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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의 규례 (1)
- 설교 : 김강호 목사
주보를 읽으면서 설명을 하겠다.
1장부터 7장에 시작과 끝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라는 명령이다. 1장2절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구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그렇게 되어 있고 7장 제일 끝에 보면 그런 말로 끝나 있다. 3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라 명하신 날에 시내 산에서 이같이 모세에게 명하셨더라. 그런 말로 시작과 끝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제사법은 시내 산에 강림 하사 성소에서 이스라엘 중에 함께 계신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며 또한 제사법은 여호와 앞에서 먹고 마시는 생명의 교제이다. 이것이 언약 체결의 핵심이다.
이 은혜의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완성 하사 교회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에서 그의 몸의 참여하는 생명을 누리게 하셨다. 제물의 규례에 대해 마무리하는 언급은 7장 37절이다. 이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제의 규례이다. 그렇게 끝맺고 있다. 지금 전체 문단 1-7장까지인데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라 언제 시내 산에서 그렇게 해서 처음과 끝을 마무리 짓고 있다.
제사법은 시내 산 성소 중에 강림하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예물을 드리라고 명하심인데 이것이 언약 친교의 본질이다. 그런데 이 은혜의 일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안에서 완성하셨는데 이제는 성소에서 예물을 드리고 먹고 마시는 교제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에서 그의 몸에 참여하는 교제를 누리도록 하셨다. 지금 설명이 길어서 앞에다가 전부 요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물의 규례에 대해서 지금 우리가 공부할 것인데 제물의 규례에 대한 마무리하는 언급은 7장37절이다. 거기 보면 이는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속건죄와 위임규례이다. 이렇게 총 마무리를 짓고 있다. 그러면 이제 비교를 해보면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법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 위임제의 순서로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제사에 대한 규례 즉 예물을 나누는 법인데 제물의 몫에 대한 규례는 순서가 어떻게 되냐면 번제 소제 거기까지는 좋다.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의 순서로 되어 있다. 벌써 화목제가 제일 뒤로 돌려져 있다.
그리고 여기는 제사장의 소제가 소제 중에 끼여 있다. 순서가 바꿔져 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법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이렇게 되어 있고 제물을 나누는 몫에 대한 규례는 번제 소제 그 다음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화목제가 제일 뒤로 돌려져 있다. 그리고 그것을 총 마무리하는 말씀은 7장 37절에 보면 그러나 그 규례를 마무리하실 때는 위임제의 한 부분인 소제를 소제의 항목이 화목제 앞에 위임재를 언급하셨다. 언급할 때는 번제 소제 그 다음 제사장의 소제가 있으니까 제사장의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이런 순서로 되어야 논리가 있을 것인데 그렇게 안하고 번제 소제 속제제 속건제 위임제 화목제 그 위임제를 소제의 항목과 연결시켜서 말하지 않고 화목제 앞에다가 위임제 이렇게 붙여 났다.
그러면 가령 우리가 30배 60배 100배, 100배 60배 30배 그런 질서가 있어야 외우기 좋고 또 문장이 힘이 있는 것인데 여기 보면 완전히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제사법은 번제 소제 화목제 여기 까지는 향내나는 제사다. 속죄제 속건제는 속죄를 위해서 드린 것이지 향내를 위해서 드리는 제사가 아니다. 이렇게 배열되어 있고 제물에 대한 규례를 배열할 때는 번제 소제 그 다음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를 제일 뒤에 배열해서 기록해 놓고 이것을 총 요약했을 때는 번제 소제 그 다음 제사장의 소제가 여기 붙어 있는데 안하고 속죄제 속건제 위임제 화목제 위임제란 이름을 붙여서 화목제 앞에다 붙였다. 마무리할 때는 이렇게 해 났다.
