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으로 오신 하느님
출장을 다니면 점심으로 김밥을 자주 사 먹게 된다. 외식 자영업자들이 점심 장사에 목을 거는데 그 시간에 식당 한자리 차지하기가 민망해서다. 지방 소도시나 농촌에 가면 점심도 저녁도 늘 한산하니 그냥 아무 때나 혼자 들어가서 먹는다. 대신에 단가를 맞춰드리겠다는 핑계로 맥주나 막걸리를 같이 시킨다. 보수적인 농촌에서 대낮부터 밥 시켜놓고 막걸리나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는 ‘여자’가 그 집의 명물이 될 때도 있다. 그래서 가장 마음 편한 메뉴가 김밥이다. 김밥 한 줄 사서 기차역이나 터미널 의자에 앉아서 젓가락도 안 쓰고 은박지를 도르르 벗겨가면서 먹는다. 종종 딸아이가 “엄마, 어디야?”라고 메시지를 보내면 “응, 엄마 천국왔다.”라고 답한다. 그러면 딸아이는 “엄마, 오늘도 김천이야?”라고도 한다. 정말 김천시에 출장을 가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김천은 ‘김밥천국’의 줄임말이다. 그렇게 김밥천국은 김밥집의 대명사가 되어 아예 줄여서 천국, 혹은 김천 갔노라 하면 바로 알아듣는다.
1980년대까지 김밥이 저렴한 외식 전용 음식이 아니었다. 소풍이나 운동회 같은 특별한 날에 통닭과 함께 먹던 음식이다. 색소가 들어간 전분 덩어리에 가깝지만 분홍 소시지도 들어가고 양식이 지금만큼 대형화되진 않아서 김값도 꽤 나갔다. 무엇보다 쌀이 많이 들어간다. 김밥을 말아보면 밥이 곱절은 들어간다. 꼭꼭 말아 쥐기 때문에 밀도가 세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가장 저렴한 식재료가 쌀이지만 식구 많고 소득은 고만고만한 시절 김밥을 싸려면 며칠 치의 땟거리를 총집결시키는 일이었다. 형제자매들 중에 소풍이나 운동회가 있으면 그날 내 도시락도 김밥 도시락이었다. 그러면 도시락 뚜껑을 열자마자 친구들의 십자포화를 당하기 일쑤여서 어떤 때는 쉬는 시간 틈틈이 몰래 다 빼먹을 정도로 귀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이제 가장 흔하고 만만한 음식이 김밥이다.
글을 쓸 때 특정 업체를 지칭할 때 어쩔 수 없이 영문 이니셜 처리를 하거나 혹은 ‘모 업체’ 정도로 표기하곤 한다. 요즘은 ‘땡’자를 넣어서 ‘김밥천국’을 ‘김땡천국’ 이라 일컫기도 한다. 잘못 하면 특정 업체 홍보가 되고 또 그 반대의 경우 명예훼손의 위험성이 있어서다. 하지만 김밥천국 정도는 마음 편하게 지칭할 수 있다. 왜냐면 동네에서 쉽게 마주치는 김밥천국은 상표에 대한 독점권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밥천국이라는 간판은 다 제각각인데 이 상표를 갖다 쓰는 회사가 여러 곳이다. 물론 원조 업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1995년에 인천에서 시작한 ‘김밥천국’이 인기를 끌고 가맹점포가 늘어나자 특허청에 상표 등록을 신청했다. 하지만 보통명사인 ‘김밥’과 ‘천국’을 단순하게 조합했다는 이유로 고유상표등록이 반려되었다. 이후 김밥천국 상호를 내건 프랜차이즈 본사만 해도 여러 개다. 그렇게 김밥천국은 김밥을 파는 분식집이자 온갖 메뉴를 파는 저렴한 식사 장소를 상징한다.
한때 ‘천냥김밥’이란 간판도 흔했다. 나중에 김밥 값이 오르면 간판도 바꿔 달아야 하는 흰소리도 했었지만 어쨌든 김밥은 ‘천 원’이었다. 그 가격이 김밥의 전국의 표준가격이었다. 들어가는 재료는 빤했다. 천 원 한 장을 내고 사 먹는 김밥에 사람들이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쩐내가 나는 김도, 참기름이 아니라 참기름 향을 가미한 향미유로 밥을 비볐어도 말이다. 지하철역 입구에 출근 시간에 맞춰 김밥 노점상들도 등장했다. 시간과 돈 모두 빠듯한 직장인들에게 인기가 많아 김밥 장사의 자리싸움도 치열했다.
