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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유가 비판(『墨子』,「非儒」)과 공자 연구와 비판
2026년 3월 25일
한국 유학 또는 성리학은 고려 말기에 북송 시기에 형성되고 남송 시기에 완성된 정주학을 받아들여 국가의 관학으로 삼고 과거시험에 적용하였습니다. 조선 시기에 관원과 학자 모두 정주학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애썼으며 공자와 맹자 및 이정(二程, 정명도 정이천)과 주희를 연구하고 『주자가례』를 실천하려고 예송(禮訟) 논쟁도 벌였습니다. 때로는 학술논쟁을 벌여 사상적 독존에 빠지고 당쟁을 일으켜서 정체성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 시기의 성리학은 결국 양반사회를 만들어냈고 평민들은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유학이 중국에서는 진한(秦漢)시기의 평민(齊民)사회를 버리고 귀족사회를 부활시켰고 성리학이 조선에서는 고려 시기의 귀족사회를 넘어 양반의 계급사회를 만들어냈습니다. 따라서 조선 시기에는 감히 누구도 주희를 비판하지 못하였습니다.
조선 말기에는 조선 왕조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사회경제의 몰락을 겪으면서 항일 시기를 거쳐 1980년대까지도 성리학이 조선을 멸망시켰다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룬 뒤에는 조선 시기의 생활문화를 되찾아 읽는 궁금증 바람이 불면서 조선 성리학을 비판하지 않고 막연히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조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계승하려는 조짐도 보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태도이며 조선 성리학을 비판하고 반성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국가이며 평등한 시민사회입니다. 따라서 유학과 성리학을 연구하는 동시에 비판하여야 합니다. 또한 유가와 성리학이 추존하는 성인 공자를 성리학의 도덕 관점보다는 중국사의 역사학 관점에서 이해하고 외국의 성인으로 간주하고 공맹 유학와 성리학의 학술적 가치를 연구하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중국에서는 공자와 『논어』을 어떻게 숭상하였는지? 어떻게 비판하였는지? 공자에 관한 연구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춘추시기에는 주(周)나라 왕실이 몰락한 뒤에 경대부(卿大夫)들이 제후의 국(國)을 빼앗고 또 사(士)가 대부들을 무시하는 사회정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공자는 주나라 초기의 통치 방법을 흠모하고 귀족의 예악(禮樂)을 통하여 인심(人心)을 고쳐서 춘추시기의 혼란한 사회를 주나라 초기의 안정된 사회로 회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귀족의 예악을 실행하는 데는 큰 비용이 들어가기에 귀족들도 감당하기 어려웠고 일반 백성들은 아예 실행할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공자와 맹자가 인의(仁義)에 근거한 예악은 귀족의 생활방식입니다. 공자와 맹자의 인의와 예악은 한(漢)나라 무제가 제자백가를 물리치고 유가를 독존(獨尊)할 때까지는 누구도 채택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제자백가를 몰아내고 유가를 독존하며 관원들의 행정 태도와 평민의 사회풍속을 개선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심지어 현재 중국 변경지역에서 발견된 『논어』 죽간 또는 목간을 보면 변경지역에 파견된 병사들에게도 유가의 효제(孝悌)를 가르쳤습니다.
유가 독존은 사회경제적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한무제 이후에 국가경제가 불경기에 빠진 뒤부터 시작하여 동한(東漢) 시기에는 귀족들이 대토지를 사들여 겸병하였고 평민들은 국가 토지세 납부보다 소작료 부담이 컸습니다.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귀족사회가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귀족사회는 공자가 아주 바라왔던 사회이며 동한 시기부터 실현되었는데 결국에는 수많은 농민이 못살겠다고 들고 일어나는 농민 반란을 불러왔습니다.
따라서 공자는 춘추 말기에 활동하였고 묵자는 몇십 년 뒤에 태어나서 전국 초기의 혼란을 겪으면서 공자를 비판하였습니다. 전국 시기의 묵가는 『묵자』를 편찬하면서 유가의 논리적 모순과 실천 왜곡을 들어 여러 곳에서 공자를 비판하였습니다. 『묵자』의 「비유(非儒)」도 그렇습니다. 다시 전국 중기에 맹자가 나타나서 묵자를 통렬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전국시기에는 지식인들이 유가 또는 묵가를 지지하였고 서로 갈등이 컸습니다.
주목할 것은 공자, 묵자, 맹자 세 학술을 선진(先秦)시기의 원시 유학에 넣어 나란히 평행 연구하는 것이 낫습니다. 세 학자 사이의 닮거나 다른 것(同異)을 따져서 셋 사이의 거리를 재어보아야 합니다.
공자는 인(仁)을 강조하고 묵자는 의(義)를 강조하고 맹자는 인의(仁義)를 주장하였습니다. 과거에 한당 경학과 송원명 성리학의 일반적인 이해는 맹자가 공자를 계승하고 묵자를 비판하고 배척하였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몇몇 연구자들은 맹자가 오히려 공자보다 묵자의 영향을 더 받았다고 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묵자는 논리적이고 사회적인 정의(義, justice)를 많이 주장하였고 심지어 정의를 정치의 보물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맹자도 친친(親親)의 인(仁)에 기초를 두었으나 정치에서 정의(義)를 상당히 강조하였습니다. 따라서 전국시기 중후기에 살았던 맹자는 공자보다 오히려 묵자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받았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공자--묵자--맹자 셋을 나란히 이해하는 관점이 선진(先秦) 시기의 유학(소위 원시 유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춘추 시기가 주(周)나라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수도를 옮긴 해(기원전 770년)부터 경왕(敬王) 44년(기원전 476년)까지 295년 동안이라고 봅니다. 전국 시기는 “전국(戰國)” 명칭이 나온 시기(凡天下之戰國七,而燕處弱焉)부터 말하는데 기원전 475년(『史記』 「六國年表」)부터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 255년 동안을 말합니다.
공자 묵자 맹자 세 사람이 태어나서 활동한 시간을 보면 공자(기원전 551-기원전 479년), 묵자(기원전 476년 또는 480년-기원전 390년 또는 420년), 맹자(기원전 372년-기원전 289년)입니다. 다시 말해 공자는 춘추시기 말기에 활동하였고 묵자는 전국시기 초기에 활동하고 맹자는 전국시기 중기 이후에 활동하였습니다. 서주(西周)시기에서 멀어진 정도와 각기 활동시기의 사회혼란 상황을 반영해보면 맹자는 공자보다 오히려 묵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시황 이후에 묵가가 몰락한 뒤에는 한당 시기의 경학과 송원명 성리학은 공자와 맹자 연구에 집중하고 묵자를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남송시기의 성리학을 받아들인 조선 성리학은 당연히 묵자를 이단이라고 배척하고 거의 연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공맹 연구에 힘썼습니다. 따라서 현재는 조선 성리학의 공맹 중심 편견에서 벗어나서 공자, 묵자, 맹자 셋을 나란히 연구하여야 합니다.
서한(西漢)과 동한(東漢) 시기에는 유가를 비롯하여 제자백가를 연구하는 바람도 일어났고 공자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문헌도 많이 정리하여 출판하였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孔子世家)」는 많은 자료를 모아 객관적으로 기술하였습니다. 뒤에 유향(劉向)의 『설원(說苑)』도 묵가의 관점을 많이 반영하였습니다. 『공총자(孔叢子)』의 「힐묵(詰墨)」은 『묵자』의 「비유」를 반박한 것입니다. 당대에는 조유(趙蕤, 659-742)의 『장단경(長短經, 反經)』도 여러 관점에서 공자의 주장을 인용하였습니다.
