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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법어집 백일법문
1. 중도법문 - 5) 교외별전
불교에 있어서 이론은 교(敎)라 하고 실천은 선(禪)이라 하는데, 특히 선을 교외별전(敎外別傳), 즉 교(敎)밖에 따로 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예전 조사스님들의 말씀을 살펴볼까 합니다.
오직 일승도만 있고 나머지 둘은 참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끝내 일심법을 나타내지 못 한 까닭에 가섭을 불러 법좌를 같이하여 일심을 따로 전하였으니 말을 떠난 법이다. 이 한갈래 법을 따로 행하게 하니 만약 일심법을 능히 깨치는 사람은 곧바로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
唯有一乘道하야 餘二則非眞이나 然終未能顯一心法故로 召迦葉同法座하야 別付一心하야 離言說法하야 此一枝法을 令別行하니 若能契悟者는 便至佛地矣니라 [전심법요 ; 대정장 제48권, p.382 중]
원교 일승도(一乘道)는 교리로서는 가장 발달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언어문자의 이론에 그칠 뿐, 일심을 바로 깨치지는 못합니다. 일승법을 설명만 해서는 소용없는 것이니 일심을 바로 깨치지 못하면 공리공론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가섭에게 말을 떠나서 설법하여 일심(一心)을 따로 전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교(敎)와 선(禪)을 구분하여 말할 때는 교는 이언전언(以言傳言), 즉 말로써 말을 전하는 것이고, 선은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것이니 마음과 말이 다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을 떠나 설법한다[離言說法]'는 것이 곧 이심전심인 것입니다.
'일심법을 깨친 사람은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고 한 것은 누구든지 일심법을 바로 깨칠 것 같으면 구경각을 성취하여 부처님과 같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가섭에게 전하고 가섭존자가 아난에게 전한 것은 구경각을 전한 것이지 다른 무슨 중간법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동시에 삽삼조사( 三祖社)나 그 밑으로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정통법맥을 이은 스님들도 모두 구경각을 성취한 사람들이지무슨 중간을 성취한 스님들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일심법을 말하고 또 교외별전을 말할 때는 구경각인 부처님 지위를 말하는 것이지 무슨 중간을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니만치 이 점 특별히 유의해야 됩니다. 혹 어떤 사람이, 아무리 그렇지만 조사스님들이 어찌 부처님이 가섭에게 전한 것과 같을 수 있나 하고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이심전심해서 삽삼조사로 계계승승해서 정법이 전해 내려온 것을 근본적으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섭을 불러 법좌를 같이 했다"는 말에 대해서 조금 설명하고자 합니다. 선종(禪宗)의 대표적인 책인 「전등록(傳燈錄)」이나 「선문염송(禪門拈頌)」같은 것을 보면 부처님과 가섭존자가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법상에 같이 앉았다고 되어 있으며 이것이 소위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伴座)'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경에 볼 것 같으면 부처님이 가섭존자를 불러 법상에 나누어 같이 앉자고 하니 가섭존자가 사양하여 "부처님과 같이 앉을 수 없습니다"고 하였고, 또 부처님께서 내 대신 설법하라고 하여도 사양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가섭존자가 부처님과 같이 앉았느냐 안 앉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일심법을 전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의 모든 조사가 오직 일심법만을 전하고 다시 두법이 없어 마음이 부처임을 가리키니 등각·묘각 두 지위를 단박에 뛰어넘고 결정코 제 이념에 흘러들어서는 안된다.
從上祖師가 唯傳一心法이요 更無二法하야 指心是佛하니 頓超等妙二覺之表하야 決定不流第二念이니라. [원陵錄]
예전부터 조사스님들이 마음으로써 마음으로 전해 내려온 것은 일심법, 즉 구경법을 전했지 딴 법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구경법, 일심법에 있어서는 등각이니 묘각이니 하는 이름도 붙일 수 없는 것이며 하물며 십지(十地) 등은 말할 것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조사스님들이 전해 내려온 일심법은 부처와 부처, 조사와 조사가 스스로 각각 전할 뿐이지 그 이외의 깨치지 못한 사람은 그 경계를 모릅니다. 그런데 묘각이 즉 구경각인데 어째서 일심법이 묘각위 위에 있다 하여 묘각을 부인하느냐 하는 의심이 들지도 모르겠으나, 이것은 예전 조사스님들이 마음으로써 마음으로 전한 것이 최후 구경이라는 것을 강력히 표현하기 위해서 한 것이지 딴 뜻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가섭에게 전하고 가섭이 아난에게 전하고 그 밑에 내려와서 십심조사에게 전하고 또 오가칠종에 전한 근본은 모두 다 등각·묘각의 지위에 있는 구경의 불지(佛地)입니다. 그리되면 결정코 제 이념에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일승교에서 설명하는 바는 사사무애하여 법계원융이니 이 사사무애법계는 바야흐로 한 맛으로 돌아가니 이 한 맛의 자취까지를 털어버려야만 조사가 보이신 일심이 나타난다.
