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쌀 이야기를 들으니 제 어린 시절이 생각나 오래 전에 써 두었던 추억 이야기 하나 올립니다.
사리암
삼십 해 전 여름의 끝 무렵이었다. 언니는 분홍색보자기에 양말과, 공책을 반으로 잘라서 만든 수첩과 연필을 넣고 어머니가 이웃집에서 품삯으로 빌려온 찐쌀 몇 홉을 비닐봉지에 넣어 싸고 있었다. 2박 3일간의 수학여행을 갈 참이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못 간다' '간다'로 며칠 입씨름 후에 얻어낸 수확이라 언니는 흥분에 들떠 마치 통통 튀는 공 같았다. 보자기 끈을 묶는 언니에게 그 찐쌀 내게 좀 나눠주고 가라고 했는데 여행가서 언니가 배곯으면 집도 아닌데 어쩔 거냐고 어머니가 금방 호되게 나무라셨다.
풀이 죽은 나를 돌아보며 여행을 떠났던 언니는 며칠 뒤 여행을 마치고 해쓱하지만 눈빛만은 초롱한 채 설렘과 기쁨에 들뜬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마 태어나서 산골 밖으로 나가보긴 그때가 처음이었으리라. 가장 먼저 나를 찾더니 땟국이 흐르는 보자기에서 절반이나 남긴 찐쌀과 용돈 전부를 들였음직한 예쁜 목걸이를 꺼내 주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여행지 운문사 사리암엔 산 중턱에 폭포가 있는데 수량이 어찌나 풍부한지 사리암에서 올려다보니 마치 땅속에서 분수가 솟구치는 것처럼 보이고 절 마당에 늘어선 큰 배나무에선 내 머리만한 배들이 땅바닥에 떨어져 널려있는데 아무도 눈길 주는 이 조차 없어 한 개 주워오고 싶었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노라는 이야기를 했다.
또 사리암 뒤 약수가 나오는 바위는, 예전에 한 사람이 살면 한 사람 분량의 쌀이 나오고, 두 사람이 살면 두 사람 분량의 쌀이, 열 사람이 살면 열 사람이 먹을 분량의 쌀이 나왔는데 어느 날 더 많은 쌀이 나오게 하려고 구멍을 넓힌 뒤부터는 쌀 대신 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바위 속에 숨어있던 부처님이 쌀을 조금씩 내 보내 주시는 게 아닐까 하고 마른침을 삼키며 들었다. 내가 하도 눈을 반짝이며 그 이야기를 듣고 또 듣고 하다가 한 번만 더해 달라고 조르니까 곁에서 낡은 양말을 꿰매던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너도 몇 년만 있으면 수학여행 갈 수 있다고 나를 달래셨다. 몇 번이고 묻는 내게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언니는 집을 떠난 사이에 훌쩍 커서 돌아온 것 같았다.
어머니의 약속대로 몇 년이 지났을 때 난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그해 무슨 일이 있는지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날 이후 사리암은 내게서 안타까운 꿈이 되었다. 언젠가 꼭 가 봐야지, 어떻게 제삿날조차도 마음대로 먹어 볼 수 없는 배가 그렇게 많은지, 부디 내가 갈 때까지 머리만한 배가 달리는 나무가 베어지지 않아야 할 텐데 하고는 삼십 년이 꿈처럼 흘러가 버렸다.
어린 마음에 이루지 못한 꿈 하나가 새겨진 채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운문사에 몇 번 갈 일이 있었다. 결혼한 이듬해 봄에는 밭을 매고 계시던 아버님을 졸라 운문사에 들렀는데 서녘으로 더 많이 기울어진 해와 연만하신 아버님 어머님이 걱정되어 사리암엔 못 가고 범종 소리만 가슴에 담아왔다. 그 후에도 두 어 번 더 갈 일이 있었으나 일행이 있어 사리암 표지판만 안타깝게 확인했을 뿐이었고 마음먹고 몇 해 전에 갔을 때는 등산객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내가 한없이 안타까워하자 한 친구가 불교신도증이 있으면 사리암에 갈 수 있다는 말을 했고 나는 한 가닥 희망을 가졌으나 평생토록 부처님께 일 배도 드린 적이 없는 내게 불교신도증이 생길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사리암에 가 볼 일은 어쩌면 이루지 못할 꿈이 되고 말았는데 며칠 전 우연히 이 사리암을 출입할 수 있는 신도증이 내게 생긴 것이다. 속해 있던 사진동호회에 한 스님이 계셨는데 사찰촬영 일로 단체로 만들게 된 것이다. 경위야 어떻든 난 이제 날개를 얻은 것이다.
전날 나는, 내일 언니랑 꼭 함께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니 등산할 채비를 하고 기다려 달라며 퇴근길에 산 등산복과 등산화를 내밀었다. 언니는 예의 그 투박한 음성으로 '바쁜데 어딜 갈려고?'하면서도 기대에 찬 여운을 숨기지는 않았다. 나는 천천히 사리암을 오르면서 그 때 언니에게 수학여행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고마웠다는 이야기를 할 참이었다.
