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9일 서울 한양도성 제4코스 인왕산 구간을 답사하였습니다.
역사현장으로 중요한 곳이어서 가족과 자녀들과 함께 한 번 가보면 좋겠습니다.
2015년 5월 29일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경복궁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가 7212번 버스를 타고 윤동주문학관 앞에서 내렸다.
길 건너편에 건물이 보여 횡단보도로 건너 문학관으로 들어갔다.
제1전시실에서 이명숙 문학관 해설자로부터 해설을 듣는 도중 영상 관람 시간이 되어 중단하고 제3전시실인 영상관에서 영상을 본 후 다시 제1전시실에서 이명숙해설자의 설명을 계속 들었다.
윤동주문학관은 본래 청운현대아파트 주민을 위한 “청운수도가압장”이었는데 이 수도가압장을 현존 그대로 종로구청이 건축가 이소진에게 의뢰하여 2013년 재건축한 공공건축물로 2014년 건축대상을 받았다고 한다.
제1전시실은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는 곳으로 윤동주의 일대기를 볼 수 있다.
제1전시실에서 이명숙 문학관 해설자로부터 해설을 듣는 도중 영상 관람 시간이 되어 중단하고 제3전시실인 영상관에서 영상을 본 후 다시 제1전시실에서 이명숙해설자의 설명을 계속 들었다.
윤동주문학관은 본래 청운현대아파트 주민을 위한 “청운수도가압장”이었는데 이 수도가압장을 현존 그대로 종로구청이 건축가 이소진에게 의뢰하여 2013년 재건축한 공공건축물로 2014년 건축대상을 받았다고 한다.
제1전시실은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는 곳으로 윤동주의 일대기를 볼 수 있다.
발간된 책의 겉표지(영인본)를 한 곳에 묶어 전시하고 있으며, 창씨개명 자료와 사진 등과 새롭게 용정의 우물과 같은 우물 모습을 전시하고 있어 볼 수 있다.
제2전시실은 열린 문으로 부르며 천정이 열려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제3전시실은 닫힌 문으로 명명하고 영상감상실로 운영하고 있다.
영상과 윤동주문학관을 해설하기 위해 연구를 많이 한 이명숙 해설자로부터 시인이며 인간인 윤동주의 생애를 자세하게 들을 수 있어 매우 감명 깊었다.
아직까지도 위안부 문제를 사과하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을 발발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한 일본, 윤동주를 요절하게 한 일본이 더욱 증오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더욱 우리의 대한민국을 강국으로 만들어 일본을 뛰어넘어 세계 열방에서 위대한 국가로 세워야 한다는 책임감을 통감했다.
특히 후손이 없는 윤동주문학관이 세워지기까지는 동생 윤일주와 조카 윤인선, 하숙생활을 함께 했던 정병욱과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국민의 힘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국민과 서울은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증조할아버지 윤재옥을 따라 함경북도 종성에서 간도 자동(子洞)으로 이주하여 할아버지 윤하현장로가 명동촌(明洞村)으로 옮길 때 파평윤씨 가문은 이미 부잣집이 되어 있었다.
1917년 12월 30일 아버지 윤영석, 어머니 김룡 사이에서 태어난 윤해환(尹海煥: 필명 東柱)는 외삼촌 김약연(金躍淵)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소학교 때부터 시를 쓰면서 잡지를 제작하다가 18세부터 시작 활동을 했다.
평양 숭실중학교에 편입하였으나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가 폐교되어 문익환과 함께 용정의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여 정일권 등을 만나게 되고, 법대나 의대 진학을 바라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여 기숙사와 하숙 생활을 반복하다가 현 문학관이 있는 김송소설가의 집에서 그의 자필 시집을 보관, 출간한 정병욱(鄭炳昱)친구와 함께 하숙생활을 하면서 저녁에 하숙집 근처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짓거나 담론을 하였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10월에 시인 정지용이 다닌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편입하였다.
1943년 7월, 귀국 직전에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아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광복을 앞둔 1945년 2월 16일, 27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福岡刑務所)에서 의문의 주사를 맞고 생을 마쳤다.
서울숭실고등학교에서는 명예졸업장을 추서했고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과
국민훈장을 추서했다.
유학에 뜻을 둔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 1941년 윤씨를 히라누마(平沼)로 개명하게 되었으나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것이었으며 개명 후 그는 매우 괴로워하여 창씨개명계를 내기 닷새 전에 창씨개명에 따른 고통과 참담한 비애를 그린 시 “참회록”을 썼다.
남동생 윤일주(尹一柱)의 아들 윤인선(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은 조카,
하숙생활을 함께 했던 정병욱은 사돈,
당숙 윤영춘(尹永春)의 아들 가수 윤형주는 재종형제.
이 분들이 계셔 윤동주문학관이 세월질 수 있었고 우리들이 이를 기릴 수 있음에 감사드린다.
윤형주문학관을 떠나 시인의 언덕에 참석자 전원이 다시 모여 서울시 담당자와 꼼꼼한 서울씨로 활동하면서 서울역사박물관 한양도성 탐방강사인 신치호 안내자와 인사를 나누고 일정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창의문을 바라보며 돈의문터까지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 3.9Km를 향해 출발했다.
