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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는 누구인가_이현래목사님 말씀 (전문 요약)
(2018.03.19)
다른 종교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기독교 주제는 예수 그는 누구인가 그게 주제이다.
그분은 무엇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그분 자신이 내게 무엇이 되는가 그게 중요하다.
그것을 모르고는 아무리 온갖 가르침 따른다 해도 종교에 불과하다. 그냥 가르침 받아 사는 것, 그것은 유교 불교 얼마든지 많다.
좋은 말씀이 있어서 성경이 중요한게 아니다. 한 사람을 제시하고 잇다는 것, 그게 중요하다. 그 사람을 모른다는 것, 그게 문제다.
내가 믿을 사람을 모른다는 것,
한 선교사가 묻는다. 목사님은 다른 사람과 달리 무엇을 말하냐고 묻는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알아가는 중이라고 하니까, 예수를 뭐하러 아느냐, 다 알지 않느냐? 한다.
2천년 역사 동안 많이 알려졌으니 따로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들이고, 독생자이고 성령으로 잉태했고.. 인류 위해 십자가 지고 부활 승천했다가 다시 오신다.
다 안다는 것이다. 따로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인데, 어디서 시작해야할지 모를 정도엿다.
그 사람만의 문제 아니다. 전 기독교인들의 생각, 어떻게 믿을 것인가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 ,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그것만 고심하고 있다.
기도도 해도 끝이 없고, 어디서 가야하나 그것도 모르고.. 어떤 목사님은 금식기도를 결사적으로 하고.. 그것을 마치고 나면 깨끗해지는 맛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다시 생활하는 사이에 원점 돌아가고 기도도 같다. 하지만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가 시간 지나면 사라지고.. 다시 가야한다. 철야기도도 공식적으로 하는 곳이 많다.
학교 다니는 학생들도 심지어 참석한다. 그렇게 할수록 교회가 잘 된다 한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교회에는 관심이 없다. 뭘 하느냐? 여기 와서 묻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이래서 되는가, 하는 것이다.
금식해도 안되는데 탱자탱자 해서 무엇이 되겠는가. 가만히 놀아서는 안되는 것 같다. 안식일 일하지 않는 계명이 가장 어렵다. 그래서 죽이라는 것 같다.
일한 것을 책망하는 계명, 그렇게 어려운 계명이 안식일 관한 계명이다. 목숨 걸고 지키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죽었다.
강대국 침공했을 때 안식일 때 소집해서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그것으로 색출해서 유대인이 많이 핍박당하고 죽었다. 안 해도 될 일 때문에 많이 죽었다. 우리나라 제사, 그것도 안해도 되는데 그것 제사 지내면 여호와 버리는 것이 되어 목이 잘려도 지킨 것이다. 절두산, 믿음을 지킨다 하는 표시다.
하나님 지키라는 것을 지키는 것, 어렵다. 너무 쉬우면 안 한다. 안식일 일하지 말라. 그런데 하필 그날에 할 일이 많은 것이다.
다 주변에 문 여는데 자기만 문 닫으면 단골이 다른 데 가버린다. 자기만 문 닫고 교회 가기까지, 그것을 결단하기까지 힘들다.
사람들은 본질 아닌 것에 목숨을 걸었다. 본질적인 것은 빼놓고 본질 아는 것으로 신음한 것이다.
나도 목회 전까지는 힘들지 않았다. 목회하면서 새벽기도 늘 해야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교인 숫자라도 적어지면 가뜩이나 적은 교인수, 내 기도가 부족한가? 그런 생각도 들고.,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나 안 다니던 기도원, 안 받던 안수도 받아봤다.
잘 되는 교회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방언도 해야겠고.. 성령은사 받는 문이 방언이라니 이 문을 통과해야겠는데 아무리 해도 통과가 안 되었다.
내 친구는 바로 방언을 받았는데 나는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이다. 정말 원하는데 안되는 것이다. 안수하고 기도할수록 냉냉해지지, 그렇게 뜨거워지지 않는 것이다. 결국 포기했다.
그런 방언 받고 안수 받은 사람들이 ccc가도 있었다. 그 사람들의 열정이 남 달랐다. 뭔가 시원찮고 통과하지 않은 사람으로 인식되니 편치 않았다. 물론 4영리만 전하는 것이 ccc 목적이니 그럭저럭 보냈지만 거기서 내 생전 처음으로 열심도 내봤다.
한 10분 이야기 나누고 상대 목사님 마음도 바꾸고, 기적처럼 중심교회의 대리 목회도 6개월 해봤다. 내 일생 처음으로 정열이 나오던 때였다.
..
사람들은 본질적인 것을 떠나서 부수적인 것에 관심을 쏟는다.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다른 위대한 인류 스승에 비해 무엇이 다른가. 구별된 것이 무엇이고 유일한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역 때문에 예수가 중요하다.
다른 것은 예수 아니라도 다 있다. 구속이 유일한 사역이다. 이 역시 가르침이 아니다. 그분 자신이 우리 구속이 된다. 이 점이 유일하다.
무엇이 복음인가? 예수 자신이 복음이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 그런 것이 아니다. 구속 곧 죄사함 받으려면 어떻게 하는가?
방법 많다. 회개하라, 기도하라 할 것이다. 그게 어느 종교에 없겠는가. 다 있다. 구속 곧 죄사함, 그 안에서 받는 것이다. 구속과 죄 사함이 마찬가지인데 어떤 방법 아니고 ‘그 안에서’다. 그분 자신인 것이다.