북송 시기 신종 연간에 왕안석 신법을 반대한 몇몇 관원들과 학자들은 왕안석이 요순의 통치 방법을 모르면서 신법을 감행하였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들은 공자와 맹자의 인의(仁義)를 부활시키고 역사적 사실보다는 도덕 관점에서 재해석하였습니다. 북송 말기와 남송 시기의 극렬한 당쟁이 일어났고 주희는 이정(二程, 정명도 정이천)을 중심으로 해석을 모아 성리학을 완성하였습니다. 주자학이 때로는 금지되었으나 해금되었고 원나라 시기에 국가 과거시험에 적용하여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에도 널리 보급하였습니다. 명나라 시기에는 주희를 비난한 사건이 일어나자 국가에서 강력하게 처벌하였습니다.
북송 시기에 성리학이 일어난 뒤에 남송 시기에는 공자와 공자 제자들을 연구하는 서적을 출판하였습니다. 남송 시기에 호자(胡仔, 1110-1170)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1138년에 『공자 편년(孔子編年)』 5권을 출판하며 특히 『논어』 「향당편」이 공자의 성인 모습을 기록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명대에는 설응기(薛應旂, 1500-1574)가 1557년에 『사서 인물고(四書人物考)』 40권을 출판하였고 청대에는 강영(江永, 1681-1762)가 『논어』 「향당편」을 상세하게 고증하여 『향당도고(鄉黨圖考)』 40권을 출판하여 공자 연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내놓았습니다.
근래에는 전목(錢穆, 1895-1990)이 1923년부터 집필하여 1935년에 『선진제자계년(先秦諸子系年)』을 출판하였습니다. 1930년에는 의고학파(疑古學派)를 이끌던 고힐강(顧頡剛, 1893-1980)이 전목을 추천하여 연경대학 국문과 강사를 지내면서 학계에 등단하였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양도(梁濤, 1965-현재)가 여러 자료를 모아 「공자행연고(孔子行年考)」 글을 써서 발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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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1、『墨子』,「非儒」
2、『孔叢子』,「詰墨」
『墨子』 「非儒」에는 유가의 주장을 9개 조목으로 나누어 비판하고 또 공자의 실행 8개 조목을 들어 비판하였습니다.
『孔叢子』 「詰墨」에서는 10개 조목을 들어 묵가의 비판을 반박하고 제11개 조목에서는 두 사람의 대화를 실어 묵가를 비난하고 공자를 지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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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墨子』,「非儒」:
설명 :
1、( )는 설명한 글이고 〔 〕는 보충한 글입니다.
2、「非儒」편을 번역하면서 孫詒讓(1848-1908)의 『墨子間詁』을 참고하였습니다.
1-1、儒者曰:“親親有術(殺),尊賢有等。”言親疏尊卑之異也。
其『禮』曰:“喪,父母,三年;妻、後子(嫡長子),三年;伯父、叔父、弟兄、庶子,其(期);戚族人,五月。”
若以親疏爲歲月之數,則親者多而疏者少矣,是妻、後子與父同也。
若以尊卑爲歲月數,則是尊〔者多而卑者少矣〕,其妻、(後)子與父母同,而親伯父、宗兄而卑子(庶子)也。
逆孰大焉!
1-1、혈연관계의 친소와 존비에 따른 상장례의 도덕 패역과 논리 모순
유가(儒家)가 주장하는 논리는 “혈연관계(親親)의 친소(親疏)에 따라 감쇠(減衰)를 결정하고 신분관계의 존비(尊卑)에 따라 등급을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혈연관계가 가깝거나 멀고 또 신분이 높거나 낮음에 따라 대우를 차등한다는 뜻입니다.
유가가 실천하는 『예(禮)』(『禮記』)에서는 “상례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지내고 아내와 적장자(大宗이나 小宗의 계승자)가 죽으면 삼년상을 지냅니다.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집안 형제(宗中兄弟), 여러 아들들(庶子, 衆子, 적장자를 제외한 아들들)이 죽으면 일년상을 지냅니다. 친척 집안사람이 죽으면 5개월 상을 지낸다.”고 합니다.
첫째, 혈연관계가 가깝거나 먼 정도(親疏)에 따라 상례의 연수(年數)와 월수(月數)의 감쇠를 결정한다면 당연히 가까울수록 연수와 월수가 많아야 하고 멀수록 적어야 한다. 그런데 유가는 아내와 적장자의 삼년상 연수가 부모 삼년상과 같습니다.
둘째, 혈연관계 안에서도 신분이 높거나 낮은 정도(尊卑)에 따라 상례의 연수와 월수의 등급을 결정한다면 당연히 높을수록 연수와 월수가 많아야 하고 멀수록 적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가는 아내와 적장자의 등급이 부모와 같고 혈친(血親)의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집안 형제 셋의 연수가 서자들(庶子, 적장자를 제외한 아들들)과 같이 일년입니다.
도덕과 논리의 모순(逆)이 이토록 큽니까!
참고 자료 :
『墨者』,「節葬下」:君死喪之三年,父母死喪之三年,妻與後子死者五(五者),皆喪之三年,然後伯父、叔父、兄弟、孽子其(期);(戚)族人五月,姑姊、甥舅皆有月數(數月)。
『墨者』,「公孟」:子墨子謂公孟子謂:“喪禮,君與父母、妻、後子死,三年喪服。伯父、叔父、兄弟期,(戚)族人五月,姑姊、舅甥皆有數月之喪。”
1-2、其親死,列尸弗斂,登堂、窺井、挑鼠穴、探滌器,而求其人矣。
以爲實在,則戇愚甚矣!
如其亡也必求焉,僞亦大矣!
1-2、조상신이 실재한다고 믿는 미신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 잠시 방안에 시신을 그냥 놔두고 염습도 하기 전에 육신을 떠나신 혼을 모셔 오려고(招魂) 지붕에 올라가거나 심지어 우물 속을 들여다보거나 쥐구멍을 뒤지거나 세숫대야까지 들치면서 돌아가신 부모님의 혼을 찾습니다.
첫째, 돌아가신 부모님의 혼이 실재한다고 여기는데(以爲) 고집스러운 믿음과 어리석음이 몹시 심합니다!
둘째, 설사 혼이 없다고 여기더라도 반드시 혼을 모셔 오겠다니 거짓(僞)이 정말로 큽니다!
1-3、取妻身迎,袛褍爲僕,秉轡授綏,如仰嚴親;昏禮威儀,如承祭祀。
顛覆上下,悖逆父母,下則妻、子;妻、子上,侵事親。若此,可謂孝乎!
儒者:“迎妻,妻之奉祭祀;子將守宗廟。故重之。”
應之曰:此誣言也!其宗兄守其先宗廟數十年,死,喪之其(期);兄弟之妻奉其先之祭祀,弗散(服);則喪妻、子三年,必非以守、奉祭祀也。
夫懮(優)妻子以大負累,有曰:“所以重親也。”爲欲厚所至私,輕所至重,豈非大奸也哉!
1-3、결혼식에서 아내 우대의 패역과 모순
아내를 맞는 결혼식을 올리는 날 낮에 신랑이 신붓집에 직접 가서 맞아오는데, 몸에 붙는 옷(袛褍)을 입어 노복(僕)처럼 꾸미고 신부가 탄 수레를 끄는데 신랑이 말의 끈을 잡아끌고 수레의 끈을 신부에게 맡기는데 마치 무서운 부모님을 모시듯이 맞아 옵니다. 저녁에 올리는 예식은 아주 위엄 있게 치르는데 마치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것처럼 합니다.
