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산소에 ‘치킨’을 올리다
- ‘예출어정(禮出於情), 제여재(祭如在)’의 의미를 되새기며 -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아버지 돌아가신 지 46주기(周忌)를 맞았다. 마침 일요일이다. 하루 전날 가족 채팅방에 ‘가정사(家庭事) 알림’을 올렸다.
“내일은 너희 할아버지 기일(忌日)이다. 온갖 꽃이 만개한 계절이니, 칠갑산 가는 길 맑고 향기로운 바람도 쐴 겸 간단한 제물을 준비하여 성묘를 다녀오려고 한다. 너희 할아버지께서는 생시에 닭고기를 좋아하셨는데, 올해엔 ‘가장 맛있는 치킨’을 준비해 가려고 한다. 날씨가 좋으면 산소에서 소풍 기분으로 점심도 먹고 올 계획이다. 다 같이 참례하면 좋겠다.”
전통적으로 우리 가정에서는 부모님 기일에 성묘하러 가면서 간단히 주과포(酒果脯)정도 준비한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께서 생시에 닭고기를 좋아하셨던 것을 잘 알기에 통닭을 꼭 빠뜨리지 않았다.
올해도 역시 통닭을 준비하려고 하니, 좀 번거로운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제례 음식은 후손이 정성을 들여 만들어야 마땅한 일이지만, 기온이 상승하는 계절에 집에서 삶은 통닭은 원거리 이동 과정에서 자칫 상할 수도 있어 매년 은근히 걱정해 왔던 터다.
치킨을 준비한다고 하니까 신세대 아들도 좋아했다. 치킨 역시 조리 방법만 다를 뿐 성분이 똑같은 닭고기이니, 제례 음식으로서 예에 벗어나는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냥 ‘보통 치킨’이 아니라 ‘가장 맛있는 치킨’이라고 가족 채팅방에 이채롭게 공지하니, 성묘 가는 길이 마치 소풍 가는 것처럼 가족들의 기대감도 상승하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올해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 손자도 함께 성묫길에 나섰으니, 치킨 음식은 모두가 환영하는 최상의 산소 음식으로 꼽혔다.
양지바른 곳에 잠드신 부모님의 산소는 해마다 가족의 담소 장소가 된다. 매년 눈물과 한을 쏟아내던 슬픔의 장소가 세월이 차츰 흐르면서 가족간의 따뜻한 정을 오붓하게 나누는 화기애애한 장소가 됐다.
자손들이 오순도순 모여 앉아 부모님 음덕을 기리고, 경건하게 추모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한편으로는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는 정다운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도 생시에 어른들이 소망하셨던 일이다.
산소 앞에 돗자리를 펼치면 마치 '가족 소풍'을 온 기분을 느낀다.
▲ 부모님 산소가 어린 손자에게는 놀이마당이었다. 소풍온 기분으로 뛰어 놀고 즐기는 손자의 모습을 부모님께서도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것만 같다. (2021.04.04. 오후, 충남 청양 선산에서)
올해는 부모님 산소 앞에서 색다르게 준비해 간 치킨을 먹으면서 문득 돌아가신 장형이 생각났다. 한평생 교육자로 살아오신 장형(윤길원 1932~2010)은 향토사학자이자 문인으로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중에서 《옥천의 효자 충신 이야기》 (2001년, 필자 윤길원)는 지금도 많은 독자가 기억하는 유익하고 흥미로운 향토사(鄕土史) 책자다. 장형이 생시에 충북 옥천지역 43명의 효자, 충신, 열녀의 일화를 상세히 채록하여 기술해 놓았는데, 삶의 귀감이 될만한 유익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 필자의 장형(윤길원)이 저술한 《옥천의 효자 충신 이야기》(옥천군, 2001년)
아버지 기고 일에 산소에서 치킨을 먹으면서 특별히 떠오른 사람이 이 책 속에도 등장하는 ‘유학자 손대창 효자’(1752년 영조 28년, 옥천 군북면 출생)이다.
나의 장형은 집안 장손으로서 모든 제사를 주관하면서 부모님 기고(忌故) 때마다 동생인 내게 ‘효자 손대창’의 감동적인 효행 일화를 자상하게 들려주었다.
