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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11:50 출출하기도 하고 손님이 딱 끊겨서 차이나타운에 자장면 먹으러 갔습니다. 어제 그 이모가 살랑살랑 반겨줘서 고마웠어요. "안녕하세요!" "어, 이게 누구야!" 40대 젊은 피 두 명이 한잔하다가 벌떡 일어나 건달 인사를 합니다. "여긴 누구신가?" "형님입니다!" " 하는 일들은 잘들 되고?" 자장면 면발이 방금 나와서 식감이 좋습니다. 구리에 2년 동안 있었더니 이제 가끔 알아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알아보면 기분이 업 되는 이유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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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서 아주 오래된 영화<초원의 집, 1974 NBC>을 숨도 안 쉬고 8편까지 보았어요. 액션도 멜로도 아닌 서부 개척시대 드라마가 나를 이렇게 잡아끌지 몰랐습니다. 찰스 브론스 나오는<내 이름은 튀니티1976>를 아시나요? 내 기억으로는 <영자의 전성시대 1975>와 같은 시기에 유행했던 영화 타이틀이 분명합니다. <초원의 집>은 서부 개척시대 원주민을 밀어내고 오늘날 U.S.A가 탄생한 이야기입니다. 십 대에는 주로 총싸움하는 서부 액션극을 좋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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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어려서 영화관은 갈 수 없었지만 만화 방은 꽤 많이 들락거렸을 것입니다. 그 시절 만화책 스케치를 스크랩북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들 사이에 권력이었습니다. 이것이 비망록으로 발전한 것이니 내 쓰기/그리기의 시작입니다. <초원의 집>은 제목만 본 것 같습니다. 투박한 통나무로 집을 짓고 추수감사절 날 칠면조 고기 대신 토끼 사냥하는 풍경이 정겹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리본을 달고 목형 별을 만드눈 걸 보니 나도 공방에 들어가 나무 냄새를 맡고 싶어지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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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드 장화 주머니가 산타클로스 선물 주머니라는 걸 우리 공주들이 알까요? 거친 자연 속에서 삶을 일궈가는 한 가족의 여정을 통해, 집과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실용주의 미국인의 개성이 개척시대 통나무집에서 유래됐을까요? 둘째 딸 ‘로라 잉걸스’ 역을 맡은 꼬마가 <연인 1992>의 주인공 그녀(제인 마치/54) 인가, 멜리사 길버트(63)일까요? 이야기는 1870년대 후반,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도시 생활이 점점 어려워지던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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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잉걸스는 가족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아내 캐롤라인과 세 딸(임신)을 데리고 서부 개척지를 향해 긴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캔자스 대초원입니다.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거의 없는 이곳에서 가족은 나무를 베고 흙을 다지며 직접 작은 통나무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특히 둘째 딸 로라는 처음 마주한 거대한 자연을 두려움보다 호기심으로 받아들이며 이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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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초원의 삶은 곧 현실적인 생존 문제로 이어집니다. 계절이 바뀌면서 겨울이 찾아오고, 매서운 추위와 눈보라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지며 가족의 삶은 점점 더 위태로워집니다. 늑대의 위협과 알 수 없는 질병까지 겹치면서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싸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걸스 가족은 서로를 의지하며 위기를 버텨냅니다. 찰스는 가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캐롤라인은 흔들리지 않는 모성으로 집안을 지켜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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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또한 서로를 위로하며 조금씩 성장해 나갑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황량한 초원에는 잉걸스 가족뿐 아니라 새로운 이웃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게 됩니다. 서로 다른 배경과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서 갈등도 생기지만, 결국 자연이라는 공통의 위협 앞에서 협력의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이들은 힘을 모아 우체국-학교-예배당을 세우고, 점차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필자가 과거 하우스 처치를 십수 년 했는데 그때 <초원의 집>을 롤 모델로 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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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단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는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단순한 시대극을 넘어 인간관계와 공동체의 의미까지 확장되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화려한 사건보다도 일상의 생존과 관계 속에서 감정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깊은 여운을 남기는 드라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미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초기 역사를 이미지로 볼 수 있었고 딸들과 소통하는 잉겔스의 부성이 감동으로 다가오더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자기 세계를 짓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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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사우나에 갔는데 만화책이 정말 만화방입니다. 