이런 결혼 의식은 위아래 존비(尊卑) 등급을 뒤엎었는데 부모님께 패역하는 정도가 높으신 부모님을 낮게 여기는 것(下待)이 아내(妻子)와 자녀(子)처럼 낮고 아내와 자녀(子)를 높이려니(使妻、子上) 부모님의 존귀함마저 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분의 존귀를 뒤엎은 태도가 과연 유가가 주장하는 효(孝)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유가가 변호하길 “아내를 맞는 의식이 위엄 있는 까닭은 아내가 조상님들의 제사를 받들기 때문이고 아내가 낳은 큰아들(嫡長子)이 종묘(宗廟)를 이어받아 지키기 때문에 아내와 큰아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고 말합니다.
묵가가 반박하길 “이 말은 왜곡(誣言)입니다! 대종(大宗)이거나 소종(小宗)의 종자(宗子) 형님(宗兄)이 조상 종묘의 제사를 수십 년 동안 지켜왔어도 죽으면 일년상을 치르고 종중 형제들의 처(妻)들도 조상의 제사를 오랫동안 받들었어도 상복을 입지도 못합니다. 아내와 적장자가 죽으면 삼년상을 치르는데 종묘를 지키고 제사를 받들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반드시 틀렸습니다.
아내와 적장자를 우대하는 까닭은 그들에게 큰일(제사)을 책임 지우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유가는 ‘이것은 부모님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라고 변명합니다. 이 변명은 자신의 가장 개인적인 가정(至私 : 妻子)을 후대하려고 가장 중요한 부모님(至重)께는 박대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아주 이기적인 사람(大奸)이 아니겠습니까!
1-4、有強執有命以說議曰:“壽夭貧富,安危治亂,固有天命,不可損益。窮達、賞罰、幸否有極,人之知力,不能爲焉!”
群吏信之,則怠於分職;庶人信之,則怠於從事。吏不治則亂,農事緩則貧。
貧且亂,政之本,而儒者以爲道教,是賊天下之人者也。
1-4、천명 결정론과 게으름
유가는 하늘이 운명(天命)을 결정한다고 굳게 고집하며 의론하길 “개인의 수명이 길거나 짧거나 재물이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또 국가가 평화롭고 안정되거나(安治) 위태롭고 혼란스럽거나(危亂) 모두 하늘이 결정한 천명이 확실하게 있기에 개인이나 국가가 이런 현상과 추세를 줄이거나 늘릴 수 없습니다. 개인의 출로가 막히거나 영달하거나 상사(賞賜)를 받거나 처벌을 받거나 지배자의 총애를 받거나 받지 못하거나 모두 무한하지 않고 최고점(極)이 있기에 사람의 이해력으로는 최고점을 조작할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실제 사회에서 관원들이 천명 결정론을 믿으면 맡은 직무를 게을리하고 일반 백성들이 믿으면 생업을 게을리합니다. 관원들이 직무를 처리하지 못하면 혼란 상태를 불러오고 일반 농민이 농사를 태만하게 하면 가난하게 됩니다.
농민의 가난과 국가의 혼란 두 문제는 정치(『說文解字』:政,正也)가 힘쓸 근본 문제입니다. 그러나 유가는 천명이 하은주 왕도(王道)의 핵심 요지라고 여깁니다. 이들은 천하를 해치는 사람들입니다.
1-5、且夫繁飾禮樂以淫人,久喪僞哀以謾親。立命緩貧而高浩居(傲倨),倍(背)本棄事而安怠傲。貪於飲食,惰於作務,陷於飢寒,危於凍餒,無以違之。是若人氣(乞人),鼸鼠藏,而羝羊視,賁彘(獖豕)起。君子笑之,怒曰:“散人(庸人)焉知良儒!”
夫夏乞麥禾,五穀既收,大喪是隨,子姓皆從,得厭飲食。畢治數喪,足以至矣。因人之家翠以爲,恃人之野以爲尊(因人之家以爲翠,恃人之野以爲樽)。富人有喪,乃大說喜,曰:“此衣食之端也!”
1-5、유가의 무능하고 비굴한 경제생활
또한 유가는 번잡하게 꾸미는 활동을 예악이라고 여겨서 사람들을 허례허식에 젖어 들도록 하며, 오랜 기간 상장례를 지내 슬픔을 거짓으로 꾸며서 돌아가신 부모님께 효도한다고 부모님을 속입니다. 천명을 핑계로 삼아 자신의 가난을 걱정하지 않고 태만하며 오히려 잘났다고 오만함을 자랑하며, 먹고사는 본업(本事)을 팽개치고 게으르고 오만함에 안주합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가난하여 먹고 마시는 음식을 탐하면서도 노동하는 실무(作務)에는 게으르며, 나아가 배고프고 추위 상황에 빠졌으면서도 심지어 몸이 얼고 빠짝 말라 죽을 지경이 되었어도 배고픔과 추위를 벗어나려고 힘쓰지 않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거지(乞人)처럼 굶주리고 들쥐처럼 작은 음식도 숨기지만 태도는 숫양처럼 머뭇거리며 기웃거리고 거세한 돼지처럼 날뛰기도 한다. 묵가가 비웃으면 화를 내며 “보통 사람이 어찌 훌륭한 유가를 이해하겠느냐!”며 떠듭니다.
이들의 일년 생활을 보면 초여름(보릿고개)에는 보리와 벼가 익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굶주리고 가을에 오곡을 추수한 뒤에 큰 장례식이 열리면 따라가서 도우미를 자처하며 가족을 데리고 가서 배부를 때까지 먹고 마십니다. 몇 번의 상장례 도우미를 마친 뒤에야 몹시(至) 만족하였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상장례를 치르는 남의 집의 재산에서 도와준 보수를 받고 남의 밭곡식으로 담근 술을 마십니다. 특히 부잣집에서 상장례가 생기면 가장 기뻐하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먹고살 돈벌이다!”라고 말합니다.
1-6、儒者曰:“君子必服古言(古服古言),然後仁。”
應之曰:“所謂古之言服者,皆嘗新矣,而古人言之服之,則非君子也?然則必服非君子之服,言非君子之言,而後仁乎?”
1-6、유가의 복고풍 복식과 언어의 모순
유가는 “군자는 반드시 옛날 성왕(聖王)이 제정한 옛날 복식을 입고 옛날 언어를 말하여야만 유가의 인(仁)을 실천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박하길 첫째, “옛날의 언어와 복식은 옛날 당시에는 새로운 것인데 옛날 사람은 당시의 언어를 말하고 복식을 입었으니까 군자가 아닙니까?” 둘째, “옛날 사람은 반드시 더 옛날 군자의 복식을 입지 않았고 더 옛날 군자의 언어를 말하지 않았는데 유가의 인(仁)을 실천하였답니까?”라고 말합니다.
1-7、又曰:“君子循而不作。”
應之曰:“古者羿作弓,伃作甲,奚仲作車,巧垂作舟。然則今之鮑、函、車、匠,皆君子也?而羿、伃、奚仲、巧垂,皆小人邪?且其所循,人必或作之,然則其所循,皆小人道也。”
1-7、유가의 보수적 태도 비판
앞의 말에 덧붙여 유가가 “군자는 옛날에 창작된 제도(예악)를 답습하고 창작하지 않습니다.(述而不作)”고 주장합니다.
