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시마을(호지촌/濠池村)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경북 영덕의 영해면 괴시리다.
푸른 동해가 마을 앞으로 쫙 펼쳐저 있고,
마을 뒤편은 얕으막한 구릉같은 산 자락이다.
고려말 목은 선생이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당초에는 마을 이름이 괴시리가 아니라
호지촌(濠池村)이었다고 한다.
마을 명칭 답게 마을 앞이 얕은 웅덩이로 되어 있고,
그 웅덩이에서 수련과 청포가 많이 자라고 있다.
목은 선생이 당시 원나라에 유학을 하면서
그곳의 괴시(槐市)와 많이 닮았다고 이름 붙였단다.
원나라때 괴시라는 곳은 구양현의 고향으로 알려졌다.
그러면 구양현은 누구인가?
목은이 원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무렵,
구양현은 원의 대 학자였다.
둘에게는 아주 유명화 일화다.
고려 때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원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했다.
이때 학사 구양현(歐陽玄)이 그를 변방 사람이라 하여
경솔히 여기고 글한 짝을 지어서 조롱하는 것이다.
˝짐승의 발자취와 새의 발자취가 어찌 중국에 와서
왕래하느냐?[獸蹄鳥迹之道 交於中國]˝ 하자,
목은은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개 짖고 닭 우는 소리가
사방에 들려오고 있다[犬吠鷄鳴之聲 達于四境].˝
하여 구양현을 놀라게 했다.
짐승의 발자취와 새의 발자취가 어찌 중국에 와서 다니느냐 ?
한 것은 당시 변방 고려를 극도로 멸시하여,
너희들 새나 짐승같은 것들이 어찌 감히 우리 중국 땅을
더럽히느냐 하는 글이다.
그러나 여기에 화답한
목은의 시가 더욱 기개롭다.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가 사방에 들려옵니다.
즉 이것은 우리 고려를 새나 짐승으로 취급한다면
당신네 중국은 역시 개나 닭이지 뭐냐는 기막힌 풍자였다.
구양현은 기이히 여기고 또 글 한 짝을 지었다.
“잔을 가지고 바다에 들어가니,
바다가 큰 줄 알겠도다[持盃入海 知多海].˝ 하자,
목은은 또 즉석에서,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고, 하늘을 작다고
하는도다[坐井觀天 曰小天].˝ 하고 회답하니,
구양현은 크게 경탄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이때 목은과 성명이 같은 사람이 있었다.
이것을 비유해서 어느 중국 사람이 목은을 조롱하는 말로,
“인상여와 사마상여는 이름은 서로 같으나
성은 서로 같지 않네.[藺相如 司馬相如 名相如 姓不相如]˝하자,
목은은 즉시 대답하기를,
“위무기와 장손무기는 옛날에도 꺼릴 것이 없고
지금에도 꺼릴 것이 없네[魏無忌 長孫無忌 古無忌 今亦無忌].˝
하였더니, 그 사람은 일어서서 절하면서,
“동방에는 이런 글재주가 있으니 우리가 공경하지 않을 수 없도다.”
하고 목은을 자기들의 스승으로 대우했다는 이야기다.
아아! 목은의 이 세 차례의 회답한 글은 다만
댓구로서만 용할 뿐이 아니라, 실로 문장과
이치가 모두 구비해서 하늘의 조화로 자연을
이루어놓은 것과 같으니 실로 그는 동파(東坡)나
그밖의 이와 대등한 여러 사람에게 못지 않다 하겠다.
<순오지>에 나온다.
위 세가지 일화중 두가지가 목은과 구양현의 대화이다.
목은은 아버지 이곡(이 분도 대학자)이
원나라에서 국가의 일을 보았기에 어려서 3년간
원나라의 국자감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고려에서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지제고가 되었다.
이 당시 구양현이 한림학사로 있었다.
그때의 일화가 위의 '목은 이색의 댓구'라는 전설로 내려온다.
이 정도의 교분이었으니 목은이 구양현의 고향마을을 가져와
자기 고향마을 이름으로 부를 만 했다.
|
첫댓글 뜻 깊은글 감사히 봤읍니다 ...............................
희도님,
다녀가시고, 댓글 주심에 감사합니다.
12월 대경 정모에서는 뵐 수 있겠지요?
목은을 스승으로 대우 할만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박하향 언니 유익한 글 올려 주시니......
많은 것을 배움니다.
언니 수고 하셨습니다.
곰시리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그렇지요. 목은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지요.
중국의 대 학자 구양현을 대적하여 이겼으니 말입니다.
언제나 의미 깊은 댓글주심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