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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가 고등학교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만들었다는 곡... 1951년 생이니 1968전후의 일이겠군요.
이때는 집에 전화도 없을 때입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연락을 하려하면 전보를 보내야 했었습니다.
전화국에 가서 가장 짧은 문구를 적어 신청하고 나면 하루나 이틀 뒤에 전달이 되던 그 전보....
보통 누구의 부음을 그렇게 전보로 전해 듣던 시절입니다.
김민기는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강릉 경포대에 놀러갑니다. 경포대에 가면 작은 암초같은 바위섬 두 개가 보이는데,
오리바위 십리바위... 친구들끼리 오리바위까지 헤엄쳐가는 내기를 했는데, 한 친구가 오리바위에서 십리바위까지 갔다가
끝내 못 나오게 됩니다. 친구의 주검을 앞에 두고 집에 연락을 해야 하나, 전보를 보낼 수도 없고 김민기는 친구집에 이 소식
을 알리기 위해 기차를 탑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의 그의 심정이 어떨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죽은 친구를 떠올리며, 기차안에서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1971년에 만들어진 노래가 이 노래입니다.
친구 (작사/곡 김민기)
첫 소절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까지 계속되는 '미' 11개와 이어지는 '파' 1개로 만들어낸 다시 미의 전개와 레 이렇게
단순한 선율로 오묘하게 전개되는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음 전개가 황당하기 짝이 없을 정도이면서도 구성이 탄탄합니다.
잘못 만든 곡은 악기가 많아도 비어있는 느낌이 나기 마련인데 악기나 음표의 수는 빈 느낌의 원인이 아니라는 걸 이 곡이
알려줍니다. 가사 측면에선 절제된 슬픔을 마치 읖조리듯 부릅니다. 목소리는 목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영혼을 통해서 나는 소리로 가슴을 저릿하게 만듭니다.
이분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소위 말하는 가창력이라는 것은 음악을 표현하는 여러가지 수단 중에 하나에 불과한것이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해줍니다. 곡과 가사와 감성 전달이 모두 일치하는 곡입니다.
이 곡은 김민기의 1집에 실려있고 80년대 초반에 이 1집음반의 가격이 50만원이 넘었다고도 전해집니다.
박은석(웹진 '백비트'편집장)이 '세상을 바꾼 노래"라는 제목으로 다음 뮤직에 연재하고 있는 글 중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김민기는 독보적인 싱어-송라이터였다. 양희은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아침 이슬'의 원작자로 대중에 이름을 알린 그는
몇 달 뒤 발표한 자신의 첫 앨범 [친구/길(김민기 노래모음)]을 통해 갓 스무 살 나이에 한국 모던 포크의 금자탑을 세웠다.
물론, 그의 전면 등장 이전에도 모던 포크의 움직임은 완연했다. 쎄시봉과 청개구리와 오비스 캐빈은 진작에 젊은이들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었고, 트윈 폴리오, 뚜아 에 무아, 라나 에 로스포 등이 이미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1969년 '남산드라마센터'에서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임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한대수라는 걸출한 예인이 있었다.
김민기가 한국 최초의 유의미한 모던 포크 싱어-송라이터였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그의 탁월함은 그 너머에 있었다.
김민기와 그의 데뷔작은 "한국 포크를 확립한 음반이 아니라 한국 포크를 새로운 단계로 도약시킨 음반"(신현준, 이용우,
최지선, [한국 팝의 고고학 1970: 한국 포크와 록, 그 절정과 분화], 한길아트, 2005)이라는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김민기는 앨범 [친구/길(김민기 노래모음)]을 통해 한국 모던 포크의 새로운 전범을 제시했다는
말이다. '친구'는 그 모든 새로움의 총아였다.
'친구'는 여전히 번안곡이 대세를 이루던 분위기 속에서 앨범 수록곡 대부분을 직접 창작한 김민기의 음악적 실험의 결정
이었다. 탁월한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던 김민기의 연주와 노래는 정성조 악단의 세련된 미니멀리즘과 결합하여 나직하지만
강렬한 웅변으로 화했다.