『역천(櫟天) 송명흠(宋明欽)이란 유학자가 옥천에 살면서 문하(門下)에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그중에서 손대창이란 효자가 있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다른 학동들은 모두 시원한 그늘에서 책을 읽으며 공부하고 있었지만, 손대창만은 유독 뙤약볕이 내리쬐는 곳에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
역천 선생이 괴이하게 여겨 손대창 학동에게 물었다. “너는 왜 하필이면 햇볕이 따가운 곳에서 책을 읽고 있느냐?” 그러자 손대창이 대답했다.
“제 아버지는 농부이기 때문에 지금 이 무더위에도 쉬지 않고 논밭에서 땀 흘리면서 일을 하고 계시는데, 소자가 어찌 시원한 그늘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역천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사람됨이 범상치 않음을 짐작하였다.
유학자 손대창 효자는 제사 지내는 절차에도 남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 제삿날이 되면 큰 개 한 마리를 잡아서 개장국을 끓여 큰 뚝배기와 바가지에 담아 아랫목에 놓고, 지방이나 축문도 없이 그저 여러 번 정성껏 절을 하면서 “아버님 따뜻할 때 많이 드십시오.”라고 되풀이했다.
그의 이러한 괴이한 제사법에 대하여, 역천 선생(그의 스승)이 듣고는 그 연유를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제 선친께서는 생시에 따뜻한 아랫목에서 지내셨으니 신위를 아랫목에 모시고, 생시에 제일 좋아하신 음식이 개장국이셨으니 그리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제 선친께서는 평생 글을 알지 못하였으니, 지방이나 독축은 알아보시거나 들으시지도 못할 것이므로 그리하고 있으며, 평소 음식은 따뜻할 때 드시기를 좋아하셨고, 큰 그릇에 많이 담아 격식 차리지 않고 잡숫는 것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그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역천 선생은 고개를 끄떡이면서, “예출어정(禮出於情)이며 제여재(祭如在)라, 번잡한 허례보다는 살아계실 때 대하듯 함이 오히려 효(孝)니라.”고 하였다.』 - 《옥천의 효자 충신 이야기》 한 대목(필자 윤길원)
*예출어정(禮出於情) : 예(禮)는 인간의 감정과 인정에 순응한 것이지, 형식에 치우치고 체면에 의지함이 아니다. *제여재(祭如在) : 조상의 제사를 모실 때는 앞에 계신 듯이 한다. (논어)
매년 자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살아 계실 때 효를 다한 사람이 제사도 잘 모시는 법이다. 후세에 추앙받는 효자 손대창도 필시 그랬으리라 충분히 짐작된다. 살아 계실 때 이런저런 사정으로 효를 다하지 못한 사람이 돌아가신 후에 제사를 잘 모시는 것은 용서를 비는 일이지, 진정한 효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평소 드시지 못했던 음식을 사후에 푸짐하게 잘 차려 놓고 절을 하는 것은 자신의 못다 한 도리를 반성하면서 자손들에게는 답습하지 말라는 가르침의 의미도 포함돼 있다.
매년 똑같은 방식이지만 올해에도 한문 축문을 먼저 읽고, 별도로 작성해 간 한글 축문도 읽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은 한문 축문에 익숙하신 분들이고, 신세대 자식, 며느리, 손자들은 한글 축문을 읽어야 이해하기 쉽고 가슴으로 느끼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한글 축문 내용 중에는 한 해 가족들의 삶의 모습을 짧게나마 언급하는 것은 오늘 누리는 자손들의 모든 행복의 근원이 부모님 음덕이라 믿기 때문이다.
손자가 치킨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봉분을 향해 아버지께 한 말씀 드렸다.
“아버지께서도 치킨 맛이 색다르셨지요? 맛이 괜찮으시다면 제가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맛있다고 소문난 치킨을 매년 사다 올릴게요.”
산소 앞에서 음복주와 치킨을 먹으면서 우리 가족은 환하게 웃었다. 한없이 가라앉은 착잡한 심정으로 매년 똑같이 돌아가신 분을 엄숙히 추모하는 자리였지만, 오늘은 '치킨'이란 생소한 음식이 새로운 얘깃거리가 되다 보니 웃음꽃도 피어올랐다.
한평생 허리 휘게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분이다. 드시고 싶은 음식 한 가지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셨다. 그런 힘든 세월이 있었기에 오늘날 자식, 손자들이 행복을 누리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산소에 오면 생시 모습 대하듯 소박한 음식 한 가지라도 평소 좋아하셨던 것을 드시게 해서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그 옛날 유학자 손대창 효자가 몸소 실천한 것처럼 ‘예출어정(禮出於情), 제여재(祭如在)’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본다.