신치호 안내자는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에서 윤동주기념관 리플렛과 종로구청 문화체육과와 중구청문화관광과에서 제작한 서울 한양도성 관광안내지도를 특별히 수집하여 참석자들에게 배포하여 갈채를 받았으며 창의문에서 돈의문터까지 답사할 때 설명할 자료를 만들어 자신이 수집한 자료와 연구를 참석자들에게 잘 전달하고자 노력하였음을 알게 되어 책임감이 강하다고 생각했다.
걸으면서도 계속 열심히 설명을 해 주었다.
개인별로 리시버를 나눠주어 걸으면서 설명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어 너무 편리하고 좋았다.
창의문에서 돈의문터까지 3.9Km 2시간 15분의 거리는 길지는 않지만 바위 사이를 조심해서 가야할 곳도 있어서 쉽지만은 아닌 곳인 것 같다.
쉬엄쉬엄 경관도 구경하며 사진도 찍으며 설명도 들으며 답사하는 길은 험난했다고는 하지만 보람있는 하루였다고 생각한다.
서울 한양도성을 걷기 위해서는 특히 보안 관계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하고 사진 촬영 금지 구역도 있으므로 이런 규제에 따라 행동을 해야 한다.
보안을 위해 근무하고 있는 근무자들은 보안에만 업무를 전념하는 것도 좋지만 근무지 부근의 PET병이나 비닐, 종이 등 쓰레기도 줍는 마음을 가지고 근무하면 좋겠다. 주변에 이런 쓰레기들이 보이면 눈살이 찌푸러지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누가 하라고 시켜서 하기보다는 자발적으로 하면 얼마나 좋을까? 참석자 전원 사고없이 일정을 소화해서 천만다행이었다.
예정 시간보다 늦게 경교장에 도착하여 답사를 마쳤을 때는 6시가 다 되었다. 무사히 오늘의 일정을 모두 마친 것에 감사하며 서로 헤어졌다. 함께 식사 자리도 갖지 못하고........
윤동주문학관 제1전시실에는 서시를 배경음악으로 깔아주면 더욱 좋겠다고 생각했다.
배포된 자료 2014년 12월 제작한 “서울 한양도성 관광안내지도”에 “딜쿠샤” 보존물에 대한 안내표시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표시해 주기 바라며 현재 거주하고 계신 분들이 생활하고 있어 주춧돌 사진도 찍을 수 없었고 노출된 도시가스배관시설, 노후된 외벽 등 관리가 안 되어 볼썽 사나왔다.
수리 보수해야할 곳이 많은 것 같은데 빨리 거주자와 서울시, 중구청이 문제를 해결하고 온전하게 보존되고 관람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3.1운동과 관련된 딜쿠샤를 지은 테일러 부자의 역사관으로 개관되길 기대한다.
이씨조선 600년과 한양 도읍 800년은 고스란히 역사로 남아 있는 현장이다.
이런 도시에 살고 있는 나 자신은 너무도 행복할 뿐 아니라 긍지를 갖게 한다.
서울시 자원봉사자로 봉사하여 금장까지 받고, 청계천변에 기념 타일을 기증하며 서울시정모니터로 활동하면서 사는 즐거움이 나를 너무도 행복하게 한다.
이런 위대한 도시를 자원으로 삼아 세계 만민에게 대한민국 5,000년 문화와 역사를 보여 주고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알려야 할 것이다.
서울 한양도성 스탬프투어가 있어 4개 코스를 모두 종주하면 기념뺏지를 준다고 하는데 이 번 참여한 분들에게도 미리 이에 대비하도록 스탬프 북을 배포하였으면 다른 코스를 종주할 때도 도움이 되고 좋았을텐데 이를 놓쳐서 아쉬웠다.
4코스 인왕산 구간 중 돈의문에서 숭례문까지 1.4Km를 걷지 안하여 스탬프 찍을 자격이 없나요?
4코스를 금년에 모두 종주해볼 계획이다.
성곽 개축이 거의 끝났다고 보는데 자료를 확인하지 않고 복원하여 잘못된 곳을 신치호 안내자가 지적해 주었다. 앞으로 역사보존물을 수리, 개축할 때는 전문인들과 합력하여 한치의 오차도 없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잘못 개축된 곳을 다시 헐고 고칠 수 없으니 잘못 개축했다고 설명하면서 100년, 200년 동안 후손들에게 전해야 할 것 같다. (예. 鳳山上末에서 봉산상은 붙어있는데 말이 떨어져 있다.)
간혹 사고 예방을 위해 로프를 연결할 계획으로 지주만 설치한 곳이 있는데 차일피일 미루지 말고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빨리 로프를 연결하기 바란다.
현장 답사 사진을 몇 장 올린다.















첫댓글 즐감하며 좋은 공부도 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먼 곳보다는 서울 도성 전 구간을 종주하는 계획을 세워 시행하면 어떤지요?
매월 마지막 토요일로 .......셋째 토요일, 일요일 행사는 참여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