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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의 한국 나들이]
배사장의 이름은 배 상종이다.
배사장은 고 미자씨의 남편이였고 센터의 창시자이고 창업자였다. 그는 인물 체격이 출중 할 뿐만 아니라 듬직하고 마음씨 고운 남자이다.
우리부부가 센터로 오기 조금 전에 배사장은 중국 연길로 갔었다. 박사장의 대동하에 너덧 사장님들이 힘을 모아 연길 산골농촌에 한국 독자기업 “한길 농장”을 꾸리고 배사장이 대표로 일을 보고 있었다.
연길 의란진 춘양촌 한 산골짜기에 8000m2되는 돈사를 짓고 규모가 상당한 현대적인 양돈장을 세웠다. 지금(06년말)에 와서는 당지 농민공 서른 넷을 쓰고 있고 存栏数(기르고 있는 수)는 7000마리, 고기돼지 매년 出栏数(내보내는 수)는 만 오천마리이다. 한길농장은 이미 연변의 선두 외자 기업으로 꿎꿎하게 일떠섰다. 모든 자금과 기술 및 시설들을 한국에서 가져갔고 웅돈의 정액도 고사장한테 와서 가져간다. 이렇게하여 당지의 기후, 자연 조건에 잘 적응하면서도 빨리 크는 육질 좋은 고기돼지를 길러낸다. 이번에도 배 상종사장은 웅돈정액을 가지러 연길에서 몇달만에 건너 온것이다.
20년전 한 보통 농가에서 20대 중반인 배 상종은 웅돈 두마리를 사놓고 혼자의 힘으로 정액 장사를 시작 하였다. 비바람 눈보라 속에서 건장하고 씩씩한 한 청년이 오토바이를 타고 흙사람 눈사람이 되여 산촌의 오솔길을 누비며 가가 호호 양돈호에 돼지정액을 배달하고 인공수정까지 시켜주는 모습을 지금도 펀히 보는 것만 같았다. “인공수정센터”가 오늘만큼 되기에는 배 상종씨의 얼마나 많은 피타는 노력이 슴배여 있으며 얼마나 많은 뼈 아픈 사연들이 담겨져 있는지를 우리는 상상도 하기가 힘들다.
“어머님도 달밤이면 이 아들 그릴테지! 아, 잠 못 드는 타향의 달밤이여…”
추석 전날 밤이다. 허리가 움직일 수 없게 아파보기는 난생 처음이라서 나는 저녁 반지술을 다른 때 보담 조금 더 하고 센터 밖으로 나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홀로 앉아 산정에 걸린 둥근달을 바라보며 눈물을 쏟았다. 할 줄도 모르는 노래로 기분을 잡아가며 둬시간 실컷 눈물 빼고는 돌아와 코를 골고있는 안해 곁에 아무일 없은듯 누워 흑흑 흐느끼다가 잠들었다. 어머님도 다시 못 뵙고 죽을 것만 같이 아팠던 것이다. 당장 어머님 뵈러 가려해도 통증으로 비행기에 오를 수 있을것 같지 못해 눈물이 났다.
아무리 모질게 아프더래도 돼지는 먹여야 했다.
목단강 리아저씨는 산에 떨어진 밤 한주머니를 주어가지고 추석 며칠전 서울에 사는 딸집으로 가버렸다. 일년 반 전, 그의 애지중지 하는 막내 딸은 서울에로, 나이가 좀 많고 소아마비증으로 다리를 좀 젏는다는 실랑한테로 시집을 왔고 반년 전엔 딸애를 낳고 아버지를 초청해 한국으로 모셔왔다. 스무한살인 그딸애는 실랑이 만들어 준 은행카드를 람용하여 이천만원을 빚 지었고 중국에서 온 아비는 그 빚을 물어 주겠노라고 피땀 흘리는데 중국에서 놀고만 있다는 스무네살 건달 아들은 돈 부쳐 달라고 전화가 끊이질 아니 한다. 계집애만 셋 낳고 겨우 얻은 아들이라 곱다고만 쓰다듬어 그 꼬라지임이 불보듯 뻔하다. 리아저씨는 서울에서 두달간 페물 장사군의 밀차를 밀어 주었는데 각전 한 푼 못 받고 이 센터로 온 것이라 했다.
