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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63편 7절-10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붙인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7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다윗이 주님으로부터 무슨 도움을 받았다는 거냐? 광야에서 세상살이가 편하게 살 수 있도록 이런 저런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거냐, 아니면 광야에서 환난을 통과하면서 유혹과 미혹을 이기고, 내적으로 올라오는 시험도 이기고, 현실의 모든 세상성을 이기며 신앙정조를 잘 지키면서 이룰구원을 잘 이뤄나갈 수 있도록 지혜도 주시고, 도움도 주셨다는 거냐?
예수 믿는 나는 주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싶으냐, 아니면 세상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싶으냐? 영적 이스라엘이요 진리의 성도는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느냐?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핍박만 있었다. 요셉이 애굽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리의 종 요셉으로 인한 여파가 미쳤었다. 그런데 요셉을 신임하던 애굽의 왕이 바뀐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혜택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혜택도 받지 못한 채 노예로 살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애굽을 떠나서 광야로 나가니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다.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도움이 없는 거다. 영적으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세상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도움이 있겠느냐? 세상이 도움을 준들 성도가 노예로 부림을 받는 것밖에 없는 거다. 세상은 성도들을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곳이지 참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곳이 아니다. 어찌하든 성도를 부려서 자기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 세상이다.
이스라엘이 광야로 나가니 누가 인도를 하느냐? 하나님께서 인도를 하신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렸다. 왜 이런 보호를 받는 거냐? 이스라엘의 발걸음은 가나안을 향한 발걸음이기 때문이다. 이제 광야를 거치면서 훈련을 받으면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다. 이게 얼마나 좋으냐? 신앙 면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싶으면 세상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목적으로 살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아무리 난리를 쳐도 신앙정조를 잘 지키면서 사람 앞에 바로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보호를 받는다. 이렇게 되려면 평소에 말씀의 진수를 먹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세상이라고 하는 광야에서 만족을 얻게 된다. 인간이 물질로 만족하는 것은 순간이다. 그래서 자꾸 또 다른 물질의 만족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신앙 면에서 정신적인 만족을 얻게 되면 이 사람은 좀 못 살고 가난할지라도 그 마음은 평화요 기쁨이다.
부자가 죄를 지으면 이 사람의 마음이 편하겠느냐, 불안하겠느냐? 불안하다. 그러나 좀 가난하지만 사람에게나 하나님에게 아무런 죄가 없이 바로 산다면 마음이 그렇게 편하냐? 부자면 뭐하느냐? 문제는 인생이 만족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세상사람들은 정신적인 면에 만족을 추구하며 살지만 기독자들은 신앙 면에 만족이다. 기독자가 세상이라고 하는 광야에서 영혼에 만족을 얻고 산다면 이 인생은 주님의 날개 그늘의 보호 아래 있다는 증거다.
세상은 임시성에 속한 기쁨밖에 모르는데, 예수를 믿고 영원에 속한 도움을 받게 되면 이것은 영원히 기쁜 것이요, 이것이 주님의 날개 그늘의 보호 아래 사는 거다. ‘날개 그늘 아래’란 ‘진리의 보호 아래’ 라는 거다. 자기가 진리의 보호 아래 살려면 진리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는 그 영혼이 늘 생명의 말씀인 진수성찬을 먹게 되고, 살아가면서 진수성찬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의 도움을 받을 때 ‘돈이 참 좋구나’ 하고 실감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건 임시다. 말씀 깨달음으로 자기에게 닥친 일을 처리해 나가는 면에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를 가지게 되면 ‘아, 하나님의 말씀이 참 좋구나. 지혜라는 게 이렇게 좋구나’ 하고 실감을 하게 된다. 이게 영혼의 만족을 맛보는 거다.
잠:에 지혜를 많이 말하고 있다. ‘금은패물보다 지혜를 가져라. 지혜가 너를 빛나게 해 줄 것이다’ 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는 성도들이 ‘지혜’ 라는 말의 뜻을 구체적으로 모르고 있다. 말씀의 이치를 잘 배우면 이 이치에서 지혜가 나온다. 깨달음으로 얻은 이 지혜는 내 것으로 된 것이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적지적소에서 이 지혜를 쓸 수 있어서 참 자유롭다. 걸그작 거릴 게 없다.