내 기필코 이놈들을 다 먹어 치우고야 말 것입니다. 사실 만화책이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바로 행복 바이러스가 저를 미소 짓게 만듭니다. 우리 예주에게 시험을 해보았는데 만화책 공부가 독서에 엄청난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 아이가 책 보기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 <그리스 로마신화> 50권짜리와, <먼 나라 이웃나라> 전집을 사다 줬고, 한때 우리 딸내미 취미가 공부요, 특기가 독서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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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만화책을 접한 것이 국민헉교 2-3학년이었습니다. 당시 초딩 월간지는 <어깨동무>,<소년중앙>, <새 소년> 정도이었지요. 그중 어깨동무(육영재단)는 아예 학교에서 구독 신청을 받을 만큼 막강했었습니다. 괴력의 손 <주먹 대장>이 인기가 있었고 별책부록인 <손오공>은 조무래기들 최초의 로망이었습니다. 4교시 끝날 때쯤 들어오는 일일 공부의 맨 아래 연재된 <차돌바위/신동우>도 재밌는 만화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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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컷 정도 되는 만화 속 꼬리가 3개나 달린 여시 이야기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소름이 오싹 든답니다. Elementary School 고학년이 되어 반장이었던 박 형기네 집에 놀러 갔다가 방안에 수북이 쌓여있는 '소년중앙', '보물섬' ‘삼국지'같은 엄청난 만화책을 보고 기절할 뻔했습니다. 몇 년 전, 동창회 가서 알았는데 형기가 의대를 마치고 전남 어느 종합병원장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여, 만화책과 공부는 필시 모종의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소싯적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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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때 남 초등학교 앞에 살다가 천변 리 영천 상회 안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저는 식구들 몰래 두만이 아저씨네 만화방을 곧잘 가곤 했답니다. '꺼벙이' '어사 박문수' '신비한 아흔아홉째 문'같은 대작들은 볼 때는 만화방 안 집 토방까지 점령한 채, 최고의 간식 '달고나'를 까먹으면서 20-30권씩을 섭렵했습니다. 그때는 만화방에서 나쁜 짓이라고 해봐야 다 읽은 책 공짜로 바꿔치기하는 것 밖에 없었는데 왜 어른들은 만화방 출입을 건전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몰라, 혹여 울 예주도 p. c 방 출입하면서 아빠처럼 죄의식을 느낄까? since2018>>
2.
인간은 무엇으로 자기 세계를 짓는가? 누군가 나를 알아볼 때 왜 기분이 좋아질까? 그리고 어린 시절 만화방에서 시작된 ‘보는 즐거움’은 어떻게 독서와 글쓰기로 이어져 한 사람의 세계를 만드는가? 밤 11시 50분, 출출하기도 하고 손님도 딱 끊겨 차이나타운으로 자장면을 먹으러 갔습니다. 어제 보았던 이모가 살랑살랑 반겨줍니다. “안녕하세요!” “어, 이게 누구야!” 한쪽에서 술 한잔하던 40대 젊은 피 두 명이 벌떡 일어나 건달 인사를 합니다. “여긴 누구신가?” “형님입니다!” “하는 일들은 잘들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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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은 마침 방금 뽑은 면발이라 쫄깃합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날 맛있었던 것은 자장면만이 아닙니다. 구리에 2년쯤 있다 보니 가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 묘하게 기분을 업시킵니다. 왜 그럴까요? 헤겔의 철학을 빌리면 인간은 혼자서 자기 존재를 완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기의식에는 타인의 인정(Anerkennung)이 필요합니다. 내가 아무리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생각해도 누군가 “어, 이게 누구야!” 하고 알아보는 순간과는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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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마디는 사실 이런 뜻입니다. "당신은 여기 있었고, 나는 당신을 기억한다.” 그래서 내 나와바리에서는 주소 이상의 것이 생깁니다. 나를 알아보는 식당 이모가 있고, 지나가다 인사하는 사람이 있고, “형님!” 하고 일어서는 후배가 생기면 공간은 비로소 <장소, 나와바리>가 됩니다. 인간은 땅에만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기억 속에도 정착하는 존재입니다. 이 인정의 문제가 오래된 드라마 <초원의 집>과도 이어집니다. 십 대에는 총잡이가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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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한 자루 차고 황야를 달리는 서부극이 멋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다시 서부를 보니 총보다 "통나무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총잡이가 누구를 쓰러뜨리는가보다 가족이 어떻게 집을 짓고 살아가는가가 더 재미있습니다. 이 변화가 중요합니다. 젊은 날의 서부극이 "정복의 이야기"였다면 지금 다시 만난 <초원의 집>은 "거주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나무를 베고, 흙을 다지고, 장화를 만들고, 먹을 것을 구하고,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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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가족 하나가 겨울을 넘기기 위한 생존이었지만 사람들이 모이면서 학교가 필요해지고, 우체국이 필요해지고, 예배당이 필요해집니다. 집 → 이웃 → 마을 → 공동체 문명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래서 미국 실용주의의 기질을 개척시대에서 느끼신 것은 흥미로운 직관입니다. 미국의 철학적 프래그머티즘이 통나무집에서 직접 탄생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 닮은 정신이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옳은가?”에 앞서 “실제로 해보니 작동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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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훗날 윌리엄 제임스와 존 듀이의 철학에서도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초원에서 집은 주거에 관한 담론이 아닙니다. 