아침이슬(작사/작곡 김민기)
아침이슬은 1975년 금지곡이 됩니다. 보통 금지곡들은 사유가 명시되지만 아침이슬은 그 사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그 시대 금지곡의 상징을 나타내는 듯 합니다.
박은석(웹진 '백비트'편집장)의 '세상을 바꾼 노래" 중
1971년 봄, 막 대학에 들어가 역사학을 공부하게 된 여학생의 귀에 어떤 노래가 들어온다. 그 노래가 마음에까지 들어오자
여학생은 악보를 구하여 자신이 불러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노래를 1970년에 작곡한 청년은 악보를 이미 찢어버렸다.
하지만 찢어진 악보 조각들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구한 여학생은 조각들을 이어 붙이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어느 날,
작곡한 사람을 직접 만나게 된다. 이렇게 양희은이 ‘아침이슬’을 만났고, 김민기를 만났다. ‘아침이슬’은 작게는 한국 대중
음악에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싱어송라이터들 중 한 사람인 김민기와 한 시대를 대표하게 될 가수 양희은을 만나게 했다.
양희은을 눈여겨본 사람들 덕에 음반을 발표할 수 있게 되자 곧 독집음반을 내게 될 김민기가 ‘아침이슬’을 양희은이 먼저
음반에 싣도록 배려했다. 녹음작업까지 도왔다. 그렇게 양희은의 데뷔앨범인 [고운 노래 모음](1971)이 나왔고, ‘아침이슬’은
세상과 만난 것이다. 포크의 시대라고는 해도 외국의 곡들을 번안하여 부르는 것이 주된 활동이었던 때에 한국에 사는 젊은이
들의 정신을 대변하는 노래의 등장이었다.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자기네 이야기를 노래로 직접 만들어 부르는 것이 남다른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대중가요에도 깊은 사유가 들어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나아가 그런 노래가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음악적으로 ‘아침이슬’은 노래하는 이의 음색과 성량이 안정된 상태로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는 음역대과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 포크의 품 안에 있지만 클래식 등 다양한 형태로 변주할 수 있는 화성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으면서 대중 그 누구나 좋아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곡이다. 굳이 빗대어 말해야 한다면, 영국에 비틀스(The Beatles)의
‘Yesterday’가 있고 한국에는 ‘아침이슬’이 있는 것이다.
군사정권은 ‘아침이슬’의 이러한 가치를 알아보고 ‘국민’에게 권할만한 ‘건전가요’로 선정했다. 하지만 몇 해가 지나가 그들은
‘아침이슬’의 또 다른 가치를 알아보았고, 금지곡으로 묶어버렸다. 우습게도 군사정권이 이 노래의 서정성과 저항성이라는
두 개의 가치를 모두 알아본 셈이다. 그러나 음반을 사서, 혹은 방송을 통하여 이 노래를 듣지 못하게 할 수는 있어도
사람들의 입까지 막지는 못했다. 우울하면서 아름다고, 어두우면서 우아한 ‘아침이슬’은 이내 누군가의 방으로, 청년들의
화기애애한 모임으로, 결의에 찬 표정으로 어깨동무를 한 학생들이 행진하는 교문 밖으로, 시대를 고민하고 아픔을 나누는
이들이 모인 거리까지 퍼져나갔다.
작곡한 김민기도, 노래한 양희은도 작은 노래 하나가 자신들의 뜻을 넘어 세상에서 더 큰 생명력을 갖게 된 것에 놀랐다.
노래가 제 스스로 생명을 얻어간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아침이슬’은 70년대를 넘어 80년대에도, 90년대에도
불려졌다. 음반 대신 악보로 인쇄되었고, 사람의 입과 기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제 발로 찾아갔다. 이렇게 ‘아침이슬’은
청년의 조용한 노래에서 거리의 치열한 노래로, 그리고 시대의 묵직한 노래로 성장해간다. 새로운 정서와 기법으로 태어난
창작곡이 저항가요의 대표로 이름을 올리는 순간들이었다.
