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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북항에 간 아유
김 광 욱
1
진영은 북항으로 가고 있었다. 날이 흐리고 침침했다. 왼쪽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 위에 저녁 어둠이 서서히 내리면서 바닷물의 빛깔이 검은 빛깔을 띄기 시작했고 섬들은 고요히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흐린 날씨 때문에 황홀한 석양의 운치는 구경할 수 없었다. 바다 위엔 고깃배들이 드문드문 떠 있고 섬으로 가는 여객선과 화물선이 보였다. 큰 화물선은 그 자리에 정박해 있었다. 북쪽 항구에서 멀지 않은 곳엔 수만톤급의 무역선과 빨간 크레인을 실은 운반선이 얌전히 떠 있었다. 그 배들은 모두 움직이지 않고 정지돼 있었다.
목포 부두에서 북항으로 가는 도로는 개통된 지 얼마 안 되어 깨끗하고 인도는 주황색 보도블록으로 바독돌처럼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다정히 산책하는 연인들이 차창 옆으로 지나가며 진영에게 손을 흔들었다. 진영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의 직업이 형사인 줄 모르고 멋쟁이 아가씨인 줄 아나 보다.
진영은 직업과 어울리지 않는 순박한 생김새에, 겨드랑이가 보이는 하얀 티셔츠와 타이트한 검정 바지를 입고 있었다. 화장도 짙게 하지 않고 몸에 향수도 뿌리지 않았다. 곱게 꾸밀 시간도 없고 꾸며 봤자 누가 알아 주지도 않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
테이블엔 미제 사건이 수두룩히 쌓여 있고 과장은 걸핏하면 사표 내라고 으르렁거렸다. 범인 검거 실적이 미약하기 때문이었다. 미약하다기보다 전무하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범행이 날로 흉폭하고 잔인해져서 경찰도 범인 검거에 겁을 먹고 있었다.
범행 신고와 고발 서류만 접수해 놓고 처리 못한 사건들이 너무 많았다. 그 사건들을 다 처리하기엔 경찰 인력이 딸렸다. 급증하는 강력 사건에 비해 형사들의 수는 늘어나지 않고 제자리걸음이었다. 질적으로 양적으로 범인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진영이 군 경찰서의 형사과 형사로 발령 받은 것은 그녀의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그녀가 고향에서 봉사하고 싶다고 본부에 자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청에 근무할 때 남자 형사들이 해결하지 못한 미제 사건을 여러 건 처리한 베테랑이었다.
젊은 나이에 여자 경찰관으로서 그녀만큼 강력 사건을 많이 처리한 형사는 없을 것이다. 침착하고 야무지고 당찬 여자 형사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녀는 사실 사격술과 무술 실력에 있어 남자 경찰관 두세 몫의 일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진영은 여성스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어서 평소에 활동하지 않을 때는 시골처녀처럼 수줍음을 타고 순박해서 저 여자가 형사일까 하고 의심하게 했다. 그녀에게선 전혀 경찰의 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동정하고 이웃돕기에 솔선수범하는 모범 공무원이었다. 눈물이 많은 여자였다. 그런데 그녀에겐 아직까지 애인이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결혼해서 중학생 자녀를 가진 친구도 있는데 진영은 노처녀였다. 직장에서 인기도 있고 생김새도 그만하면 수준급인데 그녀를 차지한 남자가 없다는 게 이상했다. 진영은 고향에 봉사한다고 군 경찰서로 오더니 차츰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사건 처리에 수동적이고 개인 시간을 즐기려고 했다. 태만하고 사색적인 여자로 변했다. 진영과 가장 가깝게 지내는 우제철 형사와 함께 살인범을 검거하기 위해서 잠복 근무하다가 그녀가 보이지 않아서 찾아보면 찻집이나 술집에서 혼자 사색에 잠겨 있었다.