오늘 밤 아이들이 얼어 죽지 않도록 막아주는 벽이어야 합니다. 교육도 추상적인 교육철학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살아갈 세계를 어떻게 물려줄 것인가라는 현실적인 필요에서 학교가 생깁니다. 당근 <초원의 집>을 아름다운 미국 건국신화로만 읽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개척자에게 ‘새로운 땅’이었던 곳은 원주민에게는 이미 오래된 고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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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의 개척은 다른 쪽의 상실이 될 수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적 근면과 가족주의, 자립과 상호부조가 미국의 힘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팽창을 하나님의 축복과 동일시하는 순간 신앙은 정복의 이데올로기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거 하우스처치를 십 수년 하면서 <초원의 집>을 롤모델로 삼았으면 좋았겠다는 회고가 재미있습니다. 교회부터 만들고 사람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다 보니 교회가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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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아이를 돌보고, 아픈 사람을 찾아가고, 싸웠다가 화해하고, 어려울 때 서로의 겨울을 견뎌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오이코스(oikos) 역시 이런 ‘집’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좋은 하우스처치라면 작은 대형교회가 아니라 큰 식탁을 가진 작은 집에 가까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초원의 집>에서 찰스 잉걸스의 부성이 눈에 들어오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젊을 때는 총 잘 쏘는 서부의 사나이가 멋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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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족이 살아갈 세계를 만들어주는 아버지가 더 멋있어집니다. 좋은 아버지는 아이 대신 세상을 살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사우나의 만화방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눈앞에 만화책이 수북하게 꽂혀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바이러스가 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향수가 아닐 것입니다. 그 책들은 어린 시절 자신이 세계를 처음 발견했던 "입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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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 『소년중앙』, 『새소년』, 『주먹대장』, 『손오공』, 『차돌바위』, 『꺼벙이』, 『어사 박문수』, 『신비한 아흔아홉째 문』….어른에게는 종잇장에 그려진 그림이었지만 어린아이에게 그것은 하나의 우주였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만화를 읽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본떠 그리다보니 그 스크랩북이 되었고, 스크랩북이 비망록으로 발전해 마침내 글쓰기로 이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쓰기의 시작은 ‘글’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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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를 수집하고 배열하는 일이 먼저였습니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추상적인 개념으로 세계를 배우지 않습니다. 먼저 보고, 만지고, 흉내 내고,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세계의 질서를 익힙니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어린아이의 세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아이에게 놀이와 수집은 하찮은 행동이 아닙니다. 아이는 어른들이 버린 조각과 이미지와 물건을 주워 자기만의 세계를 다시 구성합니다. 스크랩북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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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 → 선택 → 배열 → 해석 놀랍게도 이것은 글쓰기의 기본 구조와 같습니다. 수많은 것 가운데 무엇을 남길지 선택하고,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을 나란히 놓고, 거기에 자기만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어린 시절 만화 스크랩북에서 하던 일을 지금은 문장으로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만화가 독서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도 무시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화는 글과 그림을 동시에 해독해야 하는 매체입니다. 컷과 컷 사이에는 실제 장면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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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앞의 그림과 뒤의 그림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스스로 추론해야 합니다. 만화 읽기는 생각보다 적극적인 독서입니다. 이를테면, 첫 컷에서 아이가 문을 엽니다. 두 번째 컷에서는 아이가 울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독자가 만들어냅니다. 바로 그 ‘컷과 컷 사이’에서 상상력이 작동합니다. 