그가 처음 왔을 때 고사장은 두달 후부터는 월 로임을 팔십만원으로 올려 주겠노라 강사기를 올려 놓았었는데 넉달째에도 그냥 칠십만원이니 기분 상해 가버린 것이다. 대머리에 왜소한 체구인 리아저씨는 나보다 다섯살 위일 뿐인데 60을 썩 넘긴듯이 겉늙어 보이는 불쌍한 농민이다.
“저 아저씨 샤워 좀 하라구 그러세유, 애들이 냄새 난다잖아유.” 호성이가 직접 그하고는 말 못하고 나보고 하는 말이다. 돈사의 일을 하다보니 옷이나 몸에 슴배인 그 냄새가 말이 아니라 날마다 샤워 해도 부족한데 그는 그런줄을 몰랐다. 그가 떠나는날 고개넘어에까지 배웅하고 돌아 서며 생각하니 본의 아니게 내가 그의 일자리를 빼앗은 것이라 기분이 퍼그나 서글프고 언짢았다.
날 밝기전에 일어나 사료를 주고 청소를 끝내면 애들이 배달 나간 후이다.
“아저씨, 왜 허리가 불편하시요?”
내가 허리를 붇잡고 힘들게 움직이는 모양을 배사장이 본 것이다.
“예, 조금 지나면 괜찮아 질겁니다.”
“다치셨어요?”
“아니요, 모르겠는데요.”
“이리와 엎드려 보세요.”
나는 그가 시키는대로 방바닥에 얼굴을 대고 큰 대(大)자로 엎드렸다. 배사장은 무릎 하나로 나의 척추를 지그시 누르고 두손으로 나의 오른 손목과 왼 발목을 잡아 들었다. 여나무번 들었다 늦추었다 하더니 왼 손목과 오른 발목으로 바꾸어 그짓을 한참 하였다. <남의 아프다는 허리를 아주 분질러버릴 작정인가?> “그만!”하고 나가려는 소리를 겨우 삼키며 나는 이를 악물고 극도의 아픔을 참고 뻗히였다. 전신에 땀이 흥건하고 정신이 멍해졌다. 나는 <내가 하도 견강하니 참는다, 아니면 어림도 없지!>하고 속으로 자위안 하며 내맏겨버렸다. 들어올릴 때마다 처음엔 “으음!” 하는 된소리가 저도모르게 터져 나오군 하던 것이 그 소리가 차츰차츰 가늘어지고 사라졌다.
그와 반면에 등뒤 숨소리가 갈수록 거칠어 지더니 나의 손 발목을 놓아버리고 손바닥에 힘을 주어 척추뼈를 아래 위로 꿍꿍 몇번 눌러주는 것이였다. “됐어요, 천천히 일어나세요.”하니 나는 “수고 하셨습니다.”하며 일어나 앉았다. 헌데 이것 참 나 원, 전혀 아프지가 않았다. 일어서서 허리를 좌우로 뒤틀어 보기도 했다. 언제 아팠더냐 싶게 멀쩡 해졌다. “어머니ㅡ”를 목놓아 부르며 홀로 울던 전날 밤이 못내 우수웠다.
“좀 괜찮으세요?” 배사장이 화장실에 들어가 땀을 씻고 나오면서 묻는다.
“예, 아무렇지도 않게 되였네요. 참으로 귀신이 곡 할 노릇입니다!”
“다행이네요, 일 할 때 허리 조심해얍니다. 나이 드시면 다 튀여난대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실로 자기의 허리를 아낄줄 몰랐다. 일을 해도 멍청스레 하는 편이다. 얼마전 분변 처리 진공뽐프를 다루면서 허리를 풀떡 놀래운 일이 있었다. 뽐프의 무게만은 4-50kg쯤 될 것이나 그것을 뜯으려면 모터와 고정틀까지 대개 150kg쯤 되는 물건을 다 움직여 끌어내야 했다. 그렇다고 누구의 방조를 청 할 줄도 모르고 혼자 하는 멍청이다. 어리다면, 또 사람들 앞에서라면 혹시 힘 자랑이나 하고 잘 하는척 하는 짓이라고나 하겠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니니 답답하다.