"거기서 뭘 하냐?"고 물으면 "범인과 두뇌싸움 중"이라고 능청을 떨었다. 진영은 범인을 잠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인생을 회의한다고 할까.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듯한 고독한 모습이었다. 진영은 최근 몇 달 동안 그녀에게 배당된 사건을 한 건도 처리하지 못해서 과장으로부터 "무능한 형사"라는 낙인이 찍혔다. 과장은 걸핏하면 진영을 불러서,
"이봐 백 형사. 옛날의 그 화려한 명성은 어디로 갔지? 벌써 늙은 거야? 아니면 자기가 늙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말 좀 해 봐, 말 좀!"
하고 호되게 꾸짖었다. 진영은 뒤통수를 쓸며 "죄송합니다"란 말로 일관했다.
2
진영의 생각은 "살인범을 잡아 봤자 뭘 하느냐? 또 다른 살인범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기는데." 범인 못 잡는다고 형사를 조질 게 아니라 살인이 안 생기도록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예방책이 시급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사회 분위기가 살인 사건을 조장하고 있다. 살인범이 더욱 기승을 부리도록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다. 황금만능과 인명 경시풍조가 그것이다. 그 책임을 형사가 질 것인가? 그것은 무모한 요구이다.
진영은 범인 검거에 일부러 소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동료 우 형사와 함께 열심히 뛰고 있었다. 그녀에게 배당된 사건이 고차적이고 까다로운 것이어서 여자의 힘에 부친 것이다. 그녀는 형사이기 전에 여자였다.
훈련으로 단련된 몸이라고 해도 여성의 본성을 감출 수는 없었다. 문학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했던 소녀 시절의 꿈을 버리지 못하듯이, 그녀는 명상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진영을 독한 여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풀잎처럼 연약하고 꽃처럼 가냘픈 여성인 것이다.
이번에 그녀에게 배당된 살인 사건도 그녀에겐 필시 힘에 부치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살인 용의자의 이름만 있고 물증이며 단서(살해 동기)가 하나도 없었다. 범인은 염전에서 일하는 노동자인데 사장(염전 주인)을 살해하고 나서 도주했다.
사장은 손으로 목이 졸려 죽은 것 같았다. 살해의 동기나 목적을 알 수 없었다. 사장은 좋은 사람이었고 인부들과 사이가 좋았다. 말다툼도 잘 하지 않았다. 월급도 제 날짜에 잘 주고 명절엔 보너스도 두둑히 준다고 했다.
범인은 술자리에서 사소한 시비 끝에 우발적으로 사장을 살해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범행 현장엔 사장과 범인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곳은 사장의 집이었다. 범인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도망쳤는데 그가 범인임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사장의 죽음과 같은 무렵에 잠적했다는 사실 하나였다.
다른 단서도 없고 증거물도 없었다. 그를 붙잡더라도 범행을 부인하면 사건이 장기화될 수 있었다. 다른 이유로 잠적했다고 발뺌을 한다고 가정할 때의 얘기다.
범인은 진영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살인을 할 사람도 아니고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남자로 알고 있었다.
범인은 진영의 고향 친구였다. 사건을 맡고 보니 하필이면 어릴 적 고향 친구였던 것이다. 진영은 우 형사와 함께 두 달 동안 살인범을 추적했다. 물론 다른 사건도 처리하면서 주로 염전 살인사건에 매달렸다.
범인을 붙잡는 것은 진영의 숙명이기도 했다. 범인을 체포하여 그를 교도소에 수감시키는 것보다 그의 억울함을 밝히는 게 진영의 목적이었다. 살인범에게는 반드시 억울한 점이 있었다. 그 이유가 사회적 책임이 아니고 살인범 자신의 책임이라고 해도 그녀가 처리한 사건들 대부분이 그랬다. 살인범은 항상 약자였다.
죽일 놈, 나쁜 놈도 붙잡아 놓고 보면 나약한 인간이었다. 진영은 그런 인간들과 살았다. 신문하고 취조하고 대화하면서 그들도 인간이란 걸 알았다. 염전 사장을 죽인 친구도(그가 정말 살인범이라면) 그녀가 전에 처리했던 사건과 같이 또 하나의 전철을 답습하게 될 것이다.
