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신도님께서 선물해 주신
유명 메이커의 땀 배출이 잘 된다는 회색 티셔츠를
승복 안에 입어 보았더니
더운 여름날 긴 가사장삼 안으로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고생인 우리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하나 더 구입하려고
등산복 매장에 가 보았더니
가격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비쌌다.
그래서 못 사고 나왔는데,
나중에 시장에 갈 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중저가 등산복 매장에서
똑같은 땀 배출 기능이 있는 기능성 티셔츠를
저렴하게 구입해 사 입었는데,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앞의 유명 메이커 티셔츠 못지않게 너무 좋았다.
그래서 신도님들께 이런 얘기를 했더니,
요즘 등산객들은 기능성만을 보고 입는 것이 아니라,
유명 메이커를 보거나,
매년 달라지는 등산복 패션의 유행을 따라
해마다 새로운 등산복을 사 입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가격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유명 메이커에 최신 유행 패션이
산에 오르는 이들에게까지 점령당했다는 생각을 하니
옛 사람들의 청빈과 맑은 가난이라는 단어를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서울의 유명한 명품 거리에서만
메이커와 유행 패션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저 무위자연의 고장,
숲과 들꽃과 하늘과 바람의 고향, 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허영 된 욕망이
자리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산을 닮고자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보다.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의 소탈함을
마음에 담으려고 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 비교 불가한 무위의 자연 속에서까지
남들의 패션과 메이커와 비교 당한다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가난한 마음이 아닌가 싶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마음은 더욱 더 가난해지는 것이 아닌가.
옛 사람들은 청빈과 맑은 가난을
모든 수행자들의 삶에 있어,
아니 모든 근원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청빈한 삶이란 곧 본질적인 삶을 의미하며,
'나' 자신과 소탈하고 순수하게 대면할 수 있는
직접적이고 가장 체험적인 수행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청빈하고 가난해야
그 속에서 맑음과 청정이
또 참된 지혜와 사랑이 움튼다.
인류의 모든 성인들도 다 가난했다.
어쩔 수 없는 가난이기 보다는,
극복해야 할 과제로서의 가난이기 보다는
그들 삶에 지혜의 근원으로서의 가난이었다.
그렇다고 가난한 삶이란
단지 외적인 모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돈' 없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많이 소유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 청빈해 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삶 그 자체가 가난해야 참된 가난이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만이
참된 가난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마음속에 욕심과 욕망을,
또 물질적인 부를 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가난하지 않다.
삶의 모습에 있어 가난이란,
마음에 바라는 것 없이 자족(自足)할 수 있어야 가난이고,
행동에 있어 절약하고 절제하며
최소한의 소비로 살아갈 수 있어야 가난 이며,
'최소한의 필요'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베풀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라야 참된 가난이라 할 수 있다.
아끼고 절약하는 것,
보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
욕망 보다는 필요에 의한 작은 소유로 만족하는 것,
소유물에 집착하지 않으며 항상 베푸는 것,
이렇게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맑은 가난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수백억을 가지고 있더라도
가난에서 오는 참된 지혜와 미덕을
그대로 안으로 움트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 출처 :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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