그러면 이런 것이 무엇인지 그냥 하나님이 기억력이 없어서 왔다 갔다 섞어 놓고 마음대로 말씀하셨는가? 순서를 마음대로 바꾸어도 좋은 것인가? 만일에 그렇지 않고 순서를 바꿨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런 점들을 비교해서 해석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그렇지 않고 제사법에는 무엇이 있냐 외울려면 순서 필요 없다. 다섯 가지 그런데 성경은 배열하는 자체에서 어떤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이 우리가 그냥 해석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 자체가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분별해야 한다 그 말이다.
그러면 왜 제사법을 그냥 한꺼번에 제사법 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법 하나님 몫 임자 몫 다 한꺼번에 하면 말하기 좋을 것인데 하나님 앞에 드리는 방법은 1장부터 6 :7장 절까지 한 번 다하고 그 다음 또 나누는 몫을 제사법을 비슷하게 기록하면서 또 다시 반복하는가? 하는 문제부터 생각을 해야 되겠지요.
제물의 규례에서도 드리는 제사법을 언급하지만 여기서의 제사법은 예물의 성격을 규정한 제사법이 아니라 여호와의 몫을 규정한 제사법이다. 가령 처음에 제사법에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법이 있다. 예물의 몫을 나누는데도 또 제사법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왜 하나님 앞에 드리는 법을 두군데 분리를 시켰냐? 하나로 묶어 났으면 알기가 더 쉬울 것인데 칼빈 같으면 하나로 묶어서 해석을 해 버릴 것이다. 그렇게 하면 제사지내는 방법론만을 연구한 것이지 그 의미 해석은 어렵게 된다.
여호와 앞에 드리는 제사법에는 그 예물의 성격을 규정한다. 이 예물의 성격이 하나님 앞에 무엇이냐? 향내를 위한 것인데 속죄를 위한 것인지 그런 것이 강조되어 있고 예물의 규례 즉 몫에 대한 대해서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법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예물에 대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예물의 몫을 규정한 제사법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몫인데 어떤 의미로 하나님의 몫이냐 하는 것을 이런 제사법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1-6장까지 제사법하고 6-8장의 제사법을 그냥 섞어서 만들어 버리면 실은 안 맞다. 그 기록된 문장 내에서 해석을 해야 맞다.
그러면 번제의 규례를 보면 강조 점은 번제물을 사르는 단위에 불이 꺼지지 않게 하고 그 위에 아침마다 번제물을 사르는 것이다. 제사법에서는 이런 것이 강조 점이 아니라 전체를 살라라 그것이 강조점이었다. 잡고 각을 뜨고 창자도 씨고 정강이도 씻고 다 씻어서 전체를 불살라라 하는 것이 1장에 있는 제사법에서 강조점이있다. 즉 전체를 드리는 것이 강조다.
그런데 또 여기 예물의 몫에 대해서 번제는 이러하니라 또 제사법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전체를 사르라 그런 강조점이 아니라 불을 꺼지지 않게 하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두고 꺼지지 않게 하고 그 위에다 화목제의 기름을 사르게 하고 그리고 꺼지지 않게 하고 그 말이 계속 반복되어 있다. 제일 끝에도 반복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 본문을 요약해서 여기다 적어 놨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처음에 1장에서 번제를 드릴 때는 제사장이 무슨 옷을 입고 나오고 그런 말이 일체 없고 전체를 살라라 이 말만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제사장이 새 마포 흰옷을 입고 재를 성소 밖 재 버리는 정결한 곳에 버리고 그 때는 다른 옷을 입고 나가서 버리고 제단에 나갈 때는 새 마포 흰옷 고의를 입고 그리고 재를 버릴 때는 다른 옷을 입고 나가고 이런 문제들이 기록이 되어 있다. 오히려 번제의 규례가 더 제사법을 자세히 묘사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니까 1장에 있는 것과 여기 6장에 있는 것은 번제에 대한 제사법들이 서로 다르게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면 이것을 합쳐서 번제를 드리는 온전한 방법 해 가지고 제사장은 새마포 흰옷을 입고 잡아서 각을 뜨고 물로 씻고 정갱이를 씻고 다 불사르고 그 다음 저녁부터 아침까지 두고 화목제 기름을 불사르고 이렇게 섞어 두면 제사지내는 방법론은 연구하겠지만 왜 1장하고 6장하고 따로 따로 배열했는지 그것은 해석을 못한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항상 문맥 해석에 강조를 두라 그 말이다. 거기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잘 잡으라 그 말이다. 그러면 왜 새마포 옷을 입냐? 레위기를 보면 새마포 흰옷은 성소와 관계된 것이다. 실은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제사장도 영광스러운 옷을 벗고 새마포 옷을 입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은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제사장은 새마포 흰옷을 입고 나아간다.
