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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경영의 신(神)’으로 추앙받는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경영을 단순한 ‘돈 벌이’가 아니라 사람들의 행복에 기여하는 가치 있는 종합예술로 여겼다. 마쓰시타의 삶은 패전국 일본이 세계 경제의 기관차로 떠오르는 과정 그 자체였다. 그가 남긴 말을 중심으로 그의 경영철학 및 삶과 만나보자.
“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릴 때부터 갖가지 힘든 일을 하며 세상살이에 필요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저는 허약한 아이였던 덕분에 운동을 시작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던 덕분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제 선생이어서 모르면 묻고 배우면 익혔습니다.” 마쓰시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화로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밤이면 외로움에 떨며 어머니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 흘렸다. 화로가게가 문을 닫자 자전거 가게 점원으로 17살 때까지 일했다.
자 전거 가게를 그만두고 시멘트 회사 운반원을 거쳐 1910년 오사카전등주식회사 견습사원으로 입사해 만 22살 때 검사원으로 승진했지만, 검사원이 되기 전부터 소켓 개량 연구에 착수하고 있었고 결국 1917년 6월 20일 퇴사했다. “몸이 약했기 때문에 회사 근무는 맞지 않았습니다. 보수가 일당 지급이라 쉬면 끼니를 걸러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쉬더라도 다소나마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참으로 사소한 동기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1917년 10월 소켓을 출시했지만 판매가 시원치 않았고 제품에도 문제가 많았다. 품질 개선에 착수했지만 수익을 내지 못하던 12월, 선풍기 부품 대량 주문을 받아 기사회생했다. 주문이 안정되자 마쓰시타는 1918년 3월 7일 오사카시 기타구(北區. 오늘날 후쿠시마구) 오비라키 1번가 2층 목조 가옥을 빌려 마쓰시타 전기기구제작소를 창립했다. 직원은 마쓰시타 부부와 마쓰시타의 처남 이우에 도시오(산요전기 창업자)가 전부. 이날의 창업은 내쇼날, 파나소닉으로 유명한 연매출 7조 엔(연결기준)이 넘는 세계 굴지 기업의 출발이었다. 첫 히트 상품은 연결 플러그였다. 모양이 현대적이고 경쟁제품보다 30% 싸서 인기를 모았다. 그 다음 히트 상품은 전구 두 개를 끼울 수 있는 플러그. 이 상품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불경기도 헤쳐 나갔고 1923년 70평 규모의 공장도 지었다.
1929년 말 정부의 긴축정책으로 기업활동이 위축된 시기, 과잉재고와 자금부족에 시달리자 직원을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마쓰시타는 이렇게 결정했다. “오늘부터 생산량을 반으로 줄인다. 직원은 한 명도 줄이지 않고 월급도 전액 지급한다. 대신 모두 휴일을 반납하고 재고품 판매에 힘쓴다.” 직원들이 합심하여 노력한 결과, 두 달 만에 재고를처리하고 공장을 정상 가동할 수 있었다.
가볍게 도시락을 먹으면서 경영진 회의를 갖고 있는 마쓰시타
전후 40년대 말까지 부채가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세금도 내기 힘들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지 않던 인원감축을 단행한 당시를 마쓰시타는 ‘내 생애에 그 때만큼 원치 않는 일을 하며 괴로워한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마쓰시타는 PHP 연구 및 운동을 시작했다. 이것은 ‘번영을 통해 평화와 행복을(Peace and Happiness through Prosperity)’ 의 약자로, 일종의 사상계몽운동이다. 또한 마쓰시타는 1953년에 중앙연구소를 새로 설립하면서, “주체성 없이 무턱대고 배우려 하거나 자존감 없이 타인의 힘과 돈에만 의지하는 자는 나약한 자이며, 중요한 것은 스스로 고안하고 노력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 편 마쓰시타는 1964년 10월에 마쓰시타 통신공업이 사무용 대형 컴퓨터 사업에서 철수한다고 선언했다. 10억 엔 넘는 연구비를 투입한 상태여서 금전적 손실과 이미지 손상이 컸지만,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회사경영이든 뭐든 솔직하고 객관적인 마음으로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옳고 그름에 대한 현명한 판단이 자연스럽게 선다. 역시 자기성찰이 중요하다. 특히 경영자가 판단을 내릴 때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
사업이 확장일로에 있던 1930년대 초 마쓰시타는 기업가로서의 사명을 정했다. “좋은 물건을 싸게 많이 만들어 공급함으로써 가난을 몰아내 물질적 풍요를 실현하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1932년 5월 5일을 창립기념일로 정했다. 실제 창업 시기와 상관없이 사명을 깨닫고 정한 날을 창립기념일로 정한 것. 마쓰시타는 사명 달성기간을 250년으로 정했다. 25년을 1기로 삼아 10기에 걸쳐 사명을 달성한다는 유례없는 초장기 기업경영계획이었다. 이외에도 마쓰시타는 5개년 단위 계획을 세워 목표를 달성해 나갔다.
