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론강단-484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복음21장15-17절)
성경말씀은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17절까지 봉독합니다.
[요한복음 21장]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우리가 드디어 요한복음 마지막장 21장을 같이 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수록되지 아니한 내용들이 21장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마치 20장까지 해서 요한복음서가 마무리 되는 듯 하다가, 조금 후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매우 중요하다 해서 뒤에 21장에 덧붙여진 것처럼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요한 사도가 다른 사도들보다 오래 살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죠.
다른 사도들은 거의 AD70년 경에 이미 다 순교했고, 요한 사도 한분만 AD90년이나 100년까지 살아계셨던 것 같은데, 그래서 시간이 지나가니까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무엇이 덜 중요한지 요한이 자연히 분별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은 다른 복음서에서 언급한 것은 중복을 피해서 생략하는 입장도 있고, 또 반면에 다른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요한만 알고 있는 사실이 강조되기도 하고,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 있으면서도 요한이 똑같이 다루고 있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 그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는 21장에,
[요한복음 21장]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제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 모습을 제자들이 접하게 되는 부분을 요한은 ‘자기를 나타내셨다.’ 의도적으로 나타내지 않으면 사람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는데, ‘나타내어 보여 주셨다.’ 그런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 경위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그러면 베드로하면 안드레는 자동으로 따라붙을 것이고,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이면 야고보와 요한과, 또 다른 제자들 둘이 하면 8명이 돼요.
8명 정도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베드로는 사람이 굉장히 단순하고 그리고 포기도 할 줄 알고, 그리고 결단도 우유부단하게 하지 않고 딱 그저 마음을 고쳐먹고 결단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을 빨리 믿을 수 있었고, 또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 거기 우리가 미련 갖고 있으면 어떡하냐?
빨리 마음 고쳐먹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겠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이렇게 하니까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베드로가 여태까지 범사에 앞장을 섰고, 또 예수님께서도 열두 제자 중에 대체로 중요한 일을 시킬 때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렇게 했는데, 베드로가 범사에 적극적이다 보니까 거기에 어떤 성경상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다, 반장이다 이런 것 없습니다.
아무 근거 없지만 자연히 이심전심으로 항상 베드로를 쳐다보는 이런 입장이었는데,
그런 베드로가 단호하게 결단하면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까 가노라 하는 말은 ‘너희도 가자’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자기 입장을 아주 분명히 합니다.
..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조금은 수동적이고 그렇죠?
고향에 돌아가서,
..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제가 조금은 상상력을 발휘해서 생각한다면, 고향을 떠난지 한 3년간이나 공백이 있었잖아요.
예수님을 안 따라갔던 동네 보통 친구들 이런 사람들은 한 3년간 그래도 착실히 노력했다면 좀 돈도 모으고 기반도 닦고 했을 텐데, 가장 한창 때에 30대 그런 중요한 때에 그 때는 30대면 결혼 했거든요. 유대인들은..
30살까지 결혼 못한 경우는 없습니다. 대개 20살 안팎에 결혼했기 때문에 아이도 하나 둘 있을 수 있는 그런 때에..
동네사람이 볼 때 예수님인가 뭔가 하면서 따라갔더니 그냥 대장된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고, 그 제자들은 맥없이 풀이 푹 죽은 상태로 고향에 돌아온 거예요.
그 벳새다에서 다 아는 사실이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물고기 잡으러 간게 아니라, 딴 사람들은 일찍 다 가고 이 사람들은 아마 점심먹고 한나절 된 후에 그 날 꼭 물고기 잡는다는 것도 아니고 몸도 풀겸 배에 물이 새나 보고 어구도 손질하고 그렇게 점심먹고 한나절 되어가지고 나갔을 거야.
..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그러니까 저녁때쯤 나갔던지 점심 먹고 한참 있다가 간 거예요.
그래서 배 손질하고 어구 만지고 챙기고 해가지고 저녁때에 갔는데 아무 것도 잡지 못합니다.
밤새도록 던지는데.. 여러분 아시죠? 베드로 잘 포기하지 않는 것..
던지고 또 던지고.. 계속 던집니다.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동네 아저씨인줄 알고..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이런 것을 보면 오후 늦게 나가서 밤새도록 고기가 안 잡히고 아무리 던져도 고기가 안 잡혔는데 새벽에 누가 와서 ‘고기가 있느냐?’ 물으니까 동네사람인줄 알고 ‘없나이다.’ 그렇게 했는데,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했어요.