옛날 갑산에서 감자 캘 때 사람들은 나를 “한초대”라 불렀다. 초대(草袋)란 벼짚으로 짠 가마니를 이르는 이고장 말이다. 7-80도 가파로운 양지쪽 뙉밭의 감자를 캐서는 가마니에 담아 메고 산마루에까지 기여 올라가 달구지에 싣는다. 그래야만 산북에 난 뉘연한 길을 에돌아 끌고 내려 올 수 있는 것이였다. 나보다 썩 더 우둑진 청년들도 죄다 반가마니씩 져 올리는데 나는 시종 한가마니씩 지여 날라 그런 별명을 가졌다. 그때 “한 하지”라는 별명도 가진 일이 있다.
집체화 그때엔 어쩌면 일 축이 그리도 안 났던지? 논두렁이에 무져놓은 벼단들이 눈속에 묻히게 될라치면 등짐으로 몇 백메터 져서 길가에로 내온다. 그래야 늦어져도 아무때건 달구지로 실어서 탈곡장에까지 운반 할 수 있는 것이였으니깐. 그런데 다른 애들은 모두 열단 아니면 반하지씩 지고 다니는데 나는 무조건 한하지인 32단씩 지고 다녔다. 그때로부터 허리병을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배사장이 권유하듯이 지금부터라도 자기의 허리를 아껴야 할 것이다. 나는 뭐나 이렇게 “행차뒤에 나발(马后炮)”이다.
추석이면 우리 민족으로선 큰 명절이라 애들은 다른 날보다 일찍이 배달 나가고 점심전으로 각기 모두 부모님 계시는 자기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튿날 새벽에 그들이 출근하기 전까지는 우리 둘 뿐이다. 우리는 족족하고 섭섭한대로 센터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부천에 계시는 큰 누님한테나 가서 조카들이랑 카드나 고스톱을 치다 오든가 아니면 서울에 계시는 윤현형 집에라도 찾아가 고모님 뵙고 술 한잔 나누고 돌아 오든가 하고 싶었는데 더 생각 할 여유도 없이 고사장이 선수를 써 “아저씨 아줌마, 부탁 할께요.”하는데 어찌 “아니요”를 부른단 말인가? “안심하쇼, 사장님!”라고 하는 수밖에.
안해는 북면 슈퍼에 전화를 걸어 술이랑 고기랑 두부랑 가져오고 논두렁이에 난 미나리도 캐다 무치고 처음으로 둘이서만 쇠는 타향의 추석이라 서운함이 없도록 아름답고 재미나는 추억을 만들려고 분주히 돌아쳤다. 연길에서는 형제 자매들이 어머님을 모시고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 추고 카드나 마작을 치며 흥 나게 놀 것이다. 추석 쇠고 며칠 안 가면 중국의 국경절이고 장모님의 진일이시다. 우리는 아무곳에도 갈 수 없다. 나는 원래 형제자매들과 모여앉아 술 마시고 놀음 놀기를 너무나도 좋아했었는데…
나는 한달에 두날씩 휴식일을 가지게 되여 있었다. 헌데 센터에서 쉬여선 뭘 하게? 하여 달 평균 하루씩 노는데 그날이면 나는 안해와 함께 데이트 하러 배달 나가는 애들 차에 앉아 밖같 세상으로 간다. 린근의 목천에도 가고 진천에도 가고 사천에도 가고 병천에도 갔었다. 그곳 지명은 왜서인지 천(川)자를 부친 것이 많았다. 뭐 그다지 큰 강이 있는 것도 같지 않는데 말이다. 지도를 펼쳐 놓고 볼라치면 부천, 용천, 이천, 선천, 서천, 순천, 과천, 옥천, 제천, 포천, 연천, 영천, 웅천, 합천, 화천, 홍천, 김천, 웅두천 등등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혹시 샘물 천(泉)자나 하늘 천(天)자를 썼는지도 나는 알 수 없다. 중국에는 주(州)자를 부친 지명이나 성시명이 많다. 귀주, 광주, 온주, 항주, 정주, 소주, 양주, 덕주, 란주, 창주등등 기수부지이다. 옛날엔 중국 약명을 주(州)라 하였다고 하니 주자를 단 지명이 많은 것인지 모른다. 미국은ㅡ미, 한국은ㅡ한, 중국은ㅡ중이라 하는데 지금도 가끔 신주라 쓸 때가 있다.