번제물위에 화목제물을 사르는 것은 여호와의 몫인 번제물의 성격을 화목제의 기름과 동일시하는 말씀이다. 다른 데서는 그렇게 말을 안한다. 번제물을 화목제의 기름에 살라라. 번제물 전체를 사른 것과 화목제 기름은 이 앞에 화목제의 규례에서 기름은 3장에서 내것이라 그랬다. 그런 의미와 관계된 의미다. 어떻든 여기서 강조점을 꺼지지 않게 하고 계속해서 드리라 그런 말이다.
가령 본문을 참고해 보면 번제물을 단위에 아침까지 두고 단의 불로 꺼지지 않게 하고 그 다음 제사장은 새마포 고의로 하체를 가리고 그리고 기름 드리는 이야기가 쭉 기록되어 있다. 단위에 불은 항상 꺼지지 않게 하라.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벌려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살라라. 불은 꺼지지 않게 하라 처음과 마지막이 꺼지지 않게 하라. 그 말이 강죄되어 있다. 끊임없이 드리라 그 말이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끊임없이 드리라 그 말이다.
그리고 화목제의 기름이 하나님의 몫인 것처럼 번제물 위에다가 화목제의 기름을 태워라 그러니까 이것은 1장에서는 전체를 다 드린다는 것이 번제물의 성격을 규정하고 또 여기서 번제의 규례는 여호와의 몫은 무엇이냐? 여호와는 지금 단에서 잡수시거든요. 그 단은 지성소와 같다. 왜 지성소에 들어갈 때 제사장이 이렇게 들어간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임재한 거룩한 처소다. 거기서 하나님이 화목제의 기름을 자기 몫으로 취한 것처럼 번제물을 끊임없이 자기 것으로 취하신다. 이런 말이다. 그것이 이 번제물의 규례에서 강조점이다.
여러분이 읽어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번제를 읽어보면 끊임없이 강조되어 있다.
소제의 규례를 보면 강조점은 소제를 여호와의 제사장의 양식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소제에서 강조점은 여호와와 제사장의 양식이다 하는 것이 강조점이다. 2장에서 화목제의 규례도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으로 준다. 그렇게 되어 있다. 제사장의 몫으로 준다 그런 말만 있지 어떻게 준다는 말은 자세하게 기록이 안되어 있다. 그냥 나머지 것은 제사장의 몫으로 준다. 한 움큼은 기념물로 불살라 향내나게 하고 모든 유향을 불살라 향내나게 하고 이것이 2장에서 소제물의 강조점이다. 향내나는 하는 것이 강조점이었다. 유향은 전부 불사르고 그리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양식으로 준다. 이 말만 되어 있고 제사장의 어떤 양식인지 거기는 강조되어 있지 않다.
드디어 제물을 나누는 몫에서 이것이 어떤 양식인가 하는 문제들이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몫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 어떻게 향내가 나는지도 강조가 되어 있다.
여호와께는 소제물 한 움큼과 유향 전체를 여호와 앞 단위 살라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고 나머지는 아론과 그 자손의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다. 여기서 드디어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지극히 거룩함을 무엇으로 연결하냐? 속죄제물로 속건제의 제물과 같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속죄 제물과 속건제의 제물과 같이 지극히 거룩하다. 그러니까 지극히 거룩함을 속죄 제물과 연계하여 말씀하신다. 아론 자손의 몫과 거룩한 먹는 법이 강조되어 있다. 누룩을 넣지 말고 먹어라 하는 것이 반복되어 있다. 또 누룩을 넣지 말고 먹는 것은 아직 안식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항상 제한하는 것은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다는 의미에 제한이다.