진영은 그 친구가 범인이 아니길 바랬다. 피해자의 가족들이 주장한 것처럼 살인이 아니고 사고였으면 좋겠다. 경찰이 볼 때 폭행이나 목 졸린 흔적이 뚜렷하지 않아서 돌연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살인이라고 해도 사장은 참으로 고통 없이 죽은 케이스였다. 그런 경우는 흔하지 않다.
진영이 범인에게 그리 적대감이 가지 않는 것은 살해 방법이 잔인하지 않고 다른 살인 사건보다 흉악하지 않아서 우발 범행이란 심증이 서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범인의 죄가 더 무거워지기 전에 신속히 체포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 도와 줘야 한다. 그것이 형사가 할 일이다.
3
형사는 범인을 체포하고 벌 주는 냉혈적인 직업이 아니라 범인이 개과천선하여 새 삶을 살도록 도와 주는 선도 임무를 띈 따뜻한 직업이라는 걸 그녀 자신이 몸소 실천하고 싶었다.
범인이 옛날의 친구가 아니더라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진영이 바라는 건 친구의 무죄. 그가 살인범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 친구는 바보같이 왜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까? 차라리 처음부터 숨지 않고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더라면 이 사건이 장기화되지도 않고 여러 사람 고생시키지도 않았을 걸. 범인은 바보였다.
진영이 바라는 건 그가 어서 나타나서 자수하든지 진영의 손에 체포되는 것이었다. 진영의 손에 붙잡힌다면 옛정을 발휘하여 그의 죄가 경감되도록 도와 줄 수도 있었다. 경찰은 공정해야 하지만 인간이니까 자기 친구가 왜 살인을 했는지, 그 이유를 캐서 살인 동기가 흉악한 것이 아니라면 그 친구가 억울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도와 줄 수가 있었다.
진영은 지금까지 모든 사건을 그런 식으로 처리했다. 범인의 억울한 점을 상부에 호소하여 죄를 감형하도록 노력했던 것이다.
(이번 제보가 제발 엉터리가 아니었으면……)
진영은 꼬불꼬불한 커브를 돌면서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산들바람이 차창으로 날아와 그녀의 종려수 같은 파마머리를 휘날리게 했다. 머리는 자르면 금방 길어났다. 짧게 좀 쳤으면 간편하고 좋을 텐데 순박한 인상이 버릴까 봐 긴 머리 그대로 나풀거리며 생활했다. 종려수같이 긴 머리는 백진영 형사의 상징물이었다.
도로에는 저녁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곳은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산책로였다. 수평선의 황혼이 아까보다 더 짙어졌다. 주변은 어둡지 않고 밝았다. 날이 흐려서 그렇지 아직 어두워질 시간이 아니었다. 일곱 시 십 오 분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거기 어디지?"
"북항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모텔들의 네온사인이 화려하네요. 여기는 잘 안 오는 곳이라 꼭 촌년이 미국 라스베가스에 온 기분이네요. 히힛"
"꼭 라스베가스에 가 본 것처럼 말하는구만. 라스베가스는 내가 알기로 미국 네바다주 사막 한가운데 있는 환락의 도시여. 환락을 좋아하면 안 돼. 백 형사의 임무를 잊지 말라고. 맬검씨 술 생각이 나서 횟집에 가는 것은 아니제?"
"그런 돈도 없어라우."
진영은 바람에 산발되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면서 한숨 쉬듯 말했다.
"월급 탄 지가 언젠디 그새 돈이 떨어졌단가?"
"잘 암시로 그라요? 월급 타서 미암에 계신 엄니한테 보내요. 오빠가 좀 도와 주실라요?"
"도와 주라면 도와 주제. 나하고 하룻밤 자 준다면."
"사모님 들으시면 쫓겨날라고 벨놈의 소릴 다하네 참!"