바울 서신의 가장 중요한 핵심어가 무엇인가?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서 이다. 그러니 방법 찾아서는 헛일이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분 없으면 아무 것도 안된다.
제자들, 예수를 3년 반 따라다녔다.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그냥 배운 것으로 한다면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종교보라. 절에서 1년만 있어도 흉내를 낸다. 들은 풍월로 그렇게 살 수 있는데, 3년 반 따라다녔는데, 그분이 죽어버리니 아무 것도 없이 백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기 잡으러 갔다. 아무 것도 없이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얼마나 허망한 말인가? 그런데 이 말이 정말 진실한 말인 것이다.
우리가 3년반 아니라 30년간 따라다녔다 해도 예수 안에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 다른 것은 다 종교적 가르침이지, 그분과 아무 관계 없다.
방법은 많다. 요즘에 교역자 세미나 가보라. 다 방법이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잘 된다더라, 그 이야기가 중점이다. 그러니 대형교회 중심으로 모여든다.
그러니 목회 어떻게 하면 잘 하는가? 하는데 ‘어떻게 하면’ 이 따로 없다.
구속 사역을 전하려면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그분이 있어야한다. 그분은 곧 거룩함과 구속함과 의로움이 되셨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이 아니다.
의롭다 해도 그분이 아니면 없는 것이고 거룩함도 그분이 아니면 없는 것이고 이 분 없이는 아무 것도 안된다.
그러니 얼마나 허무했겠는가. 다시 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 오죽했으면 베드로가 모른다고 했겠는가. 모른다고 하면 다 끝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른다고 한 것이다. 목숨걸고 주의해서 다 본 후 그럼에도 모른다고 했다.
왜 모르겠는가? 다른 일 같으면 저 사람이 이런 말 했고 저런 일 했고 할 말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데 나는 저 사람을 모르겠다, 그 패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정말 3년반 따라다닌 역사는 있지만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이다. 그분 자신을 몰랐던 것이다. 정말 허망하다.
구속사역, 이것 때문에 왔으니까 이것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예수를 굉장한 분으로 생각할 필요 없다. 다른 선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옛날 한학 공부하던 분들은 성경을 이게 무슨 책이냐고 한다. 성경 속에 별 희안한 일, 사람 사는 일, 쓸데없는 일이 많은 것이다. 그 사람들 볼 때는 시시하게 보이는 것이다.
시아버지랑 며느리 관계하여 아들 낳은 이야기는 왜 써놓았냐는 것이다. 그래서 야수쟁이 하고 비웃고 은근히 무시한다.
정말 세기적 명의를 만난 적 있었는데, 그 사람이 나를 보고 갸우뚱하며 (그렇게 실력좋은) 자기에겐 왜 사람이 없고 저 (시시한) 사람에겐 사람이 많은지 그것을 묻는다. 이게 이분 마지막 의문이었다.
내 관상을 봐도 그런게 없었는지, 정말 시시한 사람인데 왜 저렇게 사람이 따르는지! 그 사람은 자기 아들조차 그 곁에 안 있는다. 너무 칼칼해서 그렇다. 가급적 아버지랑 안 만나려고 한다. 바늘방석 같다는 것이다. 정말 외롭게 돌아가셨다. 딸도 있기 싫어하고.. 찾아가니 집안에 짜장면 그릇 수북이 쌓여있었다. 늙으면 남자는 마누라만 봐준다. 자식도 싫어한다. 나도 집에서 설설 기고 있다. 뭐라 하면 나만 손해다.
똑똑하고 영리하다고 사람이 따르는게 아니다. 인간은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그분도 평생 왜 그런지 자신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할 때 우연히 짓지 않았다. 목적이 있어서 그 계획대로 창조하셨다. 이 노선 벗어나는 사람은 헛일한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소용없다.
이 사람이 그런데 사탄에게 유린당한 것이다. 빼앗겼다. 그 사람을 통해서만 무엇을 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이 그럴 줄 알고 유린해 가버린 것이다. 그 사람은 주인을 잃고 엉뚱한 주인이 생겼다. 이 사람을 되찾는게 하나님의 일이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제자들이 예수에게 물으니
”하나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 일이다.“ 하신다.
누가 그 사람을 안 믿는가? 선문답 같은 이야기다. 이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이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게 하나님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 받아들이는 것, 그게 우리 일이다. 다른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잃어버린 인간을 찾는 데 있다.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처럼 사람을 찾는 일이다. 전도는 사람 찾는 일이다.
교회에 아무리 사람을 데려오고, 아무리 설교해도 하나님 찾는 그 사람이 못되면 헛일이다. 기독교인 된다고 다 되는 게 아닌 것이 그 이유다. 사탄에게 유린된 사람 찾아내는 것, 이것이 구속 사역이다.
예수,
공생애 시작하기 직전에 광야 나가서 마귀에게서 시험 받는다. 그분은 우리처럼 시험당한 것이 아니다. 일부러 전투하러 나간 것이다. 일부러 마귀와 싸우러 간 것이다.
예수 대답을 들어보면 명백하다.
‘네가 하나님 아들이면 이 돌들을 떡 되게 하라‘ 배고픈 사람에게 마귀가 말한다.
사탄의 목표, 그 하나님 아들의 위치를 빼앗겼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의 위치를 자기가 차지 하는 것이다. 욥기 보면 천사들을 가리켜 하나님 아들이라 한다. 창6장에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그런 말이 나온다.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들이다.
천사는 하나님 아들 위치에 있다가 사람이 나옴으로서 자기 위치를 빼앗긴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 아들이 못 되게 하는 것이 사탄의 목적이다. 그래서 자기 종이 되게 한다.