그런데 거기 보면 누룩을 넣지 말고 먹어라는 말이 두 번 강조되어 있다. 본문을 강조점을 드러내도록 요약 해보면 아론의 자손은 것을 단 앞 여호와 앞에 드리되 소제물 한 움큼과 그 위에 모두를 기념물로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여기서는 2장 소제물과 엇비슷하다. 왜냐하면 거기서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것이 소제물의 강조점이었거든요. 그리고 나머지는 아론과 그 자손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 회막 뜰에서 먹어라. 이는 나의 화제중에서 내가 그들에게 그들의 소득이 되게 하는 것이라. 속죄제와 속건제같이 지극히 거룩한즉 아론 자손의 남자는 이를 먹어라. 이는 여호와의 화제중에서 그들의 영원한 소득이 됨이니라. 이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해 지리라. 무엇이 강조되었는가를 알겠지요.
그러니까 여호와께 향기로운 예물로 드리는 것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 2장에 강조되어 있으니까. 그 강조법을 그대로 여기서 말하고 있고 여기서는 특이하게 강조된 것은 제사장의 양식이 강조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과 제사장의 거룩한 양식 그것이 소제에서 강조된 것이다. 여기서 제사장 양식으로 아론과 그 자손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먹어라 그 말을 두 번하고 어디서 먹냐? 거룩한 곳 회막 뜰에서 먹어라. 회막뜰은 하나님의 성소다. 이것이 거룩한 양식을 먹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강조냐 하면 이것은 나의 화제중에서 즉 나에게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예물중에서 내가 그들에게 주어 소득이 되게 하는 것이라. 속죄제와 속건제같이 지극히 거룩한즉 속죄제와 속건제같이 어떻게 거룩한가 하는 것은 속죄제를 설명할 때 말씀을 드리겠다. 그런데 여기서는 너희들의 몫인데 속죄제와 속건제처럼 지극히 거룩하고 거룩한 뜰에서 먹어라. 그렇게 말하고 있고 아론 자손의 남자는 다 먹어라. 이는 나의 화제중에서 이를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는 나의 화제중에서 그들의 영원한 소득이 됨이니라. 제일 끝에 결론이 강조 점이다. 그러면서 이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해지리라. 그를 먹는 정도가 아니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해지리라. 거룩한 양식이다. 누구에게 제사장에게 하나님은 향기로운 냄새로 화제를 잡수시고 그 중에서 내가 제사장 아론 가문의 남자에게 준 것이라. 그것은 거룩한 뜰에 양식이고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고 속죄제물처럼 거룩한 양식인데 아론 자손의 모든 남자는 먹어라. 내가 향내나는 나의 예물중에서 제사장에게 준 것이다. 만지는 자도 거룩하게 되리라. 그렇게 거룩한 양식 주는 것이 소제의 강조 점이다.
그 다음 제사장의 소제다. 이것은 위임제의 소제다. 위임제는 여러 가지 예물을 드린다. 속죄제부터 화목제까지 전 제사를 다 드리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소제의 항목을 빼다가 여기서 언급을 하고 있다. 왜 언급을 하냐면 소제물의 지극히 거룩한 것 여호와의 화제중에서 지극히 거룩한 것을 제사장의 거룩한 양식으로 주었거든요. 그런데 제사장이 드린 소제는 제사장 가문에게 주지를 안했다. 제사장의 위임식 소제물은 항상 드리는 소제물로 아침과 저녁에 절반씩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온전히 불살라 드리며 이것은 아침과 저녁으로 드리고 반씩 드린다. 에바 십분의 일 곡식 가루는 반씩 해서 아침저녁으로 드린다.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제사는 본래 번제다.