오른편이고 왼편이고 앞에고 뒤에고 밤새도록 던져봤잖아요.
그런데 그 베드로가 여전히 베드로인데, 여러분 아시는 대로 처음에 베드로를 부르실 때 그랬잖아요.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그렇게 했어요.
고기가 깊은 데에 있는지 얕은 데에 있는지 어느 곳에 얼마만큼 있는지 베드로가 손바닥처럼 알고 있는데,
어떤 낯선 사람이 와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이렇게 했을 때에도 군소리 하지 않고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하여 얻은 것이 없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말씀하신 분 말을 생각해서 의지하여서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해가지고 고기를 많이 잡은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비슷한 장면이 또 연출된 건데, 이것은 완전히 연출한 겁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물고기를 안 잡히게 꼭 베드로 던질려면 삭삭 빼돌려가지고 다 연출을 한 거죠.
그 날은 깊은 대로 가는 것도 아니고,
..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전에 한번 지나가면서 말씀드렸죠?
요한복음 15장 할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포도나무 가지라는 것이 그 줄기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아무 열매도 맺히지 않는 것처럼,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물고기 잡는 것도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신 거예요. 사실은..
그런데 예수님이 딱 죽어버리니까 다 잊어버렸어. 그냥..
다 잊어버리고 했는데, 그 말씀은 그대로 살아있는 거죠.
예수님을 떠나서는 잘 되던 것 익숙하던 것 어려서부터 늘 익숙한 것이라도 예수님의 사람은 예수님을 떠나서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되는데, 몰라요. 아직도..
얼마만큼 모르느냐? 바로 오른편에 있어도 몰라.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이 되게 하시는 것도 능력이 있지만, 안 되게 하는 데 선수입니다.
얼마든지 안 되게 할 수 있어요.
바로 옆에 있는데 안 돼..
그래서 안 되면 ‘아 이게 내가 예수님을 떠났더니 안 되는구나.’ 이 정도는 깨달아야 되는데, 베드로는 전혀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전혀 안 되고 왜 고기가 없는지 계속 던지고 또 던지고..
그리했는데,
..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그 때,
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요한 자기 자신을 그렇게 말하는 거죠.
..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본격적으로 했던 거죠.
웃통 벗고 그냥 옛날 솜씨를 발휘한다고 하면서 밤새도록 던졌는데 벗고 있다가 주시라, 이런 것도 감각적으로 요한이 더 민감해요.
겉옷을 둘러 입은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베드로의 성품이 문득 문득 보이죠.
모르겠어요. 제가 의도적으로 베드로를 자꾸 그렇게 묘사해서 그런지.. 저는 베드로는 볼 때마다 베드로의 그 성품이 말과 행동 속에 거의 그려진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씩이나 잡아떼고 그리고 또 열두 제자 중에 8명을 선동해가지고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해서 와가지고 물고기 잡지도 못하고 만신창이 되어가지고 밤새도록 수고해가지고 주시라 하니까 아무 생각도 없이 반사적으로 그냥 겉옷을 들쳐입고 물로 풍덩하고 뛰어들어간다는 거야.
수영해서 가는 거죠. 그냥..
그래서 그런 면에서는 참 적극적인 성격이예요.
범사에 적극적이고 그리고 단순하고 그리고 잘 포기하지 않고 또 그러나 정작 포기해야 될 때는 빨리 포기하고..
이런 성품인데, 여러분 이런 성품 치고 나쁜 사람 없습니다.
가끔 실수도 하고 실언도 하고 하지만, 그런 단순한 사람은 악한 사람도 없고 나쁜 사람도 없는 거야.
혹시 우리 교회 성도 중에 베드로와 비슷한 사람 없나요?
저는 여러분 보기에는 어떤지 몰라도 저도 조금은 그런 면이 있어요.
그냥 예수님을 믿었을 때 그냥 보통 믿고 집사가 되거나 아니면 혹 잘해가지고 장로가 되거나 그럴 수도 있을 텐데, 그냥 팍 덤벼들어가지고 성경을 배울 수 있다고 성경학교에 갔다가 신학교에 갔다가 또 무슨 성경을 한번 읽어보고 안 되면 말지, 두번 세번 읽어보고 계속 읽어보고 밤새도록 읽어보고 끝까지 읽어보고..