우리는 먼저 리발소에 들리여 칠천원이나 팔천원을 내고 나의 머리를 곱게 짜른다. 리발소에서 나와서는 슈퍼에 들리여 생활 용품도 사고 옷도 사고 센터 일에 쓸 공구도 사고, 장날이면 장 구경도 하고 엿가락도 사 먹는다. 그다음은 안해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저금소에 들리는 일이다. 우리는 달마다 두사람의 많지 않은 로임을 큰 누님의 계좌에 적금 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나의 중요한 과제만 완성하면 센터로 돌아온다.
우리는 문이 제일 크고 간판도 제일 큰 음식점으로 들어간다. 물론 우리가 간 곳은 어느 곳이나 천안시에 소속된 작은 면마을이라서 음식점들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큰 것으로 찾아 들어가는 것이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였다. 작은 음식점에 들어간다하여 적게 먹거나 큰 음식점에 들어간다고하여 많이 먹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해물찜이나 갈비찜 하나에 밥 두그릇 그리고 소주 한병이면 끝이다. 뭘 더 청하고자 해도 청할 것도 없고 필요도 없다.
꽃계찜 하면 자그마한 계 둬마리 쪼개 넣고 콩나물 듬뿍 넣고 야채 듬뿍 넣고 부글부글 끓이면서 먹는건데 죽어 나가 자빠진다고 해도 둘이서는 다 먹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다 순두부 찌개라던가 칼치구이 같은걸 더 청해서는 뭘 하겠는가? 김치라든가 미역무침같은 밑반찬은 모자라면 더 요구 할 수 있게 되여있다. 거기에서는 거개가 전문점이다 보니 연길에서 흔히 보는 메뉴판 같은건 없고 흰종이에 크게 써서 문이나 기둥이나 벽에 몇조목씩 부쳐놨을 뿐이다.
나가 놀던중 병천면이 조금 컸다. 면이라면 여기 향이나 같은건데 병천에는 대학교도 둬개 있고 아주 소문난 순대도 있었다. 병천 순대가 전국에 소문 난 것이라면서 한번은 호성이가 우리네한테 일부러 사들고 들어왔었다. 나의 구미엔 맞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맛 없는 먹거리라하면 나는 주저없이 그것을 꼽을 것이라 생각 된다. 안해도 못 먹을 것이라고 야단이다. 순대 속이라는 것이 당면과 시래기 뿐이고 조미료도 우리가 중국에서 맛들인 것과 완전히 다르니 그럴 수 밖에는… 자료에 보면 “순대 속에는 들깨, 배추, 찹쌀, 마늘, 파, 고추, 당면 등 15-20가지 양념이 들어간다.”고 썼고 그래서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 장터에 위치한 순대촌을 찾아가면 훈훈한 충청도 인심과 함께 단백하고 고소한…” 맛을 선사 할 것이라고 씌여 있다.