선악과 먹은 이후 인간은 종의 근성이 생겼다.
누가 제사 드리라고 하지도 않았고 제물 가져오라 안 했는데 항상 하나님 앞에 가면 종의 근성이 생겨서 가인과 아벨은 제물 들고 간다. 누가 시키고 요구한 것 아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제물 안 들고 가면 안되겠다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자기 친 아버지 같으면 그냥 안 들어가겠는가. 그런데 격식 갖춰서 선물 준비해서 간다. 그러니까 거리가 생겼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건너지 못할 강이 생긴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잘 보여볼까?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제물 가지고 제사 드리러 갔는데 거기서 싸움이 벌어지고 만다. 만약 자기 친아버지에게 갔다면 자기가 못 가져간 것 동생이 가져갔으면 더 좋아할 일이 아닌가!
더 좋을텐데 시기가 났다는 것, 그것을 종교사회에서 볼 수 있다. 종교사회에서는 큰 자가 반드시 어린 자를 죽인다. 약한 자가 다시 강자가 되면 올챙이 시절 잊고 다시 그렇게 반복한다.
자기 위치에 있지 않고 다른 데 있기에, 사고방식이 그런 것이다. 종교가 있는 한 안 없어진다. 수없는 사람이 그 때문에 죽었다. 그래서 종교는 스스로 반성하고 우리가 잘못했구나 하고 생각하지 못한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약할 때는 핍박받았다. 그런데 강해지니 반대로 남을 핍박한다. 그것을 회개 못하고 있다.
강자가 되면 자기가 하나님 된다. 그러니 회개할 필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는 충성을 다 했기 때문이다. 유태교가 강할 때는 예수 믿는 자들을 죽였다. 예수 믿는 사람들 강해지니 이방인 죽였다. 그러니 종교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가인이 아벨 죽였다, 언제까지 가는가? 요한계시록까지 가는데 제단 아래에서 죽은 영혼들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아벨의 신원하는 피, 이런 말이 나온다. 아벨이 억울하다고 호소한다. 억울한 자는 호소하게 되어있다. 그게 약자의 말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일이 반복된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가 국교 되길 바라지만, 그러면 사람 다 죽는다. 강자가 되면 사람 죽이러 다닐 것이다. 핍박 받을 때가 좀 순수하다. 이런 인간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이다.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다닌다.
드라크마 찾는 이야기나 탕자 이야기나 다 하나님의 마음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하신 일, 그 노선을 보면 가인이 죽인 아벨, 그 대신 셋을 주셨다고 한다. 이것은 회복의 시작이다. 구속사역의 시작인 것이다.
대신 주셨다,
노아에게 세 아들을 주었다, 바다에 다 떠내려가는 가운데 세 아들을 주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다. 전부 다 구속 사역의 한 줄기다.
마지막에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게 했는데 다 같은 열매다. 셋에서 시작해서 예수까지 다 같은 계통인 것이다.
그 계통을 알기 위해서는 그 계통에 서야 그 계통을 알게 된다. 셋이 누구이고 왜 왔는지, 그 노선에 서야만 안다.
아벨이 죽으니까 셋을 주셨다, 노아에게 세 아들을 주셨다, 다 멸망한 자리에서 주신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100세에 이삭을 주신 것이다. 대표적 일이다. 왜 하필 100세인가?
아브라함이 낳을 만 할 때 주면 좋을텐데 말이다. 아브라함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하나님 뜻 이루자. 우리 힘 있을 때 하나님 약속 이뤄지도록 도와주자.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이다. 돕자 해서 낳은 것이 이스마엘, 지금도 골칫거리다.
신기한 일이다. 지금까지 두 족속이 싸우고 있다. 옛날 싸우고 말았으면 옛날 이야기 되고 말았을텐데 말이다.
이삭족속들, 옳지 않은게 많고 이스라엘 하는 것도 이상하다. 어떻게 자기 땅이라 주장하는가? 당당히 들어와서 오히려 있는 사람 팔레스타인을 쫓아낸 것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과 같은 이야기다. 어거지인데 유엔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이야기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준 것은 자기 육체에 어떤 가능성도 없을 때, 이럴 때 하나님이 하신 일로 보이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힘이 남을 때 해야할 것 같은데 100세, 이 때는 믿음의 조상이니, 믿음으로 의롭게 받았느니 그런게 다 없어진 때다.
다 없어졌다. 하나님 사자가 와서 내년 이맘 때 아들 있을 것이라 했을 때 아브라함도 못 믿고, 사라도 장막 뒤에서 웃었다 했다. 80세, 그런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가능성이 끝난 것이다.
힘없으면 고민하려고 해도 못한다. 고민하면 잠을 못자니 오히려 고민거리를 던지고 만다.
그런데도 피똥 싸는 사람, 힘이 있으니 한다. 구할만한 조건이 전혀 없으면 구하지도 못한다.
요즘 자서전을 정리하고 있는데 한 500페이지 썼는데 기도라는 말이 한 군데도 없다. 내가 생각할 때 전혀 불가능하니 기도할 수 없었다. 여러번 중요한 고비 넘어왔는데 기도했다는 곳이 없다. 기도할 수 없었다. 언덕도 없어서 비빌 데도 없고..
35살에 결혼했다. 그런데 한 번도 결혼못하면 어쩌나,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 일로 보여지지 않았다. 내 사정을 생각하니 그냥 접었다. 그러니 결혼 할 때도 목회 하고 있으니 옆 보기에 민망하니 결혼하라 밀어부쳐서 결혼했다. 그러니 이런 사람 주십시오 기도해본 적 없다.