그런데 아침저녁으로 절반씩 향기로운 냄새로 전체를 불살라 드리며 제사장의 몫이 없다. 제사장의 위임식의 소제물을 소제와 함께 언급하심으로 소제물의 성격을 말씀하신다. 일반적으로 드리는 소제물보다 제사장이 드리는 소제물에 그 강조 점이 드러난다. 백성들의 속죄제보다 제사장의 속죄제에서 속죄의 성격이 더 드러난 것처럼 백성들이 드리는 소제물보다 제사장이 드린 소제물에서 소제물의 성격이 더 드러난다. 제사장의 위임식의 소제물을 소제와 함께 언급하심으로 소제물의 성격을 말씀하신다. 소제물도 번제와 같이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전체로 삶의 열매를 드리는 것이 핵심이고 아직 제사장의 소제는 백성에게 주지 안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번제를 드린 것처럼 제사장의 소제는 전체를 불사르는 것이 핵심이고 백성의 소제는 한 움큼을 사르고 유향 전체를 사르는데 제사장의 소제는 전체를 살라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실은 아침과 저녁에 드린다. 실은 번제에 섞어 드린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제물도 실은 번제의 성격과 같다. 전체를 드린다는 의미로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은 곡식이 일상의 양식이다. 제물은 성소의 양식이면 곡식이 일반 양식이다. 그러니까 이 소제물은 한 움큼을 태워 드리고 향을 전체로 불태워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거룩한 양식으로 준다. 그런데도 이것까지라도 그 드리는 성격의 강조 점은 실은 번제의 성격과 같다. 번제물은 다 사르니까 제사장과 임자에게 줄 것이 없다. 그래서 삶의 열매를 전체로 드리는 것이 소제물의 성격이다.
속죄제의 규례다. 강조점은 속죄제 희생의 고기를 그것을 드리는 제사장이 여호와의 뜰에서 먹도록 지극히 거룩한 양식으로 주신 것이다. 6:25을 보면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의 희생은 지극히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의 희생을 잡을 것이요 항상 처음에 있는 것과 마지막에 있는 것들이 강조 점들이다. 그 가운데는 그것을 설명하고 강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속죄제의 강조 점은 희생의 고기가 지극히 거룩하다. 그리고 잡는 것도 여호와 앞 번제단 앞에서 잡아라. 여호와 앞에서 잡는다 그렇게 되어 있다.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 그것을 먹되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며 속제로 말미암은 생명의 교제가 강조된다.
지극히 거룩한 양식의 특성을 자세히 묘사한다. 속죄제의 특성은 하나님 앞에 지극히 거룩한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며 그 고기도 지극히 거룩하다. 그래서 지극히 거룩하다는 특징이 강조해서 설명이 되는데 이 강조 점은 거룩한 생명의 교제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속죄로 말미암은 거룩한 교제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지극히 거룩한 양식을 자세히 묘사했다. 어떻게 거룩하냐 그 말이다.