반박하길 첫째, “요임금 시기의 후익(后羿)이 활을 창작하였고 우임금의 7세손 계여(季伃)가 갑옷을 창작하였고 하나라 시기의 혜중(奚仲)이 수레를 창작하였고 요임금 시기의 교수(巧垂)가 배를 창작하였습니다. 이런 논리(답습하면 군자이고 창작하면 소인이다.)에 따르면 현재 제조 기술을 답습하고 있는 가죽 기술자, 갑옷 기술자, 수레 기술자, 목공 기술자 모두 군자입니까? 옛날의 기술자 후익, 계여, 혜중, 교수 모두 소인(小人)입니까?”고 되물었습니다.
둘째, 현재까지 답습해온 제조 기술이더라도 기술자는 반드시 조금 창작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현재 답습하더라도 창작이 더해졌으니까 어떤 제조 기술도 소인입니다.〔유가는 옛날 방법을 보수(保守)하여야만 군자라고 말하지만 창작이 조금이라도 들어갔다면 군자가 아니고 오히려 소인입니다.〕
1-8、又曰:“君子勝不逐奔,掩函弗射,施則助之胥車。”
應之曰:“若皆仁人也,則無說而相與。仁人以其取捨、是非之理相告,無故從有故也,弗知從有知也,無辭必服,見善必遷,何故相與?
若兩暴交爭,其‘勝者欲不逐奔,掩函弗射,施則助之胥車’,雖盡能,猶且不得爲君子也,意暴殘之國也。
聖(聖王)將爲世除害,興師誅罰。勝將因用儒術令士卒曰:‘毋逐奔,掩函勿射,施則助之胥車。’暴亂之人也得活,天下害不除,是爲群殘父母而深賤世也,不義莫大矣!”
1-8、유가 전쟁 방식의 무용론
앞의 말에 덧붙여 유가가 “군자는 전쟁에서 이긴 뒤에는 도망가는 적군을 쫓아가지 않고 화살통의 뚜껑을 덮고 화살을 쏘지 않으며 적군이 수레를 타고 빨리 도망가는데 수레가 무거우면 밀어서 도와줍니다.”고 주장합니다.
반박하길 첫째, “쌍방 모두 어진 사람(仁人)이라면 서로 적대(相與)할 일이 없습니다. 어진 사람은 요구와 양보(取捨) 옳고 그름(是非)의 도리를 상대방에게 알려주면 도리가 없는 쪽이 도리가 있는 다른 쪽을 따를 것이며 도리를 모르는 쪽이 도리를 아는 쪽을 따를 것이며 아무튼지 반박할 말이 없는 쪽은 반드시 굴복하고 착한 것을 이해하여 반드시 개선할 것인데 무슨 까닭에 서로 적대하겠습니까?”
둘째, “쌍방 모두 폭력을 쓰는 국가끼리 다툰다면 당신의 말처럼 ‘전쟁에서 승리한 쪽이 도망가는 적군을 쫓아가지 않고 화살통을 덮고 화살을 쏘지 않고 도망가는 적군의 무거운 수레를 밀어 도와주는 것’을 아무리 잘하더라도 여전히 군자가 될 수 없으며 말하자면 쌍방 모두 폭력적인 국가이기 때문입니다.”〔어진 사람은 적대가 없고 서로 평화적으로 해결합니다. 싸웠다는 자체가 쌍방 모두 폭력적인 국가를 뜻합니다.〕
셋째, “성왕(聖王)은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해로운 사람들을 없애려고 군대를 일으켜 해로운 사람들을 죽여서 처벌합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이긴 뒤에는 유가의 주장(儒術)에 따라 병사들에게 명령하길 ‘도망가는 적군을 쫓아가서 죽이지 말고 화살통을 덮고 화살을 쏘지 말고 도망가는 적군의 수레가 무거우면 밀어 도와주어라.’고 말합니다. 폭력을 쓰고 난리를 일으킨 해로운 사람들이 살아난 것이기에 천하에서 해로운 사람들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왕이 결국 해로운 사람들을 살려주어〕 세상의 부모들을 크게 해치고 세상을 더욱 타락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의롭지 못합니다!”고 말합니다.
* 爲群殘父母而深賤世:
무슨 상황을 설정하고 어떤 뜻을 말하려는지 추측할 수 없습니다. 다만 父母라는 말에서 君長이라고 해석하여 풀이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晏子春秋』,「景公欲使楚巫致五帝以明德晏子諫」第十四:
晏子曰:「君之言過矣!古之王者,德厚足以安世,行廣足以容衆,諸侯戴之,以為君長,百姓歸之,以為父母。是故天地四時和而不失,星辰日月順而不亂,德厚行廣,配天象時,然後為帝王之君,明神之主。
1-9、又曰:“君子若鍾,擊之則鳴,弗擊不鳴。”
應之曰:“夫仁人,事上竭忠,事親得孝,務善則美,有過則諫,此爲人臣之道也。今擊之則鳴,弗擊不鳴,隱知(智)豫力,恬漠待問而後對。雖有君、親之大利,弗問不言。
若將有大寇亂,盜賊將作,若機辟將發也,他人不知,己獨知之,雖其君、親皆在,不問不言。是夫大亂之賊也。
以是爲人臣不忠,爲子不孝,事兄不弟,交遇人不貞良。
夫執後不言,之朝,物見利使(便)己,雖恐後言。君若言而未有利焉,則高拱下視,會噎爲深,曰:‘唯,其未之學也。’用誰急,遺行遠矣。”
1-9、유가의 이기적 태도와 행동
앞의 말에 덧붙여 유가가 “군자는 쇠북(鐘)처럼 두드려야 소리를 내며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반박하길 “어진 사람(仁人)은 신분이 높은 사람을 모시면서 충성을 다하고 부모님을 모시면서 효를 다하며, 남들에게 착한 행동을 권장하고 칭찬하며 잘못을 지적하여 고치도록 합니다. 이것〔충효를 비롯하여 권선과 징악을 다함〕이 남에게 신하가 된 도리입니다. 그런데 두드려야만 소리를 내고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말뜻은 알고 있는 정보(지혜)를 숨기고 힘을 남겨두며 마음 편하게 조용히(恬) 아무 일도 없는 듯이(漠) 지내면서 물어보면 대답하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임금님과 부모님께 큰 이익이 되더라도 묻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첫째, 만약에 앞으로 큰 반란이 일어나고 도적이 일어나는 조짐이 마치 짐승을 잡는 노궁(弩弓)의 방아쇠(機辟)를 곧바로 당길 것처럼 급박한대 남들은 모르고 나 혼자만 알고 있고 비록 임금님과 부모님께 상관되더라도 묻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태도는 큰 반란을 조장하는 나쁜 사람(賊)입니다.
둘째, 이런 태도는 신하로서 불충한 것이고 자식으로서 불효한 것이고 아우로서 제(不悌)하지 못한 것이며 벗을 사귀면서 정직하고 착한(貞良) 것이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셋째, 끝까지 말하지 않는 태도를 고집하다가 조정에 들어가서 어떤 사건(物)이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보이면 남보다 뒤 쳐질까 겁내며(恐後) 먼저 말합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팔짱 끼고 내려다보다가 마침 목구멍에 깊이 무엇이 걸린 듯이 ‘네에, 제가 배운 적이 없습니다.〔정치 견해가 다르다는 뜻〕’고 핑계를 댑니다. 무슨 급한 일이 있다는 듯이 멀리 떠나버립니다.”고 말합니다.