一乘敎中所說者는 事事無碍하야 法界圓融이니 此事事無碍法界 - 方歸一味라 拂此一味之跡하야사 方現祖師所示一心이니라. [順德]
이승교에서 말하는 구경법은 사사무애, 즉 한 맛[一味]인데 이 사사무애 알음알이가 있을 거 같으면 일심(一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선종의 조사들이 이심전심한 것은 사사무애위 자취도 쓸어버리고 그 자취가 조금도 미치지 못한 구경의 일심을 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무애라든지 일미라든지 이것은 결국 이론에 그치고 말지만 일심(一心)을 깨치는 것은 구경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불단 가운데 하나의 해인삼매여
삼종세간이 모두 포함되었네
다함없는 성품바다 한 맛을 머금으니
한 맛의 모양도 없음이 나의 선이다.
十佛壇中一海印이여
三鍾世間總在焉이라
無盡性海含一味하니
一味相沈하야사 是我禪이로다 [眞淨]
이 말은 앞의 한 맛의 자취를 다 털어버려야만 조사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진법계연기 전체가 자취를 감춰서만 비로소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알 수 있고 선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승도로서는 일심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이것은 교(敎)와 선(禪)의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법을 먹고 살지만 그 밥맛을 팔만대장경 이상으로 기록하고 설명해 놓는다 해도 실지 밥맛은 거기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밥 한 숟가락을 딱 떠먹으면 찰나간에 그 밥맛을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교(敎)는 밥맛을 얘기하는 것이고 선(禪)은 밥을 한 숟갈 떠먹는 것과 같습니다.
원교에는 무애연기의 견해가 있고 돈교엔 이름을 떠나고 모양을 끊는 견해가 있으나 선종은 더듬어 찾을 수 없고 고삐를 잡을 수 없다.
圓敎엔 有無碍演起之解하고 頓敎엔 有離名絶相之解하나 禪宗은 無摸索沒巴鼻니라 [淸虛]
원교나 돈교 위에 따로 선종(禪宗)이 있다.
圓頓之上에 別有一宗하니라 [華嚴疏 - 淸凉]
한 스님이 묻기를 "무엇이 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하니 조주스님이 "뜰 앞의 잣나무니라"고 대답한 이 한마디는 용궁해장에는 아직 없는 것이다.
僧門如何是祖師西來意오 趙州云 庭前栢樹子라 하니 此一句龍宮海藏所未有底니라 [寂音]
적음(寂音)존자는 홍각범(洪覺範)을 말하는데 그는 송나라 사람으로 총명과 지혜가 뛰어나고 선(禪)과 교(敎)를 회통한 유명한 스님입니다. 화엄경을 저 용궁에서 가져왔다고 '용궁해장(龍宮海臟)'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화엄경을 다 뒤져보아도 '뜰 앞의 잣나무'라는 도리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교 밖에 따로 전했다는 뜻은 하늘 밖을 뛰어나니 오교(五敎)의 학자들도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한 선종의 근기가 낮은 사람도 망연히 알지 못한다.
敎外別傳之旨 - 逈出靑소之外하야 非徒五敎學난信이요 亦乃當宗下根도 茫然不識이니라 [看話決疑 - 普照]
이처럼 교외별전이라는 것이 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높고 깊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여 비밀한 뜻을 전하여 주는 곳은 지금 편지나 종이로 논의할 바가 아니다.