‘아침이슬’은 사람을 바꾸는 데에 분명히 힘을 보탰다. 그리고 노래의 기적을 보여줬다. 한 청년이 자신의 방에서 읊조리며
만든 노래 하나가 한 여인의 입으로 불려지고, 다시 수천만 사람들의 입으로 옮겨지고, 무려 40년 동안이나 내내 불려졌다.
노래는 기적이다. ‘아침이슬’은 노래의 기적을 대표한다.
서울대 미대를 다니면서 음악의 길을 걸은 김민기, 음대를 다니다 화가까지 된 조영남과의 일화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전해지지만 대중가수의 길을 걸은 조영남과 달리 김민기는 지난한 세월을 보냅니다.
그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당시 시대상과 청년의 고뇌를 써내려 갔던 그의 노래말들로 인해 그의 노래는 그 시대의
저항가요의 상징으로 자리잡습니다.
김민기는 1972년 3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노래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공안당국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정권의 억압을 받습니다. 김민기와 '친구'의 신화를 (당사자도 부담스러워할 만큼) 거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공고
하게 만든 일련의 조치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 여파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김민기와 '친구'의 음악적 위상은
여전히 심대했을 것입니다.
80~90년대 청년기를 보낸 사람만이 김민기의 노래가 살아남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시간을 보내야했는지를 이해할수
있을 겁니다. 한복을 입고 흰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김민기는 70년대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친구라는 노래는, 그 시대의 청년들에게는, 군부독재와 싸울 수 있게 하고, 점령군(5공)의 탱크 앞에서 누울 수 있게 했던
민주화의 정신적 고향같은 노래가 되었습니다.
김민기는 당시 음악적 변혁의 상징적 존재였고 '친구'는 그의 혁명을 증거하는 이정표가 되어버렸습니다.
또 '아침이슬'은 그 암울했던 시대에 노동자들과 학생들에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함께 저항할 수 있게 만든 노래였습니다.
강변에서(작사/곡 김민기, 노래 송창식)
당시의 우리 순이들의 애환을 노래한 곡입니다. 이른바 공순이, 차장 등의 이름으로 불리던 우리 누이들....
이 노래를 옛날 신입사원 시절에 직장 송년회에서 기타를 치면서 불렀더니, 뒷풀이에서 나이가 지긋한 차장님이 흑인영가
잘 들었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꾸 술을 주는 바람에, 이게 원래 흑인 영가였나하고 잠시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당시의 기성세대들은 꿈도 못 꾸던 내용의 노래였습니다.
봉우리(작사/곡 김민기)
처음 양희은의 이 노래 듣고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가사를 자꾸만 다시 보게 만드는 곡입니다.
그 외 김민기의 곡을 올려 놓겠습니다. 밝고 서정적인 노래도 있고, 대부분이 노랫말을 곰곰 생각해봐야 하는 곡들입니다.
지금은 60이 넘었고 소극단의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긴 세월 동안 말문을 닫았다가 최근에 인터뷰도 한 것 같던데
다시한번 그의 노래와 그의 생각이 담긴 노랫말들을 들어 보았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가을편지 (작시 고은 작곡 김민기)
그 사이(작사/곡 김민기)
새벽길(작사/곡 김민기)
작은연못 (작사/곡 김민기)
내나라 내겨레 (작사 김민기 작곡 송창식)
바람과 나 (작사 한대수 작곡 한대수)
잃어버린 말 (작사/곡 김민기)
저 부는 바람 (작사/곡 김민기)
백구,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 아하 누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 등 많은 곡들이 김민기의 곡입니다.
혹시 듣고 싶으신 곡 있으면 댓글에 달아 놓으시면 추가로 올리겠습니다.
첫댓글 친구를 잃은 안타까움이
그대로 녹아 있어 아릿한 마음
힘든 시대를 살아오며
여러곡을 남긴 그의 열정이 경이롭습니다
김민기 양희은....... 오랜 시간 아직까지 사랑 받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의 열정
보내주신 초연처사님의 정성까지 음미하며
한 곡 한곡 들어 보려 합니다
고마운 마음 댓글로 먼저 전합니다
큰 선물이온데 더 신청 하라시니.....................