930년 보량국사가 초창한 사리암은 언니의 기억대로 아차 발을 잘못 디뎠다간 깎아지른 절벽 아래 계곡에 떨어질 것처럼 위험한 길이었다. 그대로 마셔도 좋을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계곡에선 도롱뇽 알이 말갛게 씻기고 저만치 까투리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는 산비탈 절벽에 위태위태하게 서 있는 사리암을 보니 공연히 감격스러워 눈물이 솟았다.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배나무는 한 그루만 남긴 채 다 베어지고 대신 암자 마당엔 새로 건물 두 동이 협소한 지면을 최대한 이용해서 신축되었다. 그 때는 한 줄로 겨우 서서 올라갔다는 토끼길은 이제 불편 없이 왕복할 수 있도록 군데군데 시멘트를 발라놓아 언니를 많이 안타깝게 했지만 나는 그저 기억 속에 있던 사리암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나반존자(那畔尊者) 기도도량으로 신통력이 있다는 사리암은 과연 일반 등산객의 출입을 제한해야할 만큼 기도하는 신도들로 넘쳐 났다. 사리굴 앞에도 계단참에도 한 목소리로 나반존자를 부르는 간절한 모습으로 카메라를 든 내 등에 대고 자꾸만 절을 해 무안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
언니에게 해 주려던 이야기를 백장미처럼 예쁜 언니의 두 딸도 함께 듣게 되었다. 중학생이 된 은비가 '이모 그런 소중한 추억이 있었어요?' 하며 동기간의 정을 다 이해한다는 듯 내가 진 배낭을 받았다. 우리 아이들도
'어머니 다음에 또 절에 따라 와 드릴 게요' 하며 대단한 선심을 쓰듯 하는 얘기를 듣고 있으니 넉넉지 않다는 게 꼭 그렇게 행복하지 않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 때 내가 찐쌀이나 배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거나 특별히 수학여행에 의미를 두지 않을 형편이었다면 나는 이 작은 암자를 진즉에 잊어버렸을 터였다. 함께 여행하지 못한 동생 때문에 제 몫으로 준 찐쌀도 다 먹지 못하고 가뜩이나 적게 준 용돈을 다 들여 목걸이를 사 준 그 정을 이렇게 오랫동안 간직할 수도 물론 없었을 것이다. 가난함 속에 함께 나누었던 따뜻한 마음을 추억하는 건 나로 하여금 늘 부자로 살게 해 주었다. 자꾸 가벼워지는 발걸음, 아물아물 오르는 아지랑이 너머로 나뭇가지에 물이 올라 엷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친정 동네 뒷마을 호동이라는 산골마을이 있다.
돌이켜보니 40년도 훨씬 전 초등학교시절에 친구를 따라 그 꼴짜기를 간적이 있었는데
어제 그 마을에 볼 일이 있어 가게 되었다.
산과 산 사이로 이어진 벌판에는 나락들이 태풍에도 끄덕없이 잘 익어가고 있었고
오래 전의 기억은 모두 세월에 묻히고 사라져 흔적도 없었다.
반백년이 다 된 추억거리 하나가 떠 올라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고
사람의 기억이란 장치가 참으로 견고한 기계같다는 생각을 했다.
... 대구시내 한복판에서 태어난 나는, 시골과 가난에 대한 정서를 모르고 컸답니다.
그리고 나하고는 상관없는 삶들에 대해, 상관없음으로 살았습니다.
지지리 가난했던, 그래서 일찌감치 대구로 나와 자수성가 하시어,
명절때 성묘길에 금의환향? 하신 아부지를 따라간 고향에선, 내가 특별한 아인줄 우쭐거린 기억도 고백합니다.
글을 쓰면서 부터, 나의 삶이 반똥가리 정서, 결핍정서인 것에 직면하였습니다.
총체적인 삶을 볼 때, 아날로그 적인 유년이 인간을 얼마나 따뜻하게 하는지를, 치유해 주는지를, 완성시켜 주는지를...
그런 의미에서 가로등에 올려 진, 대리 경험 할수있는 글 들이 너무 고맙고,
세이지님 역시...^^
사리암은 3번을 가야 신도증을 주지요. 갓바위처럼 기도도량이라 많은 불자들이 찾는 곳이고요.
예전에 신도증이 있어 몇번을 갔었는데, 갱신을 하지 않아 사리암 이제 무용지물이네요.
그래도 조계종 신도증이 있어 갈 수 있지만....글을 보니 한번 가고 싶어지네요. ^^
세이지님의 글을 대할 때마다 아름다운 추억여행 떠납니다. 부족했기에 지금이 더 소중하고 행복을 느끼고 삽니다.
저는 무심코 옛 이야기를 써 보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제 이야기의 주제는
'가난했지만 정겹고 아름다웠던 고향과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 였네요.
산골짜기에 소릇이 안긴 형제들처럼 정겨운 다랑논을 보고 오신 함박꽃님 고맙습니다.
소백님께 어린 시절의 가난을 나누어 드릴 수는 없지만
도시의 골목길있었던 소백님의 추억에도 아낌없이 공감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고백합니다.^^
세모와네모님 요샌 사리암에 신도증 없이도 갈 수 있대요.
11월초 단풍철 사리암에 갈 일이 있는데 가신다면 다행이고 아니면 사진으로 사리암 소식 전할 게요.
옥수수빵은 그 시절 사람들의 필연적인 그리움입니다.
좋은 곳 출사 가실 때 한번 불러 주세요...ㅎㅎ
아님 야생화 출사에 함께 하셔도 좋구요.^^
그 때 우리의 언니 오빠들을 그랬었지요.
저도 화이트데이지님의 쇠고기국에 관한 이야기에 가슴 아파서 그래서 더 아껴 드려야지 그럼 마음이 들곤합니다.
가난 했지만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든 그때가 그리워 집니다.
세이지님 사리암 단풍소식 기다리고 있을께요.
문학회 사람들과 11월 11일이 되어야 갈 건데 그 때까지 세모와 네모님 수선화님 기다리고 지치시면 어쩌나 싶습니다.
그래도 운문사의 풍경소리에 잘 익은 단풍 몇몇은 반드시 분명히 틀림없이 데리고 올게요!
별일도 안하면서 큰명절 앞두고 맏며느리 그저 용만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