2021. 4. 4.
윤승원 성묫길 단상 記
※ 餘錄 : 멧돼지가 산소 여러 군데를 훼손하여 크게 걱정했으나 장조카가 전문 일꾼을 동원해 사초를 공들여하고, 인조 망으로 산소 전체를 철저히 둘러치는 등 안전장치를 잘하여 안도했다. 장형이 돌아가신 뒤 장조카가 지극 정성 효심으로 산소 관리를 철저히 해주고 있으니, 고맙기 그지없다. 저 높은 곳에서 존경하는 장형도 장조카의 세심한 산소관리를 흡족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계시리라 믿는다.
첫댓글 "부모님 산소에 키친을 올리다" 주제가 본 글을 읽기도 전에 눈길을 사로 잡습니다. 3대가 모여 부모를 대면했으니 금년 한해는 하시는 일마다 만사형통하리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치킨은 처음 드시는 닭고기 맛이라 선친께서 무어라 말씀하실지 조심스럽게 귀 기울여 봅니다.
필경 오늘 밤 선친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제게 무슨 말씀이든지 꼭 하실 것입니다.
3대가 함께 참례한 가운데, 제가 크게 독축을 하니, 그 어느 해보다 기일 추모의 의미가 컸습니다.
복 선생님이 따뜻한 눈길로 칭찬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장천선생! 윤리를 새롭게 실천해가는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도 큰 영향을 줄것으로 믿습니다. 4월4일은 저의 집안에서는 한식차례로 선조에게 제사를 올려야 하나 코로나로 가을 시향으로 미루어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제사에서 틀에 박힌 제물 차리기를 간략하게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나 여러 사람의 뜻을 맞추기가 어려워 아직 실천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모님 기일 제사에 새로운 방식의 제물 차리기와 독축의 자리를 마련하심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정 교수님께서는 전통 제례 문화에 늘 앞장 서고 계시는 분입니다.
한글 축문 독축에서부터 조상님들과 후손과의 연결 고리인 제사를 모시는 일과
고향에 사효당을 짓고 가문의 전통을 빛나게 하시는 정 교수님의
효심은 늘 제게도 큰 가르침이 되고 있습니다.
따뜻한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 문학평론가 송하섭 교수(전 단국대 부총장) 카카오톡 답글
◆ 답글 / 송하섭 교수 2021.04.05. 07:44
식목일 새벽, 윤 선생님의 주옥같은 글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흔히 문학의 기능으로 쾌락과 교훈을 말하지요. 즉 즐거움과 가르침을 준다는 것인데 선생님의 글에는 이 두 가지 기능이 조화롭게 융합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사실 효 문화의 중심에 있는 제례와 산소 문제가 앞으로 큰 과제입니다. 제물에 대한 선진적인 실천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형식보다는 정성.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집은 아버님께서 기독교인으로 사셔서 추모예배로 의식을 치르고 성묘합니다.
특히 부모님 추모예배에는 그분의 생애를 기록한 약사를 읽어서 어린아이들이 추모하는 분을 이해하도록 하고 있는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젯상 앞에서 절을 하면서도 그분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그저 형식적으로 지내는 경우가 많지요.
살아서는 무식해도 죽어서는 유식해진다는 말도 있었지요. 망자는 글을 모르는데 제문은 한문으로 써서 읽는 것을 풍자한 말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의 이 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건필을 빕니다. 그저 제 소견입니다
◆ 필자 윤승원 답글 2021.04.05. 08:25
송 교수님은 역시 제게 큰 가르침을 주시는 이 시대 큰 어르신입니다. 어제 산소를 다녀와서 현장에서 느꼈던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쓴 글입니다. 그래서 여과되지 않은 감정도 들어간 부족함이 많은 졸고입니다.
그런데도 따뜻한 격려와 함께 제가 미처 언급하지 못한 현실적인 제례 문화까지 담아 귀한 답글 주시니 우리 가족은 물론 전통문화를 중시하는 많은 독자와도 공유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선친 기일에 이런 소감을 신속히 글로 적은 목적은 멀리 사는 조카들과 몸이 불편하여 제례에 참례하지 못하신 누님과도 함께 공유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송 교수님의 귀한 가르침이 더 보태졌으니 저의 졸고는 우리 가족에게 대대로 귀하게 전승될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번 달엔 어머니 기고도 있으니 송 교수님 귀한 말씀을 산소에 가서 부모님께 상세히 보고 드리겠습니다. 선친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일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