그래서 만화책을 좋아하던 아빠가 『그리스 로마 신화』와 『먼 나라 이웃나라』를 건네준 것은 꽤 좋은 독서의 다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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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통해 이야기의 재미를 얻고, 이야기를 통해 역사와 신화와 세계에 관심을 갖고, 그것이 다시 문자책으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반장이었던 친구 집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만화책을 보고 기절할 뻔했는데, 수십 년 뒤 동창회에서 그 친구가 의사가 되어 종합병원장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대목도 재미있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만화책을 많이 읽으면 의사가 된다”는 인과관계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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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많은 아이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책을 좋아하는 경우도 있지만, 책을 좋아하다 보니 공부의 세계까지 넓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린 시절 ‘읽는 행위 자체가 즐겁다’는 경험입니다. 그것이 생기면 독서는 숙제가 아니라 놀이가 됩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이 만화방을 불온하게 보았던 것도 조금 억울합니다. 당시 만화방은 공부의 반대편에 놓인 공간으로 취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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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교과서가 정상적인 지식이라면 만화방은 아이를 샛길로 빠뜨리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샛길에서 상상력과 서사 감각과 역사적 호기심을 배운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PC방도 비슷하게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물론 과도한 이용이나 유해 콘텐츠의 문제는 별개로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특정 공간 자체를 죄악시하면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죄책감부터 배우게 됩니다. 중요한 질문은 “PC방에 갔느냐?”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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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서 무엇을 경험했고, 그 경험이 삶의 다른 영역과 어떻게 연결되는가?”일 것입니다. 돌아보면 두만이 아저씨네 만화방 토방에서 달고나를 먹으며 20~30권씩 읽어치우던 아이는 놀고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사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영웅은 왜 떠나는가. 악당은 왜 악당이 되는가. 약자는 어떻게 강자를 이기는가. 사람은 왜 사랑하고 배신하는가. 모험이 끝난 뒤 주인공은 어디로 돌아가는가. 철학의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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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초원의 집』을 여덟 편이나 숨도 쉬지 않고 본 것과 사우나에서 만화책을 발견하고 미소 지은 사건은 사실 하나의 이야기입니다.어린 시절에는 만화방에서 다른 세계로 떠났고, 지금은 넷플릭스를 통해 1870년대 미국 초원으로 떠납니다. 매체만 달라졌을 뿐 이야기를 통해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세계를 살아보려는 욕망은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달라졌습니다. 만약 소년이 『초원의 집』을 보았다면 아마 말과 총을 보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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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통나무집과 학교와 예배당, 아버지와 딸의 대화가 보입니다. 작품이 변한 것이 아니라 독자가 변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작품은 한 번 읽고 끝나는 작품이 아닙니다. 내가 변할 때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젊을 때 읽은 『삼국지』와 나이 들어 읽는 『삼국지』가 다르고, 소년이 보는 서부와 아버지가 된 뒤 바라보는 서부가 다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는 ‘집’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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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며 동네라는 집을 만들어주고, 『초원의 집』에서는 가족이 통나무를 쌓아 물리적인 집을 만들며, 만화방에서는 아이가 수많은 이야기 속에 상상의 집을 짓습니다. 하우스처치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받아주며 신앙의 집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글쓰기 역시 집짓기입니다. 50년 전 만화책 한 컷, 두만이 아저씨네 토방, 달고나 냄새, 반장 친구의 책더미, 딸에게 사준 『그리스 로마 신화』, 구리의 자장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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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74년의 『초원의 집』까지 서로 아무 관계없어 보이는 기억을 하나씩 가져와 문장이라는 못을 박아 연결합니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만들었던 스크랩북과 지금의 글쓰기는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때는 마음에 드는 그림을 오려 붙였고, 지금은 삶에서 마음에 걸린 사건을 잘라 문장에 붙입니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도 거대한 스크랩북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좋은 글이란 그 스크랩북을 뒤적이다가 오래전에 붙여놓은 그림 하나를 발견하고 이렇게 말하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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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여기서부터 시작했구나.” 소년은 만화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50여 년이 지나 돌아보니, 어쩌면 그 만화책들도 오랫동안 그 소년을 읽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만화방에서 보낸 시간은 독서의 반대편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바로 거기서 독서가 시작되었고, 스크랩북에서 글쓰기가 시작되었으며, 소년이 좋아했던 이야기가 반세기를 돌아 다시 『초원의 집』의 통나무집 앞에 우리를 데려다 놓은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나를 어떤 사람으로 읽어냈는가?
2026.8.24.mon.악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