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이 되어서야 떠난 여름휴가였다. 여기서 방점은 출장이 아니라 휴가였다는 것에 찍힌다. 한데 이 서점 직원들은 한국에서 책의 숲을 헤매는 것으로도 모자라 런던에서도 서점 구경에 피치를 올렸다. 가령 프로 요리사들은 하루 종일 요리하는데 질려서 가정으로 돌아가면 부엌엔 얼씬도 하지 않는다던데, 책 욕심 있는 자들은 아무튼 못 말린다. 한국에선 구할 수 없다며, 가격이 참신하다며, 이렇게 예쁜 책을 놓치면 바보라며 서로를 다독이면서 낑낑대며 사 들고 온 무거운 원서들이 오늘도 해사하게 책장에서 웃는다.
둘. 보더스(Borders) 책방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아뿔싸. 뭐든 먼저 책에서 배우는 버릇을 지닌 그녀들이 런던 여행서를 탐독한 것만해도 몇 권인데 런던에서도 보더스가 자취를 감췄다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다. 옥스퍼드 스트리트을 한참 휘젓고 다녔으나 끝내 보더스를 발견하지 못하자 거리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다 귀찮아진 채로 발걸음을 돌렸던 것. 지난 40년간 미국 2위 서점 그룹으로 세계 전역에 매장을 뒀던 보더스는 경영난으로 파산해 미국에서 한 지점도 없이 완전하게 사라졌고, 옥스퍼드 스트리트에 있던 매장도 문을 닫았다. 얼마 전 싱가폴에서 생활하는 한 저자랑 인터뷰를 할 때 ‘즐겨 찾던 동네 보더스가 문을 닫아 섭섭하다. 교보문고는 꼭 굳건하게 남아줬으면 좋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오프라인 서점이 사라진다는 건 즐겨찾기 해둔 쇼핑몰 사이트가 폐쇄된 거랑은 다른 차원의 얘기다. 어떤 이에게는 마음의 고향을 잃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
셋. 거대한 워터스톤즈(Waterstone's)는 ‘여유’를 판다
백과사전 스타일로 말하자면, 워터스톤즈는 영국의 대표적인 대형 체인망을 갖춘 기업형 서점이다. 1982년에 창립자 팀 워터스톤이 문을 열었고, 현재 영국을 포함해 유럽 전역에 300여 개의 매장이 있다. 서점 여인들은 그 많은 체인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하는 피카딜리 서커스의 워터스톤즈 본점을 방문했다. 거대한 워터스톤즈의 건물 외관부터 늠름하기 짝이 없다. 교보문고 본점인 광화문점이 단층 매장으로는 세계 최고 규모인 2천 700여 평의 광활함을 보여준다면, 워터스톤즈 본점은 총 6층으로 구성된 그야말로 ‘책 백화점’의 위용을 자랑한다.
대형마트에서 흔한 끼워팔기 이벤트 즉, ‘3 for 2’(2권 가격으로 3권을 살 수 있는) 코너도 워터스톤즈뿐 아니라 영국의 서점에선 흔한 풍경이다. 영국에선 지난 90년대 초반 도서정가제를 권장소비자가격 제도로 바꿨기 때문에 도서 할인판매가 허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서정가제를 지키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선 낯설기도 하다. 그럼에도 아이러니인 것은, 우리나라보다 영국 동네 서점들의 생명력이 훨씬 더 길다는 거다. 물론 영세서점들의 수가 팍 줄어든 것은 우리나 그네나 같은 상황이지만, 그래도 뚜렷한 기획 컨셉트를 지닌 영국의 전문 서점들은 명민하게 살아남아 여행자들의 관광코스가 돼 버렸다.
우리나라의 1층에 해당하는 G층부터 4층까지 다양하고 세세하게 구분된 섹션 또한 인상적이었다. G층엔 베스트셀러와 신간, 런던 여행서, 문구 코너가 있고, 5층엔 ‘5th View’라는 카페 겸 레스토랑이 있다(맛집은 아니라는 게 중평이긴 하지만). 그 사이 층엔 세분화된 장르의 책들이 구비돼 있다. 물론 장르의 구분과 범주가 다른 탓도 있겠지만, 일례로 SF&판타지, 다크판타지, 호러, 범죄, 게이 픽션 등이 다 구분돼서 책장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으니 보기에 편한 것이다. 자국뿐 아니라 영미권 책들로 범주를 넓게 가질 수 있으니 분류가 풍성해 지는 걸까? 분류만으로도 호기심이 동했다.
워터스톤즈를 거닐면서 그 공간에 가득 배여 있는 여유가 부러웠다. 대형서점과 문화공간이라는 타이틀이 정확하게 합을 맞춘다고 할까? 만약 마케터의 입장에서 본다면 치밀한 전략으로 잘 짜여진 ‘책 백화점’일 지 모르만, 워터스톤즈 방문객의 입장에선 스스로가 ‘소비자’가 아니라 ‘독자’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붐비지 않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연륜이 느껴지는 가죽 소파에 앉아(어떤 이들은 반쯤 누워) 부담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다. 어떤 소파는 지나치게 낡았지만 이 곳에선 그마저도 그렇게 멋스러울 수 없다. 사실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이 ‘워터스톤즈의 쇼파 맛’이었다. 의자와 의자 사이의 공간도 무척 널찍하다. 창문 밖으론 고풍스러운 건물이 내다보이고, 빛이 스며들어 푹신한 카페트 혹은 나무 바닥 위로 떨어진다. 한가한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것처럼 편안함을 주는 공간 인테리어가 곧 책을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책방에서 쉬다 왔다’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대형서점, 워터스톤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