1956년에는 전기제품 수요의 폭발적 증가를 예측하고 향후 5년 간 매출액을 4배 늘려 800억 엔을 달성한다는 계획을 발표, 재계에 충격을 던졌다. 마쓰시타는 4년 만에 매출액을 1천50억 엔까지 늘렸다. 1960년 1월 경영방침 발표회에서는 5년 뒤 주5일 근무제 도입을 선언했다. “국가 간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직원 모두가 능률을 두세 배로 올려, 서양의 일류기업에 조금도 뒤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미국처럼 5일 동안 일하고 이틀은 쉬어야 합니다. 마쓰시타 전기가 5년 후 그런 모습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많았지만 계획대로 1965년 4월부터 주5일 근무제를 실시했다.
1962년 2월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한 마쓰시타
"일본기업을 한층 더 강하게 발전시키려면 경영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평소 끊임없이 경영 능력을 갈고 닦음으로써 외국 기업에 이를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영 자체가 본래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한데, 저는 이것을 경영은 예술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습니다.”(1967년 1월 경영방침 회의에서) 1960년대 중반 일본은 본격적인 개방경제체제에 들어서고 있었다. 마쓰시타는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어젠더로 경영 예술론을 펼치며 아래와 같이 말했다.
“예술은 매우 가치가 높은 창조 활동이다. 경영도 이에 못지않게 높은 가치를 지닌 창조적 활동이다. 경영자는 기본방침을 정하고 사람과 자본을 어떻게 조달할지, 어떤 공장을 지을지,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 팔지, 백지 상태에서 하나하나 정하고 균형을 잡은 다음 세심하게 배려하며 경영한다.
경영학에서 경영의 예술성은 가르치지 않겠지만, 나는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상식으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1952년 마쓰시타는 필립스와 기술제휴를 맺었다. 필립스가 선불금 55만 달러, 주식 30%, 기술지도료(로열티) 7%를 요구하자 마쓰시타는 필립스 측에 경영지도료를 요구했다. 결국 기술지도료 4.5%를 필립스에 내고 경영지도료 3%를 받기로 합의했다. “나는 제휴를 맺으면서 마쓰시타 전기의 경영가치를 인정받았다. 이제는 국내에서도 경영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다. 경영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더 높이면 경영자를 더욱 존중하고 경영을 좀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쓰시타는 1979년 일본의 차세대 리더 양성을 위해 사재 70억 엔을 들여 (재)마쓰시타 정경숙을 설립했다. “일본은 경제와 기술 분야의 세계적 파워로 떠올랐지만, 인류 번영과 세계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물질적 번영 뒤에는 사회, 문화적 가치와 도덕성 측면의 많은 혼란이 있습니다. 경제력에 부합하는 사회적 영향력이나 정치적 지도력이 결여되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나는 마쓰시타 정경숙 설립을 결정했습니다. 재능 있는 청년들에게 스스로의 보다 나은 미래는 물론, 일본과 세계의 보다 나은 미래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늘 젊게 살고 싶어도 나이 먹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몇 살이 되든 청춘 시절과 마찬가지로 매일 새로운 희망에 부풀며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몰두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청춘이란 마음의 젊음이다. 신념과 희망이 넘치고 용기에 차 매일 새로운 활동을 계속하는 한, 청춘은 영원히 곁에 있다.”
“판 매 담당은 상품에 관한 기술, 제조하는 사람이 들인 고심을 생각한다. 기술 및 제조 담당은 판매하는 사람의 노력에 감사하며 마음을 담아 제품을 만든다. 경리 담당은 1엔의 돈이라도 그것이 이익이 되기까지 기술, 구매, 제조, 판매, 그 외 모든 부문의 사람들이 흘린 땀의 결정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그것을 최대한으로 살려나간다. 이러한 서로의 노력 하나하나를 눈시울 뜨겁게 생각하고 이해하며 살려나간다. 그렇게 거둔 성과를 함께 기뻐한다. 이래야만 비로소 전체가 발전할 수 있다.”
1989 년 4월 27일 오전 10시 6분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성장일로를 걸어오던 일본 경제가 버블붕괴를 겪고 장기 불황으로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그의 죽음은 전후 일본 경제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리는 상징적 사건과도 같았다.
[영원한 청춘. 마쓰시타 고노스케 나의 이력서] 는 어린 시절과, 창업 때부터 은퇴한 뒤까지 중요한 사건과 결단을 중심으로 마쓰시타 자신이 서술한 일종의 자서전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 일본이 낳은 경영의 신] 은 100쪽 안쪽의 짧은 분량으로 마쓰시타의 기업가로서의 생애를 잘 정리한 책이다.
[경영의 마음가짐] 은 경영에 관한 마쓰시타의 잠언록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그가 평생을 통해 깨달은 원칙과 자세가 확신 넘치는 톤으로 펼쳐진다. 경영뿐 아니라 삶의 원칙과 자세를 배울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