以心傳心하야 密意傳授之處는 非金簡牘所論이니라 [淸凉·圭峯]
밀의(密意), 비밀한 뜻을 전하여 준다하니 비밀히 무엇을 숨겨서 전한다니 비밀히 무엇을 숨겨 전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뜻이 한도 깊어서 전하여 주는 사람과 전하여 받는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마음으로써 마음으로 전한다[以心傳心] 함은 달마대사의 말씀이다. 혜가스님이 "이 법은 어떤 문자와 교전으로 배우고 익힙니까?" 하고 물으니 달마대사가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여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以心傳心者는 是達마大師之言也라 因可和尙이 問此法이 有何文字敎典習學고 大師答云 我法은 以心傳心하야 不立文字라 하니라 [都序]
달마스님이 처음으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다[以心傳心]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가지 설명할 것은 선종의 소의경전(所衣經典)으로 달마스님이 능가경( 伽經)을 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것은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는 틀리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중국 선종 사서(史書)가운데 오래된 것으로 「능가사자기( 伽師資記)」라는 책이 있고, 거기에서 달마스님들이 자기를 믿지 않기 때문에 능가경을 전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별전(別傳)소식을 믿지 않기 때문에 능가경을 믿음으로 삼은 것이며, 방편으로 한 것이지 근본내용은 '문자를 세우지 않는 데' 있습니다. 만약 능거경이 근본경전이 되었다면 달마스님 이후 오가칠종(五家七宗)에서 능가경을 근본으로 삼아야 되는데 혜가스님 이후에는 능가경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不立文字], 마음으로써 마을을 전하는 것[以心傳心]이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오정 홍인대사가 육조 혜능에게 말씀하였다.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은 하나의 큰 일인 까닭에 근기의 크고 적음을 따라서 중생들을 인도하여 마침내 십지·삼현·돈점 등의 뜻이 있으니 교문(校門)이라 한다. 그러나 가장 미묘한고 비밀스럽고 원명하고 진실한 정법안장으로써 대가섭존자에게 부촉하여 거듭거듭 서로 전해주어 달마대사에 이르러 중국에 오고 혜가대사를 얻어 대를 이어서 나에게 이르렀으니 지금 너에게 부촉하노니 단절치 않게 하라.'
五祖忍이 告六祖能曰 諸佛이 出世에 以一大事故로 隨機大小而引導之하야 遂有十地三賢頓漸等旨하야 以爲敎門이라 然이나 以無上徵妙秘密圓明眞實正法眼藏으로 付于大迦葉하야 展轉相傳授하야 至達마하야 屆于此土하니 得可大師하야 承襲以至于吾라 令付於汝하노니 無令斷絶케하라 [傳燈錄]
v">오조스님이 육조스님에게 전하는 것은 삼현(三賢)·십지(十地)·돈점(頓漸)·대소승(大小乘)의 교문(敎門)이 아니고 분명히 마음으로써 마을을 전한 별전소식인 정법안장(正法眼臟)을 너에게 전하는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v" color="#008000">교리를 하는 사람은 오직 점차의 뜻을 드러내고 참선하는 사람은 오직 순식간에 깨침을 펴니 선과 교가 서로 만남은 북쪽 끝과 남쪽 끝의 간격이 있다.
講者는 備彰漸義하고 禪者는 偏頗頓宗하니 禪講이 相逢에 胡越之隔이라 [都序]
경에서 '삼아승지겁 동안을 점차로 닦아서 비로소 보리를 깨친다'고 하고, 선종은 찰나간에 문득 정각을 이룬다고 한다. 경은 부처님 말씀이고 선은 스님네 말이니 부처님을 어기고 스님네를 존중하는 것은 극히 의심스럽고 옳은 것이 아니다.
經에 云漸修치劫하야사 方等菩提(리)라 하고 禪稱刹那에 便成正覺이羅 何泥 經是佛語요 禪是僧言이니 違佛존僧은 切疑未可니라 [都序]
이것은 규봉스님이 점문(漸門)으로 가야하고 돈종(頓宗)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점차문만 말씀하시고 순식간에 깨치는 돈문은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선문경에서 말하였다. '바깥 모양에서 구하면 비록 몇 겁을 지내도 끝내 이루지 못한다. 안으로 마음을 깨쳐 보면 한 생각에 보리를 증득한다.'
禪門經에 云 於外相求하면 雖經劫數나 終不能成이요 於內覺觀하면 如一念頃에 卽등菩提라하니라 [頓悟要門]
이와 같이 부처님이 오로지 점차문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돈문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흔히들 육도만행(六韜萬行)을 닦아서 성불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모두 밖으로 모양을 구하는 일입니다. 연수(延壽)스님은 그의 보살계 선문에서 육도만행을 닦아서 성불하려는 것은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지기의 마음을 깨치지 않고 밖에서 무엇을 구하면 성불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점(漸)이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말이고, 돈(頓)이란 시간이 극히 짧게 걸린다는 말이니, 안으로 참선하는 화두를 부지런히 하면 시간이 적게 걸리고 밖으로 모양을 구하여, 염불하든지 주력하든지 경만 보든지 하면 삼아승지겁이 벌어져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노력 같은 시간일진댄 어떻게 해서든지 빠른 길로 가야하지 않겠습니다?