어느 곡도 의미가 남다를 듯 하여 그냥 편한대로 올려 주시면 듣고 싶습니다
첫 곡 친구가 묵직하게 남아 다시 들으러 갑니다
고맙습니다
편안한 저녁시간 보내시길..........................................^^
감사합니다.
사연이 있는 노래는 사연을 생각하면서 들으면 더욱 마음에 와 닿죠.
김민기, 송창식, 양희은, 정태춘 등 좋아하던 가수들이 있어서 젊은 시절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제 데뷔곡이 중학교 2년때 소풍가서 전교생 앞에서 기타치고 부르던 아침이슬이었는데...ㅋㅋ
담임선생님이 도덕선생님이셨는데 참 좋아하셨어요...
우리 시대의 아픈 자화상이라지요.제가 오래전부터 남미 안데스음악을 많이 좋아했습니다.그러다보니 그 원주민들의 광산에서의 노동력의 착취.그래서 저항하는 음악도 많이 듣게 됐습니다.좋은 곡들도 많지요.
부산에도 쎄시봉이란 음악실이 광복동에 있었죠.신청곡도 받아줬었죠.
한대수를 잘 아는 선배언니가 예길 많이 하더군요.친한 친구동생이어서 그 집에서 자주 보고 같이 놀기도...
김민기의 노래는 잘 모르지만 올려주신곡 들어 볼께요.고맙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부산에는 좀 늦게와서 쎄시봉이란 음악실을 한번도 가보지 못했네요.
한대수는 천재여서 시대를 앞서간 것 같구요.
좋은 추억들이 많으시네요. 남미 음악 중에서 좋아하시는 곡 있으시면 다음에 소개해 주세요.
영상을 찾아서 올려볼께요.
끝말 조금만 더 이어볼께요. 쎄시봉, 송창식이 부른 남몰래 흐르는 눈물 한번 보세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초연처사님.제가 좋아하는곡 올려주셔서요.
그리고 칠레의 "Quimantu"그룹의 곡으로
광산에 끌려갔던 노동자 인디오들을 추모하기위한 미사곡 " Kyrie" ....
처절하게 폐부를 찌르는 둣한 단조풍의 연주는
안데스 노동자들의 슬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몇년전 끼만뚜 그룹이 내한해서 공연도 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룹이며 좋아하는 곡입니다. 고맙습니다.초연처사님.
칠레 음악은 좀 있다가 정리해보겠습니다.
끼리에 말씀을 하시니, 혹시 성당 다니시는지요?
지금은 아무데도 다니지 않습니다.자라긴 불교를 믿는 집안에서 자랐는데 시집은 기독교집안으로 가서 오랫동안 교회열심히 다녔었습니다.단순히 시어머님께 효도한다는 생각으로 ㅎ..제가 종교적인 성향이 없나봐요.여러가지 이유로 지금은 아무데도 다니지 않습니다.아마 가게돼면 절에 갈거예요.
그러시군요.
끼리에 설명을 하는데 조금 필요할까 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몇 곡 합쳐서 곧 올려드릴께요. 건강하시구요
두 분의 쟁쟁한 실력에 조금은 기죽은 봄봄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동당대며 사느라 그저 좋아라 듣기만 해 온 터라.......-^
들꽃 흐드러진 들판에서
고운님과 초연처사님의 소풍 노래 듣고 싶다
소녀같은 봄봄님의 모습과 초연처사님의 깊이 쌓아두신 많은 지식을 하루종일 예기하고 들어도 지루하지 않을듯... 전 듣기를 참 좋아하거든요.. 얼른 그런 기회가 왔으면 하고 바랍니다.^^*
ㅋㅋ 저는 봄봄님이 부러운걸요.
너무 맑게 사시는 것 같습니다.
시도 배우시고, 보통의 마음가짐이 아니신 것 같아서요...^^
혼자 송알대도 다아 들어 주시는 고운님 초연처사님 사랑 합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