우 형사는 핸드폰 속에서 너털웃음을 날렸다. 그는 진한 농담을 하면서도 응큼 떠는 짓거리는 하지 않는 신사였다. 그들 사이엔 격의가 없었다. 동지이며 형제같이 지낸다.
"이번엔 뭔 기미가 쪼깐 보인가?"
"엉터리 제보것제라우. 범인 닮은 사람이 한둘이것소? 범인과 생김새가 비슷한깨 형사 놀려먹을라고 경찰서에 장난 전화한 것이것제라우. 그래도 어짜꺼시요? 소방서 아저씨들처럼 불이 났다 하면 일단 현장에 달려가 봐야 도리제."
"내 생각엔 말이여……"
우 형사는 담배를 피우는지 한참 있다가 "퓨!"하고 타이어에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음을 섞어 말했다.
"진영이가 술 생각이 나서 북항까지 간다고배끼 판단이 안 선다. 지난번에 내가 맬검씨 자넬 북항에 데리고 갔제. 나도 속없는 놈이여. 잡으라는 살인범은 안 잡고 파트너하고 술이나 묵고 돌아다녔으니, 형사 자격도 없당깨로."
"제철 오빠,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길을 가나 밥을 먹으나 한시도 범인 얼굴을 잊어 본 적이 있소? 잠자면서도 범인 노이로제에 걸려 헛소리를 안 하나. 마치 범인하고 열애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단깨. 우리가 가끔 입가심할라고 마시는 술이 취할라고 마시는 술이것소? 범인은 안 잡히고 성질난깨 마시제."
"자네 말이 맞다. 방금 삑하는 그 소리는 뭔 소린가? 노처녀 방구 끼는 소린가?"
"북항에 다 왔다고 내 고물 차가 방구 낀갑소. 오빠는 어디 있소? 아이들 소리가 나는디."
"염전에 있는 범인의 집이네. 혹시 부인한테 뭔 연락이 왔나 하고 물어 본깨 부인이란 여자가 전복처럼 입을 꽉 다물고 안 갈차준당깨. 지독한 여자여. 완전히 남편과 한통속이더라고."
"부인이 들으면 어짤라고 그라시요?"
"아, 부인이 없은깨 말하제. 나만 보면 미꾸라지같이 어디로 새분단말시. 부인을 범인은닉죄로 체포해불까 생각 중이네."
"죄없는 부인 너무 족치지 마시오. 부인이사 뭔 죄가 있것소? 남편 따라 함께 산 죄배끼 없제. 아이들이 좀 부잡한갑네. 싸움소리가 나는 걸 본깨."
"징하게 부잡하네. 열 두 살짜리와 열 살짜리 남매가 서로 장난감 자동차를 빼앗을라고 안 싸운가? 애들 줄라고 장난감까지 사 온 나여. 날 냉혈인간이라고 욕하지 마. 나도 범인 가족에게 할 만큼은 하는 놈이네."
"잘하십니다."
"북항에 도착했닥한깨 하는 말인디, 형사티 내지 말고 조심하라고. 완전히 유한족 행세를 해부러야 범인이 맴을 놓고 활보할 것 아닌가?"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헛걸음 칠폭 잡고 잘해 봐. 혹시 진짜 범인일지도 모른깨."
"알겠습니다."
"뭔 일 있으면 전화하게. 눈썹이 날리게 달려갈 것인깨!"
4
진영은 승용차를 주차시키려고 차들이 없는 어선 선착장 골목으로 들어갔다. 화물선 선착장 부근엔 회를 먹으러 온 손님들의 승용차들이 운집해 있었다. 회를 먹지도 않으면서 횟집 앞에 차를 대놓기가 싫었다. 진영은 생선회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어선 선착장엔 크고 작은 고깃배들이 매어져 파도에 출렁거렸다. 어선 선착장은 한산했다. 어둠이 바닷물을 검은색으로 물들이며 건너편 횟집의 휘황한 불빛들이 파도 위에 넘실거렸다.