그렇게 하다가 또 안 되면 제가 빨리 때려치웁니다.
그래서 단념도 잘 할 수 있고 그런 면에서 베드로를 제가 조금 이해를 해요.
그리고 가끔 깊은 충격에 빠지기도 하고 장담 해놓고 닭 울 때 통곡도 하고..
이렇게 그런 것을 볼 때 조금 제가 이해가 돼요.
베드로 같은 성품이 내게도 조금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오십간’은 한 100m입니다. 한 간이 여섯자 하면 180cm이니까 50간 하면 90m에서 100m.
그러니까 90m-100m이면 제법 되죠?
보통 수영을 제법 하는 사람이라야 100m정도 갈 수 있어요.
그리고 영 잘하면 대한해협도 건너간다고 하는데, 그것까지는 아니라도..
여러분 100m 건너갈려면 50m 간 후에 조금 물위에 떠 있어 좀 쉬는데, 한꺼번에 100m간다면 제법 힘들어요.
그런데 베드로는 워낙 선수니까 그냥 바로 저기쯤이야 하고 바로 수영을 해서 가고, 다른 제자는 배를 저어가지고 이렇게 오는 거죠.
그래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님께서 혼자 식사당번을 하신 거야.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보나마나 요한이 다 세어 봅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그런 것 세어보지 않고 예수님이 신기해가지고 그렇게 하는데, 요한은 그것 다 세어보고 ‘그것도 100마리 넘더라’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상당히 많더라’ 이렇게 한 것도 아니고 한마리까지 다 세어봐. 153마리라..
..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왜 이런 말이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형체 외형적인 모습이 보통 초라하던 그런 모습인데,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상당히 외형으로 달라지신 거예요.
전혀 예수님이 초라한 그런 모습이 아니고 비쩍마른 그런 모습이 아니라, 완전히 너무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해서, 외형으로서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고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변화된 겁니다.
제가 처음에 어릴 때에는 외모에 컴플렉스가 있었어요.
여러분은 잘 안 믿을지 모르지만 사실이예요.
그래서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못 생겼는가 해가지고 그런 자격지심이 너무 심해가지고 마음도 소심한데다가 지금은 제가 빼버려서 없어졌는데, 덧니가 하나 있었어요.
상상이 됩니까?
덧니가 뭐하러 붙어가지고 꽤 큰게 붙어가지고 재료가 좀 남았는가 봐..
그게 꽤 보기 싫었어요.
하여튼 우리 반에서 다른 애들은 속으로는 모르겠는데, 다른 애들은 하나도 자기가 못생겼다 이런 생각을 안 한것 같은데, 내가 남자가 되어가지고 뭐할려고 그런 생각을 했는지, 항상 나는 못생겼다. 이런 생각 때문에 쪽을 펴지 못하고 ..
그래서 시골이니까 잘생긴 애들 없어요.
그래가지고 그 때 한두명 아이가 좀 부자집 아들들인데, 가죽볼이 쳐질 정도로 피부가 뽀얀 아이들이 있었어요. 시골에..
그리고 옷도 반듯하게 입고 하는 거야.
하여튼 우리 반에서 옷은 패션은 내가 최고야.
옷입는 것도 모양새가 아무리 모양을 낼려고 해도 모양이 안 나..
그런 컴플렉스가 있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상당히 있었어요. 예수 믿고 전도사 생활할 때도 상당히 그런게 있었던 같은데..
모르겠어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뻔뻔스러워 졌는지..
제가 50 넘어서는 어느 날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이것은 여담 같은데, KBS MBC 아나운서 MC 나오는데 보니까 어느날 갑자기 보니까 ‘네놈도 별놈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괜찮은 사람 손석희 하나만 괜찮을까.. 나머지는 다 거기서 거기야.
어느 날 그런 것을 보고 그리고 CTS CBS 보니까 목사님들이 내노라 하는 목사님들 나왔는데, 내나 그분들이 그분들이고 그렇더라고 보니까 ..
그래서 그때부터 아이고 어차피 내가 외모 가지고 그럴 필요없다.
그래가지고 자신감이 생겼어요.
자신감을 갖고 나니까 나도 괜찮더라고. 보니까..