내가 원하는 사람 놓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책망하실 것 같고 그렇다고 아무나 놓고 기도할 수도 없고.. 그래서 구할 수 없었다. 장래가 빤해서 무슨 가능성이 없었다.
군대 신체검사에서 면제 주면서 ‘장가는 가야할텐데..’ 했던 말이 뇌리에 박혔던 것 같다. 그래서 결혼해야할텐데 생각 못했다. 생각하면 비참할 일, 절대 생각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건강도 학벌도 돈도 무엇도 없으니 어떤 기대도 없었다. 다른 생각없이 살았다. 전혀 뭐가 없으니 무엇도 할 수 없었다.
100살 아브라함, 다 사라져 기대할 것이 없었다. 이것이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것과 똑같다. 마리아가 오죽했겠는가. 결혼 전에 임신했으면 그냥 돌 맞아 죽을 상황에서 애기를 낳은 것이다. 오죽하면 결혼 전에 임신했겠는가.
사라-이삭-야곱 다 이 계열이다. 이것이 죽고 다시남의 전형이다. 이 노선이다. 나도 할 말 없는 자리에서 불러졌다. 그러니 두 말할 필요 없게 되었다.
나를 우유부단하다고 하는데 여유 있으면 그렇게 된다. 급하면, 그 길밖에 안 보이면 번개처럼 일어나게 된다.
예수가 다른 사람과 뭐가 다른가? 죽고 다시 산 것이 다르다. 그냥 어느날 갑자기 그 말이 나온게 아니다. 셋부터 나왔다. 아벨 죽고 온 셋. 그때부터 하나님 사역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의 잃어버린 길이 바로 이 길이었다. 이렇게밖에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선악과 먹고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한 아담 안에서 자신이 창조한 사람을 찾을 방법은 이밖에 없다. 다른 길에선 못 찾는다.
수천 년을 이렇게 지나 죽고 다시 산 것이다. 죽지 않고는 안 된다. 십자가 못박았는데 뛰어내려버리면 하나님 일을 망쳐 버린다. 그러면 예수는 들어올 수 없다. 이 노선이다.
그런데 십자가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었다니까 문제가 생겼다.
예수가 왜 못 뛰어내리는가?
뛰어내릴 수 있음에도 하나님 앞에 순종하느라 못 뛰어내린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정상인가?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는게 정상인가,
십자가 못박혀 있는게 정상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라.
예수가 죽어? 십자가 못박혀 있지만 죽은 사람도 살렸잖아.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였잖아. 하나님 아들이잖아. 그런데 왜 못 뛰어내려?
이렇게 사람이 세뇌되고 만 것이다. 이방인에게 그 이야기하면 십자가 못박아 놓으면 당연히 죽지 이렇게 생각할텐데 기독교인들에게 그 말하면 의문을 갖는다. 누가 이상한지 알 수 없다.
이보다 쉬운 길이 없다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이보다 어려운 일이 없게 된 것이다.
한 두 사람 아니다. 심각한 문제다. 검은 것을 희다고, 흰 것을 검다 한 것이다. 그래서 셋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렇지 않고 좋은 말해서 될 것 같으면 왜 이리 긴 시간이 필요하겠는가. 말로도, 무엇으로 안되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특별한 사람을 골라서 하나님이 자신 일을 하신다.
하나님은 유명한 연출가시다. 딱 맞는 사람을 골라서 연출시킨다. 지원병으로 하는게 아니다. 그 중에 딱 집어서 쓰신다. 엄청난 프로잭트 움직임에 있어서 아무나 등장시킬 수 없다.
성경에 실린 아브라함 같은 정확한 사람, 믿음도 있고 다 있는데도 안 될 때 불렀다. 종교 만들기 위해 아브라함을 믿음 좋은 사람 만들었다. 아브라함을 다시 만들었다. 아브라함의 믿음 좋은 단계도 있었지만 그것은 밑의 단계다.
의롭다 함 받는게 다들 최상인줄 아나, 그건 저 밑에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이삭을 주셨다, 이것이 최상인데 이것을 버리는 것이다.
종교는 저 밑의 아브라함을 세웠다. 그래야 종교가 되는 것이다. 보다더 보수적이고 고지식할수록 사람은 많이 모인다고 한다. 그렇게 빡세게 돌려야 교회가 잘 된다고 한다.
헌금이니 새벽기도니 쎄게 해야 그런 종교가 잘 된다고 한다. 단순, 명료, 세게. 그래야 사람의 자존심, 교회 가는 보람이 생긴다고 한다.
이 교회는 무엇을 하라는지 모르겠다 하는 사람도 있는데, 본전 찾자는. 그 사람 살리려는 이야기다. 원 하나님의 창조 그 사람을 찾아야하는 것. 그게 예수의 유일한 사역이다. 다른 것은 이것을 위해 임시적으로 가는 과정에 필요할 뿐이다. 마지막엔 이것만 남는다.
율법은 우리가 못 지킬 줄 알고 주신 것이다. 잘난 척하니, 지킬 수 있다고 하니 준 것이라고 바울은 해석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기 위해 모든 것은 다 잘라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것 나쁘다는 말 아니다. 생선 먹을 때 날개, 비늘, 뼈 다 골라내고 생선살만 먹듯이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그 안에서 살게 하려고 횟감 먹게 하려고 주신 것이다. 그런데 날개만 붙들고 있으면 되겠는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 필요해서 주었지만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다.