2-1、夫一道術、學業,仁義者,皆大以治人,小以任官,遠施周偏,近以修身,不義不處,非理不行,務興天下之利,曲直周旋,利則止,此君子之道也。
以所聞孔某之行,則本與此相反謬也!
2-1、공자 행동의 비판
유가가 통치 방법과 학업에서 일관되게(一) 주장하는 인의(仁義)는 높은 관직을 맡으면 많은 관원(人)을 다스리고 낮은 관직을 맡으면 담당 직분을 맡습니다. 멀리는 전체(周)뿐만 아니라 구석(偏)까지 널리 직무를 관리하고 가까이는 자신을 수양합니다. 의(義)롭지 않으면 취직하지 않고 도리(理)가 아니면 실행하지 않습니다. 천하의 이익을 진흥하는 데 힘쓰며 옳고 그름을 조정하여 이익의 효과가 나타난 뒤에야 그칩니다. 이런 태도가 군자의 모범입니다.
그런데 제가 들은 공자의 행동은 처음부터 군자의 태도와는 상반되게 틀렸습니다.
2-2、齊景公問晏子曰:“孔子爲人何如?”晏子不對。公又復問,不對。景公曰:“以孔某語寡人者衆矣,俱以賢人也。今寡人問之,而子不對,何也?”
晏子對曰:“嬰不肖,不足以知賢人。雖然,嬰聞所謂賢人者,入人之國,必務合其君臣之親,而弭其上下之怨。孔某之荊,知白公之謀,而奉之以石乞,君身幾滅,而白公僇。
嬰聞賢人得上不虛,得下不危。言聽於君必利人,教行下必於上(教行於下必利上),是以言明而易知也,行明而易從也。行義可明乎民,謀慮可通乎君臣。
今孔某深慮同謀以奉賊,勞思盡知以行邪,勸下亂上,教臣殺君,非賢人之行也。入人之國,而與人之賊,非(仁)義之類也。知人不忠,趣之爲亂,非仁義之(道, 行)也。逃人而後謀,避人而後言,行義不可明於民,謀慮不可通於君臣。嬰不知孔某之有異於白公也,是以不對。”
景公曰:“嗚乎!貺寡人者衆矣,非夫子,則吾終身不知孔某之與白公同也。”
2-2、초나라 백공(白公) 반란에 동참한 공자를 비판함
제(齊)나라 경공(景公, 재위 기간 기원전 547년-기원전 490년)이 제나라 상대부(上大夫) 안영(晏嬰, ?-기원전 500년, 『晏子春秋』 남김)에게 “공자가 하는 행동이 어떻습니까?” 물었습니다. 안영이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경공이 재차 물어도 안영이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경공은 “공씨 아무개를 나에게 추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모두 공씨 아무개가 현명한 군자(賢人, 聖人의 아래 단계이며 위에서 말한 君子를 뜻함.)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공씨 아무개를 물어도 당신(子, 晏子)은 대답하지 않는데 무슨 까닭입니까?”
안자(晏子)가 대답하길 “저(晏嬰)는 어리석어 현명한 군자(賢人)를 알아볼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알기로는 현명한 군자는 외국에 들어가면 군주와 신하가 화합하도록 친목에 반드시 힘써야 하고 높은 관원과 낮은 관원 사이의 갈등(怨)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공씨 아무개가 초(楚)나라에 갔을 때 백공(白公, 楚國太子建의 아들이며 이름이 勝임)이 복수하려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모략을 알고도 전사(戰士) 석걸(石乞)을 백공에게 추천하였습니다. 그래서 초(楚)나라 혜왕(惠王)이 백공에게 붙잡혀 목숨이 위태로웠으나 초나라 대부 엽공(葉公, 姓沈, 名諸梁, 字子高)이 백공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백공이 도망가서 자살(僇)하였습니다.
저(晏嬰)는 배우기로는 현명한 군자는 신하로서 군주(上)를 모시면 군주가 죽지(군주가 시해당하면 君位가 虛함) 않도록 하고 아래 관원들(下)을 지배하면 그들을 위험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또 군주에게 건의하더라도 반드시 관원들(人)에게도 도움이 되도록 하고 아래 관원들에게 행동을 명령하면 반드시 위 관원들에게도 도움이 되도록 합니다. 따라서 군주에게 올리는 말(言)은 명확하게 하여 군주가 쉽게 이해하도록 하며 아래 관원들에게 명령하는 행동(行)은 분명하게 하여 아래 관원들이 쉽게 실행하도록 합니다. 올바른 정책을 실행하려면 반드시(可) 백성까지도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하고 국가계획을 세우려면 군주와 신하 모두 이해하고 공감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공씨 아무개는 깊이 생각하여 석걸(石乞)과 공모하여(同謀) 석걸을 도적(백공)에게 바쳤고 깊이 생각하여 온갖 지혜를 내서 반란(邪)을 실행하였습니다. 아래 사람(석걸)을 부추겨서 위 사람(백공)에게 반란을 일으키라고 권장하고 결국에는 신하(백공과 석걸)가 군주(초혜왕)를 시해하도록 교사하였습니다. 이것은 현명한 군자(賢人)의 행동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첫째, 외국에 들어와서 군주(人)를 죽이려는 적(賊, 白公)에게 동참하였는데 이것은 인의(仁義)를 주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둘째, 사람(백공)이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이끌었는데 이것은 인의(仁義)의 도리와 행동이 아닙니다.
셋째, 관원들을 회피하여 반란 세력과만 몰래 계획을 짜고 관원들을 회피하여 반란 세력과만 소통하였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올바른 정책을 실행하려면 반드시(可) 백성까지도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도 아니고 국가계획을 세우려면 군주와 신하 모두 이해하고 공감하도록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공씨 아무개가 반란을 일으킨 백공과 무엇이 다른지 알지 못하여 대답을 올리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이제는 알았기에 대답합니다.〕
경공이 탄식하며 “아! 나에게 건의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당신(上大夫)이 설명해주지 않았으면 나는 죽는 날까지도 공씨 아무개와 백공이 똑같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고 말하였습니다.
참고 자료 :
孔子適齊考
『左傳』昭公二十五年,公伐季氏,不克,奔齊,魯亂。『世家』系孔子適齊於是年亂後,是也。時孔子年三十五。
『世家』又記昭公二十年,齊景公與晏嬰適魯,與孔子問答。
『齊世家』云:“獵魯郊,因入魯,與晏嬰俱問魯禮。”
『年表』亦同。
* 설명 :
공자가 제나라 경공을 언제 만났고 몇 번 만났는지 두 가지 의혹이 있고 공자가 제나라에 머문 세월이 1년이냐 또는 7년이냐에 관하여 주장히 서로 다릅니다.
첫째 만남은 『사기』 「공자세가」와 『설원(說苑)』 「존현(尊賢)」에는 노나라 소공(昭公) 20년(기원전 521년)에 제나라 경공과 안영(晏嬰)이 노나라 교외지역(沛)까지 사냥을 나왔다가 노나라에 들어왔습니다. 이때 공자는 30살이며 제나라 경공과 안영이 함께 공자를 만나 진목공(秦穆公)의 패(覇) 방법을 물어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또 『사기』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와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에는 제나라 경공과 안영이 사냥하러 왔다가 노나라에 들어왔고 공자를 만나 노나라 제도(魯禮)를 물었다고 합니다.