속죄제의 희생은 지극히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요 죄를 위해서 드리는 제사장이 그것을 먹되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며 무릇 그 고기에 접하는 자는 거룩할 것이며 그 피가 어떤 옷에든지 묻었으면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빨 것이요 그 그 고기를 삶은 토기는 깨뜨릴 것이요 유기는 물에 씻을 것이며 그 고기는 지극히 거룩하니 제사장의 남자마다 먹으라. 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 속하게 하신 성소의 고기는 먹지 못할지니 불사르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제물 자체가 지극히 거룩하고 제물의 고기가 지극히 거룩하다. 그러니까 잡는 것도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고 먹는 것도 거룩한 뜰에서 먹는데 어떻게 먹어야 되느냐? 어느 정도 거룩하냐? 죄를 위해서 드리는 제사장이 먹는다.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며 그 고기에 접하는 자는 거룩할 것이며 그 피가 어떤 옷에 묻었으면 그 옷이 거룩하게 되기 때문에 빨아야 된다. 고기를 삶은 토기는 그 토기까지 거룩하기 때문에 그것은 깨뜨려 버려야 된다. 유기 그릇은 물에 씻어서 거룩이 거기까지 옮기게 하면 안된다. 그리고 그 고기는 지극히 거룩하니 제사장의 남자마다 먹어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고기는 희생 자체도 여호와 앞에 드리는 거룩한 희생이고 고기도 그 죄를 위해서 드리는 제사장이 거룩한 뜰에서 먹어야 된다. 아론 자손의 모든 남자는 먹고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다. 그런데 이것도 어디까지는 거룩이 옮겨가지 않으냐? 만일에 그 피가 옷에 묻었으면 이것은 지극히 거룩한 것이라 옷까지 거룩하게 해 버린다. 이 피가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에 이 고기를 삶았으면 삶은 그릇까지 거룩하게 되어 버린다. 그러나 아직 옷이나 그 그릇에는 거룩이 옮겨가지 않도록 되어 있다. 빨아야 되고 깨뜨려야 되고 씻어 버려야 되니까. 그런데 거룩한 곳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피가 거룩하기 때문에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말하냐?
속죄 희생 자체가 거룩하고 그 고기 자체가 거룩하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속죄하기 위해서 성소로 그 피를 가지고 들어간 그런 속죄 희생의 고기는 먹지 못하고 불살라야 된다.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아직 번제단에서 속죄한 제물을 제사장이 먹지만 성소에 들어간 속죄제물은 아직 먹지 못한다. 그러니까 번제단에 있는 속죄는 그들에게 효과 있다 먹으니까 그런데 성소에 들어가서 향단 뿔에 바르고 하는 속죄제 희생의 고기는 먹지 못하고 불사르도록 되어 있다. 왜 아직 그것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되어 있다. 먹지 못하니까?
속죄제물을 먹는 것은 속죄의 교제다. 제물 자체가 지극히 거룩하고 고기 자체가 지극히 거룩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소의 뜰에서 먹는 지극히 거룩한 생명이다. 속죄로 말미암은 생명의 교제가 강조되어 있다. 먹는 예물의 거룩함을 통해서 생명의 거룩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예물까지라도 아직도 옷이나 그것을 삶은 그릇까지는 거룩하게 하지 못하고 또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간 피는 아직 제사장도 먹을 수가 없다. 전체로 태워 드려야 되니까. 그것은 아직 온전히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휘장에 뿌려도 그 일로는 휘장은 아직 안 열린다. 그렇게 먹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번제단에서 잡은 속죄제물은 제사장이 여호와의 뜰에서 먹는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며 제사장의 남자마다 먹는다. 그러나 이러한 거룩은 그것을 요리한 기구에라도 옮겨서는 안되며 성소의 피를 가지고 들어간 속죄 제물은 아직은 제사장에게 주시지 않으셨다. 그것이 이 속죄제의 규례에서 강조하는 바이다.
그러니까 제일 간단한 방법은 기록된 자체대로 여러 번 읽으면 강조 점이 나타나 있다. 거듭 같은 말을 반복하고 결론에서 강조한다. 처음부터 지극히 거룩하니라. 그러면 언제 그 기구까지 거룩하냐 스갸라서 제일 끝에 보면 역사의 종말에 그 때는 말 방울까지 성결하고 여호와의 제단의 그릇까지 전부 거룩하고 거룩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고 그 때 구원 역사가 완결된 시점에서 스갸라서 끝에는 다 거룩하다 그런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거룩은 아직 안 주셨다. 그래도 성소 뜰에서 먹는 다는 의미로 거룩하다. 왜 하나님께서 성소에 함께 계시면서 나에게 예물을 드리고 우리가 한 상에서 즐거워하자 그런 교제로 부르셨다.