그래서 나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잘 가르쳐서 사람이 만들어지는 면으로 높여주려고 하고 있는데 이걸 잘못 알아듣고 오해를 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해 주고, 영능의 실력을 올려주고, 세상살이도 하나님 앞에 거침없이 바로 걸어가면서 세상살이를 할 동안에 하나님의 은혜를 잘 받게 하려는 건데, 사람이 이렇게 된다면 이런 축복이 어디 있겠느냐?
8절: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나의 영혼이 주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말만이 아니라 힘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전 인격으로 주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이러면 주님의 인격을 닮게 되는 것이고, 주님의 인격을 닮으면 주님의 오른손의 힘 있는 손, 힘 있는 역사의 손이 그 사람을 붙든다. 주님의 오른손이 자기를 붙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일을 하게 된다는 거다. 이걸 알아라.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일이 뭘까?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하는 게 능력 있는 일이다. 이 일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안 된다. 사람이 깨달음으로 인격적인 면에서 고차원적으로 올라가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다. 목사가 잘나서 이렇게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붙들어 주심으로 되는 거다.
주님의 오른손이 자기를 붙든다고 하는 것은 자기로 하여금 능력 있는 일을 하게 한다는 것인데, 능력 있는 일이란 사람 중에 최고의 사람, 즉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일을 맡긴다는 거다. ‘목사가 되게 한다. 신학을 하게 한다’ 이게 아니라 목사가 되는 바탕이 있는 것이니, 우리교회로 말하면 체계신학이나 조직신학을 배워서 그 사상을 가지고 성경을 팔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게 능력 있는 일이다. 우리교인들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 사람을 목사로 세울 거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님의 오른손에 붙들린다는 것을 종교적인 사업을 활동적으로 크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종교적인 사역을 크게 해야 주님의 일에 충성스런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사람의 인격과는 관계가 없는 거다. 이런 생각은 이방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은 하나의 종교적인 사고방식일 뿐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오른손에 붙들린다는 것을 신비로운 체험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잘못된 생각을 가진 자들이 수두룩하다. 사람이 이렇게 나가면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은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데 말씀의 깨달음이 없이 그런 것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 귀신의 장난에 휘말리기 쉽다. 무슨 신비로운 능력을 얻어서 큰일을 하려고 금식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하느라고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건 다 바람이 든 거다. 허영심, 영웅심, 허풍성이 들어서 그러는 거다. 이거 못 쓴다.
우리도 주님의 오른손에 붙들림을 받아야 되겠는데, 어떻게 해야 주님의 오른 손에 붙들려지겠느냐? 앞에서도 생각을 했지만 전 인격으로 주님을 따라야 한다. 말씀을 따라야 한다. 몸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서 주를 따라야 한다. 말씀을 따라야 한다. 말씀의 생활을 해야 한다. 성경에 ‘먼저 난 자와 나중에 난 자’가 있는데, 말씀을 따르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면 스스로 뒤쳐지는 거다. 그러니까 주님의 의사를 내 의사로, 주님의 목적을 내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자로, 하나님의 도덕성자로, 하나님의 능력성자로 만들어져야 주님과 친해지는 거고, 주님의 오른손에 붙들림을 받게 된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하나님의 도덕성, 하나님의 능력성자로 되어 들어가면 하나님과 뜻이 잘 맞고, 생각도 맞고, 마음도 맞고, 대화도 잘 되고, 모든 의사와 활동이 주님과 같이 되는 거다. 그러나 생각이 다르고, 뜻이 다르고, 소원 목적성이 다르다면 이 상태로 주님을 위해 아무리 충성봉사를 많이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걸 주님이 알아주시겠느냐?
이런 것은 인간기준에서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일 뿐이니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모른다’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우리는 먼저 주님과 의사단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주님의 힘 있는 오른손, 영능의 역사에 등용이 되는 거다. 이것이 복음역사요, 복음역사에 수종을 드는 것이 주님의 오른손에 붙들림을 받은 거다.
