‘음악 레슨’


그림 그리는 사람을 ‘환쟁이’라고 부르고 음악 하는 사람을 ‘딴따라’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예술이 밥 먹여주느냐” 며 예술의 가치와 효용을 폄하하던 때 말이다. 하지만 문화의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도 이제 예술의 중요성을 또렷이 인식하고 있다. 오늘날 예술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정서적 만족을 주는 차원을 넘어 한 사회의 부와 경쟁력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분야가 되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예술 교육에 관심을 쏟는 것은 이런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창의력과 상상력은 우리가 아는 것, 익숙한 것을 뛰어넘는 힘이다. 예술은 바로 그 힘을 길러준다. 그래서 예술이 21세기를 이끄는 중요한 동력이 된 것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앞으로의 세계는 그런 창의력과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해갈 시대가 아닌가.

 

프레더릭 레이턴 경이 그린 ‘음악 레슨’은 예술을 통해 자신 안에 잠재된 창조적 재능을 기르는 어린이와 그 어린이를 자애롭게 인도하는 어머니를 그린 그림이다. 일단 두 모녀의 표정에서 우리는 예술이 무엇보다 즐겁고 행복한 삶의 동반자임을 알 수 있다. 예술은 아이와 어머니를 더욱 가깝게 이어주는 끈이다. 힘들게 배워야 하고 어렵게 알아가야 하는 특별한 기술이기 전에 삶과 인간관계를 풍성히 해주는 푸근하고도 아름다운 중재자다. 그림 속의 어머니는 예술 교육이 딸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다정한 표정과 친절한 몸짓으로 그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어머니가 이렇게 편안하고 부드러운 마음결로 사랑하고 즐기는 예술을 딸이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아마 이 세상에서 아이에게 가장 좋은 예술 교육은 어머니 자신이 예술을 얼마나 사랑하고 소중히 생각하는지 직접 보여주는 게 아닐까. 부지런히 갤러리에 드나드는 어머니, 늘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는 어머니는 그 어떤 전문가보다도 훌륭한 아이의 예술 스승이다.

예술이란 무엇보다 감동으로 소통하는 세계다. 자식에게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다. 어머니가 느끼는 감동만큼 자식에게 큰 감화를 주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 추억을 아이에게 선물하기 위해서라도 아이의 손을 잡고 갤러리를 찾을 일이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예술을 외면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글 이주헌

 

 

 

GOLD &WISE

KB Premium Membership Magazine
ISSUE 90 january 2013

www.kbsta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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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Webster. Sickness and Health. 1843

 

Ecole fran? aise du XIXe si? ??cle

 

Briullov , Karl Pavlovich ( 1799-1852) - Mother, wake up from crying child. 1831

 

Lord Frederick Leighton - Mother with child

 

Adolphe William Bouguereau - Mother"s happiness [Admiration Maternelle] 1869

 

George Dunlop Leslie - Alice in Wonderland

 

Who? Nikolai Alekseevich Kasatkin - 1897

 

A Flood by Frederick Morgan

 

Mother and Child Mary Teasdale - circa 1920

 

The Fisherman and the Syren, c.1856?1858 Frederic Leighton

 

The Painter-s Honeymoon 1864. Frederic Leigh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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