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7] 정대화 (鄭大和) - 내조자로서의 한평생
11. 유럽 식구들에게 한글과 심정 교육 1 세계 공통어가 될 모국어인 한글을 공부하는 붐을 일으켰다. 김인구 박사가 ‘나의 맹세’를 한국어로 토를 달아 경배식 때마다 읽게 하였다.
2 수련회 때는 필수적으로 한국어 공부 시간이 있었고, 유럽협회장 회의 때도 한글 시험을 치르도록 하였다. 현지의 한국인, 한국 식구가 선생이 되기도 하고 한국어 강습소에 다니는 식구도 생겼다.
3 언어가 통하지 않아 속마음을 헤아리기 힘들고, 기후와 음식이 맞지 않아 고생스러웠지만,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종의 몸으로 일할 때 식구들이 부활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기쁨이 더 컸다. 4 남편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식구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근검절약 성실하게 생활하며 식구와 교회를 사랑하고, 권위의식 없이 식구를 대하는 태도에 유럽 식구들은 감명을 받았다.
5 남편은 50여 명이 함께 사는 협회 본부의 생활을 하나하나 관리하여 낭비를 없애고 질서를 세웠다. 집 수리도 새로 하여 집이 깨끗하게 정돈되었다. 때때로 이곳을 방문하는, 미국에서 온 유럽 식구들은 남편과 식구가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남편을 존경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을 하였다. 6 수련회가 끝날 무렵 언제나 화동회가 있다. 그런데 화동회를 이끌어가는 사회자가 시원치 않으면 남편이 나가 직접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고, 노래하고 춤까지 추었다. 그런 모습을 본 유럽 식구들은 남편의 또 다른 모습에 놀랐고 나도 놀랐던 것이다. 7 그렇게 외적으로 활동하는 남편을 도우면서 나는 한글 공부를 시키고, 심령 지도와 상담 역할을 하였다. 누구나 자유롭게 와서 자기의 신앙 문제, 부부간의 문제, 자녀 교육 등을 의논하였다.
8 특히 축복가정 부인회를 조직하고 월례회를 통하여 서로 친목을 도모하였으며 5대 행사를 준비하는 마음 자세도 가르쳤다. 9 또한 참부모님과 참자녀님들의 모심의 생활의 귀중함을 체득하게 하였다. 내가 기회 있을 때 미국 행사에 참석하게 되면 어머님께 간청하여 참자녀님들이 입으시던 옷을 하사받아 유럽으로 가져와, 그 가치를 설명하고 축복자녀들에게 양말 하나씩이라도 골고루 나누어 주어 심정적인 유대를 두텁게 하였다. 선물을 받은 식구들은 가보가 생겼다고 좋아했다.
10 아기들이 병이 났을 때 그 옷을 입히고 간절히 기도하면 병이 낫고, 아기가 안 생기던 부부가 그 옷을 놓고 기도하면 임신하게 되는 등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가정이 결합되고, 고환암으로 불임인 줄 알고 자녀를 단념했던 아이슬란드 책임자가 아기를 갖게 되었다.
11 식구들끼리 삼위기대를 맺어 주어 서로 왕래하게 하고, 새로 교육받은 유럽협회장들이 자주 회의를 하게 되니 하나의 유럽 형태가 되어갔다.
12 참부모님을 가까이 모시지 못하는 쓸쓸함과 그리움은 있었지만 나날이 부활되어가는 유럽 식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위로를 받았다.
13 사이좋은 한 쌍의 비둘기같이 항상 수련소 옆에서 다정한 모습으로 살아가던 김주화 선생과 남편 오토 할아버지와의 만남도 큰 위로가 되었다. 14 참아버님께서 댄버리에 계실 때는 유럽 식구를 위해 ‘심신봉헌 천애대승 (心身奉獻天愛大勝)’이란 휘호를 주셔서 기도실에 걸어 놓고 열심히 정성 들이던 지난 날이 어제같이 생생하다. 15 1986년까지 4년 반 동안 유럽 생활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가 참부모님의 사랑이요 축복이었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