‘천원김밥’은 농촌에서도 유용했다. 읍면 단위에 나가면 김밥과 떡볶이를 파는 분식점은 있기 마련이다. 들일 을 할 때 중간에 나가서 몇 줄씩 사 오면 새참으로 요긴했다. 무엇보다 그 가격에 ‘밥’을 먹을 수 있다는 만족감이 높았고 실제로 저소득층 노인들이 밥알을 씹을 수 있는 유일한 한 끼이기도 했다.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점포에 자리를 잡고 먹으려면 좀 비싼 김밥을 시키거나 곁다리 메뉴로 라면이라도 하나 더 시켜야 한다. 김밥에 단무지, 국물을 제공하고 설거지라는 부수적인 서비스가 동반되므로 업주들 입장에서는 김밥 한 줄을 팔면서 자리까지 차지하는 이들이 달갑지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은 저가 김밥은 포장만 가능한 곳이 많다.
10년 전 당시 노골적으로 자리에 앉아 김밥 한 줄을 시킨 손님에게 싫은 내색을 하는 김밥집 주인을 본 적이 있었다. 업주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를 했지만 그래도 그 가게를 다시 찾지는 않았다. 그 집에 천주교 십자고상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 모욕을 참고 꿋꿋하게 자리를 잡아 김밥 한 줄 사 먹는 눈치 없는 ‘진상손님’들은 그렇게라도 따뜻한 국물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을 테고, 이때 아니면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2005년 전후로 ‘천원김밥’이 1500원으로 올랐다. 김밥 값이 오르자 우리 집에 한 달에 두어 번 들러 신문을 가져가시던 할아버지가 많이 속상해했다. 천 원짜리 두 장이면 김밥 두 줄을 사서 점심에 한 줄 먹고, 저녁밥으로도 한 줄 먹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며. 지금도 그렇지만 종일 폐품을 모아 손에 채 5천 원도 쥐지 못했다. 값이 나가는 폐품은 의외로 신문지인데 신문 보는 집도 줄고 아파트에는 수거 업체가 계약되어 있어 여러모로 어려움이 크다 했다. 할아버지는 그 알량한 고물 값에서 김밥 두 줄 값, 2천 원을 빼내 그래도 특별한 반찬 없이 밥을 입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줄을 사려면 일당의 절반이 넘는 3천 원을 내는 일이 된 것이다. 아마 그 할아버지는 두 줄을 한 줄로 줄이거나 다른 용처에서 김밥 값을 빼내야 했을 것이다. 지금은 김밥 한 줄에 2000원에서 2500원이니 폐품 할아버지는 하루 일당의 절반을 김밥 값으로 써야 한다.
김밥은 전형적인 불황형 창업 아이템으로 알려져 있다. 파는 사람도 사 먹는 사람도 주머니 형편이 좋지 않을 때 확 늘어난다. 오죽하면 차릴 것은 김밥집 아니면 치킨집이란 말이 있겠나. 하지만 편의점에서 파는 삼각김밥을 비롯해 다종다양한 김밥집이 있어 경쟁도 치열하다. 여기에 고급 김밥 프랜차이즈들도 속속 등장했다. 기본 김밥 값이 한 줄에 3500원에서 4000원. 속 재료에 따라 5000원에 육박하기도 한다. 김밥 두어 줄 사 먹으면 만 원이 훌쩍 넘곤 해서 선뜻 사 먹지는 않는다. 그래도 만 원 한 장으로 김밥도 라면도 먹는 세상이면 좋겠어 서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다시 창궐하고 있다. 방역단계를 3단계로 올리면 그나마 김밥천국에서 김밥을 국물과 함께 먹기도 어려워진다. 오로지 포장배달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식당 아니면 끼니 해결이 어려운 이들에게 김밥천국같은 저렴한 식사 장소는 귀한 곳인데 많은 이들이 난감해질 것이다. 요리에는 시간과 돈, 무엇보다 주방 도구와 식재료까지 갖춰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쉽게 집밥을 해 먹자고도 할 수 없다. 삶이 지옥인 세상에서 누군가에겐 파는 김밥 한 줄이 하느님이고 천국이다.
‘김밥’도 보통명사, ‘천국’도 보통명사다. 하느님 나라인 천국은 김밥처럼 보통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곳곳에서 김밥 한 줄이 필요한 사람들도 김밥 한 줄을 팔아야 하는 사람들도 모두 고통에 허우적대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지금 손에 쥐어야 할 것은 무엇이겠는가. 반짝반짝 빛나는 은박 포장의 김밥 한 줄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빛나는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며 지상에서 천국을 사는 일이다.
-정은정 아그네스
성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소식지 분도 , 2020.겨울호(vol52) : http://ebook.cbck.or.kr/gallery/view.asp?seq=21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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