v" color="#008000">힘센 장사가 이마의 구슬을 잃어버리고 밖으로 찾아서 방을 두루 다녀도 마침내 찾지 못하지만, 지혜 있는 사람이 그것을 스스로 보는 것과 같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자기의 본 마음을 잃어버려 자기가 부처임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바깥에서 찾으려 모든 노력을 다하고 차제(次第)로 증득함에 의지하여 역겁 동안 부지런히 구하여도 영원히 도를 이루지 못하니 곧 바로 무심함만 같지 못하다. 결정코 일체법이 본래 있는 것이 없으며 본래 얻을 것이 없고 의지할 것도 없고 머물 것도 없고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음을 알아 망념이 움직이지 않으면 문득 보리를 증득한다. 또 도를 성취한 때엔 다만 본 마음의 부처를 증득 하는 것이요, 역겁의 노력은 모두 헛고생이니 흡사히 힘센 장사가 구슬을 얻는 것은 다만 본래 이마의 구슬을 얻은 것이요, 밖에서 구해 찾은 노력과는 관계없는 것과 같다.
如力士가 迷額內珠하야 向外求覓하야 周行十方호대 終不能得이러니 智者指之하야 當時에 自見本珠如故니라 故로 學道人이 遂自本心하야 不認爲佛하고 遂向外求覓하야 紀功用行하야 依次第證하야 歷劫勤求호대 永不成道일새 不如當下無心이니라. 決定知一切法이 亦無所有하며 本無所得하야 無依無住하며 無能無所하야 不動妄念하고 便證菩提니라 及證道時엔 祗證本心佛이요 歷劫功用은 병是虛修니 如力士得珠時에 祗得本額珠요 不關向外求覓之力이니라 [專心法要 ; 大正藏, 48권, p.380 下]
v">우리가 마음을 깨치면 부처인데 마음 밖에서 구해 보았자 부처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성불이 목적이고 부처란 마음 속에 있으니 내 마음 속 부처를 찾아야지, 마음 밖의 부처를 찾아서 시방세계를 돌아다니들 헛고생만 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마에 본래 있는 구슬을 찾듯이 우리도 내 마음 속에 있는 부처를 찾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시방여래의 십이부 경의 청정하고 묘한 이치를 항하수 모래알 같이 기억하여도 다만 희론만 더할 뿐이다. 네가 비록 결정코 명료하게 인연과 자연을 설명하므로 사람들이 네가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칭찬할지라도, 여러 겁 동안 쌓아온 다문의 훈습으로는 마등가의 난을 면할 수 없었느니라. 이런 까닭에 아난아, 네가 비록 역겁 동안 여래의 비밀스럽고 미묘한 법문을 기억하더라도 하루 동안 무루업을 닦아서 세간의 미워하고 사랑하는 두 가지 고통을 멀리 벗어남만 같지 못하느니라."
佛告阿難호대... 雖憶持十方如來十二部經의 淸淨妙理를 如恒河沙하나 只益戱論이니라 如雖談說因緣自然하야 決定明了하야 人間稱汝多聞第一이나 以此積劫多聞熏習으로 不能免離摩登伽難하니라... 是故로 阿難아 汝雖歷劫憶持如來秘密妙嚴하여도 不如一日에 修無漏業하야 遠離世間의 憎愛二苦니라 [首楞嚴經 ; 大正藏 19권, p.121 下]
v">억천만겁토록 팔만대장경을 환히 외운다 해도 잠깐 동안 선정을 익히는 것만 못하다는 부처님의 간절한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살펴보았는데 교 밖[敎外]이라 한다고 해서 불교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에만 그치지 않고 실천하는 것을 바로 말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봐서는 아난존자같이 그렇게 총명이 절륜하고 박학다문하며 부처님 법문을 한 자 한 구도 빼지 않고 다 외우는 사람이 없지만 결국은 부처님 돌아가신 뒤에 경전(經典)을 결집할 때도 가섭존자에게 쫓겨난 후 비사리성으로 가서 깨쳐 다시 와서 결집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한편으로 보면 아난존자가 대화현보살로서 일종의 연극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앞으로 누구든지 언어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참으로 바로 깨쳐야 한다는 것을 모범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아난존자가 그런 연극을 벌였다고 볼 수 있지마는 나는 연극이 아니고 사실이라고 봅니다. 아난존자 아니라 아난존자 보다 몇 백배나 나은 총명을 가진 사람이라도 실지 마음을 깨치지 못하면 불법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불법이란 오직 마음을 깨치는 데 있지, 언어문자를 익히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대중들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세존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