날씨는 소나기라도 내릴 듯 후덥지근하고, 눅눅한 갯바람이 염분을 싣고 후각으로 스며들었다. 언제 맡아도 싫지 않는 바다냄새. 진영의 고향은 미암 갯마을이었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열 여섯 살 때까지 그곳에서 성장했으니까 바다는 곧 진영의 꿈과 추억이 갖추갖추 심어진 마음의 고향이었다.
나이 먹어서 직장을 떠나게 되면 고향에 돌아가 노부모님을 봉양하며 살고 싶었다. 그때까지 부모님이 살아 계실지 모르지만 아들들이 노부모 모시기를 꺼리는 현실에서 딸이라도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형제들은 모두 도시에서 근근히 살고 있고 노부모를 부양할 만큼 여력이 없으니까 맏딸인 진영이 월급 타서 부모님께 생활비를 대주고 있었다. 마을 앞 바다가 간척지로 변해서 옛날처럼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릴 수 없었다.
부모님이 노쇠해서 많은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간척지는 한낱 그림의 떡이었다. 진영은 퇴직 후에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싶었다. 그래서 농지를 사려고 일정액을 저축한다. 허리띠 졸라매고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도 참는다.
여자 농부가 되어 넓은 들판에서 트랙터를 운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것은 허황한 꿈이 아니고 진영의 인생의 목표였다. 아마 진영과 같은 생각을 하는 여자도 드물 것이다.
결혼은 언제 할 것인가? 성실하고 생활력이 강한 남자가 있으면 농부와 결혼할 생각이었다. 그런 남자는 찾아보면 있을 것이다. 언젠가 결혼이 하고 싶어질 때 말이다. 아직은 그런 배우자도 없고 그렇게 마음에 드는 남자도 없었다.
막상 결혼을 하겠다고 남자와 선을 보면 정이 들 것 같지 않아 뒤로 미루곤 했다. 생각해 보니 영두 때문이었다. 영두는 진영의 어릴 적 소꿉동무였다. 소꿉동무이면서 정말 처녀를 바친 남자였다. 그들은 너무 조숙해서 중학교 일학년 때 어른들이 하는 행위를 했다.
진영의 집은 조금 부자이고 영두의 집은 너무 가난했다. 이웃집 소꿉동무인 그들에겐 빈부의 차가 없었다. 영두보다 진영이 더 조숙했던 것 같다. 모든 행동에 진영이 리드하고 앞장섰으니. 어느 날 영두의 집이 먼 곳으로 이사간다고 했을 때 그녀는 얼마나 울었던가.
영두가 떠나 버린 뒤로 진영은 열녀가 되기로 결심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영두가 이사간 마을로 어렵사리 찾아갔을 때 영두는 노동을 하고 있었다. 고등학생 교복을 입은 진영을 보고 수줍어하며 달아나 버렸다. 영두는 계집애같이 수줍음을 잘 타는 아이였다.
다음에 또 찾아갔지만 영두는 진영을 보고 숨어 버렸다. 진영이 돌아가는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서 기다리는데 상점 모퉁이에서 울고 있는 영두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때마침 버스가 와서 영두에게 달려갈 시간이 없었다.
그것이 고삼 때 일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고향에 찾아왔을 때 영두가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다. 영두는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이었다. 그걸로 그들의 러브스토리는 끝. 진영이 농촌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한 것도 영두의 추억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영두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왜 이 시간에 영두를 생각할까? 원인은 바다였다. 바다가 범인이었다. 바다는 곧 영두의 가슴이고 잊을 수 없는 사랑이었다. 영두. 아무리 찾아 봐도 이 세상에 영두만한 남자 없고 그렇게 마음에 쏘옥 드는 인물도 사실상 없는 것 같았다. 영두에 대한 미련이랄까 집념이 너무 끈끈해서일 게다. 소꿉동무였기에 더 애절한 것 같았다. 추억. 그리움. 상처. 모든 것이.