둘째 만남은 『좌전』 소공 25년(기원전 517년) 기록에 따르면 노나라 소공(昭公)이 25년에 계손씨(季孫氏)를 몰아내려고 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제나라에 망명 갔고 노나라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사기』 「공자세가」에는 이때 공자가 30살이며 노나라 반란 이후에 제나라에 망명한 소공에게 갔다고 합니다. 사마천은 「공자세가」에서 공자와 제나라 경공의 만남을 노나라 소공이 망명한 뒤에 노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난 뒤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초나라 백공(白公)의 반란은 『춘추좌전』 애공 16년(哀公十六年)과 『사기』 「초세가(楚世家)」에 기록이 있습니다. 애공 16년(기원전 479년)은 공자가 72살에 죽은 연도입니다. 따라서 공자와 제나라 경공을 만난 연도와 백공의 반란 연도가 서로 상관없고 공자가 백공 반란에 가담하였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묵가는 공자가 백공 반란에 가담하였다고 설정한 것은 허위 조작입니다. 그렇지만 묵가가 이렇게 이야기를 설정하고 비판한 까닭도 있겠으나 알 수 없습니다.
2-3、孔某之齊見景公,景公說,欲封之以尼溪,以告晏子。
晏子曰:“不可!
夫儒,浩居而自順者也,不可以教下;好樂而淫人,不可使親治;立命而怠事,不可使守職;宗(崇)喪循哀,不可使慈民;機服勉容,不可使導衆。
孔某盛容修飾以蠱世,弦歌鼓舞以聚徒,繁登降之禮以示儀,務趨翔之節以觀衆。博學不可使議世,勞思不可以補民。累壽不能盡其學,當年不能行其禮,積財不能贍其樂。繁飾邪術,以營世君;盛爲聲樂,以淫遇民。其道不可以期世,其學不可以導衆。今君封之,以利齊俗,非所以導國先衆。”
公曰:“善。”於是厚其禮,留其封,敬見而不問其道。
孔某乃恚,怒於景公與晏子,乃樹鴟夷子皮(范蠡)於田常之門,告南郭惠子以所欲爲,歸於魯。有頃,間齊將伐魯,告子貢曰:“賜乎!舉大事於今之時矣!”乃遣子貢之齊,因南郭惠子以見田常,勸之伐吳,以教高、國、鮑、晏,使毋得害田常之亂。勸越伐吳,三年之內,齊、吳破國之難,伏尸以言術數,孔某之誅也。
2-3、공자가 제나라 전상 반란을 획책함
공씨 아무개가 제나라에 가서 경공을 뵈었는데 경공이 기뻐하며 니계(尼溪) 땅(田)을 봉지(封地)로 주고 싶어서 안자(晏子, 晏嬰)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안자가 대답하길 “절대로 안 됩니다!
유가는 거만하고 자기 주장만 옳다고 하기에 아래 백성을 다스리도록 맡겨서는 안 됩니다. 음악을 좋아하고 사람들을 미혹시키기에 백성을 직접 다스리도록 맡기면 안 됩니다. 천명을 주장하고 업무를 게을리하기에 직무를 맡기면 안 됩니다. 상례를 중시하고 슬픔을 따르기에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도록 맡기면 안 됩니다. 이상한 복식을 입고 자세 잡기에 힘쓰기에 백성을 이끌도록 맡기면 안 됩니다.
공씨 아무개는 의복과 장식을 장엄하게 꾸며서 세상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악기를 타며 노래 부르고 장구 치며 춤을 추어 학생들을 모읍니다. 예절(禮)의 등급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의식(禮儀)을 나타냅니다. 걷거나 뛰어가는 절차를 만들어서 많은 사람이 보도록 합니다. 유학(博學, 儒學)은 세상에 모범(議는 儀)이 되도록 맡기면 안 되고 지치도록 깊이 생각하나 백성을 돕도록 맡기면 안 됩니다. 그의 학술은 오래 배워도 다 배울 수 없기에 장년(壯年, 나이 40대)에도 예의를 온전하게 알지 못하고 재물을 많이 쌓아놓았더라도 음악 행사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올바르지 못한 통치 방법(術)을 복잡하게 꾸며서 세상의 군주들을 미혹하고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여 백성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따라서 그의 방법(道)은 세상에 알려주면(示) 안 되고 그의 학술(學)은 사람들을 이끌게 하면 안 됩니다. 현재 군주께서 그에게 봉지를 주어 제나라 풍속에 도움을 주시려는데 국가와 사람들에 앞장서서 이끌 수 없는 까닭입니다.”고 말하였습니다.
경공은 “좋은 말씀에 동의합니다.”고 말하고 공씨 아무개에게 예물을 많이 주되 봉지를 주는 것을 보류하고 만나면 존경하되 정치 방법을 묻지 않았습니다.
공씨 아무개가 발끈하고 경공과 안자를 미워하였으며 그래서 화식(貨殖)에 밝은 범려(范蠡, 鴟夷子皮, 기원전 536년-기원전 448년)를 기원전 481년 제(齊)나라 간공(簡公)을 시해한 전상(田常, 陳恆)에게 추천하였고 남곽혜자(南郭惠子)에게 공씨 아무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알려준 뒤에 노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뒤에 제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한다는 소식을 들은(聞) 뒤에는 자공(子貢)에게 “사(賜)야! 지금이야말로 제나라에서 큰일(노나라를 구하는 일)을 일으킬 때이다!”고 일러주고 자공을 제나라로 파견하였습니다. 자공은 남곽혜자를 통하여 전상을 뵙고 오(吳)나라를 정벌하도록 유세하여 제나라의 고국포안(高、國、鮑、晏) 사성(四姓)의 군대가 노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오나라를 공격하도록 하여 이들이 전상의 반란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였고 월(越)나라에게는 오나라를 정벌하라고 유세하였습니다. 3년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제나라와 오나라는 거의 멸망하는 위기를 맞았고 죽은 사람들이 수만 명(術, 隧, 5개 縣의 인구)인데 모두 공씨 아무개의 모략 때문입니다.
참고 자료 :
孔子見齊景公︰
『呂氏春秋』,卷十九,「高義」︰
孔子見齊景公,景公致廩丘以為養。孔子辭不受,入謂弟子曰:“吾聞君子當功以受祿。今說景公,景公未之行而賜之廩丘,其不知丘亦甚矣。”令弟子趣駕,辭而行。孔子布衣也,官在魯司寇(魯定公之司寇)。萬乘難與比行,三王之佐不顯焉,取捨不苟也夫!