뭐든 글이나 화면을 보면 군침 나지만 먹어보면 그것이 그것이다. 몰라, 호성이가 잘못 골라 사온 것이였던지 아니면 식어버려서 그런 맛이였는지도. 아우내 장터는 옛날 독립운동 때 유 관순렬사가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고 체포된 혁명 유적지라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아닐지, 그래서 수수한 순대 또한 높이 뜨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우리 민족의 맛, 민족의 자랑이라 하는 김치와 된장이 멀어지기 시작한다. 옛날엔 김치와 된장으로 살았다. 지금 애들은 옷에 냄새가 옮는다고 꺼려한다. 옛날엔 그 냄새 속에서 살았는데 말이다. 된장을 담구자면 큰 가마에 콩을 삶아야하고 김치를 담구자면 김치움이 있어야 한다. 헌데 사회가 발달하면서 그런것들이 없어지고 있다. 공장에서 생산하는 김치거나 된장도 나오고 김치 랭장고도 따라 나오고 있지만 그맛은 재래식으로 어머님께서 손수 해주던 것과 비기면 왜서인지 천양지별(天埌之别)이라 어른들도 맛을 잃고 있다. 그맛이 아니라서 전국의 으뜸이라는 “병천순대”가 우리 입에 맞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서울이나 제주도에서까지도 그 순대 소문에 귀가 벌쭉하여 군침 흘리며 찾아 온다고들 하는데 우린 장거리에서 “병천순대”라든가 “순대국집”이라고 제목을 달아놓은 집만 보면 멀리로 에돌아 가 “곱창전골”간판을 건 집을 선호로 하였다. 비록 곱창은 적게 넣고 지저분한 소위와 콩나물을 듬뿍 넣고 끓였지만도 얼큰하고 뜨끈하고 구수한 맛이 순대보담은 퍼그나 좋았다.
물론 갑배처가 우리집에 왔을 때 끓여 준 것 보담은 말도 안되지만은. 정심을 먹은 후 뻐스를 타고 북면까지와 북면에서 센터까지 걸어 건너 올 때도 있지만 거개는 미리 약속 해둔 아이가 배달일을 끝내고 우리를 실으러 온다. 일이 일찍 끝나 정심전에 우리한테로 왔을 때엔 그아이가 돈을 내기도 하고 우리가 돈을 내기도 하고 간단한 것으로 함께 먹고 돌아온다. 애들과 우리는 언제나 식구처럼 스스럼 없이 보냈기에 추석이라고 우리 둘만 있으려니 더욱 적막하고 고독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한창 점심상을 갖추고 있을 때 뜻밖에 반가운 손님들이 몰켜왔다. 윤현형님께서 차를 몰고 형수님과 제수씨(윤현형님부인과 흥현동생부인) 그리고 나의 큰 누님까지 모시고 우리 뵈러 오셨던 것이다. 큰 누님께선 여러가지 과일도 사오고 “참이슬”표 흰술도 한박스나 사오셨다. “이 한박스만 다 마시고 뚝 끊어라, 끊어.” 동생이 산골 농장에서 일을 한다 하니 그토록 좋아하는 술도 못 얻어 마시는것 같아 불쌍히 여기면서도 술에 너무 집착함을 아는지라 상할까 걱정 하시는 나의 누님이시다.
우리들은 정심을 먹은 후 나의 안해만 집에 남겨두고 밤 주으러 산으로 올라갔다. 60세가 다 되신 윤현형은 날파람이 살아 있었다. 매끄러운 밤나무에 날래게 기여올라 통채로 흔들어대면 밤이 우박 쏟아지듯 우수수 떨어진다. 리씨 아저씨와 함께 여러번 밤 주으러 다녔지만 우리는 한번도 나무에 올라가 볼 념을 못하고 땅에 저절로 떨어진 것만 줏군 하였다. 군대에 갔었다는 것이 농사 짓고 돼지 먹이다 총도 몇방 못 쏴 보고 돌아온 놈이니 베트남 전장에서 날뛰던 특종병 형님과는 상대도 안 될게 뻔연하다.
밤 줏는 재미가 별 재미라 누구도 모르는 사이 해가 서산머리에 다았고 돼지밥 줘야 할 시간이 되였다. 큰것들만 골라 모아둔 밤 한주머니를 형님 차에 실었다. 먼지에 묻혀 산굽이를 돌아서는 차를 바라보며 마음은 다시 허전해졌다.
이튿날, 누님네 몇분이 오셨다가 뵙지 못하고 문안만 남기고 가셨노라 고사장과 말했더니 자기에게 왜 전화라도 하지 않았느냐고 퍼그나 서운해 하였다. 고사장 그녀는 그렇게 다정다감하고 곧은 성격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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