진영이 형사이면서 여성스러움을 간직하고 아직도 문학과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영두란 그 구심점이 내부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사람은 웃겠지만 진영은 그런 여자였다. 그런 형사였다.
순수하고 정이 많은 여자 경찰관이 누구냐고 한다면 백진영이 그 적격자일 게다. 오래 생각에 몰두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머리를 도리질쳐 지워 버리고 바다에서 시선을 돌렸다. 빈 고깃배 한 척이 통통거리며 북항 선착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젊은 어부 두 명이 뭐라고 지껄이며 어구를 배에 싣고 있었다. 야간 출항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황혼이 짙어지면서 식당과 배의 불빛이 더 뚜렷해졌다. 진영은 승용차를 선착장 주차장에 두고 식당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가는 곳은 횟집들이 많은 화물선 선착장이었다. 거기에선 압해도에서 방금 들어온 철선이 하선장에 하선 철판을 내리고 있었다.
철선에서 관광 버스 한 대와 승용차 다섯 대가 내리고 사람들이 몇 명 내렸다. 관광 안내판엔 목포 북항에서 압해도 선착장까지 일 킬로미터라고 적혀 있었다. 압해도는 가까운 섬이었다. 그 철선은 북항에 정박하고 다른 철선이 손님과 차를 싣고 용출도로 떠나고 있었다.
용출도에는 해수욕장이 있고 관광 개발이 한창이었다. 지금 가는 배는 용출도 해수욕장으로 피서객을 싣고 가는 막배일 게다. 용출도 선착장까지는 이 킬로미터쯤 된다. 섬들은 어둠과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5
진영은 철선 선착장 축대 위에 주저앉아 안개 속에 보이지 않는 섬들의 형체를 찾고 있었다. 섬들은 보이지 않고 바다의 뱃불만 깜박거렸다. 찰싹찰싹 파도가 선착장에 부딪치는 물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웃음소리가 들렸다.
진영은 형사의 임무를 망각한 채 목포항의 또 다른 아름다움에 취해 있었다. 북항은 유달산 뒤편에 있는 북쪽 항구였다. 목포의 아름다움은 여객선터미널이 됐든 삼학도가 됐든 유달산이 됐든 북항이 됐든 너무 아름다웠다. 목포의 밤바다는 여자의 육체를 들썩거리게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연인과 술 마시고 춤춘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고약한 면도 있었다. 한쪽에는 매립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바닷물을 메꿔 선착장과 주차장을 만드는 사업이었다.
왜 아름다운 바다를 메꿔 육지로 둔갑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다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예술이다. 진영은 검은 매립지를 보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고향의 간척지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은 이 생각 저 생각 하며 명상을 지피다가 그 범인의 얼굴을 생각하고 현실의 자신으로 돌아왔다. 진영은 살인범을 쫓고 있었다. 그녀가 북항에 온 이유도 목격자의 제보를 듣고 그 범인을 붙잡기 위해서였다.
예상했던 대로 어선과 철선 선착장 어디를 봐도 범인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형사의 티를 내지 않으면서 고양이처럼 여기저기 샅샅이 꿰뚫어봤지만 장사꾼들과 관광객들의 소음만 들리고 평화 이외의 어떤 검은 그림자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실망하지도 않았다. 북항에 온 값은 했다고 본다. 여기에 와서 맑은 공기를 맘껏 허파에 담았으니.
진영은 그 제보의 성실성을 믿지도 않고 큰 기대를 걸지도 않았다. 기왕 북항에 왔으니까 그리 비싸지 않은 집에서 저녁밥이나 먹고 갈 계획이었다.
