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성경에서 이름(오노마)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통칭되고 있는 단어입니다.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성전에 두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로서 구약의 성막이나 성전이 그 모델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성전에 두시고자 한 그 이름은 바로 지성소 안의 언약궤가 여호와의 이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언약궤가 신약의 예수님이 구약의 성전의 실체가 돼 이 땅에 오셨는데 예수라는 성전 안에 이름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그 이름이 여호와의 생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똑같은 표현으로 성령, 이름, 마음 등으로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그 이름을 이기는 자 위에 기록한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제목에서 주의 이름이라는 단어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을 둔다고 하는 그 이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 그 이름으로 불리워지신 최초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예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 주의 이름이 바로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제목에서 유의해야 할 단어가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구절입니다. 얼핏 이 글을 그대로 읽어버리면 주의 이름인 예수를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읽혀질 수가 있습니다만, 그런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부르는’이라는 단어는 이름을 붙이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즉, 누가 불러준다는 의미의 단어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3;12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지요. 새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기록한다고요.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예수라는 이름을 불러서 구원받는다면 구원은 사람에게 시작된다는 말이 되고 하나님은 인간의 요구에 그 요구사항을 들어줘야 하는 꼭두각시밖에 되질 않을 것입니다. 구원은 사람이 아무나 취할 수(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성경은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그래서 아무나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르면이라는 단어는 엄연히 원문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면 ‘불리워진다면’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새 이름을 기록하여서 그 이름이 예수가 되게 하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주여 내가 믿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즉 이름을 주시는 하나님에 의해 주의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자가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바로 이런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은 어떤 이름일까요? 바로 예수라는 이름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주의 이름으로 불리워지면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성경에서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예수, 예수그리스도라고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단어들을 한마디로 정확하게 정의한다면 “예수+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라는 말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가 되었다는 말도 됩니다. 너무나 간단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예수가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예수가 돼야 한다고 하니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미친 재림예수가 또 하나 탄생했다고 사이비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기름부음)가 됐는데 어떻게 예수가 안되느냐는 것입니다. 기름이 부어졌는데 왜 성도라고 할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와 그리스도를 성경은 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짝은 서로가 분리될 수 없는 단어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두 단어 중 하나만을 사용하였더라도 엄연히 두 단어의 조합으로 이뤄진 이름인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 예수라 부르거나 그냥 예수라 부르느냐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름이 부어졌으니 당연히 예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를 그리스도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안디옥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이천년 전 예수님에게만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만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왜 안디옥에 있는 제자들도 그리스도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이 서로 충돌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결론은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이고 예수라는 것입니다. 재림 예수가 또 하나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위의 본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서 역시 ‘부르는‘이라는 단어는 역시 부른다는 말이 아니라 ’불리워지는’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 얻는 구원이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져서 얻는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선물이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선물이라는 단어는 피동적인 위치에서 받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선물을 인간이 달라고 해서 주어진다면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 능력으로 얻게 된다는 괴상한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붙여주는 것입니다. 즉,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름을(예수라는) 받게 되는 통로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영접하는 자라고 합니다. 영접한다고 하니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이천년 전의 그 예수님을 영접하면 된다고 하는데 정말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속된 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이미 부활승천한 그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만날 수 없는 분입니다. 성경에서 분명하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소자에게 냉수 한그릇 대접한 자 결코 상을 잃지 않는다고요? 소자가 바로 이천년 전 그 예수님이 모델이었고 지금도 그런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지는 천사가 예수의 모델로 보내진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천사는 날개달린 어떤 존재를 말하고 있지를 않고 그냥 우리와 똑같은 모양의 사람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가르치는 자라는 직분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어떤 사람으로 하나님에 의해 보내지는 자를 영접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이렇게 보내지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영접함으로 구원은 성사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가는 것이 절대 절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이것이 바로 소자에게 냉수 한그릇 대접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편에 서 있는 자들에게 주인이 하시는 말씀 즉, 지극히 작은 자(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는 결론인 것입니다. 구원은 그 예수가 돼야 합니다. 즉, 예수 이름으로 불리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안디옥에서 제자들이 그리스도가 되었듯이 모든 성도 역시 그리스도예수가 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구원받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출처; 네이버카페 생명의 만나 남용모 목사
유튜브 남용모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