9절-10절: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붙인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성도다윗의 영혼이 어떤 영혼이냐? 그 가치력, 그 존귀성이 무엇이냐? 다윗의 영혼은 하나님의 제 1의 사랑의 대상자요,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것이요, 하나님과 같이 신령한 천국을 누릴 자요, 다윗의 자연목숨도 나그네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는 거다. 그러니 누가 감히 다윗의 영혼을 사냥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것인데 누가 감히 사냥할 수 있겠느냐?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하나님의 신실한 종 모세의 인도로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는, 천국을 향해 가는 운동을 방해하면서 세상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반역운동을 하던 다단과 아비람과 고라자손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땅 속 깊이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하는 건지, 누구에게 대적을 하는 건지, 자기가 대적하는 자의 뒤에 누가 배경이 되어있는지를 모르면 저주 받을 짓을 하게 되고, 결국은 저주를 받는다. 진리성도를 박해하는 것은 주님을 박해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진리의 성도들은 주님의 일에 수종을 드는 천국의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부리시는 일꾼들을 건드리면 주님이 가만 계시겠느냐?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이 말씀을 우리가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산 사람이 땅 속 깊은 굴에 들어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느냐? 어쨌든 좋은 현상이 일어나겠느냐, 아니면 나쁜 현상이 일어나겠느냐? 사람이 땅 속 깊은 곳에 들어가면 만물에게 비쳐지는 하늘의 해를 볼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를 볼 수 있느냐? 땅 속에서 나와야 해를 볼 수 있다.
사람이나 짐승이 흑암에 갇혀서 해를 볼 수 없다면 이것은 큰 저주다. 사람이 진리의 빛을 영원히 발견할 수 없는 자리에 처해져 있다면 이는 저주의 삶으로 보는 거다. 참 처절하다. 사람이 진리의 빛을 못 보는 자리에 있다면 이건 흑암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자들이 이걸 못 느낀다. 왜냐? 교회는 나가는데 진리가 무언지 모르기 때문이다, 진리의 말씀의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면 어찌 되겠느냐? 자기 눈앞에 어둠의 역사가 즉시 나타나는 거고, 살아가면서 두고 두고 나타나는 거다. 이게 바로 네 인생이 되는 거다. 그런데 이걸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살다가 흑암 가운데 죽으면서도 그 사실조차 모른다.
사람은 교훈이 가장 먼저고 중요하다.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으면 정신이 확 깨우쳐지지만 바른 교훈을 못 받으면 가치판단성이 흐려진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이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지라도 그냥 그렇게 사는 거다. 이게 얼마나 답답하냐?
어떤 자들이 저주를 받았느냐?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진리성도를 박해하고 비진리적 세상적 운동을 하는 자들은 진리의 빛을 발견하지 못하고 저주의 대상이 되어있는 거다. 이런 자들이 어떤 세력에게 붙인바 된다고 했느냐? ‘칼의 세력에 붙인바 되어.’ 이러면 어떤 결과가 오느냐? ‘시랑의 밭이 되리이다.’ 시랑이 뭐냐? 여우과에 속하는 짐승이다. 이게 다 저주를 말하는 건데, 칼의 세력이라는 것은 전쟁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랑의 밥이 된다는 것은 전쟁이 일어나서 죽은 자들은 늑대나 이리나 여우 등등의 들짐승의 밥이 된다는 거다.
이 말씀을 보면서 지금의 교회들을 보면 ‘지금의 기독교회의 흐름이 어떻고, 앞으로 어떻게 되겠구나’ 하는 윤곽이 떠오른다. 안 믿는 사람들은 ‘정치가 어떻고, 폭탄이 어떻고’ 하는 것을 가지고 ‘세계의 종말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거지만 우리는 성도들의 신앙사상을 보고 생각을 하는 거다.
6. 25 전에 장로교회가 구원론 때문에 대판 싸우다가 기장과 예장으로 갈라지면서 6. 25가 났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것도 그냥 보아 넘길 게 아니다. ‘기독교회 전체가 이렇게 돌아가면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되겠구나’ 하는 걸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이 안에 자기도 들어있는 건지, 안 들어있는 건지? 예수 믿으면서 은연중에 그들과 같이 있든지, 반대편에 있든지 하는 거다. 그러니 신앙노선을 구별을 해야 한다. 자기가 나가는 교회가 진리신앙 노선이 아니면 그곳에서 나와야 한다.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붙인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진리본질의 성도들을 박해하다가 전쟁을 만나 흩어진 저주 받은 시체는 들짐승의 밥이 되는 거다. 이걸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진리 박해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받는 거고, 하나님의 생명권과, 하나님의 사랑권과, 진리말씀의 치리권 밖에 있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들처럼 본능적인 사고방식으로 살다가 안 믿는 자들의 밥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도 모른다. 이런 자들은 진리의 고상한 하나님의 빛을 못 본 채 지렁이처럼 땅의 소원 목적으로 살다 죽을 것이니 참으로 원통한 삶이 아닐 수 없다. 성도가 이렇게 살다 가서야 되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