괜히 나 혼자 스스로 나는 못생겼다..
스스로 못생겼다 생각하면 얼굴에도 못생겼다 하는 생각이 비춰서 그렇게 보여요.
그래서 못생겨도 여러분 당당한 사람이 있다니까..
우피골드버그라든지 뭐 잘 생겼습니까?
그래도 당당해요.
여러분 혹시 외모에 컴플렉스가 있다면 빨리 떨어버려요.
나는 그것 때문에 내 인생에 죽을 쑨것 같아.
그러다가 희망이 생겼는데, 여기 보니까 예수님이 변화된 거예요.
변화산에서도 잠깐 맛을 보여줬죠?
여기 지금 너무 변화되어가지고 외모로 알아볼 수 없을만큼 되었지만, 그분이 주신 줄 아는 고로 감히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더라.
여러분에게는 이런게 전혀 심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저는 상당히 심각했어요. 그 문제가..
그래서 사실은 제가 어디가서 내노라 하고 나서보지 못하고 그랬던게 이런 저런 컴플렉스라든지 소심하다든지.. 보통 A형이 소심하다고 하는데, 나는 A형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소심했어요.
13절,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빵도 주시고 생선도 주시고 이렇게 할 때 제자들이 모르긴 해도 문득 생각이 났을 거야.
오병이어를 먹던 그런 생각도 했을 것이고..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그러니까 이 말은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 개인적으로 나타나신 것을 다 포함하면 10번 내지 11번 되는데, 열두 제자 내지는 다수의 제자들이 모인 곳에 공식적으로 나타나신 것은 세 번째라고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밥먹을 때는 아무 말 안 했습니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하는데,
식사 끝나고 난 다음에,
.. 요한의 아들 시몬아,
여기 예수님께서 일부러 이런 말씀하셨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사람은 이름을 ‘베드로’라고 고쳐주셨거든요.
그런데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고 완전히 예수님의 부름받기 이전 물고기 잡이로 돌아가버렸요.
그래서 처음 부를 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 하는 것처럼, 완전히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면서 완전히 베드로가 시몬이 되어 버린 거예요. 사실..
..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 물음은 학자들이 고민을 많이 하는 부분인데, 저는 별로 고민하지 않습니다만, 여기에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할 때, ‘이 사람들’이란 것은 거기 있는 베드로 외에 다른 입곱명의 제자들이 거기 있었다면, ‘그 일곱명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특별히 너라고 해서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으셨는지..
아니면 ‘베드로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나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은 것인지, 아주 학자들이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여러분은 어느 것 같아요?
제가 볼 때는 ‘이 다른 제자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특별히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느냐?’ 그렇게 물은 것 같아요.
그렇죠?
왜냐하면 베드로가 이런 말을 했거든요. 그 이전에..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렇게 했거든요. 그렇죠?
그런데 똑같이 주를 배반하고 모른다고 잡아떼고 물고기 잡으러 갔노라 하고 갔으니까 너라고 해서 이 제자들보다 나를 더 사랑한 것이 있느냐?
그랬더니, 더 사랑한다는 말은 못하고,
..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여기 헬라어를 보면 조금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요한누 시몬네’, ‘요한의 아들 시몬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아가파스 하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가파스메?’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아가파스 하느냐?’ 했더니, 베드로는 ‘내가 주를 필레오 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했단 말이죠.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더’ 라는 말은 뺍니다. 이 사람들보다 더 라는 말은 빼고 ‘네가 나를 사랑하기는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으신 거예요.
아가파스메라는 말을 하되, ‘이 사람들보다 더’ 라는 것을 빼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었어요.
그랬더니 베드로는 똑같이 ‘내가 주를 필레오 합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 때는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필레오 하기는 하느냐?’ 이렇게 물었어요.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아가페와 필레오를 가지고 따로 나누어가지고 하는데, 글쎄 이것은 참 어려운 문제가 저는 볼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고 ‘아가파스메’ 라고 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있지만..
예수님께서 아람어를 썼지,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았거든요. 틀림없이..
베드로가 헬라어로 대답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냥 히브리어로 했는데, 먼 훗날에 또 요한 사도가 이 요한복음을 직접 기록할만큼 헬라어에 능통했겠는지 아니면 요한이 이렇게 어설픈 말로 하니까 누가 비서가 지금 요한복음서를 이렇게까지 썼는지 몰라요.