방금 한 해석이 영해가 아닌 이유는 스갸라서 제일 끝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슥14: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종말적인 절기다. (슥14:17)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슥14: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 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슥14:19)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슥14:20) 그 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20절에 여호와께 성결 여호와께 거룩은 제사장의 이마에 붙어 있는 관에 쓴 글자다. 그런데 말방울에까지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슥14: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구약 언어로 마지막 구원 역사의 완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 언어로 그 때는 모든 것이 성결이라. 다시는 가나안 사람이 없고 천하 만민이 거룩하리라. 그런 언어로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직 아니라는 것이 확증되고 있다. 성소의 뜰에서 먹는 거룩함은 나타나 있는데도 휘장을 걷고 들어가서 향단 뿔에 피를 바른 고기는 아무도 먹지 말아라 그것은 실은 영문 밖에서 불살라지는 그런 제물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 은혜의 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됐다. 제사법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며 그 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먹고 마시는 생명의 교제를 인친 것이다. 그것이 언약 체결의 핵심이다.
구약 때는 이런 저런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 하나님의 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단으로부터 먹도록 했던 것을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완성시키셔서 그에 상에서 그의 몸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먹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 앞에 산 제사를 드리고 그의 몸에 참여하는 백성으로 생명의 교제를 누린다. 그것이 이 제사법의 완성이다.
이제 속건제 나 화목제를 보면 먹는 문제가 더 강조되어 나온다. 그래서 화목제를 제일 끝에다 돌려 놨다. 그리고 요약하기는 위임제도 화목제 앞에다 놨다. 제일 끝에 요약할 때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제사장을 먹이는 것인데 실은 위임제는 제사장에게 소제물은 안 주었다. 안 주었는데도 제사장을 세운 위임은 무엇인가? 거룩한 하나님 앞에 봉사하며 먹고 마시도록 세운 것이다.
그래서 위임제 항목을 화목제 앞으로 옮겨서 요약을 해 놓고 있다. 왜 화목제가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먹는 문제는 화목제에서 더 강조해서 나타날 것이다. 다음 시간에 속건제와 화목제를 하면 마무리가 될 것이다.
설명을 듣고 본문을 읽어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강조가 그렇게 뚜렷하게 드러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제사하는 방법을 연구하려고 읽으니까 여기저기 섞어져 있고 또 반복되어 있고 복잡하게 되어 있어서 아주 비능률적으로 가르친 것같다. 1번 임자가 할 일 2번 제사장이 할 일 해서 언제 옷을 입고 어떻게 하면 몇 줄 아니면 끝나게 될 일을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고 같은 말을 여러 번 쓰고 있고 그래가지고 아주 복잡한 것처럼 되어 있는데 이것처럼 잘 강조해 준 방법이 없다. 더구나 소제물 같으면 여호와의 화제중에 내가 내 제사장에게 주는 것이니라.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니라. 모든 아론 자손의 남자는 먹어라. 내가 향내로 맡은 것 중에 내가 너에게 주노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 말이 반복되어 있다.
또 속죄제물의 거룩함을 강조했다. 더구나 속죄제 는 죄를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와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생명의 교제가 특별히 강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속죄제는 속죄제의 의미가 약해진다. 그래서 속죄제의 희생은 지극히 거룩하니 번재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아라. 내 앞에서 잡고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니 내 뜰에서 먹어라. 그렇게 해서 그 친교가 강조되어 있다. 그것이 속죄제물의 특징인데 우리는 하나님이 성질 내고 있으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푸냐 하는 식으로 해 가지고는 속죄제 희생을 풀어 가지고는 잘 풀리지 않는다. 그것은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생명의 교제를 허락하심이 강조다. 그러니까 성찬이 예배의 중심이 안되면 성경이 바르게 해석된 것이 아니다.