문자 아니면 말씀 기록할 수 없어서 주신 것인데 그 문자만 씹어먹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다른 것 빨아먹으라고 준 것인데 문자만 붙들고 있는 것이다.
사탕수수 역시 그 달콤한 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겉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을 주시기 위해 같이 주신 것이다. 문자가 아니면 기록할 수 없어서 주신 것인데 그 안의 알맹이를 먹지 않으면 어떻겠는가.
핵심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생선 핵심은 살이고, 사탕수수의 핵심은 그 안의 단 물이다. 다 알맹이를 보호하기 위한 겉이다.
사람들에게 우리가 줄 것도 그렇다. 못 먹을 것은 추려내고, 자기 먹을 수 있는 좋은 것을 줘야한다. 자기가 먹고 좋은 것, 자기가 먹고 약이 되고 복이 되는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이다. 문자로 기록된 것을 주는 게 아니다. 그것은 우편배달부다. 편지가 아니다.
그것으로 요리를 해야한다. 그게 사역이다. 그러려면 그분을 내가 소화해야한다.
엄마가 밥을 먹고 젖으로 내놔야한다. 그게 사역자다. 밥 그대로 아기에게 못 먹인다.
젖이 복음이다. 그냥 주는 것은 죽음이다. 내가 해본 것, 먹어본 것만 줄 수 있다. 자신이 김치만 먹어도 그것만 내놓아도 된다. 하나님이 알아서 살린다. 내가 맛있게 먹었나? 그게 중요하다. 그것만 내놓아야한다.
내가 맛있게 먹은 것을 내놓는데 사람들이 너무 좋아한다. 전에는 지식적으로 내놓으니 사람들 반응이 없어서 거기서 내가 답답하고 걸렸다. 왜 이런가?
이상만 박사 주석을 그당시 많이 봤다. 공정한 주석이어서 좋았다. 그러면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일줄 알았는데 냉냉했다. 그래서 걸리게 되었고 왜 그런지 알게 되었다.
내게 맛있어야 남에게도 달지, 내게 달지 않은데 상대에게 달겠는가? 엄마가 먹은대로 아기가 먹는다. 찬 것 먹으면 아기가 설사한다. 우리가 설사한 것을 먹으면 먹는 사람도 설사한다.
내가 깨달은 하나라도 즐겁게 먹은 것, 그것을 내놓으면 상대도 반응이 나온다.
예수는 죽고 살았다, 본질적 문제다. 죽고 산 것이 무엇 되는가? 바로 교회가 된다. 죽고 살지 않고서는 교회 될 수 없다.
여기서는 천년왕국-새예루살렘 가는 길이 되었다.
죽고 다시 사는 것은 새 생명이다. 소생, 전의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생명이 온 것이다.
죽으면 죽은 것이다. 예수님이 뛰어내리지 못해야 죽은 것이지, 뛰어내리면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것이다.
야, 놀랍다 그것만 남는 것이다. 예수는 정말 놀라우신 분이다! 그것만 남는데 그게 남아서 뭐하는가?
그런 것만 그동안 보고 다녔다. 하지만 죽어야 산다. 죽은 데서 산 것이 나온다.
그의 죽으심
마리아의 죽으심
아브라함의 죽음
노아의 죽음
아벨의 죽음
다 죽음이다.
내가 나를 죽인다는 것 아니다. 그냥 죽었다. 죽을 수밖에 없어서 죽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안 죽을 수 있는데 하나님 경륜을 이루기위해 죽었는가?
아벨은 힘이 없어 죽었다. 힘이 없어 죽지, 스스로 죽는 놈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안 죽을 수 있는데 죽었다, 하나님이 죽으라 하니 죽은 것이다. 살아날 수 있는데 못 살아나는가? 뛰어내릴 수 있는데 못 뛰어내리는가?
하나님이 거기까지 허락하셨으면 못 뛰어내리는 것이 맞다.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 그때까지만 해도 사정할 여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대답 안 하셔서 골고다까지 갔고 십자가 달린 것이다.
십자가 달려서도 예수님도 일말의 기대를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아버지와 워낙 친한 분이니까, 우리와 그런 점이 다른 것 같다. 그동안 그런 증거가 많았다.
그런 자기가 십자가 못박힌 것, 아버지 보고 계신데 무슨 대책있겠지.. 그랬는데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그것을 보면 나 이럴 줄 몰랐습니다 이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막상 가보니 아무 대답 없는 것이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 한 마디 속에 예수님의 고민이 만져진다.
마지막까지 기다렸어도 대답없는 자리, 그것은 죽어야하기 때문이다. 죽어야한다면 못 뛰어내리는 것이 맞다. 죽어야하기 때문에 못 뛰어내린 것이다.
못 뛰어내리는 것,
‘야 절망이다. 끝이다’ 이렇게 우리 눈에 보인다. 그런데 하나님 하시는 일이 거기서 시작된다. 그런데 뛰어내릴 수 있는데 안 뛰어내렸다 하면 하나님이 당신 일을 하실 수 없다.
거기서 예수, 하나님 아들도 별 수 없구나. 그런 것을 느낀다.
역시 사람은 죽는구나. 그렇게 보는게 당연하다.
제자들의 생각,
아 결국 사람이었네. 우리는 그를 하나님 아들로, 신처럼 생각하고 따라왔는데 결국 죽는구나. 우리가 잘못 따라왔구나. 하고 돌아간 것이다. 이것은 사람 생각이다.
요3: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자세히 쳐다봐야한다.