하여튼 예수님께서 사용한 언어는 헬라어는 아니고, 아람어 내지 히브리어로 했을 거란 말이죠.
아람어와 히브리어로 했기 때문에 별로 이것은 큰 문제가 아녜요.
아가페 필레오. 이렇게 따져서 구분해가지고 다른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세 번씩이나 물으니까,
..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그러니까 결론은 이렇습니다.
결론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라든지 오늘 우리에게 저와 여러분에게 저같은 사람이 혹시 내가 예수님을 우리 샤론교회 성도보다 더 사랑한다. 그런 생각 갖지 말라는 의미가 있어요.
베드로가 열두 제자들 중에 누가 자타가 공인하는 수제자라고 하는데,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죽을지라도’ 이렇게까지 했는데, 실제로 그렇지 못했거든요.
예수님께서 ‘네가 과연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한 것이 뭐 있냐?’ 없는 거예요. 사실은..
그러니까 여러분 ‘주님을 더 사랑한다.’ 하는데, 그러면 봉사 조금 많이 한다고 주님을 더 사랑하는 거냐?
그렇지가 않다는 거야.
목사니까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 그렇지 않을 수 있어요.
장로니까 집사보다 주를 더 사랑하느냐?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거죠.
아니면 헌금을 많이 하니까 내가 더 사랑하느냐?
그럴 수 있겠죠.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기가 더 잘 믿는다, 혹은 주를 더 사랑한다, 누구와 비교해서 더 사랑한다 그런 생각 갖지 말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러면 네가 나를 사랑하기는 아가파스하기는 하느냐?’
‘내가 주를 필레오는 합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네가 필레오는 하기는 하느냐?’ 물으신 거거든요.
베드로가 점점 자신 없어집니다. 사실은..
그래서 우리 모두가 믿는 것도 우리가 평소에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어려움을 닥쳐가지고 정말 죽을 판 되면 우리 믿음이 별로 없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전에 제가 신앙생활하면서 또 다른 사람의 신앙을 지도하면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성탄절 준비를 하는데, 전기불도 없는 집에서 제일 처음에 사천면 정동면 소곡리에 갔을 때, 딴 집은 집집마다 전기가 들어오는데, 예배당에만 전기를 안 넣어줬어요. 외딴 집이라고..
곧 철거해야 된다면서 길가에 있다고 안 넣어줬어요.
그래서 우리 예배당에만 전기가 없는 거야.
그래서 석유 램프로 네개쯤 달아놓고 강대상에 따로 놓고 이렇게 예배를 드렸는데, 성탄절 준비한다고 청년들이 와서 준비하는데,
준비하는 청년이 서너명 와서 하는데, 그 중에 한 여청년이 간질병을 하는 거야.
요란하게 하는게 아니고 가만히 있다가 그냥 넘어지거나 엎어지거나 해가지고 거품을 물고 있다가 30분 있으면 저절로 깨어나서 괜찮고 그렇거든요.
그런데 그런 아가씨가 머리를 묶었다든지 하면 될텐데, 생머리로 풀어 있다가 간질이 와서 엎어지면서 입술이 깨어진거야.
그래가지고 엎어져있다가 나중에 으스푸레하게 램프불에 희미한데다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에 피가 나면서 일어나니까, 같이 성탄절 준비하는 사람이 어마야 저마야 하고 놀래가지고 쫓아오는데, 피를 흘리는 그 청년도 같이 따라오는 거야.
그런데 올 때 이 청년들이 아무도 ‘엄마야’ 안 하는 거야.
‘엄마야’가 아니고 ‘주여 주여 주여’ 하면서..
속옷만 입고 잠자는 전도사 방으로 뛰어 들어왔어.
아이고 나도 얼마나 놀랬는지..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이 청년들이 다 ‘엄마야!’ 하지 않고 다 ‘주여!’ 하더라는 거야. 주여 주여..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래서 이 청년들이 어떻든 피흘린 사람 어스름한 불빛 밑에서 놀라기는 했지만, 머리를 풀어 헤치고 따라오니까 얼마나 겁났겠어요?
그런데 ‘주여 주여’ 하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뒤에 살아가다 보니까 지금 하늘나라에 간 우리 집사람이 조그만한 어떤 실수나 무슨 위급한 일이 일어날 때, 한번도 ‘엄마야’ 안 하는 거야.