그녀 옆으로 접근해 오는 인기척이 있어서 돌아보니 남방셔츠 차림의 한 남자가 주차장 쪽에서 진영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남방은 푸른 체크무늬였고 바지는 낡은 작업복이었다. 그러나 반짝거리는 새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 남자는 아까 어선 선착장에 진영이 도착할 때부터 진영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남자는 여기까지 진영을 뒤따라 왔던 모양이다. 형사인 진영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이상한 남자라고 생각하면서도 나쁜 사람 같지 않아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내버려두었다. 설마 형사를 납치하겠는가? 진영은 침착하려고 하면서도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진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는 씨익 웃었다. 순진한 수줍은 웃음이었다. 진영이 좋아했던 그 웃음. 진영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남자 앞으로 걸어갔다. 남자도 진영을 향해 걸어왔다. 삼사 미터 앞에서 두 사람은 멈춰 서서 상대방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
하고 진영의 입에서 가느다란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녀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웃음 반 슬픔 반이었다. 청년도 웃고 있었다.
"영두 씨죠?"
청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진영이예요. 나를 알아보겠어요?"
"알아본깨 따라왔제. 내가 어떻게 너를 잊것냐?"
진영은 달려가서 두 팔로 영두를 끌어안았다. 몸에서 어부의 냄새가 풍겼다. 싫지 않은 바다냄새였다. 영두는 어색하게 진영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비벼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진영의 어디에서 그렇게 자연스런 본능이 살아나는지 그녀 자신도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그 모습은 애정 영화의 한 신 같았다. 그렇게 멋진 러브신은 없을 것이다. 북항이 개항한 이래로 두번 못 볼 그 광경에 식당 안의 사람들이 창너머로 내다보며 웃고 있었다.
시원한 해풍이 두 사람을 감미롭게 휘감았다. 두 사람은 포옹을 풀고 매립지 쪽으로 걸었다. 그곳은 인적이 뜸한 곳이었다.
"그 동안 잘 살았냐?"
"응."
진영은 다시 소녀시절로 돌아가서 몸을 비비꼬며 어설프게 웃었다.
"너는?"
"니 염려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다."
"장가가더니 살 쪘네."
"살 쪄서 미안하다. 너도 한 백근은 나갈 것 같다. 결혼을 한 모양이제? 여자는 애기를 낳으면 살이 찐다더라. 애기는 몇이나 되냐?"
"둘."
"나하고 똑같구나. 부모님은 잘 계셔? 참, 도시에서 산깨 부모님을 자주 뵙지 못하것구나. 한번 고향 마을을 떠나니 가고 싶지가 않더라. 가서 뵙고 인사할라고 해도 내 행색이 너무 초라해서 인사할 염치가 있어야제."
"그 행색이 어떻다고 그래? 돈을 좀 못 벌면 어짠다냐? 건강하면 됐제. 니 건강한 모습을 본깨 마음이 놓인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 해. 세상에 좋은 일 하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의리 있고. 내가 바라는 건 그거다."
"난 죄많은 놈이다. 첫째 너한테 큰 죄를 졌고 둘째 나 자신에게 더 큰 죄를 졌다. 나는 너를 위해서 너보다 더 못한 여자와 결혼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잘못이었다. 내가 너와 결혼했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지 몰라. 부질없는 생각이제마는."
"지금 뭣하는디?"
6
진영이 궁금한 사항을 물었다. 그녀는 영두의 직업을 알고 싶었다. 어떻게 생계를 영위하는지, 굶지 않고 잘 사는지 그점이 항상 걱정되었다. 영두가 돈 벌어서 부자 되거나 사회적으로 큰 인물이 되기를 바라진 않았다. 출세와 성공은 꼭 돈과 벼슬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가정적으로 행복하고 사회적으로 인간의 도리를 다하면 그게 성공된 삶 아닐까?
"고깃배에서 일하고 있어. 사는 것 같지 않게 살고 있어, 벌레처럼."
"어부란 직업은 좋지 않냐? 난 바다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 제일 부러워. 자기 직업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마. 그건 자격지심이여. 괜한 열등의식이랑깨. 오늘은 배에 안 나갔어?"
"응, 쉬는 날이라 이렇게 놀고 있다. 어부가 배에 안 나가면 할 일이 없어. 그래서 어정거리다가 너를 발견했다. 처음엔 너 같지 않더라. 옛날엔 가냘펐는디 지금은 통통하고 늘씬해져서 다른 부인인 줄 알았어. 그러나 예감이 진영이 같더라."