속죄제를 지내고도 아론의 두 아들이 죽었다. 그래서 먹으라고 한 것을 아론과 그 아들이 못 먹었다. 모세가 화를 냈다. 우리는 완성된 책을 받았으니까 완성된 책을 전체로 읽어야 된다. 10장에 보면 아론의 두 아들이 죽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때 아론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제사를 지내도 죽었거든 그 고기를 먹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모세가 옳게 생각을 했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 그런 의미가 무엇인지 속죄제물을 배웠으면 해석이 가능할 것이니 연구해 보시라 그 말이다. 먹으라고 했는데 아론이 먹지 못했다. 가져다가 불살라 버렸다. 왜 너먹으라고 준 것을 먹지 아니했냐? 설명을 했다 그러면 왜 그런 설명들이 가능하고 모세가 그렇게 이해를 했는지 해석을 해보라 그 말이다.
이제 이 5대 제사쯤 지나면 레위기를 다음 책들은 여러분이 해석할 수 있도록 잡혀야 된다. 왜냐하면 항상 교제의 관계를 주는 것이고 금지된 것은 아직은 아니라는 제한이 항상 따라 있다. 그리고 예수는 항상 그것을 완성시킨 분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그렇게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이것은 먹고 이것은 먹지 말아라 11장에 나온 이야기다. 이제 해석할 수 있겠지요. 먹으라는 것은 생명의 선물로 주신 것이다. 먹지 말라는 것은 아직은 주지 않았다 그 말이다. 먹으라는 것도 스스로 죽어 버리면 먹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먹으라고 준 것도 아직 죽음이 해결이 안되어 있다. 죽어 버리면 못 먹으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에 갇혀서 먹고 있는 것이다. 아직 안준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도 아직 안 주었을 때는 먹을 소망 가운데 있다. 이제 신약 때는 다 먹으라 했다. 예수께서 온전히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다 먹으라고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전에는 그렇게 해석을 안했다. 미꾸라지를 먹지 말아라. 미꾸라지 같은 신자가 되지 말아라. 하나님의 상에 못 오를 것은 나쁜 것이다. 그리고 물위로나 다니면 다니는 줄이나 알겠는데 이 집 저 집 밑바닥으로 살살 다녀가지고 그래가지고 여기저기 구정물이나 일으키고 부흥사가 손으로 잡으려고 해도 쏙 빠져나가 자기는 회개하지 않고 이런 신자는 하나님의 상에도 오르지 못하고 여러분 사귀지 말라고 그런다. 그런데 성경은 친구 사귀지 말라는 그런 말은 안한다.
그런데 그것은 의식법을 집행하지 못하니까 의식법은 변하는데 도덕법은 항구 불변 하다고 배웠거든요. 의식법을 도덕법화 시켜 가지고 항구 불변하게 막 적용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그렇게 의식법 도덕법 시민법 그렇게 나누어 가지고 설명해 버리면 안된다.
구약과 신약으로 대비시켜야 되지 의식법은 변화니까 의식법을 도덕화 시켜서 풀어 버리면 그런 것은 헬라 철학화 시키는 것이지 구약을 푸는 방식이 아니다. 그래가지고 설교하면 독수리 같은 신자 되지 말라 자기가 신앙 좋다고 날개가 좋고 피곤하지 않을 것인데 눈이 고약하다고 발톱이 날카로워가지고 약한 것만 보면 잡아 먹어 버리고 그것이 신자냐? 이렇게 하니까 우리에게 맞는 것같지요? 우리 보수파는 무엇이 높은 듯한데 자기보다 조금 못하면 공격해 버린다. 그러니까 맞는 듯 하다고 그런데 그렇게 해석하지 말라 그 말이다.
항상 언약의 친교 문제로 해석을 해라. 그 당시 주어진 것은 구체적인 생명의 교제다. 그리고 아직은 아닌 제한들을 봐야 된다. 그것이 구약을 푸는 방식이다. 이제 이 뒤를 읽어봐도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예수 안에 완성이 무엇인가를 알고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을 읽고 아 부족하구나 하고 울고 있으면 구약 신자도 안된다고 했다. 고개를 들어보니까 그 모든 부족을 채우는 분으로 예수께서 오셨다. 그렇게 해서 구약이 신약 교회에 주신 말씀이 되는 것이다. 휘장을 벗고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기독론적인 해석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