劉向,『說苑』,卷四,「立節」︰
孔子見齊景公,景公致廩丘以為養,孔子辭不受,出謂弟子曰:“吾聞君子當功以受祿,今說景公,景公未之行而賜我廩丘,其不知丘亦甚矣!”遂辭而行。曾子衣弊衣以耕,魯君使人往致邑焉,曰:“請以此修衣。”曾子不受,反覆往,又不受,使者曰:“先生非求於人,人則獻之,奚為不受?”曾子曰:“臣聞之,受人者畏人,予人者驕人;縱子有賜不我驕也,我能勿畏乎?”終不受。孔子聞之曰:“參之言,足以全其節也。”子思居於衛,縕袍無表,二旬而九食,田子方聞之,使人遺狐白之裘,恐其不受,因謂之曰:“吾假人,遂忘之;吾與人也,如棄之。”子思辭而不受,子方曰:“我有子無,何故不受?”子思曰:“急聞之,妄與不如棄物於溝壑,急雖貧也,不忍以身為溝壑,是以不敢當也。”
『晏子春秋』,第八卷,外篇第八,
「仲尼見景公景公欲封之晏子以為不可」第一:
仲尼之齊,見景公,景公說之,欲封之以爾稽,以告晏子。晏子對曰:“不可。彼浩裾自順,不可以教下;好樂緩于民,不可使親治;立命而建事,不可守職;厚葬破民貧國,久喪道哀費日,不可使子民;行之難者在內,而傳者無其外,故異于服,勉于容,不可以道衆而馴百姓。自大賢之滅,周室之卑也,威儀加多,而民行滋薄;聲樂繁充,而世德滋衰。今孔丘盛聲樂以侈世,飾弦歌鼓舞以聚徒,繁登降之禮,趨翔之節以觀衆,博學不可以儀世,勞思不可以補民,兼壽不能殫其教,當年不能究其禮,積財不能贍其樂,繁飾邪術以營世君,盛為聲樂以淫愚其民。其道也,不可以示世;其教也,不可以導民。今欲封之,以移齊國之俗,非所以導衆存民也?。”公曰:“善。”于是厚其禮而留其封,敬見不問其道,仲尼迺行。
唐、趙蕤,『長短經』,卷七,「懼誡」第二十︰
孔子在衛,聞齊田常將欲為亂,而憚鮑、晏,因移其兵以伐魯。孔子會諸弟子曰:“魯,父母之國,不忍觀其受敵。將欲屈節於田常以救魯,二三子誰使?”子貢請使,夫子許之。遂如齊,說田常曰:“今子欲取功於魯實難,若移兵於吳則可也。夫魯難伐之國,其城薄以卑,地狹以泄,其君愚而不仁,大臣偽而無用,其士民又惡甲兵之事,此不與戰。夫吳城高以厚,地廣以深,甲堅以新,士選以飽,重器精兵,盡在其中,又使明大夫守之,此易伐也。”田常忿然作色曰:“子之所難,人之所易;子之所易,人之所難,而以教常,何也?”子貢曰:“夫憂在內者攻強,憂在外者攻弱。今君憂在內矣,吾聞君三封而三不成,是則大臣不聽也。今君破魯以廣齊,戰勝以驕主,破國以尊臣,而子之功不與焉,則交日疏於主。是君上驕主心,下恣群臣,求以成大事,難矣。夫上驕則恣,臣驕則爭,是君上與主有卻、下與大臣交爭也。如此,則子之位危矣,故曰不如伐吳。伐吳而不勝,民人外死,大臣內空,是君上無強臣之敵,下無民人之過;孤主制齊者,唯君也。”田常曰:“善。然兵業已加魯矣,不可更。如何?”子貢曰:“子緩師。吾請救於吳,令救魯而伐齊。子以兵迎之。”田常許諾。
2-4、孔某爲魯司寇,舍公家而奉季孫,季孫相魯君而走,季孫與邑人爭門關,決植。
2-4、노나라 계손씨 반란에 협조한 공자
공씨 아무개는 노나라 정공(定公) 9년(기원전 501년) 사공(司空)에서 대사구(大司寇)로 승진하였는데 노나라 공실(公室)을 버리고 계손씨(季孫氏)를 모셨으며 계손씨가 노나라의 실권자가 되었다가 도망갈 때 계손씨와 읍인(邑人)이 관문(關門)에서 대치할 때 공씨 아무개가 관문을 잠근 가로막대를 열어주었습니다.
2-5、孔某窮於蔡、陳之間,藜羹不糂。十日,子路爲享豚,孔某不問肉之所由來而食。號(褫)人衣以酤酒,孔某不問酒之所由來而飲。哀公迎孔子,席不端弗坐,割不正弗食。子路進請曰:“何其與陳、蔡反也?”孔某曰:“來,吾語女:曩與女爲苟生,今與女爲苟義。”夫飢約,則不辭妄取以活身;贏飽,則僞行以自飾。污邪詐僞,孰大於此?
2-5、반란 가담과 허위 행동
공씨 아무개가 채(蔡)나라와 진(陳)나라 사이에서 곤경에 처하였을 때 나물죽에 곡식을 넣지도 못할 만큼 굶었습니다. 열흘 뒤에 굶주림을 참지 못하자 자로(子路)가 돼지를 구하여 삶아오자(烹) 공씨 아무개는 돼지고기를 어떻게 얻었는지를 묻지도 않고 먹었습니다. 또 남의 옷을 벗겨서 팔아 술을 사왔는데 공씨 아무개는 술을 어떻게 얻었는지를 묻지도 않고 마셨습니다. 노나라 애공(哀公) 11년(기원전 484년)에 계강자(季康子)가 공자를 위(衛)나라에서 노나라로 맞아온 뒤에는 자리가 단정하지 않으면 앉지 않고 고기를 똑바르게 자르지 않으면 먹지 않았습니다. 자로가 나서서 “어찌하여 현재 태도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곤경에 처하였을 때와 상반됩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공씨 아무개는 “가까이 오너라! 내가 너에게 말해주마. 과거에는 나도 너도 모두 굶어 죽지 않고 살기에 급급하였으나(急生) 현재는 나도 너도 예의 실천(敬義)이 중요하다.”고 일러주었습니다. 몹시 굶었을 때는 먹거리를 어떻게 얻었는지를 묻지 않고 먹어서 목숨을 살렸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때(贏飽, 盈飽)는 거짓(虛僞)을 행동하여 자신을 꾸몄습니다. 반란에 가담한 것(污邪)과 거짓 행동으로 속인 것(詐僞)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2-6、孔某與其門弟子閒坐,曰:“夫舜見瞽叟孰然(『孟子』:舜見瞽叟,其容有蹙。),此時天下圾乎!周公旦非其人也邪!何爲舍其家室而托寓也?”
2-6、군주권 강화보다 천하 백성을 위한 반란을 조장함
공씨 아무개가 학생들과 한가하게 앉아 말하길 “순임금이 제위에 오른 뒤에 조근을 받을 때 아버지 고수(瞽瞍)의 걱정하는 안색을 보았다고 말하는데 이 시기에 천하가 가장 위급하였다! 주공(旦)이 국가권력을 조카 성왕에게 되돌려주었다고 말하는데 주공은 천하 백성을 생각하지 않고 정권을 양보하였다는 명예를 얻었으니까 성인이 아닐 것이다! 주공은 어찌하여 가족을 버리고 성왕 곁에 머물렀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참고 자료 :
唐、趙蕤,『長短經』,卷七,「懼誡」第二十︰
『易』曰:“湯武革命,順乎天而應乎人。”『書』曰:“撫我則后,虐我則仇。”『尸子』曰:“昔周公反政,孔子非之曰:‘周公其不聖乎!以天下讓,不為兆人也。’”(議曰:昔堯稱:“吾以天下授舜,則天下得其利而丹朱病;授丹朱,則天下病而丹朱得其利。吾終不以天下之病而利一人,遂禪於舜。”今周公不以天下為務,而自取讓名,非為聖達節者也,故孔子非之。)
2-7、孔某所行,心術所至也。其徒屬弟子皆效孔某:子貢、季路,輔孔悝亂乎衛,陽貨亂乎齊,佛肸以中牟叛,漆雕刑殘,莫大焉!
2-7、공씨 아무개의 행동거지를 보면 마음 쓰는 곳(心術)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그의 학생들도 공씨 아무개를 본받았는데 자공(子貢)과 계로(子路)는 위(衛)나라 대부 공리(孔悝)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도와주었고 양호(陽虎)는 제(齊)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불힐(佛肸)은 중모재(中牟宰)로서 반란을 일으켰고 칠조씨(漆雕氏) 아무개는 처형을 받아 죽었습니다. 반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이 아주 큽니다!