"그렇게 나를 생각했었어?"
"밤과 낮으로 니 꿈만 꿨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고, 여자를 보면 혹시 진영이가 아닌가 흘끔거리는 버릇이 생겼제. 주책없게도 옛날 소꿉놀이 때를 생각했던 거여."
"속없는 사람!"
진영은 영두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 진영은 옛날 애인을 만난 듯 다정히 영두의 팔을 끼고 있었다. 그들은 매립지 축대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서서 식당 쪽으로 걸었다. 바람이 더 세차게 옷깃을 때렸다. 바람은 약해졌다가 또 강하게 불어왔다.
"북항엔 어째 혼자 왔냐? 신랑하고 같이 오제."
"나, 실은 미혼이다. 애기도 없고 가정이 있단 말도 거짓말이여. 직장 생활을 하다 본깨 혼기를 놓쳐부렀다. 내 중매 하나 서 줄래? 높은 직책이나 부자 남자 바라지 않고 그저 착실하고 경제력 있는 남자면 될 것 같아. 중류 정도의 농부면 더 좋고. 널 만나 본깨 어부도 괜찮을 것 같다."
"참말로 결혼 안했냐?"
"참말이여."
"죄를 하나 더 추가한 기분이다. 너를 볼 면목이 없어. 니가 나 때문에 노처녀로 늙는 걸 생각하면 죽고 싶다. 난 니 마음을 너무 몰랐다. 내 멋대로 생각하고 내 멋대로 판단한 결과 널 불행하게 만든 것 같아. 여자 나이 서른 다섯 살에 시집을 못 간 것은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다."
"난 안 불행해. 이렇게 행복하면 됐제 얼마나 더 행복해?"
진영은 영두의 땀 묻은 팔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소금기가 느껴졌다. 햇볕에 타서 흑인처럼 검게 단련된, 대장간의 쇠붙이 같은 그의 팔뚝이었다. 그 팔뚝에 힘껏 안기고 싶었다.
"니가 안 불행하다고 해도 내 마음이 불행한 걸 어쩌냐? 저기 가서 식사나 하자."
영두는 화려한 식당의 네온 간판을 가리켰다. 그 집은 북항에서 가장 비싼 집이었다. 진영은 내키지 않아 싫다고 했다. 그래도 영두는 그 식당으로 끌고 들어갔다. 비싼 집이건만 식당엔 손님들이 많았다. 그들은 창 옆 빈자리에 앉았다.
"왜 돈을 쓸라고 그래?"
"오랜만에 만나서 돈 좀 쓰고 싶다. 너하고 술 한 잔 하고 싶어."
영두는 놀랍게도 비싼 자연산 농어회를 시켰다. 여러 가지 부식이 많이 나왔다. 진영은 회를 싫어하면서도 영두가 사 주는 음식이라 맛있게 먹었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고 갔다. 두 사람은 소주 세 병을 마셨다.
술은 진영이 더 센 것 같았다. 그녀는 형사 하면서 술만 늘었던 것이다. 아니 그전부터, 사랑의 상처를 마시면서부터 술도 덩달아 마셨다. 그 상처가 상흔이 되어 그녀 앞에 앉아 있었다.
"많이 먹어라."
"너도 많이 먹어."
음식은 줄지 않고 술병의 술만 줄어들었다. 영두는 회도 별로 먹지 않고 밥은 아예 손도 대지 않은 채 김치국물만 홀짝거렸다.
"회를 싫어한 줄 모르고 이리 오자고 했구나. 난 그렇게 내 맘대로란 말이다. 빌어먹을, 여자 마음도 모르고 너를 울린 나는, 죽어도 구렁이가 될 것이다."
"나 동정하면 싫어."
"동정이 아니고 내 자신이 미워서 그래. 결혼이 뭣이 좋다고, 결혼이 인생의 전부도 아닌디 나는 너를 배신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