부엌에서 뭘 하다가 그릇을 하나 떨어뜨려도 ‘주여 주여’ 반사적으로 ‘주여’ 하는 거야.
나는 그게 잘 안 되어가지고 내가 믿는 건가 하는데, 우리 집사람이나 아이들은 전부 주여 주여..
여러분 혹시 우리가 놀라는 일 있을 때 ‘엄마야’ 하는 사람 없어요?
그런 사람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주님을 부르지 않고 엄마야 하는 사람들은 아마 문제가 있지 않겠나..
그래서 믿음이 있는 것 같아도 우리가 참 때로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가 믿음 없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이 믿음만 있으면 낫는다고 하는데, 보니까 믿음이 없는 거야.
그래서 이 사람이 하는 말을 보면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그러죠?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해놓고 믿음도 없는 거야.
그러니까 ‘나의 믿음 없는 것도 도와주옵소서.’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믿음도 없을 뿐 아니라, 우리가 과연 참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예수님께서 한 세번 물으면 여러분 많이 대답이 약해 질거야.
처음에는 여러분들이 ‘다 교회 안 나와도 나는 나올 겁니다. 목사님 밀어내도 나는 나올 겁니다.’ 이렇게 할지 몰라도..
목사가 기분 나쁜 말 한마디만 해봐. 힝 하면서..
얼마든지 사람들이 그럴 수 있어요.
그래서 베드로에게 세번 쯤 물었더니 베드로가 굉장히 자신 없어하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우리가 참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했고,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고 가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여전히 그 베드로에게 와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딴 것은 안 물었어요.
‘내가 다시 묻노니 너희가 누구라 하느냐?’ 이렇게 물은게 아닙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해 놓고도 주를 부인하고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했잖아요.
지금 다시 그렇게 물은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러분 우리가 만약에 믿음이 어떻게 있든지 모르겠고,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러면 희망이 있는 거죠.
그래서 그럴 때 예수님께서 그 베드로에게 그 자신 없어 하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
어떤 양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값주고 산 양이예요.
그 양을 베드로에게 위탁을 하신 거죠.
우리가 믿음이 충만하고 어떤 고난 역경이 와도 주를 부인하지 않는 완벽한 제자에게 ‘내 양을 치라’ 했다면 모르겠는데, 그런 허물투성이인 베드로에게 여전히 위탁하시는 거예요.
다시 말해 예수님의 택하심에는 후회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때로는 좌절하고 낙심하고 흔들리고 부인하고 돌아서고 배반하고 그리했을지라도 주는 일양 미쁘셔서 그 베드로를 택하심에 후회하지 않고 ‘내가 너를 괜히 택했어.’ 이렇게 한게 아니야.
여전히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저는 몇번씩이나 참 내가 목사로서 이게 무슨 내가 제대로 하겠나..
그럴 때 사도바울의 약해하는 모습이나, 사도바울이 맨날 천날 고난에 내어던져지는데, 바울이 그럴 때 고난을 자기가 ‘신앙생활 잘못 해가지고 그렇게 되었다.’ 한번도 그렇게 생각 안 했거든요.
그리고 지나간 말 같습니다만 그럴 때 예수님이 거기 와서 세번 예수님 부인하고 했다해가지고 베드로 제쳐놓고 ‘야고보 너 이리와 봐. 너 날 사랑하지? 내 양을 치라고 해봐.’
그 다음에는 베드로는 교회에 안 나온다고..
그냥 허물투성이인데, 예수님께서 그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한 거예요.
여러분은 몰라도 저는 참 이런 장면이 아주 눈물겨웠어요.
주의 택하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거예요.
또 그럴 줄 모르고 택한게 아니잖아요.
18절,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렇게 아주 알송달송하게 이야기를 했어요.
요한의 해석입니다.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다시 물고기를 따라가지 말고 나를 따르라..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여기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요한 자기 자신이죠.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꼭 베드로답죠?
자기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면 그냥 자기 문제로 고민하면 될텐데, 요한을 가리키면서 ‘주여 얘는 어찌되는 돼요?’