그냥 인간 생각으로 사람 좋은데, 하나님의 아들로 따라왔는데,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하니 무엇 못하겠나 했는데 할 수 없네, 우리가 잘못 봤네.. 이런 애석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너무 사랑한 사람, 너무 존경한 사람이니까 유대인처럼 비난하고 욕한 사람 속에서 숨어서 도망쳤을 것이다. 동네 가서 뭐라 하겠는가. 사람을 잘못 봤어, 좀 미친 노릇하고 왔어, 그럴 것이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 할 때 얼마나 비난받았겠는가.
그가 인간이지 무슨 신이냐?
그런 수모를 당하며 고기 잡으러 간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라, 자세히 보라.
하나님은 이 사람 밖에 준 일이 없다. 이 사람만 줬다면 이 사람만 자세히 봐야한다. 그래야 살 것 아닌가?
놋뱀을 쳐다보고 살았다, 왜 놋뱀 쳐다보고 살았을까? 우리는 모른다. 모세도 몰랐던 것 같다. 해답이 없다.
그런데 예수가 그것을 자기에게 대입해서 말씀하신다. 그 말씀을 요한이 그대로 기록했는지, 요한이 자기 속에서 소화된 것으로 기록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복음이다. 성경 중에서 가장 좋은 구절일 것이다. 그런데 그 앞의 구절을 빼버리고 멋모르고 좋아했다.
앞에 가장 중요한 구절이 있다.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얍복강에서 야곱이 하나님 바짓가랑이 매달려서 축복 받았다, 가는 데마다 그런다.
그런데 성경 보라. 밤에 어떤 사람이 와서 야곱과 씨름한지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 말은 쏙 빼고 나무뿌리 뽑으라는 말만 계속 한다.
자기대로밖에 안 보이는 책이다. 역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얼마나 좋은가! 앞의 구절이 사라져 버렸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하리니.
예수의 직접 말인지 요한의 말인지 모른다. 그런데 이 말이 없으면 다음 구절이 공허하다. 독생자 주셨으니~ 하지만 독생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예수가 독생자라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왜 그런 믿음은 멸망치 않는가. 따지고 보면 공허해진다. 그래서 앞의 구절이 필요하다.
거기 자기들이 신처럼 생각한 사람이 매달려 있다. 저게 대체 무엇인가? 아, 사람이구나.. 우리와 같은 사람이구나..
우리는 전에 어떤 모양의 사람이었는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지 못해도 막걸리에다 동동주 만들 수 있는 수준의 사람들이었다. 막걸리에 다시 누룩 넣고 밥 넣으면 동동주 된다.
나는 그래도 동동주 만들 수 있는 사람이야,
그게 우리 자존감이었다. 이것말고도 수없이 많다. 사람마다 자기로서 존재키 위해 자기를 받쳐주는 자존감 필요하다. 이것이 무너지면 정신병 걸린다.
정신병 환자도 자존감만 살아나면 회복될 수 있다. 그것이 무너진 것이다. 내가 나라는 것,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니 왜 무시하느냐, 그런 말도 나온다. 제일 불쾌한 것이 무시당하는 것이다. 누구나에게서 무시받으면 독이 나온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존감 세우는 사람이 산다. 술 먹어야 마음 편한 사람, 이 사람에겐 술이 필요하다. 독이 올라있다가도 술 마시면 노긋노긋해진다. 이 사람에겐 술 필요하다. 율법 들이대면 안 된다. 자칫 정신병 걸린다.
죽고 부활하심으로 교회가 이루어진다는 것,
하나님의 구속을 예수가 완수하셨다.
예수는 확실히 죽은 것이다.
죽지 않으면 나를 포함하지 못한다.
내가 그를 쳐다볼 때 ‘나와 같은 것이 있구나’ 하고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는 분 앞에 감동하고 감격하게 되면 종교가 된다.
그러면 경배하는 수준으로 그치게 된다.
그를 함부로 대할 수도, 신적인 분과 같이 있을 수도 없다.
예수를 다른 곳에서 만나면 나와 다 다르다. 만날 수가 없다
그런데 가까이 와달라고 그 앞에서 기도한다. 그런데 가까이 와보라. 같이 살겠는가?
같이 못 산다. 단지 우리가 존경하고 경배할 대상밖에 못된다.
그와 내가 거리가 머니 연합 안된다. 합해지지 않는다.
자기 보기에도 만만해야 곁에 간다.
굉장한 사람과는 같이 못 산다.
내 속에 예수 있다는 말은 아예 안 될 말이다.
난 지금도 내 속에서 예수 찾아낼 수 없다. 못 찾는데 그것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게 예수 아니다. 일시적으로는 신비한 경험 가능하다. 나도 해봤다. 하지만 그런 것은 나 혼자의 경험이기에 떠들지 않는다. 똑같이 다 경험 되는 게 아닌 것이다.
나와 딱 맞는 사람 만나야한다.
오병이어로 오천명 먹이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한 것, 다 옷이다. 입고 있던 옷이 다 벗겨나간 것이다. 실제로 다 벗어진, 그분이 갖고 있던 것이 다 벗겨진 곳이 십자가다.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십자가 못박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만 남았지, 아무 것도 없었다. 거기서 우리는 예수를 만나고 내 자신을 보게 된다. 그게 나다.
그분이 옷입고 있을 때는 나와 달랐는데 옷 벗겨지고 나니 나인 것이다. 남이 아니다.
그러니 쳐다보라. 쳐다보면 산다. 인자도 들리리니 들리는 자마다 그게 참 사람이라는 것을 믿어야한다는 것이다. 이게 진짜 사람이구나. 예수의 핵심은 저 사람이구나 하고 알게 된다.