2-8、夫爲弟子後生,(皆效)其師,必修其言,法其行,力不足、知弗及而後已。今孔某之行如此,儒士則可以疑矣!
2-8、공자 학생들의 임용 반대
제자 학생은 그의 스승을 본받아 스승의 말씀에 따라 수양하고 스승의 행동을 모범으로 삼는데 능력이 따르지 못할 때까지 지식이 미치지 못할 때까지 본받으려고 합니다. 현재 공씨 아무개의 행동이 이와 같으니 그를 본받는 유사(儒士)들은 의심하고 임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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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孔叢子』,「詰墨」,11條︰
1、墨子稱:景公問晏子以孔子而不對,又問,三皆不對。公曰:“以孔子語寡人者眾矣,俱以爲賢聖也。今問於子而不對,何也?”晏子曰:“嬰聞孔子之荊,知白公謀而奉之以石乞,勸下亂上,教臣弒君,非聖賢之行也。”
詰之曰:楚昭王之世,夫子應聘如荊,不用而反,周旋乎陳、宋、齊、衛。楚昭王卒,惠王立,十年,令尹子西乃召王孫勝以爲白公。是時,魯哀公十五年也。夫子自衛反魯,居五年矣。白公立一年,然後乃謀作亂。亂作在哀公十六年秋也。夫子已卒十旬矣。墨子雖欲謗毀聖人,虛造妄言,柰此年世不相值何?
2、墨子曰:孔子之齊,見景公。公悅之,封之以尼谿。晏子曰:“不可。夫儒倨法而自順,立命而怠事,崇喪遂哀,盛用繁禮。其道不可以治國,其學不可以導家。”公曰:“善。”
詰之曰:即如此言,晏子爲非儒惡禮,不欲崇喪遂哀也。察傳記,晏子之所行,未有以異於儒焉。又景公問所以爲政,晏子答以“禮云”。景公曰:“禮、其可以治乎?”晏子曰:“禮、於政與天地並。”此則未有以惡於禮也。晏桓子卒,晏嬰斬衰枕草,苴絰帶杖,菅菲食粥,居于倚廬,遂哀三年。此又未以異於儒也。若能以口非之而躬行之,晏子所弗爲。
3、墨子曰:孔子怒景公之不封己,乃樹鴟夷子皮於田常之門。
詰之曰:夫樹人、爲其信己也。『記』曰:“孔子適齊,惡陳常,而終不見。常病之,亦惡孔子。”交相惡而又往仕,其不然矣。『記』又曰:“陳常弒其君。孔子齊戒沐浴而朝請討之。”觀其終不樹子皮,審矣。
4、墨子曰:孔子爲魯司寇,舍公家而奉季孫。
詰之曰:若以季孫爲相,司寇統焉。奉之自法也。若附意季孫,季孫既離公室,則孔子合之;季孫既受女樂,則孔子去之;季孫欲殺囚,則孔子赦之。非苟順之謂也。
5、墨子曰:孔子厄於陳、蔡之間,子路烹豚,孔子不問肉之所由來而食之。剝人之衣以沽酒,孔子不問酒之所由來而飲之。
詰之曰:所謂厄者、沽買無處,藜羹不粒,乏食七日。若烹豚飲酒,則何言乎厄?斯不然矣。且子路爲人,勇於見義。縱有豚酒,不以義不取之,可知也。又何問焉?
6、墨子曰:孔子諸弟子:子貢、季路輔孔悝以亂衛。陽虎亂魯。弗肹以中牟畔。漆雕開形殘。
詰之曰:如此言,衛之亂,子貢、季路爲之耶?斯不待言而了矣。陽虎欲見孔子,孔子不見,何弟子之有?弗肹以中牟畔,召孔子,則有之矣。爲孔子弟子,未之聞也。且漆雕開形殘,非行己之致,何傷於德哉?
7、墨子曰:孔子相魯,齊景公患之,謂晏子曰:“鄰有聖人,國之憂也。今孔子相魯,爲之若何?”晏子對曰:“君其勿憂。彼魯君,弱主也,孔子,聖相也。不如陰重孔子,欲以相齊,則心強諫魯君。魯君不聽,將適齊。君勿受,則孔子困矣。”
詰之曰:案如此辭,則景公、晏子畏孔子之聖也,而上云非聖賢之行,上下相反。若晏子悖,可也;不然則不然矣。
8、墨子曰:孔子見景公。公曰:“先生素不見晏子乎?”對曰:“晏子事三君而得順焉,是爲三心,所以不見也。”公告晏子。晏子曰:“三君皆欲其國安,是以嬰得順也。聞君子獨立不慚於影。今孔子伐樹削迹,不自以爲辱;身窮陳、蔡,不自以爲約。始吾望儒貴之,今則疑之。”
詰之曰:若是乎孔子、晏子交相毀也。小人有之,君子則否。孔子曰:“靈公汙而晏子事之以整,莊公怯而晏子事之以勇,景公侈而晏子事之以儉。晏子、君子也。”梁丘據問晏子曰:“事三君而不同心,而俱順焉。仁人固多心乎?”晏子曰:“一心可以事百君,百心不可以事一君。故三君之心,非一也;而嬰之心,非三也。”孔子聞之,曰:“小子記之。晏子以一心事三君,君子也。”如此則孔子譽晏子,非所謂毀而不見也。景公問晏子曰:“若人之眾,則有孔子賢乎?”對曰:“孔子者、君子行有節者也。”晏子又曰:“盈成匡、父之孝子,兄之悌弟也。其父尙爲孔子門人。門人且以爲貴,則其師亦不賤矣。是則晏子亦譽孔子,可知也。夫德之不修,己之罪也;不幸而屈於人,己之命也。伐樹削迹,絕糧七日,何約乎哉!若晏子以此而疑儒,則晏子亦不足賢矣。”
9、墨子曰:景公登路寢,聞哭聲,問梁丘據,對曰:“魯孔子之徒也。其毋死,服哀三年,哭泣甚哀。”公曰:“豈不可哉!”晏子曰:“古者聖人,非不能也,而不爲者,知其無補於死者,而深害生事故也。”
詰之曰:墨子欲以親死不服,三日哭而已。於意安者卒自行之,空用晏子爲。引而同于己,適證其非耳。且晏子服父以禮則無緣,非行禮者也。
11、曹明問子魚曰:“觀子詰墨者之辭,事義相反,墨者妄矣。假使墨者復起,對之乎?”
答曰:“苟得其禮,雖百墨吾亦明白焉。失其正,雖一人猶不能當前也。墨子之所引者,矯稱晏子。晏子之善吾先君,吾先君之善晏子,其事庸盡乎。”
曹明曰:“可得聞諸?”
子魚曰:“昔齊景公問晏子曰:‘吾欲善治,可以霸諸侯乎?’對曰:‘官未具也。臣亟以聞,而君未肯然也。臣聞孔子聖人,然猶居處勌惰,廉隅不修,則原憲、季羔侍;血氣不休,志意不通;則仲由、卜商侍;德不盛,行不勤;則顏閔、冉雍侍。今君之朝臣萬人,立車千乘,不善之政,加於下民者眾矣,未能以聞者。臣故曰:官未備也。’此又晏子之善孔子者也。曰:‘晏平仲善與人交,久而敬之。’此又孔子之貴晏子者也。”
曹明曰:“吾始謂墨子可疑,今則決不妄疑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