그런 것을 물었다는 거야.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너나 나를 잘 따라와..’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여러분 요한이 왜 굳이 이런 말을 보태고 있느냐 하면, 실제로 다른 사도가 다 순교했는데, AD70년 이후에 20년 이상 요한사도만 혼자 홀로 순교하지 않고 살아 있거든요.
그런 것을 보는 제자들이 ‘요한은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죽지 않는다.’
그리고 64년부터 68년까지 1차 박해가 있었잖아요.
기독교 대박해가.. 네로황제 박해가 있었을 때 그 박해가 마지막 박해로 알았을 겁니다.
마지막 박해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는 의미에서 마지막 박해였을 것이고, 이제 박해가 끝났으니까 예수님이 오시지 않겠는가..
하고 요한이 나이가 들어가고 하니까 ‘요한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실 것이다.’ 자꾸 이런 말이 돌고 요한은 아니라고 부인해도 ‘괜히 겸손해서 하는 소리야. 틀림없이 오신다.’ 이런 말이 자꾸 도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루머같은 이상한 말이 도는 것은 막을 수가 없어요.
막으면 더 나와..
그래가지고 요한이 ‘그게 아니고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그게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만 하신 것 뿐이다.’
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요한이 자기가 쓴 것이 전부 참된 것이라는 것을 재확인을 합니다.
그리고 가장 예수님 가까이에서 십자가까지라도 가장 밀착되어서 가장 가까운 데에서 목격하면서 기록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이 쓴 것도 우리가 믿을 수 있지만, 요한 사도가 쓴 것은 정말로 직접 목격하고 쓴 것이니까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이죠.
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좀 과장이죠.
어떻든 그만큼 예수님께서 불과 3년 동안에 많은 일들을 하셨지만, 딱 이렇게 간추려서 이렇게 쓰는 것은 그 진리를 혼잡하게 하지 않고 단순화해서, 다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신 것과, 또 그를 힘입어서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하고 20장 끝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아주 분명히 하거든요.
이렇게 하면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실려는 것을 대체로 정리가 되었는데, 한번 잠깐만 돌이켜 보면, 요한은 예수님을 위에서 오신 그리스도, 태초부터 있는 로고스가 육체가 되어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
이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로고스가 바로 하나님이신데, 이 하나님 되신 로고스가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던 분이다.
그리고 승천하신 것도 원래 거기에 계셨던 분이 내려오신 것이다.
그래서 다시 올라가셨다. 이렇게 하는 거죠.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첫째 갈릴리 가나에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
그리고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 갈릴리 가나 사람이죠.
그 다음에, 니고데모가 방문한 사건도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수가성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났던는 사건도 딴 복음서에는 안 나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친 사건도 다른 복음서에는 안 나오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를 돌로 먼저 치라. 이것도 딴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위에서 왔느니라. 이런 말씀도 딴 복음서에는 안 나오고.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를 고쳤다 하는 말도 딴 복음서에는 안 나와요.
나는 선한 목자다. 이런 말씀도 다른 복음서에는 안 나오고.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도 굉장한 사건인데, 다른 복음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하는 것도 다른 복음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긴 사건이 나오는데, 이것도 다른 복음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 사건이고,
그리고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세상에 3년을 가르친 후에 새 계명을 수여하신다는데, 이 중요한 얘기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만 이것을 쓰고 있어요.
포도나무 비유, 딴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얘기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 하는 얘기도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기도, 요한복음 17장 전체가 그 긴 기도문이 딴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또 도마의 신앙고백,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는 신앙고백도 딴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오늘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을 받으시는,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그래도 한번 듣고 싶은 말, 예수님이 한번 듣고 싶은 말씀이 있었는데, ‘주를 사랑하나이다.’ 그 말을 한번 듣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말 못합니다. 베드로가 그대로 못해요.
그저 내가 주님을 조금 우정적으로 생각한다.. 필레오라는 말은 그런 말이예요.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밖에 안 되는 거야.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이런 말을 못했어요.
여러분 중에서도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한 참 사랑의 대상으로 우정 이런게 아니라, 참 사랑의 대상으로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말 못 들어본 분 더러 있죠?
못 들었으면 어떻게든지 들어보도록 노력을 해봐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들어보는 게 중요한 거예요. 한번이라도..
그냥 성도들이 ‘목사님 사랑해요.’ 이렇게 하거나 ‘아빠 사랑해요.’ 이런 것 말고..