그러면 물 위로 걸어갔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은사요 능력이다. 그분이 가진 것이니 어느날 없어진다. 만약 그것이 자기 자신이었다면 십자가 못박혔을 때 뛰어내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주신 능력이었다. 그러니 하나님 안 주시면 없는 것이다. 내 힘같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신 것이다.
거기서 분명하게 다 빠져나가고 액기스만 남은 순수한 참 사람, 도덕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종교적이지도 않은 참 사람, 그 사람이 발견된다.
이 사람이 진짜 사람이다. 우리도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그분만 그런게 아니다. 그런데 선악과 먹고 뭔가 되려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거지옷이었다. 아담이 무화과 잎으로 가렸다는 그런 것,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그런 것이다.
계속 그 옷만 걸치면서 그게 나인 줄 안 것이다. 그렇게 계속 단장되어 오다보니 그게 정상인줄 알았다. 그 사람이 정형화되었다. 그러다보니 불교에서 자기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이렇게 걸친 게 내가 아닌데.. 하면서 이것을 찾아 나선 것이다. 돌다보면 도로 그 자리다.
왜인가?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안에서 그 사람을 본다. 아, 저 사람이 흙으로 만든 그 사람이구나. 하나님이 지으시고 심히 보고 좋다 한 사람이 저 사람이구나. 아는 것이다.
나도 옷만 벗으면 그 사람인 것이다. 입었다고 그 사람아닌가? 벗으나 안 벗으나 그 사람이다. 내 진짜 나는 그 사람이다.
거기서 나를 발견하니 안심이 되었다. 걱정할 것도, 안 가까워질 것도 없다. ‘그 사람 안에’ 내가 있다. 기적을 행하는 자리에는 내가 없다. 위대한 자리에는 없다.
영적 훈련된 사람이 자기인줄 아나, 못 박으면 죽는게 나다. 그러니 나를 찾아 돌아다닐 필요 없다. 그것을 피하려니 돌아다니는 것이다.
자기 가진 것으로 무엇을 찾고 있다. 자기를 유지하면서 뭐 없나 찾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정해준 격을 바꿀 수 없다. 해탈해도 그 사람이다.
염하시중의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이나 십자가에서 찡그리고 있는 사람이나 같은 사람이다. 그 미소를 보고 사람들이 따라가는 것이다. 그 찡그림 속에서 나를 봐야한다. 나를 보게 하는 내가 있다. 그러니 내 자리가 주저앉게 된다. 공중에서 의자에 앉듯이 내려오게 된다. 안정이 된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은 그 사람이다. 하나님은 자기 배필을 찾는데 그 사람이다. 하나님이 연합하고 싶은 사람은 그 사람뿐이다. 성경에 쓰여 있는 복있는 사람, 다 이 사람이다. 심령이 가난하면 이 사람보다 가난할 수 있겠는가?
이미 가난한 사람, 이미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인데 자꾸 뭔가 만들려고 한다.
나는 배수진 쳐진 사람처럼 버릴 것도 없어서 홀가분하게 이끌렸다.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되었다. 따로 갈 데가 없다. 그러니 그 열린 길로만 다니게 되었다. 버릴 게 없는 사람, 힘이 없으니 힘들지 않게 이끌리게 하셨다.
왜 예수가 그렇게 나타나셨는가.
나를 포함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되지 않고서는 나를 포함시킬 방법이 없다.
광해군과 허균
광해군은 허균을 가까운 친구로 생각했다. 하지만 허균은 늘 광해군 앞에 갈 때 몸을 갖추고 나가야 했다. 어느날 역모에 같이 말려들었을 때도 광해군은 허균이 아까워서 ‘지금이라도 돌리면 안되겠느냐’ 했을 때 ‘나 혼자면 괜찮지만 나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한 사람이 이렇게 많습니다. 불가합니다. 전하 용서하소서.’ 하니 그렇게 친한 사이인데도 임금이니 능지처참 하라고 명한다.
임금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임금은 임금이요 신하는 신하다.
예수님이 아무리 사랑이 많고 자비가 많다고 배워도 물 위로 걸어가신 자리에서 친구여 그게 말이 됩니까? 그것을 받아들이겠는가? 제 정신으로는 못 받아들인다.
허균은 그것을 알았기에 평소 늘 가도 신하 입장이었다.
예수 만날 때 다른 데서는 못 만난다. 다른 데서는 어떻게 해도 포함이 안된다. 기도를 아무리 해도 안된다.
그의 죽으심
뛰어내릴 수 없어서 죽은 죽음이라야 포함되지, 뛰어내릴 수 있는데 안 뛰어내린 자리에서는 포함될 수 없다.
자기 일로 생각하지 않은 사람의 말인 것이다. 내가 그분에게 포함되려면 그분은 꼭 뛰어내리지 못한 분이어야한다. 그래야 포함된다.
잘 생각해보라.
뛰어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 뛰어내린 분이 있다면 존경은 되겠지만 내가 어떻게 거기 포함되겠는가?
불가능하다. 만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평생 종교생활, 주여주여 엎드려 기도만 하게 된다.
다시 사심,
그와 연합하여 다시 살게 된다. 다시 사심은 우리와 연합하기 위해서다. 그분의 다시 살으심 속에 내가 연합된다. 죽었다가 살았으니까.
주와 함께 죽었은즉 주와 함께 살리라
바울은 그렇게 고백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이것을 보고 새생명이라 한다. 이 새생명 안에서 행하게 하려 함인 것이다.