누군가가 전 인격을 걸고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는 말, 그런 말을 한번 들어봐야 되고, 날마다 들으면 더 좋겠지만 너무 자꾸하면 입에 발린 말일 수 있는데,
결정적으로 자기 전 존재를 걸고 누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한데, 예수님도 한번도 못 들어봤어요.
마음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그런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 베다니의 마리아인데, 예수님을 참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사랑은 아니고, 마음으로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했다는 것을 읽을 수는 있겠죠.
그리고 적어도 베드로에게라도 거의 윽박질러 절 받기 같지만 그래도 한번 듣고 싶어 했었는데, 베드로가 사랑한다는 말이 굉장히 힘이 없습니다.
세번 물었더니 영 힘이 다 빠져버린 그런 얘기를 하는 거죠.
여러분 우리가 성경강좌때에 가끔 말씀을 드려왔습니다만, 하나님이시라도 사랑에는 목이 마른 것이고, 창세로부터 지금 우리가 요한복음 끝까지 오는 중에 어느 누구 하나도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단 말이예요.
별로 없었어요.
가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기도하면서 ‘주님 사랑합니다.’ 하는 말을 가끔 할 때, 내가 괜히 마음이 뜨거워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도 제일 원하시는 것이 우리가 드리는 금이나 은이나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 뭐냐 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모세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거거든요.
모세가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런 말을 다 묶어서 한마디로 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 말이다.’ 하고 깨닫게 한 것이고,
또 예수님께서 재확인해 준 거예요.
그것은 ‘믿습니다’만 하고 그저 거기서 끝나는 수가 많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는 말이 잘 안 나오는 거죠.
특히 우리 한국사람은 다 잘 안 나와요.
예수님께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참 꼭 듣고 싶었던 모양인데, 아쉽게도 베드로 입에서는 주를 사랑한다는 말이 시원치 않게 아쉽게 이렇게 이야기를 끝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치라’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시는 대로 요한 사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이적은 특별한 것만 골라서 보여줬죠?
갈릴리 가나에서 포도주 사건, 물로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사물의 질을 초월한다는 거죠.
그 다음에 오병이어 사건은 다른 복음서에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쓰는 것은 그것은 사물의 양을 초월하신다.
그리고 왕의 신하의 병을 고치는데, 예수님께서 직접 가지 않고 원격으로 공간을 초월해서 병을 고치는 사건이 나오는데, 거리와 공간을 초월하신다는 거죠.
그리고 38년된 병자를 예수님이 고쳤는데, 이것은 오래된 병이라도 고쳐내신 거죠.
시간을 초월하신 거죠.
자연법칙을 초월해서 물 위로 걸어가신 사건이 나오는데, 예수님은 자연법칙도 초월하신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주셨는데, 이것은 타고난 운명도 초월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리고 죽은 지 나흘된 나사로를 살렸는데, 이것은 죽음까지 초월하신다.
그러면 사물의 질을 초월하고, 양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하고, 자연법칙을 초월하고, 운명을 초월하고, 죽음까지 초월하시는 분이시라면 이분이 누구시냐?
이렇게 물으시면서 결국은 우리가 우리 입에서 대답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그런 답을 생각할 즈음에 절대로 헤프게 믿지 않는 도마의 입에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는 고백을 하게 하고,
그래서 그 분이 하나님이신 것은 갑자기 하나님 된게 아니라, 태초부터 하나님이셨는데, 로고스로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셨는데, 육체가 되어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가 다시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하나님 자리로 올라가신 것이다.
이렇게 증거하신 거죠.
그래서 요한복음이 꽤 신학적이고 아주 고차원적이고, 또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세밀하고 치밀하게 보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선포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오늘 아침 우리가 예배 첫머리에 묵상할 때 요한 1서 4장에 있는 말씀을 묵상했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 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가 이 성경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사도요한이 사도베드로나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실려고 했던 사랑을 배워서,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닮아가고 또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람 사도 요한이 일생을 살고 신앙고백적으로 기록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간과하거나 놓쳐버린 것도 다 챙겨서 이렇게 소중한 복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시야를 넓혀서 열두 제자중에 특별히 몇몇 사도들, 특별히 마태와 요한 사도 그리고 마가와 누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예수님의 참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계명과 또 선한 모범을 우리가 잘 배워서, 그리고 또 특별히 사랑을 배워서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