예수 역시 자기 생명으로 다시 산 것이 아니고 나도 내 생명으로 다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분으로 인해 다시 산다. 완전 죽은 분이 살았으니, 하나님이 인정하셨으니 나 역시 하나님이 인정할 것이다. 예수 안에 포함되었기에 나를 인정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당당히 그 안에 포함된 사람으로 살게 된다. 이 사역이 유일한 사역이다
아직 다 모르겠지만, 나를 이렇게 해줄 사람 아무도 없다. 이렇게 가봐라, 하는 세상에서 자기 안에 우리를 포함시켜서 인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와 함께 산 사람은 이분뿐이다. 이것을 전하는 것이 복음이다.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과 한 자리에 있다. 이게 복음이다.
내가 예수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앉은 것과 같다. 그러니 우리는 기도한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 말은 그와 함께 땅에서 왕노릇할 것이라는 말이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이것이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이다. 어떻게 먹는가? 천주교인 식으로 먹으면 먹어지는가? 어떻게 먹는가? 예수님이 자기보다 얼마나 높은데! 신부님만 해도 자기보다 얼마나 높은가!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잠 자고 나니 다른 사람 된 것이다. 그분이 자기 안에 나를 포함시켜주시니 포함되고 그분이 나와 함께 사니 나도 사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분 안에 포함된 생명으로 살면 새 생명으로 산다.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 새 생명이다. 옷입고 다니던 내가 내가 아니다. 그분 안에 포함된 나로 사는 것, 그게 얼마나 당당한가.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된다. 이미 내가 그분 안에 포함되었으니까. 다른 인정은 인정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날더러 실력있다, 재주 좋다, 등등 칭찬해도 나쁜 것은 아니라도 그것으로 손뼉치고 좋아할 일이 없다. 내가 노력한 만큼 인정받는 것이다. 서로 인정해주고 살 일이다.
벽돌의 서로 물림, 안 맞는 사람이 맞는 사람과 연합된다. 정말 내게 싫은 사람은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인지 모른다. 또 내가 없으면 안될 사람도 있다.
윤주, 하도 옆에서 불안해해서 ‘걱정마라, 네가 지옥가면 내가 같이 가줄게’ 하고 안심시켜 주었다.
까짓것 지옥가도 거기가 편안해진다면 지옥이 더 이상 지옥이 아니다. 그래도 안심이 안되는지 이번에도 또 와서 그런다.
‘지옥까지 같이 가준다고 했지요?’ 한다.
‘그래 그래’ 했다.
우리가 먹는다는 말, 내가 된다는 말이다. 십자가 못박힌 예수가 내가 되는 것인데 내가 어떻게 십자가 못 박히고 내가 어떻게 그 길을 따라가는가?
숨겨진 길도 있을지 모르나 도저히 못 따라간다.
충주에서 이렇게 기도한 적 있다.
‘주님 만약 십자가 질 일이 있다면 저는 못 지겠습니다. 그러나 꼭 내가 지어야 될 일이 있다면 자원해서는 안 되겠지만 억지로라도 제게 지우십시오. 그렇게 내게 지우시면 나중에 원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는 할 것 같았다. 억지로 지우면 질 것 같은...
‘그 동안의 의리가 있으니까 내가 원망은 안 하겠습니다. 왜 못 박는 줄 아니까, 분명히 나는 괴롭지만 당신을 원망치는 않겠습니다.‘ 하고 기도했는데 아직 십자가 안 주셨다.
밥 먹는 문제 역시 그랬다.
처음 교회부터 밥값이 얼마 안되었다. 그래서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않는다고 했는데 일을 안 시키려면 왜 부르셨습니까. 만일 나에게 음식을 끊고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다른 데로 가겠습니다. 저는 시장바닥으로 갑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알아서 하이소’ 했다. 그런데 아직 먹을 것 안 끊어졌다.
하나님이 다 책임지실 것이다. 예수 안에 포함되면 그분이 책임질 것이다.
한 장로님이 오래전에 이런 질문을 했다.
‘사후세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내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지금 예수 안에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고 대답했더니 그러면 어쩔 수 없겠네요 했다.
예수 안에 있으면 됐지, 천당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떤가. 그냥 내가 지금 예수 안에 있으면 충분치 않은가!
천국은 상태다. 그렇게 천주교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여전히 죽어 가는 천국만 이야기한다. 나는 천국 없다 하는 말은 한 적 없다. 아직 못 가봐서 모른다고 했다. 어느새 두 시간이 넘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김목사님이 감당할 것이다.
기도합시다.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생명주시고 호흡을 주셔서 이렇게 서로 만나게 하신 것을 감사하고 주께서 베푸신 은혜를 이렇게 나누도록 기회를 주신 것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의 삶을 주께서 주관하셔서 주님의 원하는 대로 사용해주시길 원하고 당신의 복음을 온전하고 쉽고 단순하게 만민에게 전파하여 누구도 그렇지 않다 하는 이가 없을 때까지 주께서 저희를 사용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여기 오신 모든 분들을 주님께서 당신의 동역자로 삼아주시길 원하고 당신의 위임을 주시는 일이 있게 되길 원하고 당신 자신을 맡기시길 원합니다.
우리가 다 주님을 맡아서 당신 이름을 세상에 알리길 원하고 당신의 능력을 세상 앞에 알리기를 원합니다. 이 집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좋은 길을 열어주시고, 좋은 은혜를 보여주시고 또 좋은 복음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할 말이 한 없이 많은 사람이 되어주시길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